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람 성경

[매일성경, 07-09-17] 사도행전 7:1-16 스데반의 설교(1)

형람서원 2007. 9. 22.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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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07-09-17] 사도행전 7:1-16  스데반의 설교(1)


제목: 스데반의 설교(1)

내용: 7장은 스데반 집사의 설교입니다. 2-16절까지는 아브라함, 야곱과 요셉의 일대기를 진술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구원의 경륜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4절) 스데반의 설교의 시작 =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1)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2)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1절)  대제사장의 불공정한 것은 정당하게 변호할 기회를 무시하고 바로 자기 견해대로 판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교황제도에서 성경을 조사하는 일을 하지 않고 단지 자기들의 미신에 의해서 판결하는 것(화형)과 유사합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비록 현재의 상황에 대한 언급이 없었지만, 그 설교를 자세히 살펴보면 긴 설교 안에는 불필요한 것이 없고, 이 시대가 요구하는 요점을 전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조상을 부르는 그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기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조상들이 섬겼던 그 하나님을 동일하게 섬기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조상들의 잘못을 고백하며,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경종을 울렸습니다.

   그러나 성전과 의식에 민감한 그들은 진리를 무시하고 스데반의 설교를 참람으로 결론지었습니다.


   2. Men, brethren, and fathers. 신사적으로 스데반은 자기에게 분노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아직 그 일을 거절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부형들아’라고 부르는 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아부나 아첨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와 지배권에 대해서 그 제도가 변경되어서 그들에게서 권위가 박탈될 때 까지”는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문제 많은 교회에 ‘성도’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The God of glory. 이스라엘의 시작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과 그의 약속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영광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계시,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전달되는 샘물과 같은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영광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이란 모든 신들과 구별되어 홀로 영광을 받으실 만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신 계시는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영광을 몸소 확인 할 때에는 아브라함은 자기의 독생자를 번제로 드림에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에게 시작된 영광은 씨의 번성(창 12장)이었지만, 아브라함이 확인한 영광은 독생자의 영광이었습니다(창 22장, 요 1:14). 

   When he was in Mesopotamia. 메소포타미아는 티크리스와 유프라데스 두 강 사이에 있는 지역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확한 명령을 받아 행동으로 옮겨 고향 땅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떠난 이유는 하나님께서 영광중에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친척과 본토에서 안정적인 삶을 버리고(현세를 떠나) 지시한 땅으로 옮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3. Come out of thy country. 아브라함의 순종은 완전한 상태가 아닌, 미결의 상태 그리고 불안전한 상태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안식을 얻을 만한 확실한 땅의 소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방황을 명령하는 하나님께 아브라함은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어쩌면 이해할 수 없는 수준으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훈련을 통해서 자기 독생자를 드릴 정도로 담대한 믿음을 소유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곤고한 삶에서 고향 땅을 바라보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고향땅을 떠나라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부인이 매우 힘든 족속은 ‘촌놈’입니다.    

    Which I shall show thee. 아브라함은 미결정 상태에 시험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보이지 않는 구원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아브라함처럼 영원한 처소로 인도함을 받았는데, 미결정 상태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처소로 아브라함처럼 나아가야 합니다.   


    4. Then going out. 아브람이 하란 땅에 머물고 다시 이동하였는데, 칼빈은 그 이유를 “부친의 병듬”으로 이해합니다. 즉 부친이 병으로 더 이상 여행을 진행하지 못함으로 하란에 머물었다가, 아버지의 죽음 후에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인 순종을 하였지만, 아버지의 상황 때문에 하란에 잠시 머물었다가 가나안으로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5-8절) 열국의 아버지, 아브라함 = 할례의 아들, 이삭, 야곱 = 열 두 조상의 아버지

    5)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6)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7)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8)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 두 조상을 낳으니


 땅도, 후손도 없는 상태에서 약속을 믿고, 또 자기 후손이 400년 동안 괴롬을 당하지만 결국 나와 자유민이 될 것이라는 약속까지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그리고 할례의 언약으로 이삭이 최초로 받았습니다.(이스마엘은 12세 정도에 할례를 받아 완전한 할례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삭은 할례의 아들이지만 야곱의 아버지입니다. 야곱은 이삭의 아들이지만 열 두 조상의 아버지가 됩니다.


   5절) 칼빈은 세 가지 사항을 제시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 종의 인내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매장지도 없는 땅으로 인도하셨고, 겨우 매장지만 얻을 수 있었는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믿고 의지하였습니다. 스데반의 설교에서는 아무 소유도 얻지 못함이 강조됩니다. 아브라함은 기대한 약속은 인간적 수단으로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시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으로 아브라함을 붙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이 약속은 단순한 조롱과 그다지 멀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演技처럼 보일 수 있지만, 종에게 참된 격려와 위로를 주십니다. 우상숭배에서 갖는 거짓소망과 거짓 격려와 위로와는 전혀 다릅니다. 아브라함의 소망은 헛된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소망이 아니라, 계시에 의한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드라마틱한 명령도 아브라함에게 굳은 담력을 주어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셨습니다.


   6.Thy seed shall be a stranger. 스데반은 애굽의 종된 상태를 부각시키며,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었으며, 또한 구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 동안 노예상태의 비참함, 수치, 고역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약속을 의지하도록 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백성들이 평안할 때에는 약속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가시가 없으면 기도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인가 봅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육체의 가시를 주셔서 바울을 겸손하게 하셨습니다. 더욱 기도합시다.


   7. The nation whom they shall serve.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포악하게 대한 애굽을 심판하십니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포악함을 심판하신다고 강조합니다. “나는 이 세상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보호 안에 있기 때문에 모든 위법행위에 대해서 보복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특성이기 때문에, 이제 나를 괴롭히는 자들은 그의 손에서 도망칠 수가 없을 것이다.”

    They shall come thence and serve me. 구속(redemption)이 성전이나 율법, 의식이 생겨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작품(성전), 의식에 속박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으로 순수한 예배가 시행되기 위해서 특별한 백성, 특정한 장소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1)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택한 장소에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택함받은 사람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순결하고 거룩한 예배를 드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2) 장소와 상관없이....


   8. He gave him the covenant. 할례는 구원의 외적인 표시인데 이것에 구원의 기원을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할례(99세)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할례 전에(75세) 이미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할례가 의의 기원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롬 4:11). 스데반은 조상들이 어떻게 구원받았는가를 다시 한 번 각인시킵니다. 그러나 할례가 주는 외적인 형식은 언약의 유효성을 계속해서 교육함으로 언약 백성들에게 주는 유익이 많습니다. 이 할례의 예식은 기독교에서 성례으로 연속됩니다. “성례전은 사람들 앞에서 외적인 고백의 증언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적인 신앙을 확증하는 효과가 있으며, 둘째 진리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성취하시지 않는 것들 안에서는 아무것도 나타내시지 않으심으로 의미 없는 형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성례를 행함이 교회의 근본이 됩니다. 유아세례를 할례 언약의 연속성으로 보며, 가족 구원의 열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9-16절) 애굽으로 초청하는 요셉과 가나안 땅에 ane힌 야곱

   9)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10)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 11)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들어 큰 환난이 있을쌔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12)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13)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14)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75명)을 청하였더니 15)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16)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9절) 칼빈은 요셉에 대한 역사를 가장 수치스럽다고(잔인성과 비도덕성) 이해합니다. 베냐민을 제외한 모든 형제들이 동참한, 지파의 기원들이 범한 비열한 행동이었습니다. 한국의 종파의 기원들과 비교한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디에서 말하여도 망신이 되는 조상의 역사를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이러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혈통을 의지하지 않도록 하셨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혈통을 의지할 뿐만 아니라, 치욕의 역사도 자부심을 갖는 비정상적인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동생의 살해하려는 형제들, 노예였던 조상들에 대한 자부심은 이해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더라면-요셉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철저하게 믿음으로 형제를 용서할 수 있었고-, 모세를 거부한 민족들에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구원받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국가 형성은 말할 수도 없고, 한 족속도 이루지 못하고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God was with him.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능력을 나타내시면서 요셉과 함께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전혀 응답하시거나 나타나시는 방식 없이 함께 하셨습니다. 택자들은 그 하나님의 침묵에서 잠잠히 주의 인도하심을 바라며 고난과 환란을 이겨냈습니다. 요셉에게 임한 그 임재 방식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3) 그리고 요셉이 응답받는 장소는 성전이 아니었으며,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애굽이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유대 말기에 여호와께서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명령하시지만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 때에 애굽에서는 하나님께서 징계로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탄생 후 애굽으로 내려가셨다가 출애굽하셔서 나사렛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장소에 있을 때에 이루어집니다.


   10절)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 하나님께서 바로의 눈을 섭리하심으로 된 것이라고 스데반은 설교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은총과 지혜(two words, favor and wisdom, there is the figure hypalloge.)를 주셨습니다. 즉 바로는 요셉의 지혜를 보고서 선택하였지만, 하나님의 은총이 없었더라면 바로의 마음에 요셉의 지혜가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11.There came a famine. 당시에 찾아온 기근(흉년)에서 야곱의 가족은 버려진 요셉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인 버려진 돌이 건축자의 모퉁이 돌이는 되는 교육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자애로우심이 요셉의 손길을 통해서 선명하게 빛났습니다. 즉 자기를 죽인 형제들에게 양식 주는 요셉은 생명을 앗아간 형제에게 생명을 주는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스데반은 이것을 유대인들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14절)  야곱의 가족이 75명에 대한 해석. 창세기에는 70명이라는 모세의 기록과 스데반의 말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롬(Jerome)은 70인경(LXX)의 숫자를 그냥 인용했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스데반이 개종자로서 히브리어를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 26권]에서 요셉의 자손과 증손자들이 포함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어거스틴의 추측을 거부합니다. 그것은 다른 족장들의 증손자들 또한 더 많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제롬과 같이 70인경의 번역을 따른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 특정한 숫자가 신명기 10장 22절에 반복되어 있는데 모세의 것과 일치하며 제롬 시절에는 이 구절이 적어도 아무런 논란이 없이 얽혀졌음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타당성이 있다.” 즉 칼빈은 숫자의 불일치를 “복사한 사람들의 오류”로 결정합니다.

  칼빈은 이러한 문제에서 계속해서 문제를 야기시킨다면, 그 사람들에게 지혜의 우월성을 인정하라고 권면합니다. 그것은 바울이 족보의 문제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서 금한 것을 따르기 때문입니다(딛 3:9).


  16절)  스데반은 족장들의 유골이 가나안 땅으로 옮겨졌다고 언급하나, 유골은 요셉의 유골만이 언급됩니다(출 13:19, 수 24:32). 칼빈은 이 구절은 정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스데반의 실수이든지, 누가의 실수이든지 명백한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하몰의 자손으로부터 어린 양 백 마리를 주고 산 밭에 매장하였습니다. 모든 족장들이 함께 있는 매장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산 매장지에 함께 매장되었다고 진술함으로 차이가 발생하였습니다.

  칼빈은 제롬의 여제자 파울라(Paula)의 여행기록, 유대인의 유전 등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지만, 의견이 합치되지 않음을 명백하게 진술합니다.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값 주고 산 무덤의 위치에 관하여 해석상 약간의 문제가 발생된다. 창 23:3-20;49:29-35;50:13에 따르면 야곱은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 산 헤브론의 막벧라 동굴에 묻혔다고 되어 있는 반면에 본 구절에서 스데반은 야곱과 12족장들이 모두 아브라함이 최초로 정착했던 세겜(창 12:6,7)에 장사되었다고  한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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