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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3:7-9. 바울의 유익: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有益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爲하여 다 害로 여길 뿐더러
빌 3:8 또한 모든 것을 害로 여김은 내 主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知識이 가장 高尙함을 因함이라 내가 그를 爲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排泄物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 그 안에서 發見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義는 律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義라
1) 7절. 그리스도를 위하여(for Christ), 유대인으로서 최고의 위치라고 할 수 있었던 사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전의 모든 것을 해로 여겨 포기했다(자기부정).
2)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얻음(8절). 바울이 이전의 모든 유대인의 영광을 버린 것은 육체의 영광이며, 예수를 믿음과 병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상함'이란 예수를 아는 지식이 지상과 우주에서 가장 뛰어난 지식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변하나 우리 주 예수는 영원하시어 영원토록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주이시다. / [비교] 불교. 諸行無常(제행무상) 是生滅法(시생멸법) 生滅滅已(생멸멸이) 寂滅爲樂(적멸위락) - 열반경 중 무상게(涅槃經中 無常揭)에서 -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에 집착을 놓아 열반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수덕적 구도이다. / 기독교는 모든 것이 변하지만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주 예수를 믿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
사도 바울은 유대적 열심으로 의에 이르렀다고 자타가 평가했지만, 이전의 모든 것이 배설물로 여겼다. 배설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얻었다. 세상의 영광과 육체의 유익이 그리스도의 영광과 영의 유익과 병행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에 의해서 육이 통체되는 것이 가능한 것을 빌 4:13에서 바울 사도가 고백한다.
3) 사도 바울은 자신을 의(iustitia, righteousness)로 여겼다(9절). '의'는 만고에 합의되지 않는 모습이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정의는 justice라는 것이었다. 혹는 분배적 정의, 응보적 정의 등 다양한 정의에 대한 토론이 있다. 성경은 공평과 정의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공평은 justice이고, 정의는 righteousness이다. 공평은 심판의 성질로 올바른 사회질서의 개념이 있고, 정의에는 언약적 개념(동의)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 iudicii(judgment, 공의), 샌델의 책을 위의 개념에 맞게 번역한다면 "공의란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 '의'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기에게 있는 것(소유)으로 인식했다. 사도 바울은 개종 이전에 자기에게 '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다메섹 도상에서 부르신 주님의 의가 자신에게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사도 바울에게 있는 그리스도의 의는 부르심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주어진 것이지, 혈통이나 육정(스스로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또한 사도들에 의해서 주어진 것도 아니기에 바울을 사도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도 바울은 이 '의'의 기원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의의 출처는 하나님이시다.
칼빈은 도구인, 형상인 등을 사용하여 아리스토텔레스적이란 표현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에서 엄격히 구분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칼빈은 질료인-그리스도의 피, 형상인(도구인)은 믿음, 목적인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했다. 빌립보서에서는 질료인으로 '그리스도'를, 도구인으로 '믿음'을, 형상인으로 '하나님', 목적인으로 '의'로 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제시를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후대지만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고 하지 않고 성경적이라 한다. 또한 칼빈도 성경적이다.
성경이 구원의 도식을 설명하는 한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얻을 수 있는 도식은 옛것을 배설물로 버리고 예수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 예수를 믿음,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가 필요하다. 이러한 습득의 근원에는 하나님으로, 하나님께서 능력주심으로만 가능한 구도이다.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有益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爲하여 다 害로 여길 뿐더러
빌 3:8 또한 모든 것을 害로 여김은 내 主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知識이 가장 高尙함을 因함이라 내가 그를 爲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排泄物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 그 안에서 發見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義는 律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義라
1) 7절. 그리스도를 위하여(for Christ), 유대인으로서 최고의 위치라고 할 수 있었던 사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전의 모든 것을 해로 여겨 포기했다(자기부정).
2)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얻음(8절). 바울이 이전의 모든 유대인의 영광을 버린 것은 육체의 영광이며, 예수를 믿음과 병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상함'이란 예수를 아는 지식이 지상과 우주에서 가장 뛰어난 지식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변하나 우리 주 예수는 영원하시어 영원토록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주이시다. / [비교] 불교. 諸行無常(제행무상) 是生滅法(시생멸법) 生滅滅已(생멸멸이) 寂滅爲樂(적멸위락) - 열반경 중 무상게(涅槃經中 無常揭)에서 -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에 집착을 놓아 열반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수덕적 구도이다. / 기독교는 모든 것이 변하지만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주 예수를 믿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
사도 바울은 유대적 열심으로 의에 이르렀다고 자타가 평가했지만, 이전의 모든 것이 배설물로 여겼다. 배설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얻었다. 세상의 영광과 육체의 유익이 그리스도의 영광과 영의 유익과 병행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에 의해서 육이 통체되는 것이 가능한 것을 빌 4:13에서 바울 사도가 고백한다.
3) 사도 바울은 자신을 의(iustitia, righteousness)로 여겼다(9절). '의'는 만고에 합의되지 않는 모습이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정의는 justice라는 것이었다. 혹는 분배적 정의, 응보적 정의 등 다양한 정의에 대한 토론이 있다. 성경은 공평과 정의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공평은 justice이고, 정의는 righteousness이다. 공평은 심판의 성질로 올바른 사회질서의 개념이 있고, 정의에는 언약적 개념(동의)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 iudicii(judgment, 공의), 샌델의 책을 위의 개념에 맞게 번역한다면 "공의란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 '의'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기에게 있는 것(소유)으로 인식했다. 사도 바울은 개종 이전에 자기에게 '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다메섹 도상에서 부르신 주님의 의가 자신에게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사도 바울에게 있는 그리스도의 의는 부르심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주어진 것이지, 혈통이나 육정(스스로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또한 사도들에 의해서 주어진 것도 아니기에 바울을 사도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도 바울은 이 '의'의 기원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의의 출처는 하나님이시다.
칼빈은 도구인, 형상인 등을 사용하여 아리스토텔레스적이란 표현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에서 엄격히 구분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칼빈은 질료인-그리스도의 피, 형상인(도구인)은 믿음, 목적인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했다. 빌립보서에서는 질료인으로 '그리스도'를, 도구인으로 '믿음'을, 형상인으로 '하나님', 목적인으로 '의'로 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제시를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후대지만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고 하지 않고 성경적이라 한다. 또한 칼빈도 성경적이다.
성경이 구원의 도식을 설명하는 한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얻을 수 있는 도식은 옛것을 배설물로 버리고 예수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 예수를 믿음,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가 필요하다. 이러한 습득의 근원에는 하나님으로, 하나님께서 능력주심으로만 가능한 구도이다.
[광주성경연구원]
고경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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