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내러티브의 위력, 영화 "노아"

형람서원 2014. 3. 21.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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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의 위력, 영화 "노아"
영화 "노아", 벤허, 십계, 쿼바디스의 뒤를 이는 기독교의 명작인가?
기사입력 2014-03-21 오전 9:46:00 | 최종수정 2014-03-21 오전 9:53:38   

3월 20일(목)에 영화 "노아"가 전국 동시 개봉되었다. 개봉되기 전에 이슬람권에서 상영이 금지되었다는 뉴스는 기독교적 영화인가로 흥미를 충분히 끌었다. "노아"는 성경적 영화가 아닌 전형적인 내러티브의 재구성된 영화이다. 내러티브의 위력은 본문에 있지 않고, 독자의 본문 읽기와 재창조의 능력에 있다. 그러니 내러티브의 독자는 새로운 창조자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를 평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다만 성경의 정보와 다른 부분이 있고, 명시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영화 작가의 독특한 해석 관점이 부여되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서초교회 잔혹사"가 자꾸 떠 올랐다. "서초교회 잔혹사"의 작가는 자기의 작품이 "100% 사실, 10% 허구"라는 독특한 설명을 했다. 내러티브의 마력일 것이다.

영화 "노아"가 성경적 진술(창세기 5장 9장까지)과 다른점은..
첫째, 방주에는 노아와 세 아들과 자부가 8명이 동승했다(창 7:7, 창 8:18). 영화에서는 6명이 탑승했고, 한 명 두발가인이 몰래 잠입했다.
둘째, 육지에 코로 호흡하는 것들은 모두 죽었다(창 7:22). 그런데 영화에서는 두발가인이 몰래 배에 탑승했다.
셋째, 성경에서 "무에서, Nothing" 천지를 창조했다는 구절은 없다(창 1:1).
넷째,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것은 여호와의 명확한 계시와 구체적 내용에 의한 것이다(창 6:9-22). 그러나 영화에서는 노아의 환상과 므두셀라의 인도에서 노아의 자기 선택에 의한 것이다.
다섯째, 성경에서 까마귀를 보낼 때에는 산 봉우리가 보일 때였다(창 8:6).

영화 "노아"가 주는 상상력의 해석이지만 성경적 원리 부합되지 않은 것.
첫째, 노아 홍수 이전의 지구의 모습이 현재와 유사 혹은 동일한 것이다.
둘째, "빛의 아들"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사람을 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그들을 배신했다는 묘사는 배우 복잡한 구도를 갖고 있다. 또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들이 다시 회복되어 천상으로 복귀하는 것은 기독교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대치된다.
         또한 방주를 그들과 함께 제조했다는 것은 더욱 어불성설이다.
셋째, 성경의 "네피림"은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의 혼인에서 발생하였다. 그리고 그런 기형적인 형태의 거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넷째, 영화 초기에 노아의 아버지 라멕이 두발가인에 의해서 살해되는 장면이다. 이것은 마치 가인과 아벨의 전철인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에는 명시되지 않았다.
다섯째, 노아가 배에 승선하려는 사람들을 거부했다는 것은 매우 작의적 해석이며, 성경에도 배치된다(벧후 3:20).

영화 "노아"가 주는 신비주의적이고 자연주의적인 모습...
첫째, 노아는 사람이 없는 평화의 지구를 상상하며, 그것이 창조주의 뜻으로 생각한다. 노아는 그 목적을 위해서 인류 전체를 몰살하고, 자기의 후손까지 죽이려는 계획을 갖는다.
둘째, 므두셀라가 준 씨앗 하나에서 거대한 밀림이 형성되는 것은 창조주의 능력이 아닌 상상에서만 가능하다.
셋째, 창조주의 자손들의 은둔 생활이다. 므두셀라는 산 중턱의 동굴에서 거주하는데 바람직한 상상이 아니다. 또한 므두셀라의 행동은 모든 것을 초월한 것처럼 보이며, 신비적 능력으로 임신이 가능하도록 하기도 한다.
넷째, "신비한 돌"의 등장은 전형적인 신비주의의 기법이다.
다섯째, 영화 "노아"는 풍성한 자연이 등장한 반면, 가장 잔인한 파괴와 살해 장면이 동시에 등장한다.

영화 "노아"가 볼 수 있는 영적으로 혼란을 줄 수 있는 장면
첫째, 노아의 고뇌, 영화에서는 노아가 왜 포도주를 마셨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영화의 단순화시킨, "많은 사람이 죽은 것에 대한 자책" 혹은 "손녀들을 죽이지 못한 불순종" 등등...
둘째, 영화에서는 범죄한 인류의 죽음이 정의로운 것처럼 제시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민족의 심판과 죽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그들의 회개를 원하신다. 그럼에도 무수한 죽음의 장면과 방주에 탑승하지 못하도록 하는 전투의 장면은 위험하다.
셋째, 방주 안에서 새와 짐승들을 잠 들게하는 장면이다. 향으로 잠들게 하는 것은 설득력을 주지만 위험한 생각이다. 만약에 그들이 잠이 들었다면 창조주의 섭리로 보아야 한다.
넷째, 방주의 문은 7일 동안 열려있었다(창 7:4). 철의 장막을 치고 치열한 전투로 방어한 흔적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문을 언제든지 열어놓고 기다리신다.
다섯째, 함의 반항과 불순종으로 본래 배도의 자녀처럼 묘사한 것이다. 관객들에게 상당히 호소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그러나 함에 대한 억측은 성경의 독자에게 그릇된 편견을 제공할 수 있다.

필자는 기독교 영화에서 "벤허"를 수작으로 꼽는데, 거기에서는 예수의 뒷모습과 십자가의 예수도 그림자로만 제시되는 감독의 세심한 배려가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영화에서 신성에 대한 배려를 한 유일한 영화이다. 그런데 영화 "노아"는 전형적인 내러티브로 재창조된 "노아"일 뿐이다. 내러티브에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능이 없고, 선과 유익을 취하는 선택만이 있다. 그럼에도 영화 노아에서는 기독교적 선을 취할 수 있는 것을 거의 찾기 어렵다. 영화 노아는 전형적인 자연주의에 기초한 시대정신이 반영되었다. 기독인 영화 관람객들이 세심하게 영화를 관람한다면, 성경과 차이를 즐기며 시대 정신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영화이다.


<영화 "노아" 메인포스터 갈무리>

고경태

www.ctime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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