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2:16.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
의롭다 하심을 받음.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의롭다하셨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백성은 의롭함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백성으로 의롭다한 인식이 올 때에 주의 자녀는 회개해야 합니다. 감히 주님 앞에 의롭다하는 의식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의 자녀가 의롭다한 인식이 없을 때에, 믿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의롭다함에 대한 인식을 고백하며 찬양하며 선포해야 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 의로움에 대한 인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성으로 번역되는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성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성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신실성을 따르는 아브라함의 신실성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신실성을 기초로 한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하나님의 의로 이해한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서 아브라함의 족속을 모으는 단일 계획으로 제시하는 것이고, 그 계획을 예수가 완전하게 밝혔다는 것이다.
저는 예수님을 유사한 하나님이나 탁월한 선지자나 비교할 수 없는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교회를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이고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여러분을 목양하려고 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자기 자신도 저주를 하는 모습은, 저도 제가 선포한 복음에 매인바되었고 그 기준에 이르지 못하지만 담대하게 선언하며 자기를 경책하며 그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노력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깊이 인지해주시길 바랍니다. 사람은 합리적인 동물이라고 하지만 비합리적으로 사는 사람이 성공하는 구조입니다. 위록지마(謂鹿之馬)를 하지 못하면 출세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말을 다하고 사는 사람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합리적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합리적이란 생각은 매우 위험합니다. 자기 생각을 소상이 밝히고 그 생각에서 원리만 정확하면 됩니다. 그 원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큰 난관을 갖고 있었는데, 최근에 약간의 풀림을 받은 것 같습니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서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논의를 4여년하고 있는데 상호 답변을 내지 못하고 봉착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능동적 순종을 주장하는 분들이 이쪽을 보고 전가를 부정하니 새관점학파와 유사하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능동적 순종을 주장하는 분들이 새관점학파와 유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차이점은 전가를 주장하는 것에 있습니다. 핵심이 유사한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획득한 의를 전가하는 것이 능동적 순종의 주장이고, 그리스도의 신설성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새관점의 주장입니다. 두 명제가 왜 유사할까요?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어떤 성질이 전달되어 변화가 된다는 개념에서 유사합니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어떤 성질의 변화에 대해서 매우 경계하며, 그런 사안이 발생할 때에 등장한 것이 십자가 신학입니다. 분명하게 외래적 의를 전가받았기 때문에 내부적 변화가 발생할 것인데, 그 발생에 대해서 루터는 십자가 신학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의인이면서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라는 명제를 외쳤습니다.
믿음이란 믿음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합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파악한 것은 합리적인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고 정리된 것은 이미 믿음이 아니라 이해가 된 것입니다. 이해된 믿음음 과거의 믿음으로 현재의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배설물로 여기지 않으면 그 행적은 부패요 타락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에서 중요한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실상을 믿는 것입니다. 보이는 실상은 이미 뒤에 있는 믿음(합리적 이해)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말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다. 능동적 순종이나 새관점은 파악된 이해 구도입니다. 즉 합리적 이해로 구축된 체계입니다.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이해는 믿음이 아니라 합리적 설득이며, 합리적 설득을 수용한 것입니다. 믿음은 이성의 설득이 아닌 성령의 선물입니다. 이성의 작용이 포함된 믿음은 이미 뒤에 있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은 파악된 이해도 포함되지만 파악되지 않은 것, 보이지 않는 실상(히 11:1)이 있다는 것이며, 그 보이지 않는 실상에 의지해야 합니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if thou shalt confess with thy mouth the Lord Jesus)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thou shalt be saved)
For with the heart man believeth unto righteousness; and with the mouth confession is made unto salvation.
로마서 10:5-9의 말씀인데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어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그 믿음의 말씀은 그 믿음의 말씀을 듣고 그 입으로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For whosoever shall call upon the name of the Lord shall be saved.)"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단순하게 십자가와 부활이 아니라 복음의 전체를 의미합니다. 롬 10:9절을 문자적으로 죽으신 것을 살리는 것을 믿으면은 이미 앞에 성육신하심과 십자가가 전제된 것이며, 현재 통치도 전제된 것입니다. 부활에만 집중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심리학의 한 기법에는 집중(concentration), 몰입(flow)이 있습니다. 몰입에는 신기한 현상이 발생합니다. 외적으로 나타난 현상들은 복음의 현상으로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복음은 보이지 않은 영적 현상입니다. 복음의 사람은 집중과 몰입을 하면서도 또 초월성을 추구하는 이중성 훈련을 잘 해야 합니다. 복음은 전체가 복음이지 어떤 한 요소가 핵심이거나 절대적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한 요소로 전체를 포괄시킬 수 있는데 가장 일반적인 용어가 십자가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고전 1:8)라고 했는데, 그 십자가의 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고경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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