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성향은 '호르몬'이 아니라 '의지'에 달려 있다.
동성애 논쟁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이 문제는 다양한 문화적 코드를 활용하며 윤리적·문화적·정치적·사회적·생물학적 경계들을 넘나들고 있다. 최근 식을 줄 모르는 인기를 얻고 있는 <왕의 남자> 역시 그 안에 동성애라는 코드를 담고 있다.
교회 역시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대단히 보수적이고 완강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미국의 경우는 성공회 동성애자 신부가 주교로 임명돼 보수와 진보간에 날선 설전이 오고갔다. 이런 경우, 아무래도 교회에게 주어지는 현실적인 요구는 신학적 답변일 것이다. 동성애 문제를 신학적으로 어떻게 볼 것이며, 과연 “동성애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란 질문에 교회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가 하는 요청이다.
동성애 문제가 무척 민감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에서는 사실 충분한 논의 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논의 자체가 필요없다는, 완강하고 강력한 목소리가 논의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형편이다. 여기에 동성애를 일종의 병적 징후로 인식하고 전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조금 완곡한 목소리만이 간혹 들릴 뿐이다.
이런 동성애를 둘러싼 문제에 대해 좀더 깊이있는 신학적 논의를 구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이 책은 깊은 사고의 지평을 허락한다. 90여쪽에 이르는 소책자이지만 ‘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복음주의자’라는 호칭이 결코 부풀려진 프리미엄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진지하고 일관적인 흐름을 제공하는 존 스토트의 논지는 간결하고도 명쾌하다. 그의 논지를 살펴볼 수 있도록 본문 가운데 주요 내용들을 발췌해서 소개한다.
- 이 논쟁은 ‘호모포비아’(동성애 공포증)와 ‘호모필리아(동성애 애호)로 양극화되어 있다. 즉, 동성애자들에 대해서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들과, 헌신된 동성애 관계는 도덕적으로 결혼과 대등하다고 보는 사람들로 양분되어 있다. 이 두 가지 대안밖에는 없을까? 하나님이 의도하신 인간의 성에 대한 성경적 사고방식을,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지지하는 성경적인 태도와 접목할 수 있는 기독교적인 방법이 있을까?
- 성경 전체의 계시에 비추어 동성애 행위를 수용 가능한 폭넓은 정상성의 범주에 속하는 다양한 형태 중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규범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봐야 한다면, 따라서 동성애 성향을 가진 이들에게 동성애 행위와 동성애 관계의 중단을 요청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이도록 격려하기 위해 어떤 조언과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나는 바울이 제시한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삼각대를 동성애 성향을 가진 이들에게 적용하고 싶다.
- 따라서 궁극적으로 이 문제는 믿음의 위기다.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세상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지배 문화의 압력에 굴복할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성향’은 날 때부터 어떠했느냐(호르몬)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마음·생각·의지)에 달려 있다.
- 알렉스 데이빗슨은 동성애 성향을 가졌지만 기독교의 소망에서 위로를 얻는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러한 상태가 그토록 비참한 이유 중 하나는, 앞을 내다볼 때 믿기 어려운 똑 같은 길이 끝도 없이 계속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여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때 반항하게 되고, 끝이 없다고 생각할 때 절망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절망적이 되거나 반항적이 될 때, 혹은 둘 다를 느낄 때, 언젠가는 그 상황이 끝날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스스로 상기하는 데서 위로를 얻는다.”
- 그렇다. 진정한 사랑과 도덕적 기준을 지키는 자세가 서로 양립 불가능하지는 않다. 사랑은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오히려 도덕적 기준을 내세운다. 따라서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의지적으로 동성애 관계를 고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교회가 징계할 여지가 있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도 교회는 겸손과 온유함으로 해야 한다. 우리는 남성과 여성을 차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동성애 범죄아 이성애 범죄도 차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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