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람 성경

[매일성경, 07-09-27] 사도행전 09:23-31 다메섹에서 다소로 간 사울

형람서원 2007. 10. 4.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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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07-09-27] 사도행전 09:23-31 다메섹에서 다소로 간 사울


제목: 다메섹에서 다소로 간 사울

내용: 다메섹에서 탈출한 사울은 바나바의 중재로 예루살렘 교회와 교제를 하게 되며, 예루살렘에서 복음 전도로 다시 핍박을 받은 사울은 다소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는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하심으로 수가 증가됩니다.


  26-31절)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다소로 선교 여행의 예고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26. When Saul was. 복음의 출발은 하였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인정을 받지 못한 어려운 문제점에 봉착하였습니다. 사울은 유대인과 예루살렘 양 진영에서 버림을 받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배척에 대해서 원망하지 않은 것은 자기의 소행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교회에서 징계를 당하고 배척을 당한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화해시켜주심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언제든지 낮은 자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사울은 그 낮은 자리에서부터 시작하여 교회의 최고의 위치까지 올라 가장 중요한 기독교 교사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먼저 자기를 낮추어 자기를 모욕하는 사람과 동료가 되지 않는다면 교회에서 가르칠 자격이 없습니다.


   27. When Barnabas had taken him. 예루살렘의 두려움에 대해서 칼빈은 두려움에서 오는 소심함(peradventure, a point of too great fearfulness)으로 이해했습니다. 교회는 두려움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정당한 신앙고백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울에 대한 다메섹에 대한 행적은 사울이 직접 말하는 것 보다는 바나바가 말함으로 적절합니다. 자기의 행적을 자기가 떠버리는 것은 그리스도인답지 못합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교회에 등장시킨 인물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그리스도인으로 시작하게 했습니다.


  28.  “제자들과 함게 예루살렘에 출입”하는 것은 매우 친밀한 관계가 되었음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바나바의 추천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일원이 됨이 온 교회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누가는 사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로 제시함으로 복음의 열정과 담력을 제시하였습니다. 사울은 “예수의 이름을(for the name of the Lord)”이 아닌 “예수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the Lord)” 전하여서, 열정과 능력의 기원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명합니다. 사울은 많은 장애물(잔인과 포악) 속에서 예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음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I(=Calvin) take the name of the Lord in this place for the profession of the gospel; in this sense, that Paul defended Christ’s cause manfully."


  29. He disputed with the Grecians. 헬라파 유대인들1)은 헬라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세계 도처에 흩어진 유대인으로 보는 에라스무스의 견해를 지지합니다. 사울은 자기를 모르는 헬라파 유대인들을 상대로 하여 복음을 전하려 합니다. 

    They would have slain him  헬라파 유대인들의 모습, 즉 지성으로 뭉쳐있다고 주장하는 헬라의 고결한 지식의 위선과 광포와 잔인함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갖는 거룩한 분노(an holy wrath)는 정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논리가 지적받고 굴복 당했다고 해서 분노하며 강포를 부리는 것은 부당합니다.


   30. 칼빈은 사울이 다소에 내려간 것도 복음을 가르치는 목적으로 제시합니다.

       In that he went to Tarsus, he did it undoubtedly to this end, that he might carry the doctrine of the gospel thither, because he hoped that he should have some favor and authority in his country, where he was famous; yet was he brought thither by the brethren, that they might deliver him from the lying in wait.


  31. Then the Churches.  사울은 원수들의 큰 가시였는데, 사울이 예루살렘을 떠난 뒤로 교회에는 큰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사울이 떠난 뒤에 찾아온 예루살렘의 교회의 평안은 잠시의 평안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교회와 백성의 연약함을 배려하여 박해의 연속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한 교회의 평안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만큼 처절한 영적 전투의 들판에 서 있어야 합니다.

  누가는 더 중요한 요점인 곧 교회가 “든든히 서고”, 그들이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수가 많아짐”을 덧봍여 진술합니다. 잠시 찾아온 평안을 누리고 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열심을 내어 회개의 역사와 성령의 위로를 계속해서 진행시킵니다. 교회가 이 능력과 사역을 빼앗길 때에는 행복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상실됩니다.

  “우리는 외적인 평화를 남용해서 쾌락과 태만에 빠질 것이 아니라 우리 원수들이 우리에게 허용하는 안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에게 기회가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을 정돈하여 믿음의 정진하는 습관을 갖도록 하자.” 그러나 만약 불경건한 자들이 교회를 핍박하더라도 성령의 위로로 만족하며, 우리의 모든 과정을 감찰하시는 그 분을 향해 전진해야 합니다.

  “든든히 서감” 칼빈은 두 의미로 제시합니다. 첫째, 숫자가 많아진다는 것이며, 둘째, 양무리 속에 있는 자들이 믿음의 성장(새로운 은사와 믿음의 강건)을 뜻합니다. 칼빈은 두 견해를 모두 견지합니다. “건축의 비유를 여기에 사용하는 것이 아주 적절한 것은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과 집이요, 성도들 또한 개별적으로 볼 때 성전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음에 이어지는 두 가지 사실,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았으며 그들이 성령의 위로로 충만해 있었다는 것은 이 건축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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