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람 성경

[매일성경, 07-09-25] 사도행전 09:01-09 사울을 부르신 주님

형람서원 2007. 10. 4.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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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07-09-25] 사도행전 09:01-09 사울을 부르신 주님


제목: 사울을 부르신 주님

내용: 1-2장 오순절 성령 강림(베드로의 설교), 3장 성전미문에서 베드로의 설교(5,000명)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형성(4장, 2장 44-47의 교회의 모습)과 말씀과 구제의 교회. 구제로 인한 교회의 문제(5장(거짓 헌금)-6장(헌금 분배))로 사도는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하고 집사를 세움, 7-8장 스데반과 빌립 집사의 사역, 9장 사울을 부르심입니다. 사울은 이방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준비된 도구였습니다.


1-5절) 사울을 부르시는 부활의 주님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 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1)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개역개정판에서는 핍박(逼迫)에서 박해(迫害)로 바꾸어 번역했습니다.


   1. And Saul. 사울의 등장은 구원사의 새로운 역사의 기원을 의미합니다. 사울에 대한 표현으로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he breathed out threatenings and slaughter as yet, ”는 사울의 잔인성을 강조하며, 교회와 원수됨을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나운 이리를 자신의 종으로 삼는 놀라운 손길을 보여주십니다.


   2. 사울은 합법적으로 핍박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았습니다. 공문(letter)을 받음으로 진행되어질 핍박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강조합니다. 사울의 열심은 남녀를 무론하고 결박을 추진했습니다. 사울은 바리새인이면서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일치되지 않지만, 교회를 핍박하는 것에는 일치합니다. 로마교회와 루터파는 일치하지 않지만, 칼빈을 비판하는 것에는 일치합니다. 마치 헤렘을 하는 하나님의 군사와 같습니다. 거룩한 전쟁의 철칙은 진멸법(헤렘, 하나님께 드려진)입니다(신 7장). 바울은 편지(공문)로서 교회를 핍박하려고 했던 사람이, 편지로 교회를 보호하고 관리하는 사람이 됩니다.  사울의 권세는 남녀를 무론하고 횡포를 부릴 수 있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칼빈은 누가가 제시한 ‘도(道, the Way)’보다 ‘당파(黨派, secta)’로 번역하기를 원합니다. 당파가 되어야 (은유법)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살하는 정당성을 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비평은 누가의 이해까지 들어가는 모습입니다.


  3. As he was in the way. 사울은 자발적으로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서 공문을 청했습니다.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는 사람에게 소명을 주셔서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비상한 은혜입니다. 인간의 오만의 극치는 자기 노력으로 사람을 죽임을 합당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사울의 광기는 제어할 수 없는 오만의 극치였습니다.

   Shined about him. 이 오만한 자를 상대할 유한한 인간이 아님으로 주님께서 직접 등장하셨습니다. 주님의 직접 등장이 그렇게 복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패역한 사람의 증표입니다. 바울 자신도 그것을 인식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신성을 직접 계시하심으로 사울에게 최고의 공포와 표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the divine power of Christ)을 경험한 사울은 그가 대항했던 그리스도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을 갖게 했습니다.


  4. 그리스도의 계시는 그 포악한 사울을 쓰러뜨리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깨닫고 압도될 경우 당황한 가운데 넘어져 거의 무로 전락하지 않고 견딜 수 있겠는가?” 칼빈은 이것을 말 위에서 교만한 사울이 떨어짐으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기로 한 겸손이 시작된 것으로 제시합니다.

   Saul, Saul! 말씀이 없는 빛으로도 사울은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누가는 이 빛을 섬광(lighting, fulguri, circumfulguravit illum fulmen e coelo)으로 비교하여, 그리스도께서 하신 음성으로 이해합니다. 즉 음성(a voice)과 섬광(flashed)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빛은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에게도 비추었던 것임으로 바르지 못한 이해가 될 것입니다(행 26:13). 빛과 음성은 구분되어, 음성이 사울에게만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은 히브리 사람들이 흔히 백성을 부르시는 방식입니다.


   5. Who art thou, Lord? 당황한 사울은 자기 그렇게 섬기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누구냐고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음성을 듣고서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변화산에서 주의 영광을 본 베드로도 두려워서 횡성수설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자기의 정체를 들려주셔서, 사울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사울은 이 음성을 듣자마자 예수께 굴복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이 구절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에서 유익한 교리(a most profitable doctrine)는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근원이 되시며, 복음과 자신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을 선언하심으로써 복음이 얼마나 귀한가를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복음을 변호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둘째, “경건한 자들에게는 복음 증거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할 때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들과 함께 이 십자가를 분담해 주신다는 소식이며, 성도의 고난의 짐을 함께 짊어지시는 소식을 듣는 것처럼 큰 위로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우리와 함께(in persona nostra)2) 고난을 받고 있으며, 마치 복음의 원수들이 우리를 통해서 그의 옆구리에 상처를 낸 것과 다름 없는 아픔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날 성도들이 복음의 변호를 위해서 당하는 모든 박해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고난의 연장으로 말씀한다(골 1:24).” 이 위로의 목적은 그리스도인이 머리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고난이 우리에게 일반적이라는 것입니다.

  It is hard for thee. it is hard for thee to kick against pricks(It's hard for thee to kick against the pricks.너의 고생을 걷어낼 수가 없다). 이 구절은 칼빈 번역본에 있는 부분입니다. “가시를 대항해서 발길질하는 네 고생이라” “이것은 소나 말이 자신을 채찍질한느 막대기를 싫어서 발길질을 해도 아픔을 맛 볼 수 없는 장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울에게 이 비유를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사울의 내면의 고통을 보신 것이며, 그리스도께 굴복하는 자는 그 가시에 상처를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치료를 받게 됩니다. 이것은 원수인 사울에게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재갈이 물린 우리는 날뛰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채찍에 즉각적인 반응, 순종함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칼빈은 우리를 “천성적으로 악하고 잔인함”으로 묘사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서는 일이 본성적으로 불가능함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은 기적이며 은밀한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사울을 부르는 기적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임한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심의 시작이란, 우리 편에서 하나님을 부르거나 찾지 않았지만, 그가 먼저 방황하고 곁길로 가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의 강한 욕망을 바꾸어 놓아 우리로 하여금 그의 가르침를 받아들이게 하신 것”입니다.3) 칼빈은 교황주의자들의 부차적인 하나님의 은혜론(부분적으로 협조하는 방식, yet only in part)을 거부합니다.

  이 사울의 회심의 역사는 바울의 교리(Paul's doctrine)를 확증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악한 상태에서 극적으로 회심하여 이리가 양으로 변하여 새로운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목자의 역할을 감당함으로 새로운 창조 사역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의 창조는 하나님의 영이 하늘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입술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6-9절) 

6.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6.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거부하던 사울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명령을 수행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효과적으로 사울을 낮추시며 적합하게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그의 본성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바울의 마음은 다메섹 도상에서 성령에 허용되자, 쇠에서 살로 변했습니다.

    And the Lord said unto him. 누가는 사울에게 지시사항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지도를 시작하심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적을 위해 사람의 사역을 사용하신다 해서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들어 자신의 일을 완성하신다 해도 그 권위와 능력은 여전히 자신의 수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사울에게 직접 가르치시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에게 가서 배우라고 보냄은 모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더욱 더 겸손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자기가 박해하던 종들에게 보내시어 배우게 하심으로 겸손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즉 바울을 교육하는데 베드로나 바나바가 아닌 다메섹의 아나니야라는 평범한 제자의 교훈을 받도록 하셔서, 겸손의 덕을 함양시키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 임명받은 교사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아나니아에게로 보낸 것은 교회 사역의 명예를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사역자들이 자기의 배움의 근원을 자랑하지만, 그리스도의 사역자인 것을 자랑합시다.

   It shall be told thee.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만을 배우고, 그의 일군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 자신뿐이라는 지침을 견지해야 합니다.4)

  7. And the men. 누가는 사울의 증인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22장에서 동료들은 빛을 보고 당황하게 된 나머지 그 음성을 듣지 못한 것으로 말씀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들이 음성을 듣기는 들었지만 그것이 누구의 음성인지 또는 무슨 얘기가 오고 갔는지 몰랐을 것이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더러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기 혼자만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소리를 듣지 않았다고 결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적을 통해서 믿음을 확립하는 뜻에서 동료들은 번개와 같은 빛을 보고 바울이 땅에 쓰러지는 것을 보며 분명하지는 않지만 하늘에서 들려 오는 음성을 듣지만 그와 동시에 바울 혼자서만 자기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8. He was raised up from the earth.  사울은 혼자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혼미하게 되었으며, 그의 시력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18절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함으로, 눈은 떴지만 여전히 볼 수 없는 시각 장애 상태가 3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다가 큰 물고기 배 속에서 3일 동안 있는 것과 유사하군요. 요나는 다시스에서 니느웨로 사울은 핍박하러 간 다메섹에서 복음을 듣고 전하로 가게 된 다메섹입니다.

    9.  바울의 삼일동안 금식은 경건의 금식이 아니라, 기겁하여 혼미하기 때문에 식음을 전폐한 것으로 칼빈은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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