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디컬, Radical 은 급진적, 철저한, 과격한 등으로 번역되지만, 명료한 개념이 쉽지 않습니다.
(especially of change or action) relating to or affecting the fundamental nature of something; far-reaching or thorough. (특별하게 행동이나 변화에서) 어떤 것의 근본적인 본성과 관련되거나 영향이 되는 것, 광범위하거나 철저함(순전함).
래디컬은 근본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자기 근본에 대한 전환이나 인식을 구체적으로 새운 뒤에, 그 근본에 맞춰서 의식과 삶을 조정하는 혁신적인 의식 체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 근본(the fundamental)에서 변경을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현재 가치가 근본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래디컬의 기본적인 특징입니다. 그리고 벗어난 현재 가치를 수정하는 방법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이 래디컬은 서양 사회에서 일어났는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즉 래디컬은 현재 자기 삶의 토양에서 새로운 토양을 건설하는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서양 래디컬 운동과 동양 래디컬 운동의 현격한 차이가 존재해야 될 이유입니다.
서양 래디컬 운동이 구체화된 것은 16세기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재세례파)일 것입니다. 아나뱁티스트를 묘사하는 또 하나의 형용사는 '급진적(radical)'로 묘사하기 합니다. 16세기 사회, 특히 종교 사회에서 종교개혁 진영과 로마 가톨릭 진영의 사이에 아나뱁티스트가 존재했습니다. 500년이 지난 지금에 아나뱁티스트는 로마 가톨릭 진영을 지향하는 것, 혹은 로마 가톨릭이 포용할 수 있는 수준의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아나뱁티스트나 로마 가톨릭은 동성애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2023년에 로마 교황청은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동성 커플을 공식적으로 허용했습니다. 래디컬이 추구하는 근본은 결정 핵심 가치를 이탈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핵심 가치는 무엇일까요?
복음의 1차 과제는 무엇일까요?
교회는 주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주의 부름에 이끌려 예배하는 것과 예배에 참여한 교회의 지체들이 부르신 주님을 증거하며 전파하는 것입니다. 16세기 루터와 칼빈은 이 가치를 회복하는 종교개혁을 구축했습니다. 교회의 권위에 근거한 복음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의 권위에 근거한 복음을 구축했습니다. 그러나 래디컬은 살아계신 주님의 권위가 아닌 이상적 가치가 근본인 것 같습니다. 그것에서 파생되어 한국 교회가 잘 인지하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름을 근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구체적인 가치가 아닙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신천지의 주장이 옳다" 이런 문장이 되어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진위를 구분할 수 없는 함축적인 문장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주장하지 않은 이단은 없습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성령의 가르침이 충돌할 때에 어떻게 진위를 평가할 수 있을까요??
유럽은 기독교 사회에서 수십년동안 국제 전쟁을 치뤘기 때문에 상호 논박을 하지 않습니다. 미국은 독립할 때 모든 역량을 융합시켰기 때문에 상호 논박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다수가 되어 여러 이설들을 초기에 함께 통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평등, 인권이 강화되면서 이단이 함께 증가하고 있습니다. 평등, 인권 등이 래디컬에서 추구하는 보편적 성향입니다.
서양 사회에서 래디컬 사유 체계에 의해서 여러 사조들이 등장했는데, 가장 큰 영향력은 공산주의 사조입니다. 그러한 혁신적 사조가 등장해서 세계 사조를 형성시켰습니다. 동양이나 아메리카, 아프리카는 유럽 사유 체계의 우산 아래에 있습니다. 미국(카나다, 호주, 뉴질랜드)은 유럽 사회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양적 사유 체계를 갖추려고 노력하는 나라는 없는 것 같습니다. 중국은 사회주의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일본은 어쩌면 쇄국적인 모습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 있는 대한민국은 매우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입니다. 그런 대한민국이 동양적 사유 체계 구축을 추구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서양적 사유 체계 이해도 필수적이고, 동양적 사유 체계 이해도 필수적입니다. 한국 사회나 교회에서 래디컬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래디컬은 동양적 사회의 기반에서 이탈해서 새로운 사회로 가려해야 하는데, 동양적 사회 기반에서 이탈이 아니라, 사회에 기반을 두지 못한 교회를 흔드는 기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16세기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교황주의와 개혁파 모두 위협을 느꼈는데, 500년이 지나니 교황주의와 친밀하고 개혁파 신앙에는 여전히 위협과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래디컬 운동은 복음적 교회에 위협이 될 여지가 많다고 생각됩니다. 복음은 죄인의 구원, 피의 구속함의 복음, 그리고 천국영생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래디컬 운동에서는 그러한 복음 가치가 아닌 이상적 공동체 구성에 관심을 두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한민국 사회는 교회의 성도 숫자가 급감하는 상황이고, 사회는 유교와 불교적 사유 체계로 구축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래디컬이 아니라 복음을 전도해서 교회를 성장시켜 사회가 기독교적 사회로 전환된 뒤에, 래디컬 운동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사회가 세속화되어도 기독교적 사유 체계로 사회가 움직일 것 같습니다. 서구 사회가 우리보다 더 교회에 출석하는 숫자가 적으면서, 우리에게 신학을 가르치고 영향을 주는 것은 그들이 가진 2000년의 역사, 사유 체계의 깊이 때문입니다.
형람서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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