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훈
칭의
1. 칼빈의 칭의론의 의의
16세기 유럽 종교개혁의 핵심적인 신학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칭의론의 확고한 정립이다. 개혁자 칼빈에게 칭의만큼 중요한 교리가 없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칭의 교리를 종교의 성패가 달려 있는 중심 요체이며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라 하였다. 또한 칼빈은 ”사톨레토에 대한 답변“에서 칭의 교리 “우리 논쟁에서 가장 주요하고 민감한 주제”라고 말하였다.
쯔빙글리는 인간의 칭의가 각 개인의 도덕적인 중생에 따라서 좌우된다는 조건적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부처도 루터의 신학에다가 성화의 일부를 넣음으로써 변형된 강조점을 첨가하였다. 그래서 칭의가 인문주의자들의 견해와 거의 차이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은 1559년판 기독교강요에서 칭의와 성화와의 관계를 분명하게 구별하여 설명하였다. 그래서 칼빈은 인간의 공로가 인정받는다는 인문주의 사상을 배격하고, 바른 도덕적인 의무감을 가지고서 성화를 이루어 가는 성도의 삶을 설명하였다. 칼빈의 신학이 16세기 종교개혁에 미친 가장 중요한 공헌 중에 한 부분이 칭의론에 있다. 칼빈의 칭의론은 종교 개혁자들 중에서 제 1세대에 해당하는 루터의 칭의론이 포함하지 못한 성화까지도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다. 또한 쯔빙글리의 조건적인 칭의론이 인문주의로 치우친 부분을 성경적으로 바르게 교정하고 있다.
루터교회 신학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점은 칭의에 대한 신앙의 체험을 강조하였다. 개혁신학의 결정적인 요점은 믿음 자체의 근원이다. 이렇게 칼빈의 칭의론은 루터의 칭의론과 쯔빙글리의 칭의론을 교정하고 발전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도 루터만큼 칭의에 대하여 매우 강조하였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3권 11장 3절에서 수사학적으로 “너는 본다(You see)”를 사용하면서 칭의와 죄사함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너는 본다(You see), 죄의 용서를 말한 후에, 그에 대한 해석으로 의롭다고 칭함받는다는 말이 온다는 것을! 너는 본다(You see), 이것은 분명히 죄의 사면으로 이해된다는 것을! 너는 본다(You see), 이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너는 본다(You see), 이것은 그리스도의 순전한 은혜라는 것을! 그리고 너는 본다(You see), 이것이 믿음에 의해서 받아지는 것이라는 것을! 너는 본다(You see), 마지막으로 만족이 소개된다는 것을, 거기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죄로부터 의롭다 칭함받는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3권 17장 8절에서 칭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우리는 칭의(稱義)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즉, 그리스도와 교제를 하게 된 죄인이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되어 죄의 용서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의 의같이 입고 하늘 심판대 앞에 자신 있게 서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칭의의 개념은 논자가 볼 때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무죄선언이다. 둘째, 칭의는 의의 주입이 아니다. 셋째,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ustitiae imputationem; imputation of righteousness)와 덧입음이다. 넷째, 칭의는 죄사함(peccatorum remissione; forgiveness of sins)과 하나님과의 화목(reconciliandi; reconciliation)이며, 이 칭의는 정죄, 죄책, 고소와 반대이다. 이제 이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논술하도록 하겠다.
2. 법정적 칭의
칼빈은 칭의 교리에서 특별히 칭의의 법정적인 성격을 강조하였다. 칭의(justification)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의 무죄 확정이며, 죄용서를 의미한다. 칭의는 도덕적인 개념이 아니라, 법적인 용어(a legal term)에서 온 것이다. “칭의는 고소(accusation)와 대조된다.” 칭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죄책이 있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 죄책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또한 “칭의는 죄책(guilt)과 반대된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3권 12장 제목에서 값없는 칭의를 강조하면서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칭의를 굳게 확신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를 향하여 우리의 마음을 들어 올려야(lift up our minds) 한다.” 칼빈은 로마서 8장 33절 주석에서도 “바울에 따르면, 칭의는 하나님의 선고에 의하여 사면되며,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칼빈은 마태복음 12장 37절 주석에서 “의인은 의롭게 계산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무죄방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칼빈은 창세기 15장 6절 주석에서 아브람의 칭의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그의 아버지로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성애적인 사랑스런 은총을 의지하면서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장점들을 신뢰하지 않고, 오직 그의 단순한 선하심만을 신뢰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
칼빈에게 칭의와 정죄는 대조된다. 정죄가 사람을 사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듯이, 칭의는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 정죄와 칭의는 둘 다 공식적인 판결, 선언을 가리키는 것이다. 칼빈의 신학을 따르는 바빙크와 게할더스 보스와 벌코프도 모두 칭의를 법정적으로 본다. 또한 그들은 이 칭의는 그리스도와 연합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칭의는 도덕적인 개념이 아니라, 법정적인 용어이다. 이것은 정죄와 반대되는 개념이며, 죄를 용서받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선행이 칭의의 근거가 될 수 없다.
3. 죄사함과 하나님과의 화목
(1) 죄사함
칼빈은 칭의를 죄사함(peccatorum remissione; forgiveness of sins)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칼빈은 의와 복은 같은 의미이며, 죄사함(remissionem peccatorum; forgiveness of sins)과 의(iustitia, justification)는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인간에게 최고의 복은 바로 이 죄사함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그 비참한 상태에서 해방되지 않는다면, 언제나 그 불행한 상태로 있게 된다. 성경에서 격찬하는 모든 복도 인간이 죄를 용서받고 복을 받기까지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인간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음으로써 복을 받은 후에는 그 복들도 자리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죄사함(peccatorum remissione, forgiveness of sins), 이것은 가장 최고이며, 가장 중요한 복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복이다”.
“바울은 칭의(iustificationem; justification)를 용납(acceptionis; acceptance)이라는 용어로 지적한다.” 또한 칼빈은 말한다. “바울은 예언자로 하여금 죄의 용서가 의의 일부분이라든가 또는 사람을 의롭다 하는 일의 부수물에 불과하다든가 하는 주장을 증거하게 한 것은 아니다. 바울은 값없는 사면에 의의 전체를 포함한다(totam iustitiam in gratuita remissione includit; he includes the whole of righteousness in free remission). 그는 하나님께서 죄를 덮어주시며, 그 불법을 용서하시며, 그의 죄과를 그에게 돌리시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선언한다. 바울은 그러한 사람은 이런 방식으로 즉 자기의 고유의 본질에서가 아니라, 오직 전가에 의해서(non re ipsa, sed imputatione, not in reality, but by imputation)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복이 있다고 판단한다.”
칼빈은 로마서 4장 6절 주석에서 칭의를 죄사함(remission of sins)이라고 말한다. 이 사면은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사면이라는 단어 자체가 암시하는 대로, 이 의는 행위가 없이 전가되기 때문이다. 의의 선물은 값없는 것이다. 또한 계속해서 칼빈은 다윗의 예는 칭의의 좋은 예라고 말한다. 다윗은 우리의 죄가 완전히 하나님 앞에서 가리워져 있다는 것, 즉 하나님의 면전에서 옮기워져 있다는 것을 선언한다. 뿐만 아니라, 그 죄들이 더 이상 추궁되거나 형벌 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공로로 만족하는 행위(making satisfaction)로 죄사함을 얻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난 의는 행위와 관계없이 값없이 주어진다. 믿음으로 난 의는 죄사함에 의존한다.
칼빈은 로마서 5장 11절에서 우리의 구원이 관련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바라보아야 하며, 우리는 죄에 대한 속죄 외에 아무것도 신뢰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들 중의 최고이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 안에, 모든 축복들의 총합과 실체를 소유하신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것이 되신다".
칼빈은 시편 103편 3절에서 하나님과 다시 화목케 되는 것은 그밖에 모든 복들이 흘러 나오는 샘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즐기는 모든 복들 가운데 첫 번째의 것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를 용서하사 우리의 죄악들을 씻으시고 우리를 그의 은총 가운데로 받아들이는 데에 있다. 실로 죄사함의 은총이 첫 번째의 복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그 은총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교제가 회복되는 복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칼빈은 시편 17편 15절에서 “우리는 다윗이 최상의 행복을 즐기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에게 화목되시는 최상의 맛과 경험을 가지는 것 이외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주의해서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2) 용납하심
칼빈에게 또한 칭의(iustificationem; justification)는 우리를 의인으로 용납하심(acceptionis; acceptance)이다. 칼빈은 그의 자비(his mercy)를 베푸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기꺼이(readily) 용서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기꺼이(readily) 용서하신다는 선례를 보이셔서, 경건한 사람들(the godly)은 생활을 고칠 용기를 얻게 하시고 완고하게 핍박을 아는 교만한 자들은 더욱 엄한 정죄를 받게 만드신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말씀은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죄사함의 조건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칼빈은 하나님은 고의적인 죄도 용서하신다고 말한다. 칼빈은 사무엘하 7장 12-17절 주석에서, 하나님은 실수나, 부지중에 범한 잘못뿐만 아니라 고의적인 범죄들에 대해서도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고 말한다. 율법하에 있을 때에 부지중에 지은 죄에 대한 희생제물과 속죄제물이 있었으며, 또한 보다 더 심각한 범죄 행위들을 위한 속죄제물들이 있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죄악에 대해서 담대함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잘못으로 아주 심각하게 걸려 넘어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3) 하나님과의 화목
칼빈은 칭의(iustificari; justif ication)는 하나님과 화목(reconciliandi; reconciliation)과 같은 의미라고 말한다. 하나님 자신이 모든 복의 근원이시다. 그러므로 이 칭의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면, 최상의 행복이며, 모든 복들이 거기에서 흘러나오게 된다. 죄가 용서되어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된다. “믿음의 의는 하나님과의 화목이며, 이것은 바로 죄사함에 있다”.
4.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와 덧입음
(1) 의의 전가
칼빈은 우리가 칭의를 얻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ustitiae imputationem; imputation of righteousness)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의가 없기 때문에 다른 데서 의를 구해야 한다.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법률상으로 존재하는 것과 같은 관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순종과 죽으심으로 획득하신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심으로 우리가 칭의를 얻는 것이다. 즉, 칼빈에게 칭의는 오직 전가에 의해서(non re ipsa, sed imputatione, not in reality, but by imputation)만 획득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이 하나님 앞에 선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심판대 앞에 우리 대신 나타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로 감싸여 있어 우리의 것으로 생각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 아브라함이나 다윗도 약속된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잡고 본질적이 아닌 전가에 의하여 칭의되었다. 이 의를 얻는 방법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는 것 뿐이다. “칭의는 의의 전가(iustitiae imputationem; imputation of righteousness)이며, 죄사함(peccatorum remissione; forgiveness of sins)에 있다.”
칼빈은 로마서 8장 4절 주석에서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됨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되어질 때, 그 율법은 충족된다. 그래서 우리는 의롭다고 여겨진다.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은 우리의 육체에 나타나고, 이러한 이유로 그것의 엄격한 요구는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할 힘을 가지지 못한다”. 칼빈은 갈라디아서 3장 6절 주석에서도 말한다. 사람들이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 의는 전가에 의한 얻은 것이다. 우리가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해지는 것은 믿음이 우리에게 어떤 습관이나 특성(a habit or quality)을 불어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시기 때문이다.
칼빈은 요한복음 16장 10절에서 칭의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에게 전달되는 의라고 말한다. 또한 칼빈은 디도서 3장 7절에서 “의롭다 하심은 의의 전가(the imputation of righteousness)와 죄의 용서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2)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음
칼빈은 칭의를 옷에 비유하여 그리스도의 무죄하심과 의를 덧입는다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칭의는 우리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수난을 통해서 그 자신의 의로움을 옷 입혀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외부의 의로 의롭다 인정받는 것이다.
칼빈은 칭의의 놀라운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외부의 의로 의롭다 인정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아버지의 값없는 선하심(his free goodness)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를 우리에게 입히신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이 하나님 앞에 선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심판대 앞에 우리 대신 나타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로 감싸여 있어 우리의 것으로 생각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
칼빈은 로마서 10장 3절 주석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를 얻는 첫 단계가 우리 자신의 의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의가 없으므로 다른 데서 의를 구해야 한다. 이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칼빈은 고린도후서 5장 21절 주석에서도 같은 말을 한다. 하나님의 의는 특성, 습관이 아니라, 우리에게 인정되는 무엇, 우리가 그에게 용납될 수 있게 만드는 의이다. 의는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의 심판을 보상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그 의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우리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칼빈은 신명기 5장 21절 설교에서도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음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로 받아주셨기 때문에 마치 우리의 몸속에는 건전함과 온전함이 충만해서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고 전 율법을 이행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겨진다. 하나님께서 무한히 많은 죄 중에 있는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수난을 통해서 그 자신의 의로움을 옷 입혀 주셨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사주신 은혜를 믿음으로 유지하고 있으며, 하나님에게 ‘주님! 우리의 구원은 주님께서 거저주시는 순수한 선하심에 있다’라고 말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니,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God's mercy)와 그리스도의 완전성(Christ's perfection)만 바라보아야 한다.
(3) 값없이 받는 칭의
칼빈은 칭의는 값없이 받는 은혜라고 주장한다. 어거스틴도 같은 말을 하였다. 칭의는 은혜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심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3권 12장 제목에서 값없는 칭의를 강조하면서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칭의를 굳게 확신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를 향하여 우리의 마음을 들어 올려야(lift up our minds) 한다.” 또한 “자격 없는 자에게 의의 선물을 거저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이다. 우리 자신의 불의를 알므로 고민하며, 무가치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의 일부이므로, 우리는 그의 거저 주시는 은혜에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말한다. 칼빈은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값없이 의를 주신다는 약속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표징으로 이 믿음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칼빈은 하나님께서 의를 값없이 주셨기 때문에, “의의 한 부분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취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며, 하나님의 의의 영광을 그만큼 줄이는 것이다. 의에 대한 찬양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칼빈은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람의 칭의는 하나님의 선하심만 의지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그의 아버지로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성애적인 사랑스런 은총을 의지하면서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장점들을 신뢰하지 않고, 오직 그의 단순한 선하심만을 신뢰했다. 칼빈은 로마서 4장 3절 주석에서 아브라함은 약속된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잡고 그에게 전달된 의를 받았다고 말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를 소유한다. 의가 전가된 자들은 의롭다 함을 받는다. 이 두 표현은 동의어이다. 이것은 믿음의 전가된 의(the imputed righteousness of faith)이다. 의의 의미를 정의하는 데는 약속과 믿음의 이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법률상으로 존재하는 것과 같은 관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를 얻게 되는 것은 복음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칼빈은 하박국 2장 4절 주석에서 생명은 믿음으로 받는 값없는 칭의에 의해서 얻는다고 말한다. 칼빈은 로마서 9장 30절 주석에서 이 하나님의 값없는 화목에 기초한 의를 이방인들에게 값없이 주셨다고 말한다. 칼빈은 갈라디아서 3장 6절 주석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칭의를 값없이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한다.
5. 의의 주입이 아닌 칭의
오시안더는 칭의를 인간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주입하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칭의를 법정적인 칭의이며, 이 칭의는 사람에게 어떤 습관이나 특성(a habit or quality)을 불어넣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초대교회의 아타나시우스나 갑바도기아와 교부들은 신화(deificatio, deification)라는 단어를 성화(sanctification)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후 반펠라기우스주의적인 로마 카톨릭 교회와 19세기 이후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공로 사상이 대두되면서 이 개념이 극단적으로 사용되어서 사람이 신이 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게 되었다. 칼빈은 이러한 사상에 반대하면서 칭의는 신성을 주입받아서 신이 되는 것(신화)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칭의의 4원인
로마 카톨릭은 트렌트 공의회를 통하여 칭의의 원인을 5가지로 정하였다. 칼빈은 이에 반대하며, 칭의의 원인을 4가지로 말한다. 이것을 통하여 칼빈은 법정적 칭의를 강하게 주장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대속을 찬양한다.
* 트렌트 공의회(1545–1563)는 1545년 12월 13일에 시작했고, 칭의교령은 1546년 6월 22일에 시작해서, 1547년에 마쳤다. 칭의교령(1547),. 트렌트 회의는 칭의의 도구적 원인을 세례로 규정했다. 트렌트의 의화 인과율, 목적인(the final cause), 효과인(Efficient Cause), 공로적 원인(Meritorious Cause), 도구인(Instrumental Cause), 형상인(Formal Cause)이다. These four Aristotelian causes are the (a) material cause(질료인), (b) efficient cause(효과인, 운동인, 작용인), (c) formal cause(형상인), and (d) final cause(목적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가 전개한 4중 인과론(fourfold causality)의 공리적 측면은 신학을 구성함에 있어 철학적 기저를 펼치는데 영향을 끼쳤다. 4중 인과론이란 원인들을 작용인(作用因, efficient cause), 형상인(形相因, formal cause), 질료인(質料因, material cause), 목적인(目的因, final cause) 등으로 나누어 고찰하는 원인론 체계를 말한다. 신학에서는 여기에 두 가지 정도의 중요한 원인들을 더해 총 6중 원인 가운데서 모든 신학적 주제를 설명하곤 했다(물론 이 외에도 다양한 원인들을 사용하지만 대체적으로 6중 원인 정도로 압축해 볼 수 있다). 4중 원인 외에 추가되는 원인은 도구적 원인(道具的, instrumental cause)과 공로적 원인(功勞的, meritorious cause)이다. The glory of God and eternal life, The mercy of God, The passion of Christ, The sacrament of baptism, The righteousness of God
칭의 원인 | 트렌트 | 칼빈 |
Final Cause: 목적인 | 신의 영광과 영생 | 하나님의 의 제시와 영광 |
Efficient Cause : 효과인(동력인) | 신의 자비 | 하나님의 자비 |
Meritorious Cause : 공로인 | 그리스도의 수난 | |
Instrumental Cause : 도구인 | 세례성사 | 말씀과 믿음 |
Formal Cause : 형상인 | 신의 의 | |
질료인(the material cause) | 예수 그리스도 |
칼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을 이용하여 칭의와 영생, 구원의 원인들을 설명한다. 칼빈에게 칭의와 영생, 구원은 모두 같은 개념이다. 칼빈에게, 하나님의 “의”와 “구원”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의 ‘구원”이란 말과 “의”라는 말은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가장 현저한 증거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실 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는 구원과 같은 의미이다. 즉 의는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어 그의 약속을 신실하게 수행하시는 의미이다. 의는 구출사건에서 찬란하게 나타난다.
칭의와 영생과 구원의 4 원인은 동력인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이며, 목적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며, 질료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시며, 형상인은 말씀과 믿음이다. 그런데, 칼빈은 기독교강요나, 성경주석들에서 이 4가지를 따로 따로 분석하여 말하지 않고, 한 문단 안에서 함께 다루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칼빈은 기독교강요 3장 14장 17절에서, “우리의 영생을 얻기(our obtaining eternal life) 위한 동력인(the efficient cause)은 하늘 아버지의 자비와 거저 주시는 사랑이다. 질료인(the matetial cause)은 그리스도이다. 형상인 또는 도구인(the formal or instrumental cause)은 믿음이다. 목적인(final cause)은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는 증거와 하나님의 인애에 대한 찬양이다.”이라고 4가지를 함께 논하였다.
또한 기독교강요 3장 14장 21절에서도 “구원을 위한 동력인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다. 질료인은 성자 하나님의 순종이다. 형상인은 성령의 조명인 믿음이다. 목적인은 하나님의 크신 관대하심의 영광이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 묵상하게 하셨다. 죽음은 사람의 행위에서 오며, 생명은 하나님의 자비에서 온다. 하나님의 값없는 선택이 근원이며 제일원인이다. 하나님의 너그러움으로 값없는 용서와 성령의 선물들을 받는다. 우리는 이것을 감사해야 하며, 이 선물들이 선택의 가치를 손상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칼빈은 에베소서 1장 5절 주석에서 “동력인(The efficient cause)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의 즐거움(the good pleasure of the will of God)이다. 이것은 우리의 공로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외부적인 원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우리의 선택의 원인이다. 질료인(the material cause)은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님과 화해되었다. 또한 목적인(the final cause)은 그의 은혜의 영광의 찬양(the praise of the glory of his grace)이다. 이 가장 높고 마지막 목적(The highest and last end)은 그러한 넘치는 은혜의 영광스런 찬양(the glorious praise of such abundant grace)이다.”
또한 로마서 3장 22절 주석에서는 “우리의 칭의의 동력인은 하나님의 긍휼이요, 칭의의 질료인은 그리스도이며, 도구는 말씀과 믿음이다”(the efficient cause is the mercy of God, the meritorious is Christ, the instrumental is the word in connection with faith)라고 함께 말한다.
또한 칼빈은 로마서 3장 24절 주석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동력인이며, 그리스도가 질료인이고, 말씀을 통해서 가지게 된 믿음이 형상인 또는 도구인이다. 하나님의 의와 선하심에서 기인한 영광이 목적인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고 함께 말한다.
칭의의 동력인(효과인, The efficient cause);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
칼빈은 칭의와 구원과 영생의 동력인(효과인, The efficient cause)을 하나님의 긍휼(the efficient cause is the mercy of God)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의 즐거움(the good pleasure of the will of God)이라고 주장한다. 성부는 우리의 구원의 시작이요, 효과적인 원인이다(the Father is the beginning, and efficient cause of our salvation). 구원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기초한다. 외부적인 원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우리의 선택의 원인이다. 이것은 우리의 공로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이 영원하다는 사실로부터 그의 백성들이 결코 멸망할 수 없다는 결과가 나온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의 자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있다”(시 103:17).
루터의 질문은 항상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칼빈에게는 구원의 기원 문제가 훨씬 더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선하심만이 구원의 기초와 확립(the founding and establishing)이며, 복의 시초(beginning)이며, 복의 완성(the fullfillment)이다.” 칼빈에 의하면,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the mercy of God)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다. 이것이 종교의 요점(main hinge)이며, 경건의 기초(foundation)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외에 여러 성경 주석과 설교에서 칭의와 구원과 영생의 근본은 모두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왔다고 말하였다. 아래에서는 이것들을 정리하였다. 먼저 신약주석들부터 살펴보겠다.
칼빈은 로마서 주석들에서도 칭의의 동력인이 하나님의 자비임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칼빈은 로마서 1장 7절 주석에서 우리의 구원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값없으며, 아버지의 사랑의 원천(the fountain of God’s free and paternal love towards us)에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원인은 오직 그의 자비뿐(his own goodness alone)이다. “이것에 우리의 부르심이 근거하며, 이것에 의하여 그의 때에 그는 전에 그가 값없이 선택하셨던 자들에게 그의 입양을 인치신다.”
칼빈은 로마서 4장 13절 주석에서 칼빈은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에만 기초한다고 말한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은 회복될 것이다.
칼빈은 로마서 5장 21절 주석에서 우리가 얻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왔다고 말한다.
칼빈은 로마서 9장 15절 주석에서 “구원의 유일한 참된 원인은 값없는 하나님의 긍휼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칼빈은 로마서 9장 30절 주석에서 “구원의 원인은 오직 하나님의 순수한 은혜뿐이다”라고 말한다.
칼빈은 로마서 10장 12절 주석에서 “오직 확신만이 요구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자비가 임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그 자비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되는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라고 말한다
칼빈은 로마서 11장 32절 주석에서도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만으로 된다”고 말한다.
칼빈은 로마서 11장 35절 주석에서 “하나님은 아무 자랑할 것 없는 자에게 그의 거저 베푸시는 자비로 말미암아 구원을 주신다.”
칼빈은 에베소서 주석들과 설교들에서도 칭의의 동력인이 하나님의 자비임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칼빈은 에베소서 1장 13-14절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값없는 선하심만이 구원의 유일한 근거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택하시고 다른 사람은 버리시는 이유도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 이외에 다른 것이 없다. 그의 순전하신 뜻과 목적과 변할 수 없는 명령에 만족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한 일이다. 그 이상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경솔함으로 깊은 심연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의 엄위와 그의 비밀스러운 계획을 겸손과 존경으로 받들지 않는 자들은 모두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구원의 원인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칼빈은 에베소서 2장 3-6절 설교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마귀가 우리를 필연적으로 완전히 장악하고 지배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은혜의 무한하신 선하심에 대해 크게 기뻐해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만 구원받는다.”
칼빈은 에베소서 2장 4절 주석에서 “우리의 전체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 탓이다.” 모든 것은 값없는 자비(undeserved goodness)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단일한 고려에 의하여 움직이신다.
칼빈은 에베소서 2장 7절 주석에서 “이방인의 부르심은 놀라운 하나님의 자비의 역사이다”라고 말한다.
칼빈은 에베소서 2장 8-10절 설교에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를 향한 사랑과 은혜로운 섭리라고 보았다. 이렇게 칼빈에게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진행되고 완성된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으며, 구원을 위해 아무런 공헌을 할 수 없다. 우리의 구원에 속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우리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으며 우리 자신을 변호할 아무런 선행이나 공덕을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계속해서 칼빈은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영광을 볼 수 있게 하는 참된 거울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의 영광이 그의 선하심을 통하여 알려지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우리를 선택하셨다. 이것은 오직 그의 순전하신 자비심을 만족시키기 위함이다. 우리의 양자됨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신 목적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그의 선택에 달려 있으며 바로 그 선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이든, 우리가 지닌 선한 것들이 무엇이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부터 얻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칼빈은 에베소서 3장 17절 주석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구원의 기초와 뿌리이므로 , 우리는 확고함과 계속성을 가지고, 우리는 사랑의 훈련에서 계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칼빈은 시편 주석들에서도 칭의의 동력인이 하나님의 자비임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칼빈은 시편 85편 2-3절 주석에서, “성도들이 자기들의 죄 때문에 놀라고 당황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에 주시는 값없는 용서의 확실한 증거를 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넘어뜨릴 만한 모든 생각들을 제거한다. 그는 말에서 이 구원의 근거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값없는 은혜라고 말했다.”
칼빈은 시편 86편 12-17절 주석에서,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겨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축복이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은 그의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인자에서 나온 것임을 나타내려 하고 있다.”고 말한다.
칼빈은 시편 113편 5-6절 주석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접근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우리에게로 내려오사 우리가 그의 특별한 보호의 대상이 되게 하신다.”
칼빈은 시편 119편 58절 주석에서 단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로마교회에서처럼 인간이 제 몫을 발휘해야만 한다고 말하면, 이와 동시에 바로 용서의 축복이 제거된다.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가 영생으로 가는 문이다.
칼빈은 시편 130편 7-8절 주석에서, “모든 성도의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요, 또한 이 근원에서 구원이 나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을 만한 공로나 가치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직무는 구원하는 일이다. 구해주는 것은 그분의 직무이다. 특히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주는 것이 그렇다.
칼빈은 다른 성경 주석들에서도 칭의의 동력인이 하나님의 자비임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칼빈은 요한복음 3장 16절 주석에서, 우리의 구원의 원천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 외에 평안한 안식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고 또 우리를 생명으로 회복시켜주는 것이다. 우리 구원의 영광은 전적으로 그의 사랑에 있다. 하나님의 영원히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흘러나오는 우리를 포용하는 높은 사랑이 근원적인 이유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의 죽음으로 그 속죄의 값이 되도록 섭리하셨다.”
칼빈은 갈라디아서 3장 11-12절 설교에서 “택함 받은 자들은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구원 받는데 충분하다”고 말한다.
칼빈은 데살로니가후서 1장 11절 주석에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목적이 우리의 구원의 원인이다”이라고 말한다. 또한 계속해서 칼빈은 “우리의 구원의 시작뿐만 아니라, 구원의 전 부분들”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칼빈은 디모데후서 1장 8-9절 설교에서,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근거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자랑치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볼 것을 말한다. “우리 스스로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가 어리석고 완악하게 되지 않도록 이것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우선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 하나님 자신 외에는 다른 것은 고려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저주 이외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면서 아무 가치도 없는 우리를 위하여 순수한 은총과 무한하신 자비로 우리의 처참한 모습을 바라보시고 도와주시는 일에 흡족해 하고 계신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실 때는 우리가 무엇이며 우리가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결코 조사해 보시지 않으시고 뜻을 세우셨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연유를 하나님 자신에게서 찾으신다. 사도 바울은 뜻(purpose)이라는 이 낱말은 섭리를 나타낸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교만심 때문에 그들에게는 얼마간의 가치가 있다고 상상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찾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을 찾은 것은 뜻과 은혜(purpose and grace)라고 지적하였다. 이것은 그가 전에 말한 바와 같이 자유로운 뜻이다.”
칼빈은 히브리서 6장 10절 주석에서 “구원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자비(the gratuitous mercy of God)뿐이다”라고 말한다.
칼빈은 요한일서 1장 10절 주석에서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만 근거하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만 안식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칼빈은 신명기 4장 37절 주석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에만 달려 있다”고 말한다.
칼빈은 예레미야 2장 1-2절 주석에서 “구원은 하나님께서 먼저 주신 은혜로 되는 것이다”고 말한다.
조창훈
칭의의 목적인(the final cause); 하나님의 은혜의 찬양
칼빈은 칭의의 목적인(the final cause)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의 찬양(the praise of the glory of his grace)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 가장 높고 최종적인 목적(The highest and last end)이다. 여기서 영광이란 단어는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특별히 그의 자비가 찬양받고, 영광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므로 그의 넘치는 은혜의 영광스런 찬양(the glorious praise of such abundant grace)을 우리에게 원하신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러한 칭의의 목적인을 기독교강요와 성경주석들과 설교, 논문들에서 반복해서 강조하였다.
칼빈은 로마서 6장 2절 주석에서 “참으로, 우리가 이러한 목적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는데, 우리가 삶의 순결함 안에서 하나님을 그 후로 경배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피로 우리를 씻어 깨끗케 하시며, 그의 속죄에 의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화목케 하시는데, 우리를 그의 성령에 참여하는 자로 삼으시고, 성령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하여 거룩한 생활을 하게 하신다.”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로마서 9장 23절 주석에서,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 그 영광은 하나님의 긍휼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으뜸 되는 찬미는 자비를 베푸시는 행위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에 의하여 자기의 아들들이 된 것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기업에 대하여 성령으로 우리가 인침을 받은 것은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택 받은 자들을 자기의 이름을 그들 가운데서 영화롭게 할 목적으로 그의 긍휼을 행하신다. 유기된 자들은 멸하기로 예비된 그릇들이라지만, 택함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도록 예비하셨다.
칼빈은 에베소서 1장 14절 주석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워하신 목적이 바로 무한하신 하나님의 자비(the Divine mercy)를 찬양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무한한 것은 지나치게 강하게 표현될 수 없다.”
칼빈은 이사야 45장 4절 주석에서, “우리의 구원의 시작은 무상의 은혜에 의한 하나님의 선택이요, 구원의 목적은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순종이다”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신명기 4장 36-38절 주석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어떤 방법으로 영광을 받으시게 되겠는가?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도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지켜본 후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높이거나 우리 자신이 이웃보다 더 훌륭하다거나 더 고상하다거나 더 월등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칼빈은 마태복음 1장 1-5절 설교에서, 구원의 목적과 의무를 세 가지로 제시하면서 구원의 목적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한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한량없는 사랑을 깨달아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둘째, 우리의 죄를 증오하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게 여겨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셋째, 우리의 구원을 소중히 여기고 이 세상과 덧없는 생명에 속해 있는 모든 것을 버리며, 주님께서 비싼 대가를 치르심으로써 얻게 된 그 기업으로 인해 크게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영원한 사망에서 구속하여 주셨으며 하늘의 생명을 획득하여 주셨다는 말씀을 대할 때에 우리는 이 세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칼빈은 예레미야 2장 20절 주석에서, 하나님의 자비로 구속하신 목적은 구속자께 헌신하는 것이다. 이 목적 때문에 그들은 구속받은 것이라고 말한.
칼빈은 이사야 32장 16절 주석에서, 우리의 축복의 궁극적인 목표와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은 바로 우리가 그를 성결과 의로 섬기는 것이다(눅1:74-75)라고 말한다.
조창훈
칭의의 질료인(the material cause);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칼빈은 칭의의 질료인을 기독교강요와 성경주석들과 설교, 논문들에서 반복해서 강조하였다. 질료인(the material cause)은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이시며, 그리스도의 순종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중보적인 원인(the mediating cause)이라고도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님과 화해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 칭의와 생명을 중보자의 인격(in the person of the Mediator)을 통해서 주신다.
조창훈
칭의의 형상인 또는 도구인(the formal or instrumental cause); 말씀과 믿음
로마 카톨릭 교회는 칭의의 도구적인 수단을 두 가지로 보았다. 하나는 세례의 성례이며, 둘째는 고해성사라는 성례였다. 그러나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칭의의 도구는 믿음이라고 보았다. 믿음만이 그리스도와 그의 의로움을 인간에게 접목시켜 주며, 칭의의 은혜를 얻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칭의의 형상인을 기독교강요와 성경주석들과 설교, 논문들에서 반복해서 강조하였다.
칼빈은 칭의의 도구인(the instrumental cause)은 말씀과 믿음이라고 말한다.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은 믿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도구(the instrument by which we receive Christ)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의가 우리에게 전달된다. 칼빈은 믿음은 의롭다 할 능력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 만일 믿음이 스스로 의롭다 할 능력이 있으면 믿음은 항상 약하고 불완전(weak and imperfect)해서 칭의가 부분적으로만 되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릇과 같다. 금 담긴 질그릇을 보물이라 하듯이 믿음 자체는 가치가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모심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믿음은 의를 받기 위한 그릇일 뿐이다. 칼빈은 믿음, 그 자체가 공로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단지 믿음은 하나님의 자비(God's mercy)를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다. 칭의에서 믿음은 수동적이고, 무엇을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받는 것이다. 즉 칼빈에 의하면, 믿음은 공로는 없으나 도구이다.
칼빈은 로마서 4장 4-5절 주석에서 믿음은 우리에게 의를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믿음은 공로적인 덕(meritorious virtue)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며, 믿음이 의로 간주 되는 것은, 이 믿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잡기 때문이다.
칼빈은 로마서 9장 30절 주석에서, 하나님의 의를 얻는 수단은 믿음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갈라디아서 3장 6절 주석에서 믿음을 칭의의 도구적 원인이라고 말한다. ”믿음은 우리의 의의 한 원인(a cause of our justification)이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의 도구적인 원인일 뿐이다(it is merely an instrumental cause). 우리의 의는 우리를 거저 받아 주심 이외의 것이 아닌데, 여기에 우리의 구원이 기초 되어있다(our righteousness is nothing else than God’s free acceptance of us, on which our salvation is founded). 우리가 믿음에 사람의 칭의를 돌릴 때, 우리는 주요한 원인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람들이 참된 의에 도달하는 방법만을 지적할 뿐이다. 왜냐하면 의는 사람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자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단순한 선물이며, 믿음에 의해서만 즐겨진다: 심지어 하나의 보수로서 정당하게 믿음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것을 받기 때문이다.“
또한 칼빈은 갈라디아서 3장 21-25절 설교에서, 은혜 언약을 받아들이는 수단이며 유일한 요구 조건은 믿음뿐이며, 이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다고 말한다.
칼빈은 창세기 15장 6절 주석에서도 말한다. “진실로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에게 화목 시키는 것 외에 다른 이유 때문에 우리를 의롭게 하지 않는다. 믿음은 첫 번째 동인이 아니라 형식적인 원인이다. 믿음은 다른 곳에서 의를 빌리고 있다. 이 의는 우리 자신 안에서는 결여되어있다. 아브람은 하나님에게서 부름을 받은 후에 많은 햇수가 지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 하나님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시고, 오직 무서운 죄악의 덩어리만 있는 것을 보신다. 이들을 의롭다고 여기서는 것은 오직 전가에 의한 것 밖에 없다.
칼빈은 이렇게 믿음을 의를 얻는 형식적인 원인, 도구적인 원인일 뿐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믿음을 칭의의 동인이 아니라, 형식적인 원인일 뿐이라고 보았다. 칼빈은 믿음을 “수용하는 기관”(vis receptiva)으로 표현한다.
조창훈
믿음의 대상
칼빈은 믿음의 대상을 값없는 하나님의 자비와 복음이라고 말한다.
(1) 값없는 하나님의 자비
칼빈은 먼저, 믿음의 대상을 값없는 하나님의 자비라고 말한다. 믿음의 유일한 목표는 하나님의 자비(the mercy of God)이다. 칼빈에게 믿음의 대상은 오직 순수한 은혜뿐이다. 믿음의 대상은 살벌한 조건을 성취해야 주는 조건부의 약속이 아니다. 믿음의 대상은 값없는 은혜의 언약과 약속이다. 믿음의 대상은 행위를 요구하는 조건부의 약속(conditional promise)이 아니라 주께서 기꺼이 또 값없이(willingly and freely) 주시는 약속이다. “믿음은 원래 하나님께서 주신 너그러운 약속에 근거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 약속을 믿음의 기초로 본다.”
칼빈의 의하면, “믿음은 원래 약속으로 출발하며 약속에 근거하며 약속으로 끝나는 것이다(faith properly begins with the promise, rests in it, and ends in it).” 믿음은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구하는 것이므로, 이 생명은 계명이나 징벌에 대한 선언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비의 약속에서, 그리고 또한 값없이 주어진 약속에서만(in the promise of mercy, and only in a freely given promise) 찾을 수 있다. 믿음은 아버지의 자비의 약속들(the promises of his paternal kindness)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비의 약속이 믿음의 진정한 목표라는 것을 지적한다.” “사람은 값없이 주신 약속(the freely given promise)을 붙잡기까지는 확고한 믿음 위에 설 수 없다.” 믿음은 값없이 주신 약속을 근거로 삼아야 한다. 믿음의 합당한 기초(foundation)는 약속이다. 칼빈에게 믿음은 행위의 도움 없이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만 근거한다. 오직 순수한 은혜가 믿음보다 앞선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성경주석에서도 믿음의 대상을 하나님의 자비라고 말한다.
칼빈은 로마서 1장 17절 주석에서 로마서의 핵심이 하나님의 자비를 믿는 믿음에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본 서신의 첫 번째 주요점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만을 통하여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 의, 이것은 믿음에 근거하는데, 오직 완전히 하나님의 자비에만 달려있다.”고 말한다.
칼빈은 로마서 4장 16절 주석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오직 은혜에 근거하며, 그럴때에만 최종적으로 확실하게 되며, 이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공로 없는 은혜라고 말한다.
칼빈은 히브리서 11장 7절 주석에서 “믿음은 약속들로부터 생기며, 그것들에 기초하고 있고, 그것들 위에서 쉬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칼빈은 시편 103편 17-18절 주석에서 사람이 의지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뿐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예레미야 3장 12절 주석에서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이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은 자비를 약속하신다고 말한다.
(2) 복음
칼빈은 앞에서 본 것처럼 믿음의 대상을 하나님의 자비라고 말하였다. 또한 칼빈은 반복해서 믿음의 대상을 복음이라고 말한다. 사실 복음이 가리키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내용으로, 복음을 형식으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복음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믿음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믿음은 복음이 제시하는 의를 받는다. 복음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한 의를 말한다. “바울은 믿음과 가르침을 불가분의 동반자로 연결 시킨다.” “믿음과 말씀은 영속적 관계가 있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옷을 입고 계신다”라고까지 말한다. “의가 복음에 나타난다면, 불완전한 의나 반쪽짜리가 아니라, 충분하고 완전한 의가 거기에 담겨있다”.
칼빈은 로마서 1장 17절 주석에서 “믿음과 복음 사이에 상호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의인들은 믿음에 의하여 사는 것이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며, 바울은 이 생명이 복음에 의해서 계시 된다고 결론 짓는다”고 말한다.
칼빈은 히브리서 4장 2절 주석에서 말씀과 믿음은 분리될 수 없으며, 말씀은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을 가져오고, 믿음과 말씀을 분리시키려는 자는 악한 자라고 말한다.
또한 칼빈은 히브리서 11장 7절 주석에서, 복음은 믿음의 말씀이며, 복음과 믿음, 이 둘 사이에는 상호관계(the mutual relation)가 확립되어 있다고 말한다.
칼빈은 마태복음 15장 22절 주석에서, 모든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생기며,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과 결합된다고 말한다.
조창훈의 글에 고경태가 편집, 첨언함.
https://theologyalongtheway.org/2020/11/05/more-thoughts-on-justification-what-is-the-formal-ca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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