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오(Sebastian Castellio, 1515-1563)
존 칼빈(John Calvin,1509-1564)
하나님의 자비를 거절한 카스텔리오는 여러 성경교리를 부정하였으며, 알미니우스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 카스텔리오는 아가서의 영감을 부인하고, 지옥강하를 부인하였으나, 칼빈은 그에게 바젤대학 교수로 추천장을 써주었다
카스텔리오는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칼빈을 알게 되어 그와 같은 집에 기거하였다(1540). 칼빈은 그의 천재성, 학자로서의 자질과 근면성을 간파하고는, 제네바로 돌아와서 자신의 옛 스승이었던 코르디에 대신에 그를 450플로린의 급료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라틴어 학당의 교장으로 초빙하였다(1541년 11월). 칼빈은 처음에 눈에 띄는 친절과 관대함으로 그를 대하였다. 1542년 전염병이 창궐하였을 때 카스텔리오는 병원으로 갈 것을 자원하였지만, 목사가 아니어서 자격이 안되었기 때문에 거부당하였든지, 아니면 막상 제비가 뽑혔을 때 자신의 마음을 바꾸었든지 하였다. 1544년 초반에 카스텔리오는 칼빈의 일부 신학적 견해들, 특별히 예정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는 칼빈의 엄격한 치리와 일인 독재를 싫어하였다. 그는 아가서에 대해서도 합리주의적으로 해석하면서, 이것이 음탕하고 성애적인 시가로서 마땅히 정경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사도신경에 나오는,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구절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구절에 대한 칼빈의 상징적인 해석,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영원한 미리 당하셨다는 해석에 반대한 것이다.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교회사전집 8, 스위스종교개혁』, 박경수 역(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4), 532.
1542년 4월 5일에 카스텔리오는 제네바에 와서 교육 주임에 취임했다. 그는 가족이 많아서 거기서 받는 봉급만으로 생계가 부족했다. 그래서 목사를 하겠다고 시에 신청했다. 시에는 허락하였으나, 칼빈은 그가 목회에는 부적합하다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시에 교섭해서 그의 월급을 올리도록 했다. 카스텔리오는 다른 일을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다시 그는 1544년에 제네바에 와서 칼빈과 그의 동역자들을 욕심쟁이요, 추잡스러운 방탕자요, 술취한 자로 비판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바젤에 있는 장 오포린에게 추천장을 써주었다. 카스텔리오는 1553년 바젤대학에서 헬라어 교수가 된 후에 죽을 때까지 부유한 생활을 했다. 이종성, 『칼빈』(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2000), 45-46.
칼빈은 카스텔리옹이 제네바를 떠날 때 추천서를 주었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이 쓰였다. “그는 자의로 대학의 학장직을 사임했습니다. 그는 그 직책을 잘 수행했고, 그래서 우리는 그가 성직을 맡을 만하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성직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그의 생활에 어떤 흠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에 대치되는 어떤 본질적인 점에 대한 불순한 교리 때문도 아닙니다. 거기에는 단지 우리가 앞에서 설명한 바로 그 이유밖에 없습니다.” Jean Cadier, Calvin, I'homme que Dieu a domptė, 『칼빈, 하나님이 길들인 사람』, 이오갑 역(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155.
1543년 카스텔요는 설교자로서의 직책을 요구하였다. 그 당시에 발효된 규정에 따라, 예비시험에 출석하였다. 그런데 시험 도중에 아가서의 정경문제와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부분에서 칼빈의 해석과 대립되는 발언을 하였다. 카스텔요는 문자적인 해석을 고집하였다. “비록 그가 허락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그의 생애의 어떤 오점이나 신앙의 주된 교리에 대한 불경스런 관점이나, 그와 반대되기 때문이 아니라, 위에서 방금 우리가 설명한 바로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François Wendel, Calvin, 『칼빈- 그의 신학사상의 근원과 발전』(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2), 96-97.
1543년 카스텔리오가 목사가 되려 하자, 칼빈은 그와 면담하면서 1541년의 대화를 상기시켰다. 당시 카스텔리오는 구약 애가의 정경성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또한 사도신경의 “지옥으로 내려가시고”라는 표현에 대해서 실제로 육체로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해석하였다. 결국 칼빈은 목사직에 대해 반대하였다. Christoph Strohm, Johannes Calvin, 『개혁자 칼뱅』, 문명선, 이용주 공역(서울: (주)도서출판 넥서스, 2009), 151-153.
카스텔리용은 아가서의 영감설을 부인하고, 사도신조의 “지옥에 내려가시고” 부분에 대한 칼빈의 해석을 비판하는 등의 이유로 칼빈과 대립했다. 이오갑, 『칼뱅의 신과 세계』(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350.
카스텔리오는 아가서가 단순한 세상적인 연애시이며,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실제로 내려가셨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주는 책으로 해석하였다. Otto Weber, Die Treue Gottes in der Geschichte der Kirche, 『칼빈의 교회관』(김영재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5, 114.
카스텔리옹은 아가서를 젊은 솔로몬이 쓴 것이라고 사랑의 시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리스도가 음부에 내려가신 것에 대해서 칼빈과 견해를 달리했다. 칼빈은 그를 이단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떠날 때 교장으로 적합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추천서를 써주었다. Herman J. Selderhuis, John Calvin: A Pilgrim's Life, 『칼빈』, 조숭희 역(서울: 대성닷컴, 2009), pp. 198-199.
카스텔리오는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칼빈의 친구였으며, 동거인이었다. 그는 1541년 제네바의 라틴어 학교의 교장으로 부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구약성경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그리스도의 지옥행이라는 기괴한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는 결국 교장직에서 물러나서 제네바를 떠나게 되었다. 그때 칼빈의 추천장을 들고 로잔을 향한다. 그는 바젤에서 희랍어 교수가 되었다. Joachim Staedtke, Johannes Calvin und Gestaltung, 『장로교의 뿌리 칼빈』, 정미현 역(서울: 만우와장공, 2009), 91-92.
카스텔리오는 아가서 7장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이끌려 저자가 기록했다는 삿실을 부인했다. 또한 사도신경 중 “지옥에 내려가신” 구절에 대해서 칼빈의 주석을 의심했다. 이것이 칼빈이 그의 목사 임직을 거부한 중요한 이유였다. Peter Opitz, Leben und Werk Johannes Calvins, 『요한네스 칼빈의 생애와 사역』, 정미현 역(서울: 한들출판사, 2012), 121.
2. 칼빈은 카스텔리오의 번역성경이 성경을 세속화시키고 위험을 약화시켰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작업들은 성경 전체를 라틴어로 번역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업을 그는 1542년 제네바에서 시작하여 1551년 바젤에서 끝마쳤다. 이 성경은 영국의 에드워드 6세에게 헌정되었고, 여러 차례 개정판을 내었다. 그는 칼빈에게 원고의 일부를 보여주었는데, 칼빈은 그의 문체에 불만을 표하였다. 카스텔리오는 후기 인문주의자들과 현학적인 키케로주의자인 벰보 추기경의 추기경의 취향에 맞추어 성경을 고전풍의 라틴어로 옮기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성경적인 단어들을 고전적인 단어들로 바꾸었다. 예를들어 baptismus를 lotio로, angelus를 genius로, ecclesia를 respublica로, synagoge를 collegium으로, presbyterium을 senayus로, doemoniaci를 furiosi로 바꾸어 썼다. 그는 문체를 위해 내용을 희생시켰고, 히브리주의를 제거하였으며, 성경 기자들의 사실주의적인 기운, 단순함과 위엄을 약화시켰다. 칼빈과 베자는 그의 번역이 성경을 세속화시키고 모독하는 위엄을 약화시켰다고 비판하였다.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교회사전집 8, 스위스종교개혁』, 박경수 역(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4), 531.
3. 카스텔리오는 세르베투스의 글을 읽지 않았으면서도 그를 옹호하였다
카스텔리오는 1554년에 『이단자들은 반드시 핍박을 받아야만 하는가?』을 출판하였다. 이 작품은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빠르게 번역되었다. 그는 이단자들에 대한 사형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버리는 자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나중에 고백하기를 세르베투스의 저술들을 읽어보지 않았다고 고백하였다. Willem van’t Spijker, Johannes Calvijn Zijn Leven en Zijn werk, 『칼빈의 생애와 신학』, 박태현 역(서울: 부흥과개혁사, 2009), 176.
카스텔리오는 1554년 3월말에 『이단론』을 출판하였다. 그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16세기 종교적 관용의 가장 탁월한 옹호자가 되었다. 박경수, 『교회의 신학자』(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4), 202.
카스텔리오는 관용의 사도가 아니다. 카스텔리오는 이단을 처벌하는 것을 옹호하였다. 그의 요지는 이단이 과연 처벌되어야 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이단인가하는 것이었다. Emanuel Stickelberger, Calvin, 『하나님의 사람 칼빈』, 박종숙, 이은재 공역(서울: 나단, 1992), p. 140.
카스텔리옹은, 정통 칼빈주의로부터 계몽주의로 향하는 사상의 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연결교리가 되었다. 그는 이성을 성령만큼 높이 평가하였다. A. Mervin Davies, Foundation of American Freedom, 『칼빈주의 사상과 자유사상』. 이창우 역(서울: 기독교문화사, 2009), 99.
4. 카스텔리오의 사상은 알미니우스주의자들에 의해 활성화되었다
칼빈이 제네바에 돌아오기 몇 달 전에 카스텔리오는 제네바 학교의 교장에 임명되었다. 카스텔리오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강력히 부인하는 책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대한 신앙고백을 공격하였다. 이것은 네덜란드 교회사에서 특히 중요하다. 그의 열렬한 숭배자는 코른헤르트였다. 그는 카스텔리오의 몇몇 저서를 화란어로 번역하였다. 아르미니우스와 호마루스 사이에 벌어진 논쟁에서 기본적으로 카스텔리오와 칼빈 사이의 갈등이 재현된다. 1613년에, 예정, 자유 의지, 믿음에 관한 카스텔리오의 많은 논문이 하우다에서 출간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화란어로 번역된 그의 글들이 한 권으로 묶여서 하를렘에서 출간되었다. 이 시대에는 카스텔리오주의가 유행이었다. ‘항변’(1610)의 다섯 조항이 거의 문자적으로 카스텔리오로부터 왔다. 도르트 회의의 진짜 반대자는 카스텔리오였다. Jelle Faber, The Theologian of the Holy Spirit, John Calvin, 『성신의 신학자, 존 칼빈』,김명순 역(서울: 성약출판사, 2004), 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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