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는데, 나사렛 사람으로 예루살렘에서 죽었다(A.D. 37년경). 유다 땅 베들레헴 태생이지만, 베들레헴 사람으로 불리지 않았고 나사렛 사람으로 불렸고, 예수도 그것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베들레헴 사람이 메시아가 될 것인데, 나사렛 사람이 메시아라는 것이 마태의 해석이다(마 2:23).
예수는 유대 땅 예루살렘 골고다(갈보리, 해골)에서 로마의 사형 방식인 십자가형으로 죽었다. 예수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서 기독교가 결정된다. 그런데 현재 기독교는 예수 죽음 의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포용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고 있다. 예수의 죽음은 오직 한 의도에서 발생한 것이다. ‘임마누엘’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마 1:18-25). 임마누엘을 위해서 선결될 과제가 ‘죄’ 문제 해결이다(마 1:21).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경륜은 하나님의 성육신, 십자가, 부활, 승천, 오순절성령강림, 교회설립 그리고 재림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 복음은 반드시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나오며(은혜),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으로 신자의 내면(평강)에서 이루어진다.
교회는 ‘성도의 교통’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현재는 많은 ‘불통’이 있다. 그런 이유 중 하나가 예수의 죽음 이후에 대한 이해가 많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구원파식 이해가 가장 심각한 이해 중 하나이다. 그것은 ‘예수가 죽어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1세기에 죄사함이 완료되었고, ‘그것을 믿으면’ 된다는 도식이다. 이런 도식의 기본은 인식(깨달음)을 기본으로 하는 영지주의적(靈知主義, Gnosticism) 도식이다.
예수의 죽음이 죄를 구속하기 위한 ‘속죄제사’라는 도식은 거의 없다. 예수의 죽음이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행위로 제시한다. 이것이 상당히 복음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자기 죄사함의 도식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예루살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은 골고다도 예수도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1세기 예루살렘에서 죽은 예수와 21세기 대한민국 사람의 관계를 설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예수의 죽음을 자기의 구원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전혀 개연성이 없다.
필자는 1세기의 예수의 죽음이 구약을 완성하는 속죄제사였고, 나의 구원임을 이해하는 연결성은 ‘소명(召命, Calling, 부르심)’으로 제시한다. 소명의 전형적인 도식은 다메섹 도상에 부른 ‘사울’이 예표이다(행 9장). 사울이 사도가 되는 중요한 이유이다. 그리스도인은 사울의 형태로 그리스도인이 된다. 사울과 차이점은 드라마틱한 인식 전환과 존재 전환이 있었지만, 그 뒤로는 그러한 전환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같은 성령을 속이는 사람이 등장했고(행 5장),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할 때 시몬이 가짜로 회심하기도 했다(행 8장).
구원은 복음을 듣고 발생하는 것인데, 실효는 ‘하늘 소명(heavenly calling)’이다. 칼빈은 ‘하늘 교리(heavenly doctrine)’라는 어휘를 자주 사용한다. 이 용어를 스웨덴보그가 차용해서 신비주의를 완성하기도 했다.
예수는 죽음으로 속죄를 완료한 뒤 침묵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 예수는 십자가 구속 이후에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승천하셨다. 그리고 성령의 내주를 오순절에 보내셨다(행 2장). 그리고 교회를 세우고, 자기 백성을 부르신다. 예수의 백성은 주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른다(요 10장). 지금도 예수의 음성이 하늘에 온다. 그 소리는 복음의 사람이 예수를 증언하는 것이다(행 1:8). 양은 거기에서 주의 음성을 듣고, 주의 교회를 이루며, 주께 영광을 돌리고 주의 이름을 증거한다.
예수의 죽음은 종결(終決)이 아니라 완료(完了)이다. 예수의 죽음을 ‘완료’라고 말하면서, ‘종료’로 이해하는 경향이 너무 많다.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일하신 것이 아니라, 보좌 우편에서 일하신다. 예수를 믿는 것이 만유주께서 자기를 불러서 믿음이 시작된 것을 생각해 보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