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스크랩] 영화 <300>과 테르모퓔라이 전투

형람서원 2007. 3. 31. 18:53
728x90
반응형
나의 평가
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

스파르타와 레오니다스왕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 중앙 지대에 위치한 고대 도시 스파르타는 산이라기보다는 산맥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한 거대한 타이게토스 산자락으로 둘러싸여 있는 천연의 요새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스파르타에만 높은 지대에 형성되는 아크로폴리스가 없다. 지금의 스파르타 외곽 - 고대나 지금이나 인구가 몇 만이 되지 않는 원체 작은 도시라 <외곽>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으나 - 에 가면 고대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의 조각상이 서 있다.

 

 

 

그는 300명의 군대로 페르시아 대왕 크세르크세스와 대적했다는 테르모필라이 전투로 너무도 유명하다. 이 전투의 상세한 묘사는 헤로도토스의 <역사> 7권과 9권에 나온다.

 

레오니다스는 페르시아 왕이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는 말에 '와서 가져가라'(molon labe; 위의 레오니다스 상 정면에 쓰인 말)고 응답했다고 한다. 테르모퓔라이(테르모는 ‘뜨거운’을 뜻하고, 퓔라이는 ‘큰 문’을 뜻한다. '뜨거운 큰 문'이기에 아래에 언급한 소설 <불의 문>이란 제목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지역 사람들은 단지 ‘퓔라이’라고만 부른다.)는 소아시아 지방에서 그리스로 건너오는 길목이 되는 곳이다.

 

테르모퓔라이와 플라타이아 전투

 

테르모퓔라이와 플라타이아 전투에 대해서 몇 마디 더 부기하기로 하자. 헤로도토스는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탁월한 용맹성을 과시했던 도시들 및 개인들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헤로도토스는 스파르타인 가운데 아리스토데모스에게 승리의 찬사를 보내고 있다.

 

플라타이아(Plataea)는 작은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키타이론 산과 아소포스 강 사이에 위치한 남부 보이오티아(Boeotia)의 도시로서, 이곳에서 페르시아와의 최후의 전쟁(기원전 479년)이 벌어졌던 곳이다.

 

 

 

아리스토데모스는 테르모퓔라이를 방어했던 삼백명의 스파르타(라케다이모니아)인 중 한 사람으로서 단지 그 혼자만이 그 전투에서 무사히 귀환했던 군인이었다.

 

사실상 아리스토데모스가 스파르타인들이 테르모퓔라이 전투에서의 그의 귀환에 부과하였던 오명에서 벗어나기를 염려했다고 할 것 같으면, 고귀한 공적을 남기기 위해서 장렬하게 플라타이아에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하지만 스파르타인들이 용맹에 대한 공훈으로서 최고의 인간에게만 수여했던 장례(葬禮)의 영예를 그에게는 시상하지 않았다. 스파르타 인들은 그에게 아리스테이아(전쟁에서의 최고의 공적) 주기를 거부했다.

 

그 이유는 그가 개인의 영광을 위해 흡사 광인처럼 열화에 휩싸인 채로 싸움으로써 부대의 대오(隊伍)를 흐트러뜨려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 왜 그가 개인의 영광과 영예를 위해 대오를 이탈해서 싸워야만 했을까? 이 해답은 테르모퓔라이 전투에서의 그의 역할 때문이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테르모퓔라이(Thermopulai) 전투에 참여했던 레오니다스가 이끌던 스파르타 군인 300명 가운데 에우뤼토스와 아리스토데모스는 안염(眼炎)을 앓아 캠프를 떠나 알페노이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에우뤼토스는 다시 전장으로 나아가 싸우다 전사했지만, 아리스토데모스는 그것을 구실로 혼자만 살아남아 스파르타로 돌아왔다고 한다. 다른 보고에 따르면, 그는 전령으로 진지를 떠나 있다가 제시간에 돌아와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늑장을 부려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와 함께 전령으로 떠났던 동료는 전장으로 돌아와 싸우다 죽었다. 스파르타로 돌아 온 아리스토데모스는 자신의 불명예스러운 행위로 말미암아 치욕과 불명예을 감수해야만 했고, 그 치욕스런 행위 때문에 ‘겁쟁이 아리스토데모스’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 그는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이전에 자신이 받았던 오욕을 씻어버리기 위해 ‘죽음을 바라며’ 호전적 난심에 휩싸인 채 대열에서 뛰쳐나와 큰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스파르타인들은 ‘죽기를 바라지 않고’ 싸웠던 포세이도니오스를 더 높이 평가하고, 아리스토데모스를 제외한 모든 전사자들의 명예를 기렸다고 한다.

 

소설 <불의 문>

 

몇 해 전인가 <불의 문(Gates of Fire; 이은희 옮김, 들녘)>이란 소설은 헤로도토스의 <역사> 제7권과 제9권에 언급되고 있는 테르모퓔라이, 플라타이아 전투를 배경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300명의 소수의 인원으로 2만명의 페르시아 군대와 맞서 싸웠다는 사실은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마치 구약 성경 속에 나오는 ‘무협 소설’의 한 장면, 다윗이 돌팔매 한 방으로 골리앗을 쓰러뜨렸다는 어찌 보면 가장 멋없는(?) 싸움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소설은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좀 더 짜임새 있는 세밀한 ‘이야기의 구성’을 통하여 읽는 기쁨을 나누어주고 있다. 단순히 소설적인 재미뿐만 아니라, 이 소설을 통하여 독자들은 당시의 스파르타 인들의 삶의 방식과 세계관을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도 가질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이와 관련된 ‘군국주의적’인 스파르타인의 생활상을 플라톤의 <법률>을 읽음으로써도 파악해 볼 수도 있다.

 

역사는 Faction이다. 그러나 진실에로의 접근도 필요하다

 

왜 옛날이야기를 꺼냈느냐 하면, 곧 <300>(감독 잭 스나이더)이란 영화가 개봉되는 모양이다. 이 영화의 소재가 되는 것이 위에서 설명한 테르모필라이 전투라고 한다.

 

신문에 난 영화평을 보니, 전투 신을 비롯한 여러 장면들은 볼만하나, 그 안에는 인종적 편견이 들어 있고,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인간 차별을 그리고 있으며, 스파르타 군인들은 모두 <몸짱>으로 표현되고, 페르시아 군인들은 이상스럽도록 잡다한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어를 못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이방인들을 <바르바로이>라고 불렀다 한다. 이 말이 변해 오늘날 야만인(barbarian)되었다. 그러니까 윈칙적으로 말하자면 바르바로이란 말에는 야만인이란 의미가 애초에는 없었다. 사실상 스파르타에는 스파르타 시민이 아닌 외국인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이 더불어 살았다. 인종차별이란 것도 좀 따져 볼 일이다.

 

스파르타가 원체 작은 나라로 독자적으로 생존하기가 어려운 산악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은 앞서 언급했다. 오죽했으면 스파르타 군인들은 전장에서 돌아와 가죽신을 풀 시간도 없이 연이어 전장에 투입됐다고 한다.

 

스파르타는 우생학적으로 좋은 아이를 얻기 위해 비옥한 토지 위에 씨를 심게 하려는 의도에서 성의 자유를 상당한 정도 허용했다.

 

스파르타의 여자들은 달리기와 레슬링 창던지기와 같은 운동을 통해서 몸을 단련시켰다. 튼튼한 모체에서 튼튼한 아이가 태어나기 때문이다. 신체의 단련을 통해서 강한 정신을 소유하도록 여성을 또한 교육시켰다. 심지어 담대한 마음을 갖도록 젊은 여성도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벌거벗은 채로 행진하라고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남자와 여자가 한데 어울려 춤도 추고 노래를 부르는 것조차 허용했다.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움을 갖지 않았던 것은 정숙하도록 훈련받았고, 전혀 바람기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젊은 여자들에게 고귀한 행동과 영광을 갖도록 교육했던 것이다.

 

외국에서 온 여성이 레오니다스 부인인 고르고에게 이 세상에서 남자를 지배할 수 있는 여자는 스파르타의 여자들뿐이라고 했다.

 

그러자 고르고는 “그야 당연하지요. 스파르타의 남자들을 낳을 수 있는 여자들은 우리들뿐이니까요”라고 했다고 한다. 스파르타의 여성들은 그 만큼 자부심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파르타 여인들은 난잡한 성생활을 했을까?

 

나체의 상태로 운동경기에 참여하고 춤추는 일은 결혼하는 동기를 부여하고 결혼을 장려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독신자들은 제약을 받았다고 한다. 한 젊은이가 유명한 장군인 데르킬리다스 장군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도 인사하지 않은 채, 오히려 “당신은 자식이 없으니 나를 위해 자리를 양보해 줄 사람도 없을 것 아니오”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결혼을 명예롭고 존엄한 것으로 여겼던 스파르타인들은 질투심까지 배격했다고 한다. 물론 음란한 무질서를 배제했지만, 남편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남성에게는 부인을 내주고 자식을 얻는 것을 오히려 영예로운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따라서 스파르타에는 간통이 있을 수 없다. 사실상 그 의미조차 몰랐던 셈이다.

 

한 외국인이 늙은 스파르타인인 게라다스에게 간통한 자를 어떻게 처벌하냐고 물었다.

“우리에게는 간통한 자가 없소.”
“그러나 만일 있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다면 벌로서 타이게토스 산 너머로 에우로타스 강물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목이 긴 소를 내놓아야만 하오.”
“세상에 그렇게 큰 소가 어디 있소.”

그러자 게라다스는 “마찬가지로 어떻게 스파르타에 간통하는 자가 있을 수 있겠소”라고 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 <리쿠르고스> 15)

 

어차피 역사 해석은 독단일 수밖에 없다. 객관적으로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그 많은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다 수집할 수 있겠는가? 설령 수집했다고 해서 하나의 <객관적> 해석만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Fact에다 Fiction이 결합된 Faction일 수밖에 없다.

 

역사적 사실과 진실도 달빛과 햇빛에 바라게 되면 신화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게 바로 어제 종영된 MBC의 주몽이 보여주는 바이고, 중국인의 역사왜곡이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by  명덕 

 

 

* <무브온21블로거기자단>이란 : 무브온21에서 활동하는 논객들이 모여 구성한 기자단입니다. 무브온21의 주요 칼럼과 무브온21 논객들이 기획한 기사와 인터뷰를 내보냅니다. 

 

moveon21.com

 

 

 

출처 : MoveOn21.com
글쓴이 : MoveOn21 원글보기
메모 :
반응형

'영화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엑소더스' 흥행 1위가 반갑지 않은...  (0) 2014.12.06
내러티브의 위력, 영화 "노아"   (0) 2014.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