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람성경

광주성경연구원. 2014.11.22.토, 세 살 아들을 일 년 돌보면서..

형람서원 2014. 11. 22.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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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 성 경 연 구 원

고 경 태 목사

010-8525-0288, 062-401-7762

광주시 북구 석곡월산길 36번지 주님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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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롬 12:1)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심은 하나님의 전적인 ‘자비’라고 하였다. 예배가 최고선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를 받아 연합하시기 때문이다.

광주성경연구원. 2014.11.22.토

세 살 아들을 일 년 돌보면서..

 

고경태 목사

 

결혼 20여년에 세 아들을 두었습니다. 늦깎이에 얻은 세 살배기 아들 준은 제가 많은 시간 돌봐야 합니다. 세 살 아들을 일 년 동안 돌봄을 해야 했습니다. 아이를 돌보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을 새삼스럽게 알았습니다. 그래도 늦게 얻은 아들과 함께 벌써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네요. 아들이 한 살씩 더 먹어야 양육에 편이가 있을 텐데, 그 아이가 성장하면 저는 폭삭 늙어버려 둘 다를 바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나의 바람과 상관없이 시간은 흘러가겠지만 ‘사람의 생명 돌봄은 너무나 많은 시간을 돌봐주어야 하는 구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귀한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20세 아니 더 많은 세월 자녀를 돌봐줍니다. 그래도 죽을 때에는 자녀를 염려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가 생각됩니다. 부모의 수구초심(首丘初心)이 자녀들인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성경묵상에 제 아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린 아들을 직접 양육하면서 몇 가지를 느낀 점을 나누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마 18장, 막 10장)에 대한 생활경험 술회입니다.

 

첫째,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 신뢰’이다. ‘어린아이’와 ‘유치원 아이’의 차이점은 어린 아이는 부모가 전부인 것이고, 유치원 아이는 우리 엄마 아빠가 장난감을 사주지 않은 분이라는 것이다. 세 살배기 아들은 아빠가 있으면 가장 행복하고, 없으면 가장 힘들다. 뽀로로도 필요 없다, 아빠가 있으면 행복하다. 장난감도 과자도 필요 없고 오직 아빠만 있으면 좋다. 그래서 항상 아빠가 옆에 있기를 바란다. 그래도 성숙해서 어린이집에서 헤어질 때 울지 않는다. 섭섭하지만 그래도 기쁘다. 좀 더 크면 신나게 어린이집에 가겠지. 좀 더 크면 아빠가 자기를 부르지 않으면 좋겠지. 그리고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아빠가 원망스럽겠지. 그리고 아빠가 없어도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하겠지. 성인인 나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일생에 한 번 겪는 경험이기에 아들은 절대로 아버지의 상실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다. 어린아이는 ‘아버지의 존재만’으로 행복하고 만족한다.

 

둘째, 어린아이는 숨바꼭질을 할 수 없다. 범죄한 아담은 하나님의 부름에 꼭꼭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담을 알면서도 끝까지 부르셨다.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음성에도 아담은 끝까지 고집부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세 살 아들 준이 가위바위보는 알지만 주먹 밖에 내지 못한다. 그리고 항상 자기가 지고 나를 찾는다. 그런데 가끔 자기가 숨는 역할도 스스로 한다. 이불을 둘러쓰고 숨는다. 그 때 “준아~” 부르면 “응”한다. 그리고 자기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아이인 나의 아들은 숨바꼭질을 해도 부르면 반드시 대답한다. 그러나 점차 기술이 발전하면 술래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고,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하나님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고 주일에 다른 곳에서 보내고, 잘 숨었다고 위로하고 착각하는 성숙하지 못한 ‘어른’에게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필요하다. 아무리 꼭꼭 숨어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대답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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