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25장. 철학자들도 학문을 세 부분(물리학, 논리학, 윤리학)으로
나누었는데, 그들이 창안한 것이 아니고 발견한 수준에
불과하다. 철학자들의 3분법이 하나님의 삼위일체 존재방식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자의 3분법은 하나님의 지식의 그림자에 의한 것으로
본다. 물리학은 ‘본성적’인
것으로 모든 사물의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고, 논리학과 윤리학을 탐구하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사물의 본성에
대해서, 이성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선에 대해서 탐구하는 것은
사실이다. 철학자들이 사물의 원인에 대해서 이성적인 인간에게
목표가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이
세 가지가 합해지는 것을 ‘향유(享有, 즐김)’이라고 할 수 있다. 진실한 즐거움은 ‘현세적인 잠시의 즐거움’이
아닌 ‘영원한 대상을 즐거워’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악한 자들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잠시의
즐거움을, 돈을 거두는 것을 추구한다. 그리스도인은 ‘열매’를
현세에서 거두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현세, ‘본성’은
원리에 관한 것, ‘논리’는
교육을 목표로, ‘윤리’는
실용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교사로 모시고, 행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내적 즐거움을 풍성하게
받아야 한다.
26장.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는 이 논제에 대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21세기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됨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자연 출생’에
‘하나님의 형상’이
부가되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기 어렵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피조물이기 때문에 창조주와 무한한 간격이 있음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피조물이 창조주를 반역함으로 일그러진
형상을 갖게 되었다. 인간이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최고의
피조물이지만, 더욱 더 가까지 갈 수 있도록 개혁되고 완전해야
한다(adhuc reformatione perficiendam).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가 존재함을 인식하고, 우리가 존재하고 인식하는 것을
좋아한다(Nam et sumus et nos esse nouimus et id esse ac nosse
diligimus).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장을 삼위일체의 뿌리로
이해하려고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식의
확실성, 아는 것이 착각이나 환상이 아닌 조건으로
‘기쁨’을
제시한다.
아카데미파의 공격, “네가 틀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틀릴 수 있다“고
확언한다. 그러나 내가 틀린 것이 내가 믿는 대상이 틀린
것이 아니다. 또한 내가 틀렸다는 것에서 나의 존재는 가장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 나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식하는 나는 결코 틀리지
않았다.
내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 내가 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
두 가지 일을 사랑할 때 나는 틀리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일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자가 당신은 거짓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참되고 실재이신 그
분, 창조주 하나님만을 사랑한다.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행복은 존재이다. 존재가 없다면 어떻게 행복을 하며 알 수
있겠는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지식에
결코 오류가 없다.
고경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