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알 발트의『교회교의학 I/1』§1,§2. 요약
교의학의 과제와 서설의 과제
고경태 목사
카알 발트는 “하나님의 자유”에 근거한 “유일신”론의 신학원리로, 모든 세대와 모든 지역을 아우를 수 있는 신학체계를 구성하는 것에 있다.
카알 발트의 [교회교의학]은 “교의학, dogmatic”으로 시작한다. 교의학은 교회의 고유한 것으로 “하나님에 관한 말, Rede vom Gott”의 내용에 관한 학문적인 자체검토이다. (1) “하나님에 관한 말”은 성경에 국한되지 않는다. (2) 학문적인 검토로 검증이 필요하며, 변화가 가능하다.
발트는 교회의 신학 이전에 하나님에 관한 말이 있다고 하여, 성경의 범주를 벗어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열었다. 발트의 신학의 구조는 “세 동심원”, “삼중적 의미(dreifachen Sinn, threefold form)”이다. 세 동심원은 한 중심에서 두 원과 놓인 방식으로 상호 교류되는 세 원을 의미한다. 발트는 원의 중심은 “교회”인데, 이것은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존재 안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시와 화해를 사람에게 선언하였다. 원의 핵심에서 물음을 제공하는 성경신학이고, 교회의 고유한 말에 대한 질문으로 조직신학이고, 목표에 대한 물음의 실천신학이고, 교회는 한 학문(eine Wissenschaft, a science)으로 이룰 수 있다. “학문(Wissenschaft, science)”은 모든 분야와 연결될 수 있고, 신학은 학문에서 특별한 위치를 갖는다. 발트의 “세 동심원”적 원리는 교회를 중심축에 놓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속적인 것과 이교적인 것까지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광범위한 원리 구조를 구축한 것이다.
신학은 인간에게서 경험되고 행해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검토이며, 이것을 교회에서 수행한다. 신학은 학문으로 인식대상에 대한 인간적인 노력이다. 신학은 학문이기 때문에 과거의 결정된 모든 것은 재검토될 수 있으며 더욱 발달된 문명 아래서 재정립해야 한다. 신학에서 어떤 것도 확정하거나 부정하지 않은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Dogma와 Dogmatic. Dogma는 검증이 완료된 바른 내용이고, Dogmatic은 하나님에 과한 진술내용으로 교회의 검증이다.
발트에 대해서 “존재의 유비, analogia entis”를 거부하고, “신앙의 유비, analogia fidei”를 확립한 것을 공적으로 생각한다. 그런 믿음의 유비는 인간적 인식이 전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통 신학의 “믿음의 신비”와 발트의 “믿음”은 차이가 있다. 이 인간적 노력과 시도는 "오직 십자가 신학, theologia crucis"으로 존재하며, 완료된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발트는 로마 카톨릭과 분리되는 것을 확인한다. 로마 교회는 “계시의 진리들”을 조립, 반복, 복사를 하는 것으로 평가했다. “계시의 진리는 자유하게 행하시는 하나님 자신이며 전적으로 오직 그분만이다.” 그래서 발트는 어떤 특정한 시기에 형성된 교의학적 노작을 반복하는 것은 수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을 “성서적인 주석신학”으로 제시했다. 교의학이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진술한 것”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근거 위해서”하는 것이다. 발트는 교회가 과거에 대한 모방, 반복에 대해서 “쓸데없는 사변, idle speculation”이라고 했다. 발트는 칼빈이 제시한 [기독교강요, I, 6, 2]에서 “하나님의 인식은 복종에서부터 탄생한다”는 것에 대해서, 플라톤을 언급한다. 플라톤은 플라톤주의가 되려면 플라톤주의의 제시에 감명을 받지 않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요청은 교회의 존재와 동일하며, 인간의 어떤 생각도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교의학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믿지 않은 영역까지 포함한다. 이는 누구든지 하늘의 음성에 불복종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행 26:19).
회심에 대한 요청. 발트는 회심(conversion, Wiedergeburt)은 인간의 언어(설교와 선포를 들음)로 인해 인간의 의식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즉 믿음, 거듭남, 회심은 인간적 경험과 태도의 개념이 된다. 회심하지 않은 신학자들은 의식과 경험이 없이, 오직 문구에 매달린다. 경건주의에서는 개인적 회심을 위해서 진지한 노력을 요구한 것은 놀랍지 않다. 이러한 노력은 교회 밖에서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비신화가 되는 것을 신학에서 방지해야 한다. 그래서 신학자는 회심이 신적인 예정, 말씀과 성령의 자유로운 은사, 행위하는 하나님에게서 일어날 수 밖에 없다는 교회의 사명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발트는 그때그때(je und je) 교의학의 결정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검토해야 한다고 한다. 이때 주를 경외함을 제시하며, 어려운 과정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어떤 교리(Glaubesakt, 신적 예정에 대한 규정), 어떤 노작도 항상 검토하여 최종적인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뻐함이 되는 곳에서(ubi et quando visum dest Deo) 언제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발트는 곧 교의학적 노작에서 “기도”를 제시한다.
발트는 § 2. 교의학의 서설(序說, prolegomena)에서 고대와 중세 교회의 큰 신학자들의 “지식의 방법, the way of knowledge, Erkenntnisweg)”을 통해서 구성한다. 하나님 인식의 가능성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물음을 접촉점으로 한다. 발트는 접촉점에 대해서 브러너와 신학적 격돌을 했다. 발트는 서설의 필연성, 즉 과거이해의 전환을 위해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시대의 구분은 신학적으로 정립되지 않는다. 둘째, 하나님에 관한 교회의 진술은 인간이성의 진술이기 때문에 신적계시척도로 전환해야 한다. 셋째, 교의학에서 우선 간주하는(praenumerando)는 없다. 즉 “우리는 이단이라고 말할 때에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한 형태로 생각한다.” 발트는 이러한 이해방식을 “복음적 이해”로 제시했다. 지식의 길의 정화는 양자의 의견을 들으며, 가능성에 대해서 개방하며, 다른 인식근거에 대해서 인정하는 방안이다. 정통교회가 이단을 정죄했는데, 16세기에 루터파와 칼빈파는 로마카톨릭에 의해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래서 정통과 이단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할 수도 있고,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발트가 교의학 서설이 가능한 것은 인간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발트는 교의학을 학문의 한 부분이며, 인간현존의 포괄적인 설명의 한 부분이다. 그것은 교의학 밖에서 먼저 praenumerando가 확립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적 실존에서 인간은 먼저(prius) 교의학을 확립할 수 있다는 명제를 이해해야 한다. 즉 모든 인간은 인간적 가능성의 밖에서 행위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통찰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카톨릭 신앙 fides catholica로 인식기반을 수립한다. 그러나 교회는 외부원천개념, 계시성을 도입한다. 이러한 점에서는 존재의 유비도 긍정할 수 있다. 그러나 "계시가 있다, es gibt Offenbarung", "믿음이 있다, es gibt Glauben"에서 인식의 수단으로 fides catholica나 analogia entis는 금지되어야 한다. 발트는 있음(es gibt)으로 교회를 순수행동(actus purus)으로 규정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순수행동으로 연결한다. 발트는 교회의 존재와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화시키는 것이 매우 특징적이다. 이 조건에 의해서 현재 교회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신의 계시가 가능하게 된다.
발트는 자신의 서설 이전은 비유적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서설 이전의 산물은 선행이 아닌 우선의 예비적인 이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의학은 인간학으로 규정한다. 인간이 올바른 인식을 위한 노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선행적인 것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해석을 올바르게 인식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의학에서는 서설에서 인식의 길의 필요성을 제시한다. 즉 이전의 해석은 절대로 답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립하는 것이다.
발트는 교회가 제시한 하나님에 관한 진술을 이해한 문장으로 제시한다. 이것은 한 부분에 불과하며, 자명한 것이 아니어서 해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발트는 종교개혁신학이 카톨릭주의에 대한 방어의 산물이기에, 이단적인 현대주의에 대항한 것이 전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의학의 기준을 성서로 세운 것도 해명이 필요하다. 발트는 교회가 선취(先取)되었던 것들을-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확립된 교의(formal dogma)는 중심 내용을 위한 질료적 교의(material dogma)에 불과하다.
My View)
§1의 교의학의 과제는 꾸준히 탐구하는 것이다. 꾸준한 탐구에서 전제는 결정된 Dogma, 66권 정경의 절대성은 의미가 없다. 학(學)으로서나 신앙(信仰)으로서나 꾸준히 전개되어야 한다. 신앙은 인간인 교회가 결정한 것에 매여 하나님의 자유를 무시하는 불신앙을 저지르면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고백해야 한다.
§2. 서설은 이전의 모든 교의에 대한 것을 임시적 혹은 비유적, 우선적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리고 발트가 세운 서설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교의학의 서설이 필연”적이고, 교의학 밖, 신학 이전의 신학이 존재했음으로 “교의학 서설이 가능”하게 된다. 발트는 교회 밖 그리고 이단까지 포함하는 범-세계적?인 교리체계(dogmatic system of the pan-universal)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볼 수 있다.
1) 발트의 “기독교 교회”의 신학이란? 발트에게 와서 “기독교 신학”이란 용어를 대신해서 “기독교 교회의 신학”이라는 용어로 전환되었다. 두 용어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발트가 1927년에 [기독교교의학]에서 1935년에 [교회교의학]으로 전환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발트는 기독교와 교회를 명백히 구분하고 있다. 필자는 이것에 대해서 “기독교 신학”은 정형화된 신학에 근거하는 것이지만, “기독교 교회 신학”은 현재의 교회에 형성된 이해가 바른 교리가 되는 구조로 본다. 그래서 발트 신학의 진영에서는 과거에 형성된 교리 체계는 무시하지 않는다지만 전혀 권위가 없다. 오히려 현재 교회의 합의와 이해가 더 중요하다.
또한 발트에게는 다수의 의견에서 소수 의견에 대해서는(과거의 확정적인 것을 고집하는) 제거하려는 의도도 있다. 그 소수 의견에 이단, 이교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변화할 수 있는 교리체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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