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목사 설교

고린도전서 4장) 그리스도의 일군

형람서원 2006. 7. 10.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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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4장) 그리스도의 일군


  1. 그리스도의 일군(1절).

    고린도 교회에서는 사역자에 대한 평가가 두 계층으로 나뉜 것으로 보입니다. 달변가 사역자와 어리숙한 사역자로, 그러나 사도 바울은 모든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의 일군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일군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권위를 얻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별볼일 없이 보인다할지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권위가 세워집니다. (조선, 윤형원의 머슴)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여김 받기를 원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창설자로, 복음의 열정적인 전도자로, 이방의 사도 보다도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인식되어지길 바라는 것이며, 이러한 근본적인 사고는 교회의 분열을 막게 됩니다. 모든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일군이며,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그러므로 사역자, 리더의 권위는 너무나도 탁월한 것이어서, 교회의 일군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2. 그리스도의 일군에게 요구되는 충성(2-6절).

    이러한 일군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2절)입니다. 충성은 (1) 상대방의 판단에 흔들리지 않는 것, (2)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 것, (3) 마지막에 심판이 있는 줄을 아는 것입니다(3-4절).

     (1) 많은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의 눈길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일군은 사람들의 눈길에 관심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많은 대적자들이 있었습니다. 헌금을 떼어먹는다고 의심을 합니다. 설교를 못한다고 조롱을 합니다. 설교가 항상 그것이 그것이 다고 비판을 합니다. 사역자 사례를 받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의심을 받습니다. 많은 말들이 오고 갈 때에 충성된 일군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러한 일들을 “작은 일” 아주 작은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신경쓸 것이 없는 가장 작은 일로 여기는 것이며, 실제로 그것은 작은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보다더 큰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2) 자기 자신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서울의 50%의 사람1)들이 우울증의 요소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 가에 따라서 발생하는 최소한의 형식입니다. 자기 판단의 최고는 그리스도 로마 신화의 나르시스인데, 결국은 자살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과장스럽게 보아도 문제가 발생하며, 자기 자신을 초라하게 보아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초라하게 보는 것입니다. 많은 비방과 실패, 그리고 더딘 행보 등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은 부정적일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그 판단을 오히려 하나님께로 미루어 놓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담력입니다.

   내가 비록 약하고, 부족하고 실수투성이지만, 하나님께로는 과감하게 밀어 넣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시죠..... (쇼생크 탈출) 의인, 충성된 사람이 하는 행동.... 예로....

   충성된 사람은 많은 실수와 부조리 속에서도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어갑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헌신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지금 판단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판단은 현재에 진행되며, 결국은 그때에(5절) 확정될 판단입니다.

    (3) 그때,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판단이 칭찬인가? 아니면 꾸지람인가?(겔 33:13) 판단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자신의 명령에 대한 이행 사항을 판단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마음이 드러나면 하나님께서 칭찬을 하십니다.

  서로를 판단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일입니다. 바울파와 아볼로파가 상대방을 보았을 때에 서로의 배우는 선생이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릅니다. 그러나 주인, 그리스도는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일군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판단하는 것은 주인을 판단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충성되이 계속해서 자신의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3. 사도 바울의 역설법(6-13절). = 그리스도의 일군은 섬기는 왕노릇하는 사람.

  사도 바울은 왕노릇에 대한 역설을 주장합니다. 이러한 역설은 “너 잘났어”하는 방식인데, 좀 다른 것은 너무나 점잖고 설득적이고 예리하기 때문입니다. 싸움을 네는 시비가 아니라, 교육을 하는 정곡을 찌르는 빈정대는 것입니다.

    (1) 서로를 판단하면 판단자가 되어 왕이 됩며, 우수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왕이 되었지만, 사도 바울은 빈정됨을 받는 자신이 참된 왕의 행위를 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섬김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신을 배신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섬김의 왕이시며, 자신은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서로 섬기는 자가 더 높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가르침이 고린도 교회에서 역전되었습니다. 그 역전된 고린도 교회에게 자신이 참된 왕노릇, 주님의 말씀데로 행동하는 참된 왕의 행위라고 강력하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2) 미말, 미련, 약함, 비천함 --> 하늘 나라의 왕 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모습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저의 표현으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표현합니다. 아무리해도 보이지 않는 작태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되나??? 그래도 우리는 계속해서 물을 부어야 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섬겨야 합니다. 기독교가 섬김으로 십자가 전쟁을 했다면, 섬김으로 선교를 했다면, 현재에 이렇게 많은 신비주의 거짓 영이 만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참으로 섬긴다면 이 땅의 많은 점집들이 문을 닫을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의 왕노릇을 하고 싶기 때문에, 이 땅은 점점 더러워져가고 있고, 교회도 더러워져가고 있습니다.


 4. 그리스도의 일군은 아비와 같은 자세 그리고 능력으로 일을 하게 됩니다(14-21절).

     (1) 아비와 같은 자세는 현재에 찾을 수 없는 성품 중 하나입니다. 아버지가 상실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아버지가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며,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 여자의 역할 - , 학교에서 체벌을 해야되느냐? 하지 말아야 되느냐?2)

     (2) 그리스도의 일군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 능력은 말의 능력이 아닙니다. 행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영적 능력입니다. 영적 능력은 생명이 살아나며, 생명이 회복되는 능력입니다. 이 생명은 참으로 회복되는 능력입니다. 진통제가 아닙니다. 치료가 되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며 운영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능력은 이 땅의 수단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의 것으로 내려오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으로 설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군, 교회의 일군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일군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군은 교회에서 지체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일군들은 그리스도께 충성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충성된 일군 아버지의 마음으로 지체들을 돌보며, 능력으로 일어섭니다. 우리 모두 헌신된 그리스도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일으키는 능력의 종들이 되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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