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272-(306)-337) 황제의 3 아들
콘스탄티누스는 311년에 동방 황제를 제압하고 통일 황제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는 헬레나이다. 헬레나는 성지 순례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다. 대표적인 장소는 시내산 수도원을 건축해서 시내 반도에 산이 시내산이라는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가 막센티우스를 깨친 후, 막시니아누스를 격파, 제국 동부를 통일했다. AD 311년 기독교 교도에 대하여 콘스탄티누스, 갈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조건부의 관용령(寛容令)을 낸 후, AD 313년 콘스탄티누스와 함께 밀라노 칙령으로 완전한 자유령(自由令)을 공포했으나, 후에는 이를 무시했다. 콘스탄티누스의 정적인 막센티우스와 막시무스가 죽었는데, 결국 리키니우스와 양분되어 갈등하게 되었다. 결국 AD 323년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와 대립 해륙(海陸)에서 패배하고 AD 325년 데살로니가(Thessaloniki : Salonika)에서 처형되었다.
콘스탄티누스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 플라비우스 크리스푸스(Flavius Crispus)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미네르비나에게서 난 아들이었다. 그는 326년에 아버지 콘스탄티누스의 혹독한 고문으로 사망했다(계모 파우스타의 '음모론' 가설). 콘스탄티누스를 "부인과 아들을 살해한 남자"로 잔혹성을 강조하는 이미지와 "기독교의 수호자"의 이미지로 대립되어 나타난다.
콘스탄티누스와 파우스타 사이에 3남, 콘스탄티누스 2세(Flavius Claudius Constantinus, 316-340), 콘스탄티우스(Flavius Iulius Constantius, 317-361, 콘스탄치우스), 콘스탄스가 있었다. 337년 황제가 죽을 때에 각각 20세, 19세, 17세였다. 세 아들은 로마 제국을 분할 통치했다.
325년 니케야 공의회를 결정한 뒤, 콘스탄티누스는 아타나시우스를 추방했다. 아타나시우스는 328년에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에 알렉산더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335년 니케야 정통파인 아타나시우스를 추방했다. 니케야 공의회를 결정한 황제가 니케야 정통파를 추방시키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다. 황제가 죽자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서 아타나시우스는 복권되었다.
콘스탄티누스 2세와 콘스탄스, 두 사람의 무력 충돌에서 콘스탄스가 콘스탄티누스 2세를 이겼고, 콘스탄티누스 2세는 전사했다. 콘스탄스는 콘스탄티누스 2세에 관한 기록을 모두 소멸시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콘스탄티누스 2세와 콘스탄티우스는 아레안파를 지지했고, 콘스탄스는 니케아 정통파를 지지했다. 그것은 339년 알렉산드리아 대주교인 아타나시우스가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주도한 아레안 파에 의해서 추방되었고, 로마의 율리오 1세에게 피신할 때였다. 당시 이탈리아 지역의 황제가 콘스탄스였고, 343년 불가리아 소피아 지역 사르디카 공의회를 통해서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했고, 콘스탄스는 아타나시우스를 비호했다(동방 주교들이 불참했고, 로마 교회의 특권을 인정하는 법을 제정함). 콘스탄스에게 굴복된 콘스탄티우스는 알렉산드리아 대주교에 아타나시우스를 복귀하는 것을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우스는 지지했고, 이교도 박해법을 제정해서 그리스-로마 신전을 파괴했다. 그리고 아리우스 반대파인 주교들도 추방하고 박해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를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336년에 아리우스를 불러 신앙을 검증하려고 했지만 아리우스가 급사함으로 직분 회복을 하지 못했다.
아타나시우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복귀했는데, 338년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서 다시 추방되었다. 343년 사르디카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 복귀를 황제에게 청원했다. 350년 황제 콘스탄스가 죽자 아리우스주의에게 힘이 실렸다. 콘스탄티우스는 아타나시우스는 죽이려고 침략했지만, 아타나시우스는 이집트 사막으로 피신해서 6년 동안을 은거했다. 363년 박해자 콘스탄티우스 2세가 죽고 콘스탄티우스의 조카인 율리아누스가 황제가 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황제가 바뀌었지만 1년 4개월을 더 유배했고, 율리아누스가 전사하면서, 364년에 유배에서 해제되었다.
그런데 아리우스주의인 발렌스 황제(Flavius Valens, 328-378: 364년부터 378년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한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동생으로, 364년에 형과 함께 공동 황제가 되어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아 제국의 동방을 다스렸다)에 의해서 365년에 다시 유배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강한 항의에 의해서 366년 2월 1일에 다섯째 유배는 4개월만에 끝났다. 아타나시우스는 소천하는 373년 5월 2일까지 비교적 평탄하게 지냈다.
아타나시우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295년 경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했다. 318년에 부제(副祭, Deacon)로 임직되어 알렉산더 감독을 수행하였다. 328년 알렉산더가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되어 373년 죽을 때까지 47년간 사역했다. 아타나시우스는 5번의 추방(유배)으로 총 20년을 유배지에 보내면서도 타협이 없는 불굴의 용기로 니케야의 결정을 수호했다. 주교직 46년동안 20년을 유배지에서 보냈고, 일흔이 되던 해에 다섯 번째로 유배되었다(365 - 366).
그는 335년 독일 남서부 트리어(Trier)로 첫 번째 유배되었다. 337년 5월 22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망하고, 콘스탄티누스 2세가 서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했다. 새 황제는 아타나시우스에게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도록 허락한 뒤 다음 해에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그의 직위를 복권시켰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반대파에 의해 2년 후 재차 추방되었다. 이 때 그는 로마(Roma)로 가서 7년 동안 머물러야 했다. 346년부터 356년까지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는 가장 평화로운 황금의 시간이었고 또 그의 주요 저서들도 이때에 나왔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자인 황제 콘스탄티우스가 그를 추방키로 하고 군인들을 보냈다. 체포 위험에서 간신히 이집트의 사막 은든자들이 있는 곳으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361년에 죽기까지 은둔하며 지도했다. 그 이후에도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두 차례나 유배를 더 당했고, 366년부터 알렉산드리아에서 사역하고 주께 부름을 받았다. 그가 사역지에서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은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전폭적인 지지 때문이었다.
아타나시우스의 논쟁은 사변적인 철학논쟁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구원론에서 출발했다. 구원론은 구주 이해와 직결되어 있다.
동방교회의 구원론은 번죄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하는 신화(神化, deification) 구원론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며 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인간들도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신화로 나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의 본질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전의 이레니우스가 영지주의자들을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증거하기 위하여 구원개념으로 신화사상을 사용하여 발전시킨 반면,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주의자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필요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이 사상을 발전시켰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 아니면 구원은 성취될 수 없다.
니케아 신조의 서명을 거부하여 면직된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감독으로 복직되자 유세비우스 일파는 아타나시우스를 꺽고 아리우스를 복귀시킬 것을 획책했다. 이들의 설득에 넘어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32년 아리우스를 알렉산드리아의 장로로 복직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가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동일실체)"를 확실히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의 명령과 위협을 무시해 버렸다. 그 결과 아타나시우스는 로마 제국의 서쪽 지역, 독일의 트리어(Trier)로 추방되었다. 트리어를 오가는 중에 아타나시우스는 서방 교회의 지도자들과 많은 접촉을 가지면서 니케아 신조에서 확인된 정통 삼위일체교리를 공감하게 한다. 또 아타나시우스는 서방교회에게 이집트 사막지역에 널리 퍼져있던 기독교 은둔 수도사들을 소개했다. 그가 가장 흠모했던 사막의 수도자의 삶을 그린 "안토니의 생애 (The Life of Anthony)"는 제국 전체에 수도원 운동이 일어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안토니(St. Anthony, 251-356)는 수도원 운동의 창시자로 여겨지는데, 아타나시우스가 그 수도원으로 피신했다. 안토니는 그가 떠날 날이 다가옴을 느꼈을 때, 그는 그의 지팡이를 마카리우스에게 주고, 한 개의 양피 망토를 아타나시우스에게 주고, 다른 양피 망토는 그의 제자 세라피온에게 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세라피온과 주고 받은 편지는 성령론을 결정짓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337년 콘스탄티누스가 죽자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2세(Constantius II)는 아타나시우스의 복귀를 허락했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2세는 교회의 평화를 명목으로 니케아 신조의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동일실체)" 를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 유사실체)"로 교체하려고 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하여 아타나시우스는 극렬히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구원은 단순히 "하나님을 닮은" 위대한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 이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자 니코데미아의 감독이었다가 이제는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으로 승진한 유세비우스의 영향력에 의해 온갖 날조된 혐의를 뒤집어 씌고 339년 로마로 추방되었다. 그의 후임으로는 아리우스 일파의 감독인 카파도키아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of Capadocia)가 군대를 동원하여 취임했다. 후에 유세비우스와 그레고리우스가 죽자 콘스탄티우스2세는 347년 아타나시우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재정유용과 권력남용이라는 날조된 혐의가 거짓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콘스탄티우스2세의 형제인 서방의 콘스탄스1세(Constans I, 재위337-350) 황제가 살해되자 콘스탄티우스 2세는 3년의 전쟁 끝에 반란을 진압하고 동서로마 전체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콘스탄티우스2세는 동서방 로마제국 전체의 통치권을 획득하자 교회의 논쟁을 종식시킬 것을 결심했다. 이 일에 가장 걸림돌이라고 여겼던 아타나시우스를 제거하기 위해 353년과 355년에 열린 교회회의에서 서방교회가 아타나시우스를 버릴 것과 동방교회의 강제적인 연합을 강요했다. 이러한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로마 감독 리베리우스(Liberius)와 당대 최고의 지성인 고올 감독 힐라리우스(Hilarius of Potiers)와 노령의 코르도바의 호시우스(Hosius of Cordoba)가 추방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356년 무력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에서 세 번째 쫓겨나 이후 6년 동안 대부분 이집트의 수도사들에게서 피난처를 구했다.
콘스탄티우스2세가 죽고 콘스탄티누스의 조카 줄리안(Julian)이 로마의 새 황제가 되자 362년 유배되었던 아타나시우스가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다. 줄리안은 기독교를 몹시 싫어했는데 콘스탄티누스가 죽자 그의 아버지와 친척들이 대량으로 학살되는 틈에 여섯 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쥴리안은 콘스탄티우스2세를 아버지의 살해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을 죽음의 공포에서 떨며 성장했고, 외적인 교회의 규례들을 엄격히 지킬 것을 강요당했던 그는 콘스탄티우스2세가 주장하는 어떤 것이라도 증오했으며, 옛 헬레니즘의 문학과 생활, 철학을 예찬했다. 그가 황제가 되자 기독교 성직자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교회를 혼란케 할 목적으로 이전에 유배형에 처해졌던 모든 감독들을 복권시켰다.
이에 아타나시우스도 유배지에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는데,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아타나시우스는 쥴리안의 예상과는 반대로 교회를 결집했다. 362년 아타나시우스가 소집한 이 알렉산드리아 회의는 에큐메니컬 공의회로 간주되지 않지만, 이 회의가 381년 다가올 2차 에큐메니컬 공의회인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과의 관계성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용어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동일실체)"라는 것을 재확인하고 "호모이우시오스 (homoiousios, 유사실체)"를 정죄했다. 또 그의 친구들인 카파도키아 교부(바실리우스와 두 명의 그레고리우스)들의 도움을 받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일 본질(호모우시오스)을 공유한 세 위격(位格, hypostases)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성부, 성자, 성령이 비록 한 본질(호모우시오스)일지라도 같은 동일한 위격(位格)이나 실재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서 사벨리우스의 양태론도 분명히 반박했다.
쥴리안은 아타나시우스가 교회를 결집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에 아타나시우스는 다시 아프리카의 사막으로 도피했다. 363년 쥴리안이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사망하자 알렉산드리아로 네 번째의 망명에서 돌아왔다.
그후 동방을 다스린 발렌스(Valens,재위 364-378)는 콘스탄티노플의 아리우스파로부터 영향을 받아 아타나시우스를 정죄했다. 아타나시우스는 마지막 다섯 번째의 추방을 당하나, 발렌스의 동정으로 곧 돌아와 7년 간 알렉산드리아 감독직을 수행하다가 373년 주께 부름을 받았다.
발렌스를 이은 황제는 로마 50대인 데오도시우스( Flavius Theodosius, 347-(378)-395)이다. 데오도시우스는 가장 강력한 기독교 정책을 폈고, 380년 2월 27일, 데살로니카 칙령으로 로마의 국교를 기독교로 제정했다.
380년 2월 27일은 로마 제국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테살로니카 칙령을 발표한 날이다. 테살로니카 칙령은 아리우스파의 축출을 담고 있다. 동방제국에서는 실제로 아리우스파 주교들은 정통 주교들로 대체됐고, 아리우스파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영구 추방됐다.
그리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서 기독교의 교리 체계를 삼위일체로 니케야 공의회의 결정대로 재확정했다. 이때 신학화를 주도한 신학자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azianzus, 329-390)이다.
* 발렌스 황제는 로마 역사에 처음으로 서고트족의 영토내 진입을 합법적으로 허용했다. 410년에 코트족이 로마 시내를 침공하고 약탈했다. 로마 땅에 합법적으로 들어온지 100년만인 476년에 서로마는 멸망한다. * 어거스틴은 430년에 소천했다.
* 로마는 기원전 390년 켈트족의 침입으로 침탈되었다. 프랑스 지역에서 넘어온 켈트족은 무려 7개월 동안 로마를 휩쓸었다. 더 이상 빼앗을 게 없어 켈트족이 떠났고 로마는 철저하게 망가졌다. 둘째는 제국의 퇴조 분위기가 뚜렷하던 410년 서고트족의 침입이다. 침략자는 6일 동안 로마를 침탈했는데 교회만 빼고 모든 것을 강탈했다.
훈족은 동고트족 정복 후에도 서진을 계속하여 452년에는 로마를 침입했는데, 레오 교황의 담판으로 물러나기도 했다. 훈족의 쇠퇴한 후 동고트족이 다시 476년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킴으로써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다. 서로마 제국은 멸망되었는데 교회는 유럽으로 확산되는 역설적인 모습이 등장했다.
형람서원 고경태
# 아타나시우스
# 아타나시우스 생애


'아타나시우스 생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엑소더스' 흥행 1위가 반갑지 않은... (0) | 2014.12.06 |
---|---|
내러티브의 위력, 영화 "노아" (0) | 2014.03.21 |
[스크랩] 영화 <300>과 테르모퓔라이 전투 (0) | 2007.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