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07-09-21] 사도행전 07:54-8:3 스데반의 순교와 사울의 광포
제목: 스데반의 순교와 사울의 광포
내용: 결국 스데반 집사님은 영광 중에 순교를 당하며, 주님의 기도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를 합니다. 그리고 사울은 더욱더 열심을 내어 교회를 핍박하는데 앞잡이가 됩니다.
54-58a) 스데반을 설교를 중단시키고 광분하는 군중
54.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4. When they heard. 군중들은 각자가 이를 갈았지만 마음에 찔려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결국 의견의 일치를 위해서 큰 소리를 지르며(57절) 스데반을 공격하였습니다.
they burst asunder inwardly, 라는 말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광포해짐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이를 갈 만큼(the gnashing of the teeth) 격동되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기술은 복음의 성질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향을 받는다할지라도 그 속에서 악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accidentale malum, an accidentary evil). 이러한 역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을 건전한 마음으로 돌려놓은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서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설교자는 불굴의 의지로 전파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결단력이 요구됩니다. 가르침의 직책을 수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사람들과 날카로운 충돌이 있을 것을 각오함이 없이는 그 직책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예가 하나님에게서 빼앗겨지게 될 때에 우리는 눈을 감을 권한이 없습니다. 그 상태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면 불길 위에 기름을 붓는 형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에 상관없이 전도자는 말씀을 전해야하며, 악한 자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려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55. Forasmuch as he was full. 스데반처럼 큰 곤경을 당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큰 곤경에 하나님의 종에게 요구되는 것은 인간의 도움이 끊어진 상태에서 그는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사의 결정자이신 하나님께로 얼굴을 돌린 것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에게는 희망이 좌절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로 눈을 돌릴 때에 그리스도께서 즉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사람은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된 스데반을 정복할 수 없었고, 하늘의 환상을 막을 자가 없었다고 기술합니다. 결국 스데반은 빛나는 승리를 하였는데, 그것은 하늘을 우러러 보았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한 것과 하늘을 우러러 본 것을 동일하게 취급합니다. 우리의 육적 안목으로는 하늘에 다다를 수 없지만, 성령이 충만하면 하늘로 올라가 주의 보좌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He saw the glory of God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서신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안목은 육안의 투시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전체 과정을 올라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뒤로 포기하고 우리의 전심전력을 다 기울여 힘써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참으로 그의 임재를 느낄 수 있도록 우리 속에 자신을 계시하실 것입니다(as he did to Stephen, but he will so reveal himself unto us within).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 그러나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임재의 확증, 은혜로 가까이 계심을 보여주심으로 스데반처럼 보이는 방식을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56. Behold, I see the heavens. “스데반이 기적이 자기에게 허용된 사실을 공개적으로 선언함으로써 하나님의 적들을 용감하게 격동시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종에 대한 개별적인 호감을 보이려고 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적들을 놀라게 하고 괴롭혀 주시려고도 한 것이다.” 하늘이 열리는 것은 스데반이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은 스데반에게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스데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그 구성 내용 전체로 다 나타난 것이 아니요 인간으로서 그의 능력이 도달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만 나타났다고 하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무한성은 피조물의 용량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The Son of man standing. 스데반에게 나타난 그리스도는 “인자(人子)” 이셨습니다. 이 인자는 유대백성들에게 죽음으로써 파멸당하셨지만, 하늘에 오르셔서 지배권을 장악하고 계신 분입니다. 누가는 56절에서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으로, 스데반은 57절에서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이라고 제시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인자가 되심을 제시합니다.
57. Crying with a loud voice.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증언하는 스데반의 증언에 가야바처럼(막 15:62ff) 심하게 분노를 일으키며 광란을 폭발케 하였습니다. 스스로 자신들을 억제하지 못하는 자들이 돌발적으로 또는 난폭하게 극단을 향하여 달려가는 습성이 있는 것처럼 그들은 격정에 사로잡혀 스데반을 향해서 돌격하였습니다.
58. They stoned. 신명기 13장에서는 거짓 선지자에 대한 형벌로 돌로 치는 형벌을 규정하였습니다. 그 규정은 이방신으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를 규정한 것인데, 스데반의 설교는 우상으로 가자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버리자는 선포였습니다. 그런데도 부당하게 유대인들은 유죄를 판결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여 빌라도에 넘길 때에는 그럴 권한이 없다고 하였는데(요 18:31), 스데반에게는 적극적으로 율법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스데반에 대한 이러한 처벌에 대해서 침묵을 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우며 맹목적인 가를 알 수 있습니다.
58b-60절) 스데반 재판의 증인으로 등장한 사울
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And the witnesses. 율법에는 증인이 먼저 돌을 던져야 하는데, 옷을 벗어 사울에게 던집니다. 이 증인들은 어떤 증거도 없이 맹목적으로 살인에 대한 양심에 가책이 없이 거짓 맹세로 무고한 스데반을 향해서 돌격했습니다. 자기의 손에 피를 대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직접 돌을 던지지 않았고, 자기가 어떻게 지시한 것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지만, 그도 동일하게 배척하는 감성으로 멸망 받을 행동에 동참하였습니다. 사울이 비록 그곳에서 무지한 행동을 했을지라도 정상이 참작될 수(핑계) 없습니다. 그는 바로 대제사장에게 가서 공문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8장).
만일 그리스도께서 속히 그를 구원해주셨다면 교회가 훨씬 덜 손상을 입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지옥의 밑바닥에서 떨어져서 광포하게 교회를 핍박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끌어올리심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현저하게 나타났습니다.
59. Calling on. 그는 이미 자기가 해야 될 말이 끝난 것을 알고 곧장 하나님께로 향합니다(now unto God for good causes). 그는 심한 고통 속에서 기도로 무장을 합니다. 전쟁과 다름없는 모든 시간에서 기도해야 하지만, 가장 힘든 최후의 순간에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은 너무나도 귀중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마지막 순간까지 겸비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모습에도 그들의 잔인성은 감소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의 기도는 두 부분인데, 첫째, 자기의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부탁하는 것으로 신앙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함으로 핍박자를 향한 사랑을 증거합니다. 우리의 종교의 진정한 완전성은 이 두 방면에 있습니다. 칼빈은 스데반이 더 많은 말을 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 두 마디에 모든 것이 귀착된다고 생각했습니다.
Lord Jesus. 스데반의 확고한 신앙고백과 기도 그리고 믿음의 용기는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은 수많은 광포자들 가운데서 저주와 모욕과 자기 귓전으로 들려오는 큰 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은혜에 안전하게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실감나게 하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수 천의 죽음에 직면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모든 위험에서 틀림없이 구원해주심을 다윗과 함께 고백하며 하나님께 우리의 생명을 위탁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을 받아주심의 확신은 영혼의 최적의 평안한 상태를 이루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위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을 안전하게 보호하심을 믿음으로 은혜로운 위로를 받게 됩니다.
“인간의 영혼이란 어떤 미치광이의 헛소리대로 사라져 버리는 하나의 숨결이 아니요, 이 생명이 끊어져도 살아 남는 하나의 본질적인 영이라는 사실이다. 더구나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배우게 된다. 즉 모든 권세가 아버지께로부터 그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께 기도하는 일은 옳고 적절한 일이다. 그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을 보호 안에 맡기게 되는 것이다.”
60. Kneeling down, he cried. 스데반의 기도의 태도는 그리스도인이 본받아야 합니다. 스데반이 마지막으로 무릎을 꿇고서 큰소리로 기도한 것은 하나님께 기도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고, 원수들의 완악함은 감소되지 않았습니다. 마치 기도가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칼빈은 이 부분에서 비록 어거스틴의 주장을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I will not say as Augustine, that unless Stephen had prayed the Church should not have had Paul; for this is somewhat hard;”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용서하셨다는 그 사실에서 스데반의 기도가 무효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인정하였다.
스데반은 무리들이 성령을 거스려 반역한 것(resist the Holy Ghost, 51절)으로 정죄하였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성령 훼방죄인 그 무리 속에 속한 사울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칼빈은 스데반의 기도가 무리 중에 속한 사람들 중에 죄의 유입 전의 과정에 있는 사람의 죄를 용서함을 구하는 기도를 함으로 전체가 성령 훼방 죄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1)
And when he had said thus, he fell on sleep. 이 말이 첨가된 것은 스데반의 기도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에 한 말이라는 것을 증언하기 위함입니다. 즉 경이로운 항상성과 평안(‘잔다’)을 보여줍니다. 죽어가면서도 기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수들의 죄에 대한 용서의 기도를 하며,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장 탁월한 덕목입니다. ‘잔다’라는 말이 성경에서 죽음을 지목하며, 육체에 관련된 말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영혼도 함께 잔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지한 추측입니다.
8장 1-4절) 교회를 핍박하는 사울
(Chapter 8) 1.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먼저 이 세상에서 경건한 자의 상태는 도살당할 양(like sheep appointed to be slain, 시 44:22)같은 것입니다. 둘째, 비록 원수들이 잔인한 행위를 감행할 자유를 행사하지만, 그 박해로 인하여 교회는 복음이 더욱 진보하게 됩니다. 셋째, 복음의 진보는 소외되었던 사람들에게 확장되어 믿음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기적을 나타냈습니다.
1. At that day. 스데반을 죽인 후로 그들은 사나운 들짐승처럼 강렬한 학살을 감행했습니다. 잔인함의 아비인 사단은 무고한 피로 감각(양심)을 무디게 한 후에 핍박을 멈추지 않게 했습니다. 교회는 잠시 평안 뒤에 심각한 곤란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초대교회의 고통이 우리시대에 적용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약함을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라고 제시합니다. 신앙의 정절을 지킴으로 교회에 더욱 심한 핍박이 왔을 때에 교회는 스데반을 전혀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군대의 선봉장(기수)이 되어 용감하게 전진하였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칭찬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누가는 이해하였습니다.
비록 ‘예루살렘 교회’라고 말씀하지만, 다른 어떤 곳에 교회가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 박해로 예루살렘 교회에서 성도들이 산산이 흩어져 많은 교회의 발생의 근원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교회 담장 안을 넘어서 이제 멀리 퍼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2)
They were all scattered abroad. ‘모든’은 보편적인 어법을 사용합니다. 사람들은 미소한 곤란에도 도망치지만, 성도들은 당황함 없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악한 자들의 광포로 인하여 교회가 끝날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유대의 여러 곳으로 흩어졌을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까지도 갔습니다. 사마리아의 개종은 이방인들의 소명의 첫 열매와 같습니다.
칼빈은 핍박 중에도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것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도록 그들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안내자가 되셔서 그의 손으로 그들을 다른 곳으로 인도하시게 되는 사실을 그들을 확실히 알게 되기까지 그들은 거기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제시합니다. 예루살렘에 머무는 것이 평안과 안전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는 성도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이리떼들이 양무리를 습격해 왔을 때에 그들을 충실하게 보호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터툴리안은 박해의 두려움을 피하여 도망하는 일이 부당하다고 주장했지만, 칼빈은 지나치게 엄격한 규율이라고 거부합니다. 어거스틴은 교회가 목사가 도망했기 때문에 적에게 굴복하지만 않게 된다면 도망은 허용된다고 주장했습니다.
2. They dressed(buried) Stephen. 박해 속에서도 경건한 사람들은 참된 종교의 의무에 헌신합니다. 스데반을 장례하는 일은 자기들의 생명의 위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순교자란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서 그의 복음의 영광을 위하여 훌륭한 승리를 거두신 사람인데 그러한 거룩한 순교자의 몸이 야수들에게 던져진 채로 버려져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의 신앙 훈련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만일 그들이 스데반과 함께 죽는 일에 동참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향해서 참으로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은 순교자인 스데반을 장사함으로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였고, 믿음의 견고성을 드러내는 실천행위였다.” 비록 장례(시신)는 신성하지 않지만, 산 자는 시체들이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게 되기까지 땅 속에 위탁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복은 영생의 약속임을 인식해야 하며, 시체에게는 어떠한 영예를 돌려서는 되지 않습니다.
They made great lamentation. 스데반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경건과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 성경은 진술합니다. 스데반의 죽음에 두려워하지 않고, 후퇴하지 않았습니다.
3. But Saul. 사울의 등장은 원수들의 잔학성의 큼을 제시하면서, 그 잔혹한 원수를 한 목자로 만드시는(도구) 하나님의 자비가 얼마나 놀라운가를 알 수 있습니다.
4. And they were scattered abroad.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는 성도들이 흩어져 갔지만 믿음의 일치를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어둠에서 빛을 죽음에서 생명을 가져오는 방법입니다. 오직 한 장소에서만 들려졌던 복음의 소리가 이제는 어느 곳에서나 들려지게 되지만, 믿음의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형람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일성경, 07-09-23] 사도행전 08:14-25 사마리아에 임하신 성령 (0) | 2007.10.02 |
---|---|
[매일성경, 07-09-22] 사도행전 08:04-13 사마리아에 전파된 복음 (0) | 2007.10.01 |
[매일성경, 07-09-20] 사도행전 07:44-53 스데반의 설교(4) (0) | 2007.09.27 |
[매일성경, 07-09-19] 사도행전 7:30-43 스데반의 설교(3) (0) | 2007.09.24 |
[매일성경, 07-09-18] 사도행전 7:17-29 스데반의 설교(2) (0) | 2007.09.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