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람 성경

욥기 24-30장

형람서원 2014. 8. 15.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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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24:1-25  숨어계시는 하나님으로 답답한 욥의 심정

계시하시는 하나님(Deus Revelatus)과 숨어 계시는 하나님(Deus Absconditus)은 루터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소개된 개념이다. 구약성경에서 욥기, 이사야, 하바국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고난에서 곤궁에 있는 신자의 탄식이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그러한 갈등은 없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흑암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신약에서 주 예수는 십자가를 지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고난에서 "하나님은 어디계시나이까?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신약에서 답을 하였다. "내가 주 예수를 믿습니다. 이 상황을 이길 힘과 지혜를 주십시오". 여전히 우리가 욥처럼 하바국 선지자처럼(하바국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바뀜) "왜 이런 상황이 벌집니까?"라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

다만 연약한 심령 때문에 의심과 두려움 때문에 그러한 질문은 한데, 곧 믿음고백으로 전환하고 믿음정진을 한다.

욥의 탄식은 하나님께 향한 원망은 아니다. 그 신비의 깊음을 바라보며 자기 한계의 하소연이고, 악인심판을 촉구하는 탄식이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악인을 사랑하며 선으로 이기도록 했고, 심판이 아닌 마라나타를 구하도록 했다. 악을 선으로 이길자, 곧 그리스도인이라.

바벨론을 이길자, 거짓과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 바벨론을 무너뜨리라! -> 신천지. 000은 이겼다는데, 아직 바벨론은 함락되지 않았고, 그런데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이김은 정복과 굴복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에 있으니, 사나 죽으나 모든 생명이 소생케되는 일이 있기를....

 

욥기 25장 1-6. 너무나 짧은 빌닷의 이의제기

세 친구들 중에서 빌닷이 마지막으로 변론을 하는데 동일한 말을 반복하기 때문에 짧을 수 밖에 없다. 세 친구의 단순한 체계와 빈약한 지식체계에서 공격한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세상에서 망하면 심판이고, 부자면 하나님께서 복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여호와 앞에서 참소하는 사단과 동일한 신학이다.
현재 첨단을 걷는 현대신학은 오히려 복잡하고 다양한 이론을 제시해서 진리를 찾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고난은 추구하는 부류도 있다(고난의 신학, 자기부정). 신비주의의 양극단은 침묵(관상기도)과 열광(오순절, 신사도 계열)이다. 그러나 이들의 답도 너무나 간단하다. "하나님은 알 수 없다." 그리고 방법은 자기의 방법을 동원하며, 하나님의 계시를 "하나님의 자유"로 설정한다. 기독교 신학의 답과 동일하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 즉 완료된 계시(계시의 충족성), 성경 66권을 의존해서 신지식을 구한다.

1. 빌닷은 욥에게 너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정죄한다. 욥은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 핵심을 벗어난 탄지걸기... 이런 챗바퀴도는 대화는 가장 피곤한 유형이다. 자기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자기의 의만 내세우며 하는 대화는 피곤한 교제의 대표적 유형이다. -> 이런 것의 반대적인 것은 "공개적인 죄고백" 프로그램인데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2.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은 인간의 고집... 세 친구들은 더 이상 변론을 할 수 없는 지경에서도 자기의 고집을 꺽지 않는다. 고집과 신념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의 상태이기에 외적으로는 분별할 수 없다. 세 친구는 지난 날에 쌓인 감정을 일소에 다 쏟아 내기만 했지, 실제적으로 욥을 이기려는 거이나 사랑하는 마음은 없었다. 욥은 친구들에게 위로를 기대했지만 위로가 아닌 쓴소리에 자녀잃음의 패닉, 부인의저주에 패닉, 세친구들의 비난으로 패닉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 청원을 하는 절대적인 순간까지 이르렀다. 우리 주님은 부모의 무지, 제자들의 무지와 배반, 그 많은 수혜자들의 침묵, 하늘 아버지의 외면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셨다. 그 외면의 아픔,,, 우리가 삶에서 외면의 아픔을 경험할 때에 십자가의 주께서 우리의 고난을 체휼하시어 중보하심을 믿어, 믿음으로 승리하는 신자가 될 수 있다면.... 배신의 파도를 즐겨라!!

 

욥기 26:1-14. 하나님의 불가해성( incomprehensibility), Finitum non capax infiniti

1. (1-4) 욥은 세 친구들의 도움이 거짓으로 오히려 아픔을 가중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그들은 지혜도 없는 소리를 듣고서 반복하는 것으로 제시했다.

2. (5-14) 하나님은 죽음(스올)을 주관하신다. * 그리스-로마의 죽음의 신, 하데스 Hades 플루톤 Pluton 플루토 Pluto, <염라대왕>.. 아우구스티누스는 많은 신들이 있지만 자기의 주관된 영역도 다른 신에 "제우스 Zeus 유피테르 Jupiter 쥬피터 Jupiter"에 의해서 할 수 없는 제한된 신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께 경배와 찬양을 한다. 많은 신이 필요한 것은 많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종교상술 중 하나다. 많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곧 종교사업이고 영적침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창조주의 지혜...(1) 구름의 신비, 물을 공중에 싸시어 물을 공급하는 것, (2) 구름으로 보름달을 가리기도 하시어 빛과 어둠의 경계를 이룸. (2) 그가 꾸짖어 하늘과 바다 정돈하심.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깨드림. -> 복음서에서 주님이 꾸짖어 바다를 잠잠케하심. (3) 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 손으로 날렵한 뱀을 무찌르신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은 그의 행사의 단편에 불과하다. 어떻게 하나님의 큰 능력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 욥은 하나님의 창조 경륜과 구속 경륜의 일부를 제시하고 있다. 놀라운 하나님의 탐구의 세계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식을 탐구하는 것은 겸손과 경건으로 가장 큰 즐거움을 준다. 그럼에도 얄팍한 인간의 판단, 칸트(Kant)라는 이성의 천재의 말만 듣고 창조주 하나님을 거부했다. Kant에 갇힌 세계는 하나님의 지혜에서 벗어나 열린 인간으로 이해한다. 삼위일체 믿음으로 있는 사람에게 닫힌 인간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계시에 열린 인간과 하나님의 계시에 닫힌 인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욥 27:1-23. '의인'을 박해하는 '자칭 의인', 친구에서 원수로 확정하는 욥

욥은 자기의 정당함을 주장한다(1-6절). 욥은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한다(2절). 자기영혼을 괴롭게한 하나님을 믿지만 이해되지 않음에 대한 불편이 있다. 그 불편은 친구들의 공격에서 발생했다. 자녀잃음, 부인의 저주에도 입술과 행동이 범죄하지 않았는데, 친구들의 공격을 견디지 못했다.

욥은 친구들을 "나의 원수"로 규정한다(7절). 욥의 마음의 충격이며 확정이다. 그리고 친구들을 향한 저주를 한다(7-23절).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에게 배우라고 권면한다(11절). 그리고 악인의 상태, 악인의 허망함에 대해서 서술한다(13-23절).

-> 욥은 정당한 의인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의인됨을 호소할 수는 없다. 구약의 한계는 악인에 대한 합당한 정의의 실현이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는 율법의 완성을 보여준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명확하기 때문이다(롬 12장).
   그렇다면 교회내의 이단도 사랑하여 방치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공적으로 확정된 이단에 대해서는 공권력으로(교회의 권위) 배제시켜야 한다. 그리고 합당한 권위기관(당회)에서는 바른 질서를 세워 질서에 부합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권징을 실시해야 한다. 그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며, 교회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권력을 사용하지 않고 교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세상권력을 의지하거나 사용하는 것은 세속이 완료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욥기 28:1-28 금수보다 탁월한 지혜가 있지만 하나님과는 결줄 수 없다.

인간은 은을 캐고, 금을 제련하고, 철을 캐고, 동을 분류할 수 있다(1-6). 그러나 솔개도 매도 사자도 할 수 없다(7-8). 사람은 반석에서 보물을 발견하고, 반석을 깨서 수로를 만들고, 물을 막을 수 있는 지혜를 갖고 있다(9-11절).
그러한 인간도 알지 못하는 것이 많다. 사람이 땅에서 알지도 알지 못하는 것은 많다. 바다는 당연이 알 수 없고, 금값을 많은 보석의 값을 어떻게 헤아리는가? 모든 생물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사람은 안다.

그러나 사람은 멸망과 사망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22절). 인간의 길은 하나님께서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땅끝까지 감찰하시고, 바람의 무게를 정하시고, 물의 분량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다. 21세기 최첨단의 수퍼 컴퓨터도 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알지 못하며, 일어난 바람의 길도 알지 못한다. 매시간 관측하면서 예측하고 수정하며 대비하는 수준이다. 국지성 소나기도 알지 못한다. 욥은 수퍼 컴퓨터로 계산해보지 않아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고, 현대 지성인은 더 큰 수퍼 컴퓨터와 위성이 있으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한다.

은과 금의 값을 평가할 수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지식을 평가할 수 없다(마태복음 13장).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하나님을 알아서 아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욥은 인간의 좋은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길을 알 수 없는 답답함이 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분명히 고백하면서도 답답한 그리스도인에게 욥의 실패는 큰 위로가 된다.
알지못하지만 믿으면서 평안과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성령의 작용을 알 수 있다. 이성의 제한이 아닌 이성이 활성화되는 은혜의 세계를 볼 수 있다.

 

욥 29:1-25. 욥의 회상, 죽음과 같은 현재 그러나 희망

27:1, 29:1, 마솰’(), ‘"풍자"(개역개정), parable(비유,kjv), discourse(nasv,niv,담화), 비사(개역), 비유(바른성경,새번역), 탄식하며 읆조렸다(공동번역), 격언(신번역) 다양하게 나타났다. 개역처럼 "비사"가 번역본을 비교에서는 좋은 의미전달로 보인다. 욥은 어떤 말장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욥이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비장의 지식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 세친구들에게 교훈적인 성격이 있다.

4절. 하나님이 내 장막에 기름을 발라 주셨다(개역개정)
    그 때는 하나님의 우정이 내 장막위에 있으며(개역)
    그때는 하나님의 친밀하심이 내 장막 위에 있었고(바른성경)
    하느님께서 나의 천막을 감싸주시던 그 때, (공동번역)
     God's intimate friendship blessed my house, niv
     when the secret of God was upon my tabernacle; kjv
     When the friendship of God was over my tent; nasb -> 개역개정의 번역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왜 기름을 발라 주셨다고 번역을 했을까? 현대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성경을 번역해버린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상당히 위험한 번역으로 보인다. "소드"에 대한 번역이 상당이 다양한데(친교, 우정, 보호 등), "기름부음"이란 것으로는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다.

1. (1-10) 욥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던 때에 대해서 회상하면서 현재 그 보호가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욥은 하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함에서 괴로워하면서 하나님의 보호까지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지의 불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만, 보호에서 의심이 발생한 상태다. 하나님께 보호받은 상태라고 생각한 때는 왕성하고 명예로운 상태였다. 그러나 비천한 상태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알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가? 십자가가 없이는 불가능하며, 하늘의 영광을 알 지 못하면 불가능한 세계다. 예수께서는 하늘영광에서 이 땅에 성육신하셔서 비하의 삶을 사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족하고 족한 하늘영광의 부요하심을 몸소 보이셨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7-18)     

2. (11-17) 욥은 하나님께서 주신 왕성과 명예로 가난한 자를 도왔고, 가난한 자들의 기쁨의 축복도 받았음을 회고한다. 그리고 불의한 자의 횡포까지 막아 보호하는 바른 일을 행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른손이 한일은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명령하신다. 선한일을 할 때에 범하는 것이 자기의에 대한 기억일 것이다. 주님 약한 백성을 도와주셔서, 모든 선행함을 잊고, 악을 선으로 싸울 수 있게해주세요.

3. (18-25) 욥은 지금에서 하나님의 호의는 죽음을 주는 것으로 주장한다. 비참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썩지 않은 뿌리 때문에 희망을 제시한다. 죽음의 비통한 지경에서도 썩지 않은 양심은 가장 큰 희망이다. 그래서 의인은 일곱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욥은 다시 회복한 뒤에 가난한 자들을 향한 인애를 행하겠다고 다짐한다.
의인의 고통은 가난한자의 고통이며 피조물의 고통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고통을 주시는가? 졸렬한 답으로 의인이 선으로 악을 이겨 가난한 자에게 인애를 베푸시길 원하시는 것이다. 이 시대에 의인을 보겠느냐?

 

욥기 30장 1-31. 자기 상황에 대한 욥의 탄식

1. (1-15) 모든 이가 욥을 보면서 비웃는다. 욥의 불행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회자하는 것에 대한 욥의 탄식이다. 옛날에는 그림자도 밟지 못했을 어린 것들이 몰락했다고 한순간에 조롱거리로 만든다. 욥은 변함없이 사랑과 돌봄을 행했지만, 그 사랑과 돌봄을 받은 사람들이 등을 돌리며 조롱하는 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다. 세상사는 것이 다 그런 것인가? 3,000년전이나 최첨단 21세기나 사람사는 환경은 바뀌어도 모습은 바뀌지 않는다.
 욥은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통으로 생각되니 더 큰 충격이다. 욥의 고난에서 응답하지 않으신 하나님, 우리의 곤란에서 응답하시지 않은 하나님. 그러나 많은 믿음의 선진들, 욥, 다니엘 등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굴하지 않았다. 구약에서는 드라마틱한 전환이 있지만, 십자가 이후 12사도들과 바울 사도의 순교 그리고 수 많은 속사도와 교부들의 순교는 그 환란에서 응답이 없을 때 어떻게 견디는 것을 보여준다. 오직 성령으로 인하지 않고서는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없다. 주 예수께 생명과 마음을 다해 섬기는 것은 주 예수께 새생명을 얻은 자의 마땅한 도리이다.  

2. (16-23) 욥의 고통.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그리고 영적인 고통. 욥에게 온 두번째 환란으로 욥은 심한 육체의 고통을 앓고 있다. 그리고 친구들의 반박과 지탄으로 심적인 큰 부담이 있고, 하나님의 응답이 없음으로 큰 고통이 된다. 욥에게 가장 큰 충격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음이다. -> 현재 우리에게 가장 큰 충격은 지갑과 통장에 잔액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은 육체적인 느낌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평안과 확신이다. 욥에게는 육체의 고통과 함께 영적인 불안과 억울이 증가되고 있다.

3. (24-31) 우리는 하나님을 왜 섬기는가? 사탄이 여호와께 힐문하듯이, "까닭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왜 사랑하시는가? "까닭없이"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 빈궁한 자를 도우면,, 복을 바라면,, 도움을 부르짖으면.. 까닭있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는가?
  욥의 변한 피부처럼 시꺼멏게 타들어가는 심장에서 터저 나오는 애곡이다. 하나님께서 조건없이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조건없이 사랑한다. 하나님께서 조건없이 독생자를 주셨으니, 나도 조건없이 나의 생명을 드린다.
 지난날... 남편으로 아버지로 하나님의 일보다 가정이 걱정될 때도 있었다. 지금도 걱정이 많다. 그러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믿음의 정진이 필요하다. 모든 짊을 주께 맡기고 주의 십자가를 지고 주와 함께 정진하는 것일뿐...

 2014년 8월 15일. 로마의 주교가 방문해서 나라가 떠들썩하다. 어떻게 로마 교회가 세계교회의 수위권을 가지게 되었는가? 자기가 주장하고 다수가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가? 로마 교회의 수위권은 당시 유럽의 전체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그것을 아메리카, 아시아에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일을 16세기 예수회에서 진행했다. 그 예수회에 기반을 둔 주교가 로마교회의 주교가 되었다. 유럽에서 잃어버린 땅을 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찾으려했고, 예수회의 꿈은 성공한 것 같다. 로마 교회의 통치 아래있는 남아메리카에서 억압이 가득한 민초들을 위한 해방신학이 등장했다. 그 지역의 로마 교회의 수장이 이 나라에 와서 평화와 가난한 자를 위한 복음을 외친단다. 구교를 이길 힘은 오직 하나,,, 침묵정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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