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목사 설교

[바울종교의기원] 제 3 장 이방인 자유의 승리

형람서원 2012. 8. 26.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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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이방인 자유의 승리

(71-113/번역본 94-148)

 

고경태 목사

010-8525-0288

 

메이첸은 3 장에서 바울이 개종하여 예루살렘 사도들과 일치된 신앙을 이룸에 대한 과정을 제시하였다. 3 장에서는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에서 동일한 역사에서 서로 다르게 보이는 진술에서 바울의 종교의 형성에 대해서 확립했다.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는 동일한 복음으로 일치된 교회를 이루며 함께 끝까지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바울: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음] 사도행전에서는 바울이 개종한 뒤에 다메섹 직가에서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았다(행 9장). 갈라디아서에서는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신 뒤에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고 했다(갈 1장).

바울은 세례를 받았지만 갈라디아서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2장으로 바울의 일생을 구성하기는 어렵다.

 

[바울: 아라비아에서 3년을 생활함] 갈라디아서 1:16에서 바울은 개종과 “즉시” 아라비아 여행이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다메섹 도상 체험 후에 다메섹에 들어가 세례를 받은 후에 복음을 전도함과 일치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심각한 난점이 아니다. 바이스(B. Weiss), 잔(Zahn), 지페르트(Sieffert), 맆시우스(Lipsius), 뷰셋(Bousset) 등은 사도행전의 내용을 채택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세례를 받고, “즉시” 혈육이나 예루살렘이 아닌 아라비아로 내려갔다. 바울은 특이하게 개종한 뒤에 예루살렘이 아닌 아라비아 여행을 선택했다. 사도행전에 따라 바울은 아라비아 여행 전에 다메섹에서 짧게 전도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아라비아 여행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것은 사도행전의 기자가 연대기적 순서와 역사적 사실에 의거해서 기록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의 다른 기사는 모순에 대한 것이 아니라 기록의 완전한 독자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에는 없고, 갈라디아서만 아라비아 3년 생활이 있지만 바울의 일생에서 매우 중요한 시간이다. 바울은 아라비아에서 이전의 믿는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 홀로 3년의 세월을 지냈다. 바울의 아라비아 3년은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이해하는데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일반 교회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구원 역사는 전혀 아니다.

아라비아 여행의 범위는 지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명확한 체재 기간도 알 수 없지만 3년의 범위에 있다. 혹 바울은 아라비아 지역에 아주 짧은 기간(몇 주)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생략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분명히 아라비아는 예루살렘과는 전혀 다른 지역이다. 다메섹은 아라비아의 관문이었을 수도 있다. 메이첸은 3년의 기간 중에 아라비아 광야에서 몇 주간을 묵상한 뒤에 다메섹으로 돌아와서 복음사역을 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메이첸은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선교활동을 한 것이 아닌 묵상(mediation)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했다. 메이첸은 아라비아 전도활동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으면서도 묵상으로 확정하였다. 메이첸은 바울을 근대주의 개념인 “실천적 기독교인(practical Christian)”이 아닌, 모든 사역이 사고에 기초하고, 교리에 근거한 생활로 이해했다.

바울이 예루살렘 방문 전에 다메섹에서 피한 사건은 사도행전 9:23-25, 고린도후서 11:32-33에 기록되어 있다. 나바티안 아레다 왕(ethnarch of Aretas the Nabatean)에 대한 언급은 이해에 곤란한 점이 있다. 이 언급도 사도행전이 아닌 서신 중 고린도후서에 나타났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성경본문은 사도행전 9:26-30, 22:17-21과 갈라디아서 1:18-19에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에서는 바울이 예수의 제자인 것(개종)을 믿지 않았다. 3년 동안 복음 활동을 하였다면 예루살렘에서 바울의 개종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의 개종을 알지 못한 것은 바울이 은둔 생활을 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메이첸은 바울의 상태를 “차가운 이성 뒤에 오는 감정(emotion behind cold reasoning)”으로 제시했다. 분명한 것은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바울에 대해서 호의적이거나 형제로 인정하지 않았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울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바울의 명확한 개종에 대한 제시이다.

 

[바울: 예루살렘 교회와 만남, 1차 예루살렘 방문] 바울은 바나바에 의해서 예루살렘 교회에 사도들에게 소개되었다(행 9:27). 갈라디아서에서는 바울이 주의 형제 야고보와 베드로만을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갈 1:19). 두 본문에서 추론하자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전체 교회 회원들, 혹은 전체 사도단과 만남이 아닌 대표자인 야고보와 베드로와 일부만을 만났을 것이다. 메이첸은 한 단계 더 추론하여, 다른 사역자들이 유대 지역으로 사역으로 파견된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의 기록을 조화시켰다.

바울은 야고보와 베드로 사도와 함께 15일 동안 교제를 진행했다. 그러나 교제의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홀스텐(Holsten)은 그 기간 동안 대화 없이 침묵으로 진행했을 것에 대해서 부정했다. 두 진영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인데, 주제는 예수의 삶과 죽음을 뺄 수 없었을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자신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온 것을 부정했다. 또한 예수에 대한 순수한 사실이 복음은 아니다. 또한 분명한 것은 예루살렘 교제 후에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증진되었을 것이다.

학자들은 고린도전서 15:3-7에서 바울이 “받았던”-예수의 죽음, 무덤, 부활 그리고 현현-에서 첫 예루살렘 방문 15일에서 전수받은 내용으로 이해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베드로 사도에게 직접 들음에 의미가 있다. 신 칸트학파였던 하이트뮬러(W. Heitmüller, “Zum Problem Paulus und Jesus", 1912)는 바울의 정보가 다메섹과 안디옥 교회에서 얻어진 것으로 주장했다. 예루살렘 교회의 정보의 취득은 교회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얻어진 것으로 제시했다. 메이첸은 고린도전서에서 고린도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과 사도들의 교리 일치가 강조된 것으로 제시했다(고전 15:11). 바울의 복음이 최초의 가르침에서 분리되지 않음이 고린도전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나타났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베드로 사도와 직접 교제하였고, 고린도전서에서는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사도들과 동일한 가르침이(the unity of his teaching) 강조되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교우들에게 개종을 확인받은 후, 박해로 인해 고향인 길리기아의 다소로 내려갔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제시되었다(행 9:28-30).

 

[바울: 다소에서 안디옥으로, 바나바] 바울은 다소 혹은 그 근경에서 얼마의 시간을 보냈다. 메이첸은 그 당시에 이미 바울이 이방인에게 사역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다소에 있는 바울을 안디옥 교회의 사역자인 바나바가 적격함을 보고 청빙했다. 메이첸은 바울이 다소에서 이방인의 사도로서 평생 사역임을 알았고 그 사역의 시기가 도래함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안디옥 교회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인”(행 11:26)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메이첸은 그 별칭이 기독교와 유대교의 구별됨의 시작으로 제시하였다. 뷰셋이나 하이트뮬러는 안디옥의 기독교공동체에 중요성을 부여하며, 예루살렘과 기독교에서 분리된 형태로 제시했다. 바울은 이 팔레스타인에서 분리된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갈라디아서에서 예루살렘과 구별된 독립성으로 연결시켰다. 이러한 방식의 이해는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일치되지 않아 성경의 일관된 해석이 불가능하다.

바나바가 바울을 안디옥 교회에 청빙하여 사역한 1년 뒤에, 안디옥 교회는 아가보 선지자의 예언에 의해 준비된 연보를 예루살렘에 보냈다.

 

[바울: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이 겪은 기근에 대해서, 아가보 선지자의 예언에 의해서 준비하였던 연보를 모아서 전달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갈라디아서 2장 1-10에서 바울이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이 등장한다. 그래서 사도행전 11장과 갈라디아서 2장의 연대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두번째 예루살렘 방문의 연대기] 사도행전 11장의 예루살렘 기근에 이루어진 방문의 시기(행 11:30)와 헤롯 아그립바(Herod Agrippa)의 폭정과 죽음(행 12:1-2, 20-25)이 동일한 시기인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헤롯 아그립바가 죽은 해는 A.D 44년이다.

 

[바울의 연대기 정리] 바울은 개종 한 뒤 3년 뒤에 예루살렘을 방문했고, 그 후 14년에 2차 방문을 했다. (3+14)인 17을 44에서 뺀다면 27이 된다. 즉 바울의 개종 년도가 27년이 된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바울이 회심한 27년보다 몇 년을 앞서 있기 때문에 난점이 발생한다. 이러한 수리적 계산의 난점에도 메이첸은 갈라디아서 2:1-10절의 방문과 바울의 둘째 예루살렘 방문(기근 때에 이루어진 방문)을 동일하게 여겼다.

메이첸은 요세푸스의 기록을 따라서, 헤롯 아그립바의 죽음의 연도를 A.D 44년으로 확정하고, 예루살렘 방문의 연도는 A.D 46년으로 제시했다. 또한 갈라디아서 2장에서 예루살렘 방문의 연도가 개종 후 17년이지만, 숫자적으로 정확한 17년이 아님을 제시했다. 즉 3년이라고 했을 때에 24개월(2년)에도 3년의 횟수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는 15년이 될 수도 있다. 방문의 년도를 46년으로 놓고, 15년을 뺀다면 바울의 개종은 31년이 되어 가능한 연대가 된다. 메이첸이 추정한 바울의 개종 년대는 31년에서 32년이다. 바울의 개종 년대 추정은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갈라디아서 조기저작설] 갈라디아서 2장과 사도행전 12장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15장 사도회의에서는 갈라디아서 2장에서 사도회의에 대한 언급이 없다. 갈라디아서 저작 연대를 뒤로 보려는 사람들은 사도행전 11장과 갈라디아서 2장이 동일 시간인 것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1920년대에는 갈라디아서가 사도회의 이전인 것으로 거의 인정되었다. 로마 카톨릭의 베버(Weber), 키르숍 레이크(Kirsopp Lake), 램지(Ramsay), 플루이(Plooij)등이 “남갈라디아서”설로 조기저작설을 주장했다. 갈라디아서 1:2에서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등 갈라디아 지역의 여러 교회가 등장하기 때문에 “북갈라디아”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 기록된 지역은 사도회의 이전이며, 다른 지역에는 가지 못했다(행 16:6-7).

둘째 갈라디아서 조기저작설에 대한 반대하는 의견은 로마서와 밀접한 관계를 제시했다. 갈라디아서가 사도회의 이전에 기록되었다면 바울서신 중에서 최초의 서신이 된다. 3차 전도여행 후라면 6~8년 후가 된다. 이런 순서로 바울서신은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고린도전.후서, 로마서가 된다. 그런데 레이크(Lake)는 로마서가 초기 회람서신으로 만들어졌고, 나중에 더욱 적당한 내용들이 첨가되어 로마 교회로 보내졌다는 것이다. 이 가설에 의하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모두 조기에 저작되어 공통성이 있게 된다. 메이첸은 레이크의 제안에 대해서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다음, 어떤 이들은 바울의 모든 서신들 중에서 가장 미숙하게 보이는 서신이 데살로니가 전. 후서이기 때문에 최초의 문서로 보았다. 구원 이해에 대해서 잘 전개된 갈라디아서가 먼저 기록되었다할지라도 어떤 문제가 없다. 바울의 편지는 바울의 이해의 정도에 의해서 쓴 것이 아니라, 보내어진 교회의 형편을 따라 쓴 것이기 때문이다.

메이첸은 갈라디아서 2장이 사도행전 15장의 사도회의 때가 아닌 사도행전 11장과 12장의 시대를 동시대로 보았다. 그래서 갈라디아서가 조기에 저작되었음을 견지하게 된다.

메이첸이 세운 연대기에 따르면 바울은 사도회의의 사도행전 15장까지 3회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된다. 갈라디아서에는 1장과 2장에서 2회 등장한다. 이러한 연대기에서 메이첸은 이방인의 자유에 대한 예루살렘의 확증이 2회 있었을 것으로 제시했다. 갈라디아서 2장과 사도행전의 기근이 일치하며, 사도회의가 후일에 개최되어 반복되어도 문제는 없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이방인의 자유 문제가 해결되었음에도 교회에 끊임없이 이방인의 할례 문제가 대두되어 교회에서 확정적으로 공포하는 구도로 이해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에 이미 이방인 사역자 디도(Titus)가 동행하여 참석하였었다. 또한 이방인 고넬료도 무할례인 상태로 교회에 용납되었다. 그럼에도 예루살렘에서 이방인의 자유 문제는 확정되지 않은 갈등 상태에 있었다. 결국 사도들은 사도회의를 개최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교회 방식을 공적으로 결정한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과 사도행전 11장이 동일함에 대해서 결정적인 반론은 없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2장이 사도행전 15장과 유사하게 보이지만, 11장도 그러한 유사한 모습은 있다. 11장과 15장 모두에서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에 갔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계시에 의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감은 아가보의 계시와 연관시킬 수 있다. 메이첸은 아가보의 계시도 바울에게서 온 계시로 이해하는 견해에 대해서 제시했다. 사도행전에서는 구제가 강조되었지만, 갈라디아서에서는 구제는 오히려 부수적인 사안이 되어 침묵했다. 갈라디아서 2장과 사도행전 15장은 동일하게 이방인 할례 문제였고, 모두 이방인에게 자유가 승리했다.

메이첸은 여러 신학자들의 견해를 반복하면서 갈라디아서 2장이 사도행전 11장과 동일한 시대이고, 사도행전 15장의 사도회의가 아님을 제시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예루살렘 기근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은 당시 상황에 대한 진술보다 갈라디아 교회에 발생한 이방인의 자유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반면 사도행전은 사도의 드러난 활동의 모습을 기록한 것으로 추측된다. 메이첸은 갈라디아서 2장에 기근의 상황이 기록되지 않아 역사성을 부인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일축시켰다.

 

[갈라디아서 2장과 사도행전 15장의 비교] 사도행전 15장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의 제시를 기꺼이 수용하는 모습이고, 갈라디아서 2장에서는 상당한 갈등이 일우어진 모습의 난점이다. 이러한 난점을 쉽게 해소하는 방법으로 사도행전의 역사성을 부인하려고 했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반론이 있었지만, 모든 반론은 해소가 되어 구원의 구도에 대해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갈라디아서 2장에서는 갈등의 전개가 아닌 베드로 사도와 바울의 완전한 일치를 보여주었다.

다음. 갈라디아서 2장과 사도행전 15장을 일치로 보지 못할 것은, 갈라디아서 2:16에서 바울은 회의에서 사도들이 바울의 견해에 더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 15장에서는 예루살렘이 결정한 뒤에 첨가하여 결정하였다. 그럼에도 바울의 행위 없이 값없이 주어지는 구원의 도식, 복음에는 변함이 결정적이었다.

 

[메이첸의 원문비평: 중립본문] 메이첸은 사도행전 15장에서 중립본문(Neutral text)이 시내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들에 의해 지지되는 표준 문서로 제시했다. 그것은 사도명령이 단순히 “예배모범(the decree ceremonial)”인가에 대한 것이다. 사도명령은 “피”, “목매어 죽인 것”에 “황금률(Golden Rule)”의 조항이다.

메이첸은 원본을 세운 방법에서 짧은 글이 원본에 가깝다는 것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문형이나 사상이 서툰 것이 더 오래되었다는 원리도 거부했다. 바울이 사도명령에서 도덕적 생활의 명령이었다면 이방인 개종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요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방인들에게 요구된 것은 우상숭배, 살인, 음행 등과 같은 절대적 가치에 속한 것이었다. 이것은 원 사도들이 유대인들에게 동일하게 요구되는 내용이었다.

메이첸은 “목매어 죽은 것”의 내용이 있는 중립본문과 언급이 없는 서방본문, 두 본문에서 없는 것이 원문(원저자의 것)일 것이라는 원문을 결정하는 조건을 거부했다. 그리고 다시 두 본문 중에서 한 본문만을 선택하도록 결정했다. 두 개의 사도행전이 없으며, 둘 다 택할 수 없는 절대선택의 것이다. 메이첸은 “목매어 죽은 것”이 있는 중간본문을 원문내용으로 선택하였다.

바우어(Baur) 시대 이후 학자들은 사도행전의 사도의 결정이 철저하게 본다면 잘못(radically wrong)되었다고 이해했다. 이러한 견해는 곧 사도행전, 성경의 기록을 믿지 못해 다른 곳에서도 회의를 가져왔다. 베이콘(B. W. Bacon)은 사도의 결정은 “사도사의 문제의 핵심(crux of apostolic history)”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진영에서도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을 인정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사도행전 21:25을 근거로 바울이 없는 상태에서 결정하였다고 했다. 메이첸은 이에 대해 사도행전 21:25이 사도행전 15장에서 바울의 제시로 결정됨에 반대되지 않는다고 했다.

[사도 명령: 바울의 복음 = 오직 믿음으로 구원얻음] 갈라디아서 2장은 사도명령에 위배되는가? 사도행전 15장 1-29절에서 사도명령은 이방인 기독교인의 구원에 도식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된 유대인과 이방인이 일치된 교회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유대적 생활 양식에 대한 것과 이방인의 혐오스러운 행동 양식에 대한 조율이었다. 이것은 바울의 사역 원리에도 부합된다. 사도의 명령은 유대인에게 율법 준수 포기를 요구하지 않았고, 이방 기독교인에게 율법 준수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율법이 구원의 수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치를 위해서 제의적 율법의 일치를 포기한 것이다. 사도 명령에서 교회일치의 원리는 “보다 약한 형제를 배려”이다. 마지막으로 사도의 명령은 지역적으로 한계가 있었다(행 16:4). 그러나 사도의 명령은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되어 합당한 문서로 받아졌다. 벤트(Wendt)는 이러한 현상을 과오로 제시했다. 사도행전 15장의 사도의 명령은 바울과 함께 결정되었으며, 예상했던 지역보다 더 넓은 지역으로 적용되었다. 또한 바울이 사역했던 지역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모든 지역에서 복음전도와 교회일치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바울이 사역한 고린도 지역에서는 시행하지 않았고, 유대 기독교적 요소가 강한 지역에서도 시행되지 않았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6에서 사도의 명령에서 “아무도 더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더했다”는 것은 바울의 의견에 누구도 부가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바울의 복음에 어떤 누구의 견해가 첨가되었다면 갈라디아서의 바울의 주장은 비역사적인 것이 될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의 복음에 대해서 첨가하지 않았다. “바울의 복음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이방인에게 구원이 수여되는 것이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바울의 복음을 순수하게 인정했다.

바울은 기근 때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사도들과 이방인 구원에 대해서 합의했다. 초기 이방인 지역인 갈라디아 지방에서 유대주의자들이 문제를 발생시켰다. 그들은 율법을 충실하게 준수하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앞세워 갈라디아 교회에 유언비어를 유포했다. 유대주의자들의 획책에 대해서 공적선언은 필요했다. 바울은 계시의 인도함으로 예루살렘 공회의를 개최하여 결정하여 더 이상의 미혹이 예루살렘의 이름으로 도용됨을 방지하도록 하였다.

갈라디아서 2장과 15장의 역사적 일치에 큰 문제가 없지만, 11장과도 아무런 문제가 없음도 인정해야 한다. 3가지의 가능성.

(1) 갈라디아서 2장과 사도행전 11장, 12장의 기근에 방문함의 일치시킨다면, 사도행전 15장보다 이전의 사건이 된다. 바울과 바나바는 기근에 방문하여 사적인 만나 합의한 뒤에 남갈라디아로 1차 전도여행을 하였다(행 13-14장). 바울의 전도로 많은 이방인이 교회에 유입될 때 유대주의자들의 반대가 발생했다. 안디옥에 야고보의 사람들이 방문하였고, 베드로와 바나바는 식탁교제를 중지하였다. 이에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하였고,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준수를 주장했다. 유대주의자들의 헛된 가르침이 유포되자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편지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공적 회의를 통해서 공적문서를 작성토록 계시의 인도함을 받았다. 그 결과가 사도행전 15장의 사도회의이다. 메이첸이 제시한 역사의 구도이다.

(2) 사도 명령의 서방 본문(Western text)이 올바른 것으로 인정될 수도 있다. 이것은 사도명령이 세 가지(우상숭배, 살인, 음행) 금령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하르낙과 다른 학자들이 지지했다. 혹자는 (1)의 견해에 결합하여 (2)로 제시하기도 했다.

(3) 갈라디아서 2장과 사도행전 15장을 일치시킬 때, 사도 명령에 관해서 중립 본문을 채택하여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를 조화시킬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사도 명령이 구원에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바울의 복음 제시도 이방인 지역에 특수하게 발생한 임시적 사안에 불과하게 된다.

(3)안에서는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바울에게 사도직의 독립성을 인정한 것과 이방인의 사도로 위임된 것에 대해서 의미가 없다.

팔레스타인 유대인은 원 사도들에게, 이방인은 바울에게 할당되었다면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누구에게 할당된 것인가? 사역의 범위를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분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동일한 복음을 바울과 베드로가 함께 전했다. 사역의 효율성을 위한 분할이었지 실제적인 분할은 아니었다. 바울과 베드로 모두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원하는 지상명령에 순종했다.

예루살렘에서는 바울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형제를 기억하라고 당부했다(갈 2:10). 복음 사역에서 가난한 자를 기억하고 돌보는 것은 필수적 사항이 교회의 시작에서부터 있었다. 예루살렘과 바울의 합의된 결정은 다음과 같다. “그대는 이방인에 대한 사도이다. 그것은 큰 사역이다. 우리는 이방인 지역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말미암아 선포되길 바란다. 그러나 아무리 중대한 사역일지라도, 그대는 예루살렘의 도움이 필요한 유대 형제를 잊지 말기 바라오.”

 

[바울의 권위: 베드로를 책망함] 예루살렘 회의 후에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돌아와서 결과를 보고하여 이방인들에게 큰 위로와 기쁨을 주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바울에게 책망 받은 것에 대해서, 베드로가 영역을 침범하여 지적을 받았다는 견해는 억측이다.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내려와 이방인과 식탁교제를 이루었다. 바울이 없는 중에 식탁교제가 진행되었다. 그 때에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왔고, 베드로는 교제의 장소를 피하고 말았다. 베드로의 행동은 확립된 이방인의 자유를 꺽고 양심을 억압하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자기 확신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였다. 바울은 그러한 베드로를 책망하였다.

베드로의 모순된 행동에서 이방인 기독교 신자들에게 미칠 영향 때문이었다. 베드로의 행동은 바나바까지 영향을 미쳤다. 안디옥 교회는 중대한 위기를 맞았다. 복음의 내용을 계시받은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했고, 베드로는 바울의 책망을 기꺼이 수용하였다. 베드로는 주의 계시가 아닌 사람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바울은 베드로의 행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력화시키는 행동으로 보았기에 담대히 책망할 수 있었다. 벵겔(Bengel)은 갈라디아서 2:11-21을 “기독교의 정수(marrow of Christianity)”라고 칭송했다.

[바울: 베드로를 존경함] 메이첸은 갈라디아서 2장이 사도 회의보다 앞선 것이며, 사도회의에서 바울과 베드로는 완전한 일치를 본 것으로 제시했다.

첫째,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5절에서 베드로를 모범적인 사도로 세우며 존경을 표시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부활 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심으로 강조했다.

둘째, 고린도 전.후서와 로마서에 의하면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지체을 위해 연보를 취함에서 전하는 일을 했다. 이것은 예루살렘 공회의에서 바울에게 권면한 것이었으며, 바울은 공회의의 권면을 잘 받들었다.

셋째, 유대주의자들의 선동은 3차 선교여행에서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옥중서신에서는 유대주의자들의 공격이 아닌 유대주의 비기독교와 관계로 보인다. 유대주의의 선동이 그친 것이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 때문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모든 교회사가 베드로와 바울이 근본적인 일치함으로만 설명이 가능하다. 마가는 베드로의 수행자였지만(벧전 5:13), 또한 바울과 절친한 관계였다(골 4:10, 몬 24). 마가는 베드로와 바울의 중요한 연결점이 된다.

초기에 기록된 바울 서신은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권위를 인정한 높은 수준이었다. 바우어가 주장한 베드로와 바울의 불화는 받아드릴 수 없다. 또한 사도행전의 저작 시기도 바우어가 추정한 시기보다 훨씬 앞선다.

사도행전에서는 갈라디아서에서 기록된 식탁 교제의 해프닝이 언급되지 않았다. 그런데 2차 전도여행 전에 바울과 바나바의 다른 갈등(마가 요한의 문제)이 언급되었다. 튜빙겐 비평학파에서는 사도행전의 저자가 심각한 문제를 숨기기 위해서 보다 약한 분쟁을 삽입한 것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한 분쟁을 숨기기 위해서 다른 분쟁을 드러내는 것은 저자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차라리 불화에 대한 정보를 숨기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사도행전 저자는 갈라디아서 2장의 사건을 제외시킨 것은 복음의 외적 전진에 관심을 가진 역사가의 입장으로 볼 수 있다. 2차 전도 여행 시작에서 헤어진 두 사람이 협력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바울은 바나바에 대한 존경을 갖고 있었고(고전 9:6), 마가와 교제가 계속되었다(딤후 4:11). 바울과 마가의 친밀한 관계는 바울서신에 종종 등장한다(골 4:10, 11 빌 24). 즉 안디옥의 사건이나 2차 선교 여행 전에 갈등이 항속적인 분리의 상태에 있지 않았다.

2차, 3차 선교 여행에서 유대주의자들의 선동은 보이지 않는다.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은 사도적 권위에 대해서 도전을 받았다. 바우어는 여기에서 역사를 재구성하여 갈라디아서를 고린도 서신에 두었다. 바우어는 당파의 대립으로 보았고, 갈라디아에서 극단적인 유대주의자들과 대립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러한 바우어에 대한 주장은 동일한 튀빙겐 학파에서 중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고린도에서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의 지식을 자랑하는 거만함에 투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고린도에도 팔레스타인 출신들이 있었고 특권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야고보와 친교를 내세우며, 추천서를 갖고서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바울은 추천서가 필요없는 진정한 사도였다. 베드로 사도와 교제의 악수를 한 동등된 사도였고, 베드로 사도를 책망하기도 한 주께 직접 부름을 받은 사도였다.

그럼에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당파에 대해서 다른 사도들과 근본적 일치를 제시하였다(고전 15장). 튀빙겐 학파의 주장처럼 바울과 원 사도들과 갈등은 서신에서 볼 수 없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방문하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방문할 때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와 만났다(행 21:17, 우리를). 예루살렘의 야고보와 장로들은 바울의 전도로 이방인들의 개종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즉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바울의 갈등은 전혀 없다.

그러나 야고보는 바울에게 율법에 대한 열심을 갖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주의를 권면했다. 야고보는 바울에게 소원과 결례를 암묵적으로 요구했고, 바울은 동행한 4 사람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제사에 참석했다(행 21:23-26). 이러한 행동을 튀빙겐 학파는 비역사적으로 해석했다.

 

[바울의 서원] 바울이 유대인의 관습을 용납하는 것은 유대주의로 귀환이 아니다.

 

[바울의 투옥] 바울이 예루살렘과 가이샤라에 투옥되었을 때에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무엇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에 기록이 없다. 이것은 먼저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이 정치적 세력이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어떤 도움의 모습이 기록되어있지 않다고 해서 바울에 대해서 차갑게 떨어져 있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형제들을 돕는데 힘쓴 사역자이다. 사도행전에서 복음의 확장은 예루살렘의 세력 확보가 아닌, 예루살렘에서 이방까지 확산된 외적 전진을 보여준 것이다.

 

[소결론] 바울은 원 사도들과 신실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 친밀한 관계는 끝까지 유지되었다. 바울의 유년기 교육은 철저히 유대적이었고 팔레스타인적이었고 헬라적이 아니었다. 그리고 동포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바울은 개종 전이나 후로 이교(우상숭배)에 대해서는 혐오하였다. 우상숭배의 배척과 계시된 복음의 선포는 모두에게 동일한 출발점이 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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