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1:1-40. 욥이 제시하는 자기 정당성
1절.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개역개정)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개역)
내가 내 눈과 언약을 맺었으니 어찌 젊은 여자에게 눈길을 주겠는가?(바른성경)
"I made a covenant with my eyes not to look lustfully at a girl. [niv]
I made a covenant with mine eyes; why then should I think upon a maid [kjv]
I have made a covenant with my eyes; How then could I gaze at a virgin? [nasb]
젊은 여인에게 눈이 팔려 두리번거리지 않겠다고 나는 스스로 약속하였네 (공동번역)
젊은 여인을 음탕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겠다고 나 스스로 엄격하게 다짐하였다. [새번역]
내가 내 눈과 서약하였으니 어찌 처녀를 정욕의 눈으로 볼 수 있겠는가? [현대인의 성경]
我與眼睛立約、怎能戀戀瞻望處女呢
-> 위의 번역을 종합하면, 욥은 젊은 하녀들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기를 굳게 맹세했다. "언약"이란 번역은 상당히 다양하게 나타난다. 개정의 "눈의 언약"을 개역개정에서 "내 눈과 약속"으로 변화시켰다.
1. (1-23) 욥은 생활에서 여종이나 이웃여인에게 어떤 음욕을 거부한 성적으로 깨끗한 생활을 살았다. 모든 거래에서 거짓이 없이 공평한 저울로 거래하며 타인의 소출을 부탕하게 착취하지 않았다. 자기 소유인 종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그리고 가난한 자, 고아들을 살폈다.
-> 자본주의는 없는 자의 것이 빼앗기 쉬우니 더 철저하게 약탈하는 것을 자본의 논리로 정당화시켰다. 말로는 "분배"를 말하지만 부패한 인간의 심성에서 그러한 선이 나올리 없다. 욥은 3000년 전에도 힘의 원리가 아닌 철저하게 하나님의 법(생명의 존중하고 보호하는)에 맞게 생활했다. 이러한 사람에서 욥의 맹점은 자기 결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2. (24-40). 욥은 많은 재산에서도 두 마음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악인의 재난을 기뻐하지도 않았다. 나그네를 잘 접대했다. 욥은 자기의 모든 정당함을 나열했다. 욥이 나열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32장에 엘리후가 등장하고, 하나님이 등장하면서 욥은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보게 된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정당성 보다 사랑이고 온유인 것 같다. 인간 일상 생활에서 요구하는 것은 능력인데, 능력있는 인간은 사람의 마음을 만족, 위로할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힘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과 온유과 관용과 절제, 인내이다.
-> 항상 일등의 착각은 자기 위에는 아무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생각이 드는 경향이 발생한다. 욥은 수 십년을 세상에서 가장 흠없이 완벽한 생활을 했다. 환난이 없었다면 욥은 그 상태를 너무나 정상적이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친구들을 향한 분노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나보다 더"라는 울분이 터져 나온 것이다.
욥기 32:1-22 엘리후의 등장
1. (1-5) 연소한 엘리후의 등장
욥이 세 친구와의 논변에서 이길 무렵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며 끼어들었다. 그 이유는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한 것으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2절). 세 친구들에게 화를 내며 그러한 욥의 말에 답변하지 못함을 지적했다. 엘리후는 4사람보다 나이가 상당히 어려서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세 사람이 욥에게 더 이상의 말문이 막히자 이야기에 들어왔다.
2. (6-22) 할말이 많은 엘리후
엘리후는 나이가 어려서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듣고 있었다. 그런데 연륜이 많음에도 자기에게 가르침이 없었다. 그러나 전능자의 숨결이 주는 깨달음을 받으면 비록 나이가 어릴지라도 어른이나 노인보다 더 깊을 수 있다. 그래서 세 어른의 할 말이 없으니 자신이 등장해서 이야기를 계속하겠다는 것이다(6-10).
엘리후는 욥의 변론에 대해서 할 말을 참고 있었다. 그리고 세 사람이 꺽어주길 바랬다. 그런데 판단은 하나님이시라는 말로 더 이상의 답변을 하지 못함에 대해서 엘리후가 반격한 것이다. 엘리후는 자신의 지식으로 욥을 충분히 꺽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11-16). 이 판단은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엘리후는 자신의 상태가 팽팽한 포도부대처럼 가득찬 자기 할 말을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의 말은 사람의 낯을 보지 않은 순수한 지식이라고 주장했다(17-22).
-> 인간의 지식에서 승자는 없다. 인간의 말과 표현으로는 하나님의 공의를 표현할 수 없다. 욥이 비록 말로는 세 친구를 이겼지만, 욥을 이길 엘리후가 기다리고 있었다.
욥기 33:1-33. 엘리후가 욥에게 두려운 하나님에게 중보자와 은혜로 회복을 주장했다.
1. (1-12) 욥에게 논쟁을 시작을 선언하는 엘리후
엘리후는 욥에게 변론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영, 전능자의 기운을 힘입어 이야기 한다고 했다. 그리고 욥이 말한 것에 대해서 제시하면서 반격한다. 엘리후가 말하는 욥의 진술(9-11절). "나는 깨끗하여 악인이 아니며 순전하고 불의도 없거늘 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잘못을 찾으시며 나를 자기의 원수로 여기사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고 했다. 이에 대한 엘리후의 답은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시다"이다(12절).
--> 욥의 말을 그대로 받아서 비판한다면 결국 욥의 마음은 읽지 못한 것이다. 엘리후는 신학은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다"이다. 세 친구의 신학은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신다"였다. 욥의 신학은 세 친구와 공통점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측량할 수 없는데, 세 친구들이 비판에 대한 자신 사이에서 판단을 원하는 신원을 했다.". 엘리후는 욥의 신원에 대해서 욥이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선언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2. (13-33) 엘리후의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이다.
엘리후는 하나님이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지 않으신다고 규정했다(14절). 그리고 꿈과 환상으로 귀에 들리는 경고로 두려게하여, 교만을 버리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에게 어떤 피해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3-18).
그리고 욥의 심한 중병 상태는 징계의 상태로 말한다(19-22). 이것은 세친구와 동일하지만, 엘리후는 그 상태의 치료에 대해서 말을 한다. 그것은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중보자"가 되어 회복한다는 것이다. [원어, 말라크, 중보자-개역개정, 바른성경, mediator-niv,nasb. messenger-kjv, 개역-해석자.. 개역성경에서는 천사가 중보자가 될 수 없음에 해석자로 번역한 것으로 보이고, 개역개정에서는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천사가 중보자로서 이해될 수 있는 여지가 되었다. 즉 엘리후의 신학에서 천사가 중보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견해가 될 수 있다.] 엘리후는 천사 중 한 중보자를 통해서 욥이 회복될 수 있고, 기도하여 은혜로 회복되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엘리후는 욥의 고난에서 회복되는 것이 중보자와 은혜로 제시하는 것이 세 친구들과 다른 것이다. 그런데 중보를 천사에게 둔 것과 조건적 은혜(기도하여)는 세 친구들과 같은 인과율에 근거한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잘 사용하는 인과율은 "뿌린데로 거둔다"이다. 너무나 맞는 원리이고 성경에도 나타나기 때문에, 은혜의 법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과율 법칙에 적용시켜 버렸다.
욥기 34:1-37. 엘리후의 욥의 이해와 신학(악을 행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심판)
1. (1-9) 엘리후의 욥의 말 인용.
엘리후는 자신이 욥의 말을 분별한다고 장담을 한다(1-4절). 그리고 욥의 말을 반복한다.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부인하셨고 내가 정당함에도 거짓말쟁이라 하였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화살로 상처를 입었노라"고 했다(5-6절). 그리고 욥과 같은 사람이 없는 욥이 비방과 악한일을 하는 자와 한패라고 몰아부친다(7-9절). 그리고 욥이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고 비난한다고 했다.
2. (10-37) 자신이 한 말을 근거와 자기 신지식을 설파함
엘리후는 자기가 제시한 인용을 확실한 근거로 세우고 욥을 비판한다. 엘리후가 판단한 욥의 모습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욥이 하나님을 향한 토로에 대해서는 엘리후의 일면의 옳음이 있다. 그러나 욥에 대한 악의적인 태도는 그의 관점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엘리후의 신학(10-15절)은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않고(10절), 공의로 판단하신다(11-15절)"이다. 엘리후는 악을 행하지 않으심과 공의를 행하심에 대해서 장황한 설명을 한다(18-25절). 그리고 악한 자의 결국은 멸망이라는 것을 선언한다(26-30절). 그래서 경건하지 않은 사람이 권세를 잡지 못하도록 하다는 것이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욥의 불평이 하나님을 악하다고 평가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엘리후의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않음"에 대한 문구가 "하나님은 선하시다"와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차이가 있다.
3. (31-37) 엘리후는 자기가 이해한 욥과 하나님 지식으로 비판을 가함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깨달아 뉘우치고 반복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음에 대해서 지적한다. 즉 욥이 무죄하다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이러한 욥의 행동에 대해서 "무식無識, 무지無智"하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욥이 깨달을 때까지 심판이 계속되길 원했다. 악인을 넘어서 안하무인眼下無人, 人面獸心에게 심판받음이 지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욥이 세 친구들을 향해서 변론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더욱 반역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욥기 35:1-15. 엘리후는 욥이 교만하다고 판단한다.
1. (1-3) 엘리후가 욥의 의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됨에 거부하며, 지금 환란과 병중에 있는데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힐문한다.
2. (4-16) 엘리후가 욥을 악한 것을 평가한다. 욥으로부터 학대를 받은 사람들의 부르짖음에 의해서 욥이 고난받은 것으로 제시한다(9절). 욥을 악인의 교만으로 판단하여, 욥의 부르짖음을 거부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악인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음으로 연결시켰다. 그래서 욥이 속히 악행을 깨닫고 자기 의를 드러내는 헛된 말을 하지 않도록 촉구한다.
-> 엘리후가 판단하는 욥의 상태는 세 친구들보다 더 심하게 왜곡되었다. 그런데 욥이 말한 애매한 부분들을 인용해서 욥을 교묘하게 공격한다. 마치 "악의적 편집"이 생각난다. 신학이나 정보에서 악의적 편집은 독자를 함정에 빠뜨리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신학에서 악의적 편집을 하지 않으려면 전체에 대한 도식과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병행되어야 하는데, 전체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전제된다. 엘리후의 신학에서 "하나님은 악하지 않다"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은 "선하시다"이다. 엘리후는 악한 부분을 악의적으로 편집한다.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선을 부각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욥기 36:1-33. 엘리후의 신지식. 하나님의 고난을 통해서 교육한다.
옳은 말은 바른 말이 아니라, 현실적인 어떤 형태가 있는 것이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한 훈련을 말하지만, 정작 욥에게 필요한 위로와 격려는 없다. 옳은 진리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적재적소에 배치되지 않으면 허공에 소리에 불과하다.
1. (1-16) 고난으로 교육하고 훈련하시는 하나님.
엘리후는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 있다고 제시한다(1-4). 그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어 그들의 소행과 악행과 교만의 행위에 대해서 귀를 열어 교훈을 알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5-10). 그래서 그 고난에서 돌이킴을 갖도록 하여 형통하도록 한다. 하나님께서 곤고한 자를 구원하시는 방법은 고난으로 말씀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아는 것이다. 엘리후는 욥이 고난에서 하나님께서 환난에서 형통으로 옳기시는 상이 될 것이라고 한다.
2. (17-33) 엘리후의 지식에 근거하여 욥을 충고함
엘리후는 하나님의 고난에 교육과 훈련, 그리고 심판과 정의가 있으니 겸손히 받아드려 악에서 벗어나라고 권면한다(17-21). 하나님은 권능이 있어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하나님을 높이라고 권면한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불의를 용납하지 않음과 하나님을 찬양해야 될 대상으로만 제시한다. 엘리후의 자세는 매우 엄격하고 자신에 차있다.
욥기 37:1-24. 엘리후의 마지막 변론
1. (1-13) 창조의 신비. 하늘의 구름의 세계
엘리후는 하나님의 신비, 창조의 신비에 대해서 측량하지 못하는 하늘의 구름의 세계를 제시한다. 번개불, 천둥의 관계(구름이 부딛히는데 번개와 천둥 소리가 나는 조화, 솜구름인데 거기에서 울려버치는 놀라운 빛과 소리), 구름 조각에서 비가 내리는 신비, 구름이 얼음이 되는 신비(눈의 결정체도 동일한 것이 없다).. 이러한 구름을 조정하시는(12절) 하나님께서 운행하신다.
그런데 엘리후는 이 구름으로 징계와 긍휼을 주시는 표징으로도 제시한다. 하나님께서는 햇빛과 구름은 의인과 악인에게 공통으로 주신다.
2. (14-24) 엘리후는 욥에게 묻는다.
엘리후는 욥에게 자신의 지식을 펼치며 욥에게 깨닫으라고 촉구한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함(24절)을 마지막으로 말을 마친다. 엘리후의 말은 하나 흠이 없는 말이다. 그렇다면 욥에게 엘리후의 말은 감동과 깨달음을 주었을까? 욥은 할말은 없었지만 깨달음이나 감동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욥에 대한 배려가 없기 때문이다.
고경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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