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18장. 하나님께서 악(惡)을 허용하셨다면 더 유익한 방안도 마련하셨을 것이다. 대구법(對句法, antitheses)은 문장의 가장 아름다운 묘사 방법 중 하나이다. 고린도후서 6:7-10에서 사도 바울이 탁월하게 이용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대조에서 반대편을 더 찬란하게 빛나게 하는 질서를 갖고 있다.
19장. 하나님은 어둠에서 빛을 나누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호한 것이 유익한 것은 여러 해석이 나타나는 것과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다는 것이다. 모호한 구절에 대한 해석에서는 보다 명료한 다른 구절의 해석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모호한 구절을 통해서 진리에 접근하는 다양한 방법을 익히게 된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에서 불협화음은 없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께서 빛을 처음 만드셨을 때에 천사도 창조하였다고 제시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을 나누실 때에 거룩한 천사와 불결한 천사도 구별하였다고 한다(참조. Civitas Dei., 11권 9장). 이 구분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넷째 날에 만들어진 하늘의 광명(창 1:14-18)은 전자의 진리의 빛과 빛을 등진 악한 천사와 구분하였다. 본성의 결함은 본성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결함이며, 하나님께 숨기거나 모호하지 않는다.
20장. 창 1:3-4에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에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눈 뒤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없다. 그것은 혹시 하나님께서 어둠도 좋아했다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함이다.
창 1:17-18절에서는 빛과 어둠이 나뉘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께서 양쪽을 다 좋게 보셨다. 양쪽이 보두 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 부분의 어둠은 하나님께 좋아하지 않았고, 뒤 부분에서 어둠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점에서 ‘천사’와 관계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21장.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4, 10, 12, 18, 21, 25, 31)는 훌륭하게 만들어진 것, 하나님의 지혜로 선하게 만들어진 세계를 말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는 미리 아시어 창조하셨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만들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좋게 여기셨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본 뒤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고 제시하였다.
플라톤은 조물주가 만들어진 창조를 보고 기쁨으로 황홀했다고 주장하면서도 예상치 않는 새로운 피조물을 보고 놀랐다는 어리석은 생각은 아니었다(티마이오스, 37). 그는 조물주가 자기의 설계대로 완성된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안에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들은 영원한 현재(sempiterna praesentia)이다(약 1:17).하나님은 시간 안에서 인식하지 않으며, 시간을 만드신 뒤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창조주이시다. 완절무결한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창조 후에 무엇을 부가적으로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셨다(dixit Deus: Fiat lux, et facta est lux). 왜 빛을 만드셨는가? 답은 “빛이 좋기 때문”이다. 창조의 이유는 하나님의 선이다. 이것은 플라톤도 동일한 견해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