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문화기행

땅콩박사, 조지 워싱턴 카버

형람서원 2006. 4. 7.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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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박사, 조지 워싱턴 카버


카버 박사는 흑인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날짜는 아무도 모른다. 1942년에 죽은 날짜만 알려진 사람이다. 그에게는 단 한 가지 재산이 있었다.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 자기를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확고한 신앙심이었다. 그는 온갖 시련을 극복하며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계속 공부하여 농학박사가 되었다. 그의 모교인 아이오와 주립농대에서 그에게 교수로 남으라 하였으나 그는 가난한 농민들의 친구가 되겠다고 알라바마주의 초라한 농업학교에 교사로 갔다. 그곳에서 평생을 살면서 농민들을 돕는 일에 자신의 학문을 사용하였다. 그는 농민들이 경작하는 목화가 바구미 벌레의 피해로 폐농하는 것을 보고 목화에 대한 대체작물로 땅콩을 개발하여 농민들에게 권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고 땅콩을 심었던 농가들이 과잉 생산으로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온갖 비난에 상심한 그는 땅콩 한주먹을 들고 숲 속으로 들어가 기도하였다. “하나님 이 땅콩을 왜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땅콩을 들고 기도하는 그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이르시기를 “땅콩을 들고 연구실로 들어가라.”라고 하셨다. 그는 연구실에서 땅콩 하나만으로 300여 가지가 넘는 제품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공장을 세워 그 지역이 부촌이 되게 하였다. 땅콩 하나에서도 이런 가능성이 담겨져 있다. 그가 한 말에 “땅콩은 모든 사람에게 복을 갖다 줄 것이며 그 장래성은 땅콩 농민들의 상상력과 노력에 달려 있다”라고 한 말이 있다. 땅콩이 그러하거늘 하물며 사람에게서야 얼마나 엄청난 가능성이 숨겨져 있겠는가? 우리 각자가 노력과 상상력으로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http://blog.naver.com/twwo/40020633968


땅콩박사가 남긴 말


1860년 미국 중서부 미주리주 한 농가에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안돼 흑인 노예인 어머니는 실종됐고 주인이었던 백인 아버지는 사고로 죽었다. 아이는 남의 집 헛간에서 자라면서 온갖 학대를 당했다. 그러나 아이는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면서 신앙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미국 역사에 빛나는 농학박사가 된다. 그가 바로 ‘땅콩박사’인 조지 워싱턴 카버다.

  그는 땅콩에서 의약품 식료품 화장품 등 무려 50가지가 넘는 상품을 개발해냈다. 그가 어느 날 상원 농업위원회에서 ‘땅콩의 섭리’에 대해 강연한 후 한 의원으로부터 “성경이 땅콩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던가요?”라는 질문을 받고 이런 명언을 남겼다. “성경이 땅콩에 대해 가르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내게 하나님에 대해 말했고 그 하나님께서 내게 땅콩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지금도 땅콩 뿐 아니라 무궁무진한 섭리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http://blog.naver.com/naha77/40012188036


내게 족한 은혜, 땅콩 박사 G W 카버


위대한 흑인 과학자인 G.워싱턴 카버는 종종 어린 시절 과학에 흥미를 느끼게 된 동기에 관한 질문을 받곤 했는데, 한 번은 많은 학생들 앞에서 그 대답을 하게 되었다.

"어린시절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하나님!!, 우주를 왜 만드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얘야 너의 좁은 머리로는 그것을 깨닫기에 너무 어렵구나. 네가 감당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물어라.'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내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인간은 왜 만드셨습니까?' 이번에도 신은 친절하게 대답해 주시더군요.

  ‘작은 아이야 너는 여전히 너의 능력을 벗어나는 질문을 하는구나. 네 질문의 수준을 낮추고 정말로 네가 알고 싶은 것이 무언지 분명히 하여라.' 나는 우울한 기분으로 손바닥을 펴 보았습니다.

  손바닥에 놓여진 먹다 남은 땅콩 한 알을 보고 투정하듯 물었습니다.

  ‘하나님!! 땅콩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 질문에 창조주는 이렇게 대답 하셨습니다. ‘그래, 그것은 매우 좋은 질문이구나. 한 가지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그것은 오묘하고 무한하다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내게 땅콩을 분해하고 다시 결합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알려 주셨죠. 수년의 연구 끝에 나는 땅콩이 땅콩 쨈과 같은 요리에 쓰이는 것 외에도 플라스틱을 만들거나 페인트를 만들 때에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이제껏 알아낸 땅콩의 사용법은 무려 350가지 이상입니다."

  재미있게 말을 풀어내는 카버박사의 말솜씨에 학생들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마지막 인사를 건네면서 카버박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 모두 현재 처한 곳에서,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가지고 출발하여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십시오. 비록 가진 것이 도토리 크기만 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큰 참나무로 변해갈 수 있는 지는 모두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은 어떤 땅콩입니까?


 고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

 마 25:21,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http://blog.naver.com/iksou0416/110001488524




아름다운 사람(4)


조지 카버는 10여 년간을 이곳저곳으로 떠돌았습니다. 먹고 자고 입는, 가장 기본적인 모든 일을 그 스스로가 해결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였습니다. 요리, 세탁, 정원사, 오물 청소부, 목공, 토공 등 안 해본 일이 없으며, 추수기 동안은 이 농장 저 농장을 떠돌며 품팔이를 하였습니다. 청년기 시절의 그의 고단한 인생을 여기다 다 적을 수는 없습니다. 노예출신의 고아였으니 굳이 언급을 하지 않아도 상상이 되겠지요.


그 고생을 하면서, 우리의 학제로 치자면 지금의 고등학교 정도의 과정을 마쳤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25세 정도가 되어 있었으며, 그럼에도 그의 성적은 단연 우수했습니다. 그동안 키가 훌쩍 커서 거의 6척으로 자라고, 몸무게는 못 먹어 빼빼마르고 허리가 굽었지만, 항상 밝고 쾌활한 성격으로 주위를 기쁘게 했지요.


고교 졸업과 동시에 조지 카버는 캔자스 주에 있는 하일랜드 대학에 입학통지를 받고는 난생처음으로 기쁨과 희망에 들떴습니다. 그러나 입학 통지를 받고 입학식을 기다리던 그 몇달 동안이 그에게 천국이었다면, 입학 전날 대학으로 부터 취소 통고를 밥은 순간부터는 지옥이었습니다. 이유는 단한가지, 그가 흑인이라는 사실이었지요.


심한 좌절을 겪고 그는 다시 살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마침 미국정부에서 이민자를 위하여 땅을 불하 하고 있었습니다. 조지 카버도 거기에 참여하여 땅을 불하 받고 개간 작업을 하게 됩니다. 나무 그늘도 없는 황무지에서 혹독한 추위, 찌는듯한 더위와 거의 2년간을 싸웠습니다. 그 당시의 그의 일기장의 내용입니다.


"주저앉지도 말고, 멀건이 서있지도 말자. 적어도 내게는 한 가지 재간이 있으니, 그 재간을 갈고 닦아 나가자"

그가 생각했던 자기의 재간이란, 땅과 식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그의 직업 중에서 그가 사랑했던 직업은 농장 생활에서의 농부와 정원사였으니까요.


 아름다운 사람(5)


2년여에 걸친 삭막한 황무지를 개간을 끝내고, 조지 카버는 식물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농장을 저당 잡혀 약간의 돈을 마련한 후 다시 길을 떠나지요. 발길 가는대로 가다가 다시 정착한 곳이 아이오와 주의 한 도시입니다. 거기서 그는 호텔 요리사로 취업을 하여 일하던 중에 또 한사람의 은인을 만나게 됩니다. 백인 의사인 밀홀랜드 부부는 그의 숨겨진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끊임없는 격려를 통하여 자칫 흔들릴뻔한 자신감을 일깨워 주지요.


그의 격려를 받으며 조지 카버는 다시금 대학의 문을 두드립니다. 이전에 흑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한 적이 있는 그가, 심슨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요. 그는 아이오와 주에 있는 심슨 대학 최초의 흑인 학생이 됩니다. 등록금 12달러를 내고나니 그의 수중에는 10센트 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학장의 배려로 대학구내의 빈 창고에 세탁소를 차려 일과 공부를 병행하지만 생활은 여전히 곤궁했습니다. 후에 조지 카버는 당시의 자기 처지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꽤 오랫동안 나는 기도와 쇠기름과 옥수수가루 만으로 살았는데 나중에는 그 쇠기름과 옥수수가루마저 떨어지고 기도만으로 살아야 했었다."


조지 카버는 이렇게 해서 늦은 나이에 대학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심슨 대학의 첫 흑인 학생으로서, 학생과 교수들의 빨래를 해주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가 교육과정에서 받은 극심한 흑백 차별은 더 이상 나열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는 그 심슨대학 시절에 미술에 소질을 인정받아 화가로써의 진로를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극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동족 해방노예들을 위해 명문인 아이오와 주립 농과대학에 진학을 결심하게 됩니다. 조지 카버는 그 명문대를 학급 수석으로 졸업하게 되어, 그의 이력에는 아이오와 주립농과대학의 최초 흑인 졸업생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됩니다. 그해가 1894년도이며 이미 그는 삼십대 중반이 되어 있었지요.


아름다운 사람(6)


조지 워싱턴 카버는 대학 졸업 후에도 학업을 계속하여 드디어 식물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어 성공한 인텔리 흑인의 전형이 됩니다. 그러나 해방 노예출신 고아로서, 가난과 차별 속에서 고생을 하며 이루어낸 그는 그의 학위를 이용하여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후반기 인생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는 그의 학업 중에 이룬 성과로 이미 여러 곳에서 제의를 받았지만, 한 초라한 흑인학교를 선택합니다.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동족 흑인들의 교육을 위해서 평생을 바치게 되지요. 그가 선택한 터스키기 흑인학교는 말이 학교이지 허름한 창고 같은 시설과 분위기였습니다. 그는 직접 학생들과 벽돌을 지고 나르며 학교 건물을 세우고,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서 실험실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학교 부설 농장을 세워 직접 경작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은 그가 하려하는 일의 준비 과정이었지요.


그는 자기 동족인 흑인들의 누추하고 처참한 실상을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 자신이 걸어 온 길이기도 했지요. 준비가 끝나자 학교가 멀어서 못 오는 흑인들을 위해 농민학원을 각지에 설립했습니다. 단순히 학문을 위한 교육시설이 아니었습니다. 농사짓는 법부터, 요리하는 법등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지요.


특히 농사부문은 해방노예들의 생명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원래 목화농업 때문에 아프리카로 부터 유입되어진 노예들이었기에 그들 노예출신 흑인들은 목화농사밖엔 몰랐지요. 그러나 목화는 연작이 힘든 농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백인 농장주들은 거대한 농장을 소유하여 땅을 돌려가며 경작할 수 있었지만 흑인들에게 불하된 조그마한 땅덩어리는 연작을 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지요.



조지 카버는 그들의 먹거리 해결을 위해, 교육을 위한 간이 시설을 마차에 실고 마을 마을을 찾아다닙니다. 후에 후원자들이 생겨서 트럭으로 바뀌었지만 이것이 그 유명한 이동학교의 시발이었지요. 이 운동은 당시에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치었습니다.


그는 부락마다 찾아다니며 교육을 하고 생활개선을 위한 연설을 하였으며, 작물농사의 종류를 가르치고, 토양에 맞는 작물을 추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추천 작물이 처음에는 콩과 고구마였고, 후에 결정한 것이 땅콩이었습니다.


노새가 끌던 수레로 부터 시작한 그의 이동학교는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고 비슷한 나라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의 이동학교 운동에 시찰단을 보낸 나라는 중국, 일본, 인도, 아프리카의 각국이었지요.


아름다운 사람(終)


조지 카버의 별명은 땅콩 박사입니다. 땅콩은 땅으로부터 아주 적은 양의 영양분을 섭취할 뿐 아니라 공기 속에서 질소를 흡수하여 땅에 저장하는 식물이며, 가뭄에도 잘 견디는 작물입니다. 황폐해진 목화 농사를 대체하기 위한 작물로 땅콩을 추천한 그는 돌아다니며 땅콩재배를 권유하였습니다.


그의 권유로 점차 땅콩을 재배하는 농가가 늘기 시작하자, 그는 땅콩의 수요를 늘리고자 모든 노력을 경주합니다. 그가 땅콩을 주재료로 해서 만든 요리법 중에 중요한 것만 골라도, 땅콩 스프, 인조 닭고기, 샐러드, 아이스크림, 과자 등등이며, 땅콩을 활용한 그의 발명품은 마가린, 비누, 기름, 버터, 인조 밀가루, 잉크, 물감, 구두약, 의약 연고 등등이며, 또한 놀랍게도 땅콩을 이용하여, 전기 절연판, 접착제, 인조 대리석등을 발명하였습니다.


그는 식물을 이용하여 다른 물질을 만드는 응용화학의 선구자가 되었지요. 그가 땅콩 외에 다른 식물로 발명한 품목들은 지금 보아도 놀랍습니다. 그는 땅콩을 가지고 105가지의 음식물을 만들어냈으며, 200여 가지의 실용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또 다른 추천 작물인 고구마를 가지고 118가지의 실용품을 만들어 냈지요. 그가 여러 가지의 식물의 잎, 줄기, 뿌리를 가지고 물감을 만드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 536가지입니다. 그는 실용화되어 현재에도 우리가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식품건조법의 발명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외에도 상당한 그의 발명들에 대한 특허에 대한 권리를 하나도 주장하지 않고 모두 처음부터 공개했습니다.


교수직에서 나오는 월급을 모두 가난한 흑인 학생들에게 지급했고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검약한 생활을 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유명해져가도 그는 한결같았지요. 그는 인도의 성자 간디로부터 추앙을 받았으며, 당시의 미국 대통령들과도 교분이 있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그를 친구로 둔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미국의 대 사업가 헨리 포드는 그에게 감동하여 평생 후원자가 되었지요. 그는 미국 백인들도 몇 안되는 영국의 학사원 회원이 되어 있었지요.


평생을 흑인들의 교육과 사회 사업에 바쳤던 그가 1943년에 죽었을 때에 노예였으며 고아였던 그는 더 이상 불우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조문이 들어왔으며, 사망 소식을 들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내가 가진 가장 큰 특권중의 하나는 카버 박사와 교분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지요. 현재 미국전역을 통하여 18개 학교가 그의 이름을 따서 카버학교라고 명명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어록(語錄)으로 기록되어 있는 그의 일화를 소개함으로 해서 조지 워싱턴 카버의 이야기를 맺을까 합니다.


거의 일생을 연구실과 들판에서 살아온 그는 변변한 양복이 없었습니다. 미국 하원에서 연설하게 되어 맞춘 양복이 근 30년만에 맞춘 양복이라 합니다. 그는 유명했을 당시에도 사교모임이나 파티에는 일절 참석을 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그의 후원회에서 그를 주빈으로 한 파티가 열려 할 수 없이 참석을 했더랍니다.


평소의 누추한 차림으로 파티가 열리는 대저택에 도착한 그를, 그 집의 안주인이 알아보지 못하고 새로온 늙은 정원사로 착각을 하여 농기구를 쌓아둔 창고로 안내를 했답니다. 후에 이 사실이 알려져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달려 나왔을 때, 그가 미소를 띠며 한말이 그의 유명한 어록이 되어 있습니다.


"부인 제가 장미를 캐서 햇볕이 있는 곳에 옮겨 심었지요. 장미는 햇볕을 원하니까요."


그는 파티장보다 들판과 정원에 있는게 더 행복했겠지요. 저는 이 일화를 읽으며 그는 참으로 자기의 삶을 사랑했구나..하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이제 "아름다운 사람"에 대하여 마지막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깨어 있고, 비어있으며, 사람에 대한 따스한 시각을 갖추고 있는 사람에게, 마지막 항목을 덧붙이라고 누군가 요구한다면, 저는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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