빛고을 광주

광주 우물의 역사

형람서원 2007. 10. 22.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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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우물은 다 어디로 갔나
16세기 광주 읍성 안에만도 100여 곳 존재
지난 100여 년간 도심개발로 대부분 사라져

   
  ▲ 향교 아랫길 사동 232-2번지 주택 옆에 남아있는 공동우물. 김태성 기자 hancut@gjdream.com   ⓒ광주광역시  
우리는 매일 몇 잔의 물을 들이킨다. 그것은 커피나 녹차일 수도 있고, 가게에서 사 먹는 생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샤워를 하건 빨래를 하건 우리가 쓰는 물의 대부분은 수돗물이다.

예전엔 대부분 우물물을 마시거나 썼다. 사람이 살 만한 땅, 즉 가거지(可居地)의 첫 번째 조건은 물, 맑고 풍부한 생명의 원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옛 기록에서 성곽이나 큰 고을의 우물 숫자는 퍽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광주에는 읍성 안에만 100여 곳의 우물이 있다고 했다. 꽤 많은 숫자다. 하지만 19세기 중엽에 김정호가 지은 <대동지지>를 보면 31개로 줄어든다. 우물의 정확한 숫자가 무엇이든 당시 광주 사람들은 먹는 물 때문에 고민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광주는 지금 작은 면소재지 정도의 규모였다. 읍성 안팎의 인구라야 고작 3000명 수준. 그래서 먹는 물은 이런 우물만으로도 거뜬히 해결했을 터다.

그런데 생명을 지켜주던 우물은 지난 100여 년간의 격심한 도심개발로 대부분 사라졌다. 다행히 지난 1990년대말 지하철 공사를 앞두고 전남대박물관의 조사로 금남로와 도청 주차장 일대 지하에서 6곳의 우물터가 확인됐다. 대개 조선시대의 것이었다. 몇 백년 동안 광주 사람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던 우물들이 배꼽을 내보이며 수줍은 표정을 짓던 광경을 생각하면 당시 발굴자들이 쾌재를 질렀을 법하다.

광주의 물의 역사에서 1896년은 혁명적인 해였다. 이 해에 광주가 전남관찰부(도청) 소재지가 되면서 인구가 부쩍 불어났기 때문이다. 1910년대가 되면 광주면 인구는 이미 1만명을 넘어섰다. 그 때문에 물 수요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그래서 1913년에 광주 사람들은 근대적인 고민, 즉 상수도 설치문제를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된다. 그 고민 끝에 개발된 것이 증심사 들머리의 왼편 골짜기인 용추계곡의 중간에 댐을 쌓아 만든 제1수원지였다. 1920년의 일이다.

수원지의 물은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학동의 배수지(현재 조선대 장례식장 자리)를 거쳐 시내에 공급됐다. 1930년대초 자료에 의하면 이렇게 해서 하루 800톤을 공급해 시내 5500여 명이 이 물을 받아 마셨다고 한다. 한 사람당 150리터가 못 되는 양이었다. 현재 광주시민 한 사람이 하루에 평균적으로 쓰는 수돗물의 절반 정도였다.

당시엔 그마저도 일종의 사치였다. 이 무렵 광주 인구는 4만명. 수돗물을 받아 마시는 사람은 열에 한 명 꼴에 불과했다는 얘기다. 수돗물은 대개 시내에 사는 사람들이 받는 혜택이었고, 수혜자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대부분 일본인들이었다.

나머지 조선인들은 우물에 기대 살았다. 그래서 조선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엔 어김없이 공동우물이 있었다. 그 중에는 꽤 유명한 우물도 있었다. 조선대 앞 도내기샘, 광주천변에 빨래터로도 이용됐던 또 다른 도내기샘 그리고 중앙초등학교 옆 우물 등등.

수돗물은 아니었지만 그 우물가엔 그래도 사람 냄새로 가득했다. 채소를 씻고 빨래하는 아줌마들의 입담에 우물가엔 얘기꽃이 만발했다. 물 길러 나온 처녀를 먼발치서 훔쳐볼 수 있었던 기회, 그렇게 풋사랑을 키웠고 또한 씻어 내렸던 곳이 우물터였다. 하지만 그 옛 얘기가 이제 밭고랑처럼 깊이 팬 주름 속에 맴돌면서 우물터는 우리 주위에서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

그나마 옛 자취를 조금이나마 간직한 곳이 더러 있다. 향교 아랫길을 따라 가보면 사동 232-2번지 주택 옆에는 아직 공동우물이 남아 있다. 우물 위로 가건물을 친 것은 최근 일처럼 보인다. 샘 주변으로 콘크리트 바닥을 깔고 담을 두른 건 그보다 더 오래전의 일 같다. 기록을 더듬어 보니 1930년대 중반에 이곳 우물을 개수했다는 내용이 눈에 띈다. 물론 우물은 그보다 훨씬 전에 있었을 것이다.

올 여름 필자가 이 우물가에서 만난 동네 할머니는 예전엔 이 물을 길어 마셨는데 지금은 허드렛물로도 쓰는 사람도 없다며 아쉬워했다. 옛 물맛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문명에 세뇌당한 탓일까, 우물가에 작은 쪽박 하나 없다는 이유로 눈으로만 물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오랜 세월, 변함없이 상큼한 물이 우러나는 것이 퍽이나 이채로웠다.

요즘엔 어지간한 마을도 우물물을 길어 먹는 경우는 드물다. 광주의 외진 근교마을에서조차 수돗물이 공동우물을 대신하고 우물은 땅에 묻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심과 산천이 변해도, 변치 않는 우물 맛에서 우리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느낀다고 한다. 허름한 우물터에 걸터앉아 광주를 생각해 보는 여유가 그립다.(본 기사는 '광주드림'사의 제공에 의해 게재됨을 알려드립니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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