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읽기(2-1) 바울 복음의 개략
(갈 2:1-10)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 “14년후에 대해서” 칼빈은 어떤 주해가들이 행 15:2로 언급하는 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거부했습니다(참조 칼빈의 사도행전 주석). 그리고 행 12:25절로 제시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행 15장 예루살렘 공의회가 개최되기전에 쓰여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행 15:2에서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유대로부터 내려온 형제(사도 바울은 거짓 형제라고 했음, 갈 2:4)가 교회가 전하는 복음을 훼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행 15:2). 예루살렘 공회의가 개최되었고 무할례자 고넬료에게 세례를 준 베드로의 변증과 야고보의 결정으로 바울이 전한 복음,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얻음”과 “구원에는 민족적 차별이 없음”이 예루살렘 교회의 복음이며 안디옥 교회의 복음이라는 것을 확증했습니다.
바울이 말한 14년 후는 행 12:25절의 때입니다. 다만 시작이 회심 후 14년인지,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서 14년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은 3년을 포함한 14년으로 보아서, 다소의 기간을 10년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바울과 사울은 안디옥으로 돌아와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행 13장). 1차 선교여행의 기간은 약 2년으로 추정하고, 예루살렘 공의회 개최시기는 AD 50년으로 추정합니다. 갈라디아서는 1차 선교여행 후 그리고 예루살렘 공의회 전에 보낸 것으로 추정합니다.
※ 디도와 디모데;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를 많이 사랑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많이 사랑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나의 동역자”(롬16:21), “나의 형제”(몬1:1)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디도는 바울 사역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동역한 사역자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1차 전도사역에서 회심하고(루스드라, 참고. 행 16:1), 2차 전도영행 때에 바울 팀에 합류했습니다. 디도와 디모데는 바울의 마지막까지 함께한 동역자입니다. 그런데 디도는 안디옥 교회에서부터 바울과 함께 한 사역자입니다. 마가는 1차 전도여행에서 이탈해서 바울과 다툼이 되었지만 다시 화해했습니다. 바울의 팀에 있던 사역자들(부겔로, 허모게네)이 배신하고 팀에서 이탈하기도 했습니다(딤후 1:15-18). 바울 사역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함께한 사역자가 디도입니다.
※ 다른 복음을 전한 거짓 형제(갈 2:4).
첫째, 다른 복음은 복음이 아닐 뿐만 아니라, 복음을 위협하는 위험이고 독이고 해악입니다. 그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거짓 형제입니다. 그런데 거짓 형제는 다른 곳이 아닌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참고. 행 15:1). 그들은 안디옥 교회에서 또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다른 복음으로 교회를 심각하게 위협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썼지만 통제되지 않았고 안디옥 교회에 큰 소동이 발생했습니다. 결국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에 대표자들을 보내어 진위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할례자에게 세례를 준 베드로, 하나님의 교회의 박해에 가장 앞장섰던 바울 등은 다른 복음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바울의 발언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서, 다른 복음을 전한 거짓 형제들의 주장은 교회에서 배척되었습니다. 거짓 형제들은 자기 주장이 배척되면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면서 개체수를 증가시킵니다. 마치 불가사리(不可殺伊)가 토막나면 다시 증식되는 것과 유사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다른 복음(복음에 할례를 더함)”으로 큰 문제가 일어났고, 사도들이 사역한 교회 후기, 사도 요한은 적그리스도의 복음,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세력을 정죄했습니다(요한서신). 다른 복음의 큰 두 진영이 있는데, 예수님을 육체로만 보는 에비온주의와 예수님을 육체로 보지 않고 신성으로만 보려는 영지주의(그노시즘)가 있다. 현대에서는 에비온주의와 영지주의가 하나로 결합되었고, 또 수많은 분파들로 합종연횡(合從連衡)을 하고 있다. 현대 하나님의 교회에 다른 복음의 양태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주의 백성은 이러한 교회에서 어떻게 자기 영혼을 지킬 수 있을까요?
둘째, 거짓 형제는 예루살렘에서 온 형제이지만, 다른 복음을 가진 교회를 파괴시키려는 교사입니다. 교회를 파괴하고 영혼을 파괴하는 일을 사람은 결코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정의이고 사명으로 가진 사람이 거짓 형제,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들의 선은 교회 파괴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교회 밖에서 교회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교회를 파괴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가만히 들어온”이라고 제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문이 아닌 울타리로 들어온 목자라고 하셨습니다(요 10:1-6). 그런데 바울은 그들의 말에 현혹된 갈라디아 성도들을 책망하면서도 거기까지만 권면합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를 저주했지만(갈 1장), 다른 복음에 현혹된 성도들에 대해서 저주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목자의 역할 때문일 것입니다. 목자는 자기 생명을 바쳐서 양을 보호해야 합니다. 양의 타락과 배도는 목자에게 가장 큰 충격이고 슬픔이고 책망입니다. 수 많은 거짓 교사들 속에서 주님께서 위탁하신 양무리를 합당하게 목양하여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 목자의 임무입니다.
예수님의 양은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보내신 사자의 음성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목자는 양을 훔치는 도둑을 잡아야 하며, 도둑에게 잡히지 않도록 양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을 보면 도둑보다 성도들에게 더 권면을 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도둑을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는 문을 항상 개방해야 할 자유체입니다. 개방된 교회에 거짓 교사를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자유롭게 들어오는 거짓 교사를 양들이 방어하고 복음으로 교회를 유지해야 합니다. 교회의 개방성과 자유를 훼방하고 폄훼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한국 교회에 신천지가 준 가장 큰 상처가 교회의 개방성을 심각하게 훼손시킨 것이다. 교회가 안된다, 안된다는 부정으로 막아낸 사례도 없습니다. 교회, 그리스도인은 부정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 낙인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개방적이며 적극적으로 선을 행동할 인격이지, 폐쇄적이고 소극적으로 선을 방어하는 인격이 아닙니다. 거짓 교사들은 복음에 대해서 부정적 이미지를 제공합니다. 그들의 아비가 처음부터 그랬습니다(창 3장). 주님의 음성을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다가가며, 거짓 목자의 음성을 철저하게 배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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