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07-09-19] 사도행전 7:30-43 스데반의 설교(3)
제목: 스데반의 설교(3)
내용: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처음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을 스데반은 “광야교회”라고 명칭합니다.
30-34절) 광야 40년이 차매 모세를 부르시는 주(Lord)
30.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31.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33.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34.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출애굽기 3:1-12절 비교를 합시다.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God)과 여호와(LORD)가 번갈아서 말씀합니다. 주 하나님, 모세는 하나님께 말을 합니다(Moses said unto God). 30절에서 ‘때가 차매’를 NIV는 passed로 KJV는 were expired로 번역하여 하나님의 경륜의 임박감에 대해서 잘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30. And when forty years were expired. 사단의 교활한 계획은 모세에게 40년의 광야 생활을 통해서 사명의 확신이 약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80세가 되도록 침묵된 하나님의 인도는 모세의 욕구를 침체시키기 충분하였을 것입니다. 모세에게는 아무런 내놓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 때가 하나님의 알맞은 때였습니다.
The angel of the Lord appeared unto him. 천사(an angel, an angel of the Lord )는 누구이며, 왜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광야, 시내산에서 보인 천사는 2위격의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첫째의 질문은 "천사란 누구였는가?"하는 문제요 둘째는 "왜 그는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났는가?"하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누가가 그를 한 '천사'라고 부른 다음에 그를 소개하면서 하는 말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대답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가끔 그 사자들에게 특히 자신에게 속한 고유한 것들을 나누어 주시고 공유하시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그들에게 적용되었다 해도 이상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천사는 공공연하게 자기가 영원한 하나님이시오, 그의 존재가 자기 안에 있으며 만물이 자기 안에 존속하는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에 이 증언은 반드시 하나님의 본질에 한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이 어떤 면으로도 천사에게 해당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좀 더 적절할 것 같다. 즉 천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기 때문에 천사는 그의 위격을 떠맡고 있는 것이요 마치 자기가 그 한마디 한 마디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 명령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런 방식으로 말한 일은 예언자들에게 매우 흔하게 있는 일이다. 그러나 조금 후에 누가는 이 천사가 바로 모세가 그의 인도와 보호를 받아 그 백성을 해방한 동일한 천사였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서 그리스도가 바로 그 인도자였다고 표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 천사가 홀로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자신이 부여 받았으나 아니냐에 대해서 우리가 이상히 여겨야 할 아무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우선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인간과의 (p.259)어떠한 사귐도 이루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립하자.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가져오는 중보자가 계시지 않고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에 대한 명백한 증언을 주고 있으며 그는 아버지와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심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한 천사로 불리워지기도 했는데 그것은 단지 그가 수행원이나 조수로 천사들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요 이를테면 그 백성들의 해방이 우리 모두의 구원의 그림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로부터 보내심을 받아야 하였다. 그래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육체를 입으시고 종의 형태를 취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체대로는 결코 인간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이 이해할 수 있는 적당한 어떤 형태로 나타나신 것이다(accommodation). 그러면서 내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 이름이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영원하신 목적에 의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 주님으로 임명되셔서 그러한 계획을 따라서 그가 모세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서 2장 16절에서 볼 수 있는 바 그리스도는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고 한 말씀과 이 가르침과의 사이에 아무런 모순도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잠시 동안 천사의 모습을 취하셨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참으로 사람이 되셨음을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 그가 천사의 성질을 취하신 일은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가시떨기나무(burning bush)에 대해서 유추법(analogy)을 사용해봅니다.. 즉 자기 백성들이 가시 떨기나무라는 것입니다. 광야에 널린 필요 없는 가시떨기 나무들은 빽빽하게 되어 있어 불이 잘 붙을 수 있으며, 맹렬한 불길에 싸이기 쉽습니다. 이 매우 허약한 집단(약할 뿐만 아니라, 쉽게 무너지기 쉬운)이 무방비 상태에 있는 곳에 독립전쟁을 이루어야 합니다. 즉 많은 유대백성은 오히려 무익한 요소가 된 것입니다. 아무리 박해한다할지라도 자유를 위해서 결집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야 할 사명이 모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교회도 세상에서 받은 고난에서 면제받을 수 없으며,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영구적으로 가시나무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이 상태에 사탄은 계속해서 불쏘시개를 던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은총이 없다면 우리는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불이 이생에서 우리를 태우도록 활활 타오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주께서는 시편 46:5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중심에 계시기 때문에 아무런 재난도 우리를 해치지 못하도록 지켜보실 것이다.” 이 가시떨기나무를 에스겔과 연결한다면, 마른 뼈가 생기로 소생하게 됩니다. 본 저는 이스라엘이지만, 주의 성령이 임하시면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길로 이해하였습니다. 유비(analogy)라면 양자로 해석되어도 부방할 듯합니다. 그러나 공통은 가시떨기나무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31. He wondered at the vision.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임재의 확증을 위해서 이 방법을 도입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단의 가짜 비젼과 하나님의 명확한 비전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단은 가짜 흉내를 계속해서 내기 때문에 경계와 분별력을 길러야 합니다. 재세례파들은 공상과 환영에 착각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만이 해결책입니다. 하나님의 비젼을 본 모세의 충격은 너무나 컸습니다. 사단의 비젼이 흉내내는 것처럼 불완전하게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우리 마음에 임재의 표적과 상징을 새겨 주십니다.1)
32. I am the God of thy father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모세에게는 그가 전하는 말에 하나님의 권위가 담겨지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그러한 비젼에서도 교리가 첨가되었다고 이해합니다.2) 즉 교리를 이해함에 따라서 말씀을 전하는 자의 권위가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교리는 주의 성육신의 이해의 도식임으로 하나님의 임재에서 성육신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계시하는 것까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칼빈은 시내산의 계시의 사건은 아브라함의 언약의 기초에서 이루어집니다. “일찍이 네 조상들에게 그들의 구원에 대한 나의 관심을 약속했고 은혜의 언약으로써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나의 가호아래 받아들였으며 그리고 또 네 동족의 노예상태를 끝내기 위하여 이 때를 이미 정해 놓았던 나는 이제 내가 말한 바를 확증하기 위하여 네게 보이는 것이다. 동일하게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양자 삼으셨고, 또 자신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그 모든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확고하고 영원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 이 토대 위에 세워지게 해야 한다.”3) 즉 모세의 율법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기초하며, 시내산 언약은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지며, 우리에게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며, 택자는 그의 양자로 입양되어 그의 기업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됨은 성도의 죽음에서 증명됩니다. 인간의 파멸은 죽음이지만, 인간의 파멸인 죽음은 성도에게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는 생명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과 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And Moses being afraid. 위로와 격려가 가득찬(a voice full of consolation) 하나님의 음성이 모세에게는 오히려 두려움이 되었고, 가장 좋으신 하나님의 임재는 모세를 떨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두려움은 모세에게 하나님께 경외감을 주는 유익을 주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해야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으로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하면(near to God) 할수록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 강하게 빛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더욱 큰 두려움에 사무치는 것이다.” 이 두려움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게 하였습니다. 이 두려움은 모세에게 더욱 큰 확신을 주었고, 적절한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Put off thy shoes from thy feet; 신발을 벗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훈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경건한 심정으로 받아서 하나님께 속한 영광은 속히 하나님께 바치도록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he is admonished by this sign with reverence to receive the commandments of God, and to give him due glory by all means.). Ex) 서양 사람들은 신발을 벗지 않는 문화입니다. 신발을 벗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33. Because the place wherein. 하나님께서는 장소(= 있는 곳)를 말씀하심으로 모세의 마음이 마치 하늘에 올리어진 것처럼 땅 위에 있는 것에 관해서는 일체 생각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모세에게 사람이 땅 위의 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관심을 드리기 위해서 그처럼 많은 격려로서 자극을 받았다면 우리는 그보다 더 백배이상 더 둔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주를 해야 할까?” 칼빈은 그 장소에 대한 특별한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어진 임재의 역사를 강조합니다. 즉 장소의 신성함으로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있는 장소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일어난다면 곧 그곳이 시내산과 같은 역사의 현장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벧엘에 임재하셨지만, 벧엘이 거룩한 땅이 아닙니다. 후손들이 그것을 흉내낼 때에 예배는 타락했습니다. 결국 그 장소는 모세 한 사람에게만 위하여 거룩한 장소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의 임재를 보이시기에 우리는 신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복까지 벗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34. In seeing I have seen.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고난과 탄원을 듣고 보고 계셨다고 말씀하신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천대받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5-38절) 이스라엘 백성이 거부한 모세를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세우시는 이스라엘의 역사
35.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37.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거부하였습니다. 애굽의 왕궁의 탁월한 지혜자를 천박한 노예들이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린 자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거부하여 죽임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참 선지자로서 영생을 수여하는 구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35절. 유대인의 조상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그들의 믿음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며, 가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스데반은 강조합니다. 즉 조상들이 버린 모세를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기의 권위를 맡겨 주셨습니다. 모세가 갖은 권위는 하나님의 임재의 확실한 체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목이 곧은 백성들에게 놀라운 인내로서 대해야 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조상들의 비참함에 대한 스데반의 지적은 그들의 양심을 매우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A ruler and a deliverer. 하나님께서는 모세는 자기의 관원과 재판관으로 삼으셨습니다. 만약 백성들이 폭군이 모세를 세웠다면 모세에게 복종했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재판관으로 임명하셨기 때문에, 교만한 마음으로 그를 멸시하고 거부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백성들의 본성은 항상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은혜를 거부하려는 배은망덕을 보입니다.
하나님의 영예로운 관리가 된 모세(an honorable title)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합당한 위치에 이르게 됩니다. 모세는 구원자자 구속주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사역자에 불과 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이 직책은 천사의 손에 의하여 모세에게 주어졌다고 설명한 것은 모세가 사역자(종)으로서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의 지도와 원조 밑에서 자기가 하나님께 복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손(in the hand of the angel, NIV는 단지 the angel로 번역함)'이라는 말은 섬김이란 의미가 아니라 주권이란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의 봉사활동을 이용하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모세의 위에 똑똑히 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하신 까닭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그리스도는 교회의 구원을 성취시키시는 최고의 통치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사람들을 자기의 일군으로 고용하시는데 능력과 성취를 오직 자기에게만 의존케 하시는 방식으로 취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탁월하게 드러내게 하십니다.
37.A Prophet shall God raise up.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입을 빌어, “나와 같은 선지자”를 이스라엘 가운데서 세우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게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모세에게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모세에게 불순종하는 언행불일치가 발생합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갑자기 모세의 역사가 중단되어 “나와 같은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율법의 완성자의 등장, 완전한 교사께서 율법을 완성시킬 것을 주목시키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왜 스데반이 여기서 모세의 증언을 포함시켰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즉 유대인들은 모세를 추켜세우고 과장되게 자랑하는데, 모세가 살아 있을 때에는 거부와 불순종으로 대적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모세의 예언을 무시하고, 그리스도(율법의 완성자)의 제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38-41절)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을 섬김
38.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39.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40.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41. 그 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38절.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복을 주시지만, 백성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역사를 스데반이 고백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에서 겨우 풀려난 폭군의 손길을 자기를 노예에서 구원해준 구원자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과 함께 광양에 있었지만,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거부했습니다. 많은 재난과 죽음의 상황에서 구원받은 백성들이 구원자를 거부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스데반은 모세를 거부했던 백성들이, 구원의 창시자인 그리스도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Which received lively oracles. Erasmus translated it lively speech; but those which are expert in the Greek tongue, they shall know that I have more truly translated the words of Stephen. 칼빈은 자기의 이해가 에라스무스보다 더 좋다고 제시합니다(in Oracles than in Speech). -NIV = living words, KJV = lively oracles.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백성들에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모세의 권위는 탁월합니다.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역하는 모세를 백성들은 거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에라스무스는 왜 율법을 산 말씀(lively speech)라고 번역했는가?에 대해서는 질문이 있습니다. 칼빈은 “생명을 주시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이란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지도하는 완전한 기준이요, 또 하나님의 의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생명과 구원의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즉 율법 자체에서 생명을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산 말씀” -효과와 능력을 인정하는-이라면 굳이 반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칼빈은 “율법이 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요, 우리 안에서 죄를 찾아내는 것”이기에 율법에도 생명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 구절에서 스데반이 모세의 가르침에 대해서 더욱 전체적이고 깊은 의미를 추구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유일한 생명이요 구원이신 그리스도를 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열심은 문자에만 애착을 갖는 것이었으며, 핵심이 되는 그리스도를 추구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집스러운 무식, 육감적이며 외형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율법을 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통주의 신학이 이 시대에 문자에 얽매인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그것은 정통신학이 그리스도께 집중하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칼빈의 제시대로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기독교 신학을 이루어야 합니다.(율법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추구입니다.)
That he might give them to us. 모세의 권위는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권위가 존속되어 말씀을 전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가 사라진다할지라도, 교사가 사라짐과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우리를 위하여 기록으로 남겨졌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가르침의 기원(창시자)이심을 돌리기 때문에 항속적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동시에 그 전한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를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신앙고백과 신앙의 도를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유익을 줍니다. 그리고 원수들 또한 가라지를 뿌려 놓았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교사의 가르침에 착념할 수 있도록 경건해 힘써야 합니다.
39. They refused, and were turned away. 스데반은 유대인의 조상들이 모세를 거절했다고 진술합니다. 애굽의 미신과 풍습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숭배했으며,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그들은 모세를 거부하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아이러니한 현상(배은망덕)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40. Make us. 스데반은 조상의 반역의 대표적인 예인 “자신을 위하여 금송아지”를 만드는 역사를 진술합니다. 모세는 산 위에서 계명을 받을 때에, 백성들은 산 아래서 금송아지를 만드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마치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은 것과 같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잠시라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폭동을 일으키고 자기들의 입맛에 맛는 신을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분명하게 그들에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반역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러한 반역의 역사는 이스라엘 조상들이 얼마나 다루기 힘든 백성이었는지를 충분히 보여줍니다. 스데반의 모세의 역사의 진술은 그 때의 역사가 반복됨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에 공공연하게 율법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신성을 모독하는 이방 종교를 유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의 인간은 육체가 능히 납득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모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우상을 열광적으로 만드는 이유입니다.4)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러한 인간의 육적 성향을 영이신 하나님께로 적용하여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비인 성육신의 이해를 신화로 전환하여 육적 이해방식의 도식을 만들어 기독교를 우상종교와 동일하게 전락시켰습니다. 메이천은 이러한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님을 [기독교와 자유주의]에서 분명히 천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임재의 표적(만나, 싹 난 지팡이, 언약판)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연속은 세례와 성찬 그리고 말씀의 외적 설교를 통해서 연속되어 왔습니다(baptism and the supper, and the external preaching of the word).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께 주신 수단(ordinatis a Deo mediis) 외에 다른 새로운 수단을 추구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임재를 실물주의로 변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부하는 우상에서 즐거움을 찾으려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망치며 다른 것으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즉 “우리를 위한 신을 만들라”는 것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적으로 예배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나 새로운 신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41. And they made a calf. 애굽에서 가장 있기 있는 우상이 ‘소’라고 칼빈은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들은(아론) 하나님께 예배하기로 모이라고 선동하였습니다. 그들이 비록 송아지의 형상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러 했다할지라도 우상을 만듬으로써 이미 하나님을 반역하고 떠났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것은 마치 로마교회가 마리아 상을 향해서 기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이라도 하나님을 위해 세워서는 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금지하심으로 그들의 신성모독 행위를 정확하게 지적하셨습니다.
They rejoiced over the works. 이 구절은 이사야에서 온 말씀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규정해 놓으신 것 이외의 종교에서 어떠한 것도 만들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을 생각 없이 만들어 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자기들의 손으로 만들어 좋은 것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손으로 한 일들, 우리 자신의 조작을 포기하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것은 신성모독이요 남용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예배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인간의 기술로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인바 되는 예배를 추구합시다.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예배가 됩니다(요 4:24).
42절-43절) 광야에서 영광을 돌리지 않고 우상에 몰두한 백성들
42.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43.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스데반은 이 부분에서 유대인들이 범죄 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그들의 고집 센 오류의 길을 계속함을 진술합니다. 그들의 우상숭배하는 것이 마치 광기(狂氣)처럼 다시 반복되어 포기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는 시는 상태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42절). 하나님께서 버리신 이 백성이 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가? 그것은 모세의 웅변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패역한 인류를 위해서 중보하시는 내용, 십자가 도상(途上)에서 중보하시는 내용과 동일합니다. 스데반의 진술에는 모세의 중보가 빠져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중보로 바로 연결시키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는 결론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설교 대지인 장막 - 성전 - 주의 보좌로 옮겨 갑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세 대지로 나눈다면, 1대지 (1-16절) 아브라함의 언약과 족장들의 죽음, (17-43절) 모세의 언약과 모세와 율법을 거약한 백성, (44-53절) 장막, 성전 보다 완전한 주의 보좌를 바라보라. 이 설교를 유대인들은 모세를 거역하고, 성전을 모독한다고 주장하여 스데반을 죽이는 판결을 합니다.
42. They rejoiced over the works. 이 구절은 아모스 5:25절의 인용입니다. 스데반의 어법은 모든 예언이 이 한 권에 집약되어 있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거약하는 범죄가 새로운 것이 아니며, 드문 것이 아니라, 상습적으로 이루어 진 것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희생제물이 드려진 일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광야에서 희생제사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타락한 예배를 하나님께서 거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사 43:22-24에서 백성의 죄악을 고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예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43.You took to you the tabernacle of Moloch. 하나님을 반역한 백성들은 오히려 우상에게는 경배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 숭배는 광야에서부터 시작하여 무수한 이방 신들을 불러 들여와 하나님의 예배를 오염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오히려 악한 방향으로 급속하게 나아가는 일을 중지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의 주장을 스데반이 동일하게 반복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히브리 본문의 기윤(Ghiun)이 어떻게 ‘레판(Remphan)’으로 유입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고 진술합니다.5)
And figures which ye made. 칼빈은 ‘형상’이란 말이 희랍어에서 사용되지만, 선지자에 의해서는 명백하게 거부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해서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만드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의 유치한 궤변은 “자기들이 숭배하고 있는 형상이나 조형물들은 우상이 아니라고” 주장 합니다. 즉 그들은 예배와 높임을 분리해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that mad worship of theirs is, [εικονοδουλεια], or serving of images, and not [ειδολοδουλεια], or worshipping of idols. Seeing they mock God sophistically, there is no man that is endued even but with common understanding, which doth not see that they are more than ridiculous even in such toys. For although I move no question about the word, it is certain that the word [τυπος: 형상]; is more honorable than [εικων: 우상]. But those same [τυποι], or figures, are simply condemned in this place, which men make to themselves, not only [προς την λατρειαν], or that they may worship them, but [προς την προσκυνησιν], that is, that they may give them even any reverence at all.
Beyond Babylon. 선지서(암 5:22-26)에는 ‘다메섹’으로 진술되었지만, 여기에 ‘바벨론’은 착오로 끼어들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6) 당시에 유대인들은 다메섹이 잘 방비된 국가로서 두려워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더욱 멀리 바벨론으로 옮기셨습니다. 우리의 예상은 매우 예리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를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의 걱정은 우리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에 순종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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