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목사 설교

구속사적 관점에 본 사도의 구원 순서와 계시완료 후 구원 순서의 차이

형람서원 2012. 8. 22.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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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관점에 본

사도의 구원 순서와 계시완료 후 구원 순서의 차이

 

고경태 목사

 

성경은 점진적 계시로 되어 있음은 모두가 인정한다. 점진적 계시란 무엇인가? 점진적 계시는 시간의 흐름에서 계시 이해가 다르게 진행되는 것인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 명확해 지는 것이다. 계시가 완료될 때까지가 점진적 계시가 된다. 계시가 완료된다면 그 후로는 점진적 계시라는 말을 쓸 수 없게 된다. 필자는 “점진적 계시의 완료”는 “특별계시의 종료”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한다.

계시는 완료되었는가? 계속되는가?는 신학의 구성에 핵심적은 요소이다. 점진적 계시가 진행중인가? 점진적 계시가 완료되었는가?도 동일한 결과를 갖게 된다. 필자는 점진적 계시가 완료되었고, 특별계시도 종료된 것으로 믿는다. 이러한 예증을 성경에서 사도들의 구원도식과 종료 후 구원도식의 절대적 차이점을 제시하려고 한다.

 

필자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서 신약성경의 완결(요한복음)까지를 계시의 과도기, 구원사의 과도기로 이해한다. 약 100년간의 역사에는 과도기적인 구원사의 기간으로 현재의 구원도식과 일치시킬 수 없다. 즉 사도행전의 말씀 전개를 현재의 구원사 도식에 직접 대입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사도행전에서는 성전이 존재하는 시대이다. 둘째, 사도행전에서는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 셋째, 유대인들이 과도기적 상태에서 알곡과 가라지로 구분하는 기간이 필요하다. 과도기 기간에 유대인들에게 참과 거짓을 규정하는 기준이 모호하다. 그러나 계시가 완료되면 더 이상 혈통에 의한 기준은 기능을 상실하게 되며,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기 때문에 유대인에게 주어진 모든 특권은 상실된다. 계시 완료 후에는 혈통적 유대인이지만 믿음이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표준이 엄격하게 주어진다. 넷째, 사도에게 들은 복음과 속사도, 교부들을 넘어서 들은 복음에는 역사적인 차이가 있다. 현재 복음은 역사적으로는 절대로 이룰 수 없다. 그러나 당시에는 역사적으로 충분히 이룰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복음 전달이 가능한 시대와 불가능한 시대는 구분되어야 한다. 복음전달에 역사적 기능이 상실되었다고 하여도 역사적 탐구를 중지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역사적 탐구로는 복음의 도리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1) 사도

 

사도는 12명인가? 13명인가? 14명인가? 가룟 유다는 사도인가? 배도자인가? 바울은 사도인가? 전도자인가?

 

(1) 가룟 유다는 예수께 선택되고 임명된 사도였다. 그러나 배신자로서 사도의 지위를 박탈되었다. 그 빠진 자리를 맛디아가 보충되었다. 그래서 사도는 12명이다. 그런데 바울이 사도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사도는 12이다. 필자는 이러한 셈을 거짓말이지만 진리라고 한다. 사도의 숫자는 바울을 포함하면 13명이지만 답은 12명이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맛디아를 빼려는 생각도 있다. 그러나 맛디아는 정식 사도이다. 그래도 사도의 숫자는 12명이다.

 

(2) 사도들의 구원 도식: 맛디아가 가룟 유다로 결원된 사도에 보충되었다. 그 때에 원리는 요한의 세례에서부터 3년 동안 동행했고, 부활의 증인으로 정했다. 즉 사도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첫 번째 구별점이다. 사도들은 모두 요한의 세례 혹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의 세례는 죄사함의 세례로 기독교의 세례인 성령세례와 구별된다. 사도들의 구원의 서정에 먼저 요한의 세례가 있다.

둘째, 사도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다. 그들이 3년 동안 예수님과 생활할 때에 메시아로 섬겼는데,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아(정치적 메시아)로 섬겼다. 우발적으로 베드로 사도가 신앙을 고백하였고, 요한복음에서는 마르다가 고백하였다. 그러나 온전한 신앙고백은 아니었고, 성령을 받은 후에 이루어질 것이었다.

사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생활한 것은 신비 중의 신비이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오순절이 지난 뒤에 사도 요한은 그 신비에 깊이 경탄하여, 신비의 도리를 복음으로 제시했다. 사도들이 갖는 육체적 경험은 절대로 반복될 수 없고 유추될 수 없는 것이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죽음의 현장에서 떠났고, 부활의 사실도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의 크신 은혜로 사도가 유지되었고, 오순절에 성령을 받음의 첫 번째 역사적 인물들이 되었다. 사도들이 육체적 예수께 행한 배신 행동은 현재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현재 그리스도인은 육체적으로 예수를 경험하지 못하며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주 예수를 배신한 충격은 말로 형용할 수 없다.

사도들은 성령을 받을 때에 성령의 파송자를 명확하게 인식하였다. 이것은 현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사항이다. 그리고 성령의 파송자를 전파하여, 죄사함과 성령받음을 선포했다. 또한 베드로 사도는 성령받음과 외식을 분명히 구별하였고, 그 구별은 사실이었다. 현재는 비록 영을 분별한다할지라도 선포하고 규정하는 것은 월권이 된다. 이것이 사도의 권위와 목사의 권위와 다른 점이다.

 

결론적으로 사도들의 구원의 도식은 (1) 유대인 --> (2) 요한의 세례 --> (3) 예수님과 공생애 3년과 죽음과 부활 승천을 목격함 --> (4) 오순절 성령 받음 이다. 이러한 구원의 도식은 사도들과 120문도에게만 적용되는 유일한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으며, 반복될 수도 없다.

 

2) 바울

 

기독교 구원의 큰 신비 중 하나는 사울의 개종이다. 사울은 강력한 유대인, 배타적이고 열정적인 유대교 신봉자였다. 그는 헬라 철학(문화), 로마 시민권(정치), 바리새인(혈통)으로 완전한 사람으로 유대인뿐만 아니라 로마인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한 인간 사울이 개종하여 예수를 구주로 믿으며, 기도하며 인도함을 받아 전도 사역을 전개하였다.

사울(바울)은 구원의 도식이 이방인을 위한 구원의 도식을 갖는 과도기적 모습이다. 그럼에도 바울의 구원도식은 절대적이고 유일한 방식이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 예수께서 직접 현현하시어 개종시켰기 때문이다. 사람의 개종은 전도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반해, 유일하게 사울은 주 예수께서 직접 등장하셔서 개종이 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유일한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혹 꿈에 등장하거나 비몽사몽간에 등장할 수 있겠지만, 실재적으로 등장하지 않음을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확신해야 한다.

바울의 구원의 순서는 (1) 유대인 --> (2) 주 예수의 직접 현현으로 개종 --> (3) 계시로 복음의 세계를 인식함 --> (4) 예루살렘과 합의하여 한 믿음을 인증 --> (5) 이방인의 사도로 활동하였다.

바울의 구원 도식에서 신기한 것은 바울에게 성령충만의 모습이 등장하지 않으며(아나니아가 성령충만을 선언하지만,,,), 성령의 임하심의 모습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유일무이한 주 예수의 현현 때문이다. 예수의 현현보다 더 강한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바울은 먼저 안수를 받은 후에 세례를 받았다(행 9:17-19). 그리고 바울은 언제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되었는지도 신비에 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받았는지, 아라비아에서 인식했는지, 예루살렘 교회에서 합의되었는지 알 수 없다. 바울은 예루살렘과 합의가 되기 전에 다메섹에서 전도활동을 하였었다.

바울의 구원도식은 신비 그 자체여서 구원의 순서를 정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울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과 기독교를 차이를 없게 한 믿음 교리 확정에 주도했고, 유대교와 기독교를 구분시킨 역할을 감당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이 없고, 교회 밖에서는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른 종교가 되었다.

 

3) 계시 완료 후 그리스도인

 

필자는 계시가 진행되던 과도기 시대와 역사적인 증인들에 의해서 전파된 시대와 역사적 전달이 불가능한 시대를 구별하였다. 먼저 구원사의 과도기 시대의 구원 순서와 계시 완료 시대의 구원 순서는 분명히 다르다. 그리고 역사적 증거로 복음을 영접할 수 있는 시대와 역사적 증거로 복음을 영접할 수 없는 시대는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접근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현재는 역사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면 필연적 다른 길로 가게 된다. 혹시 원리적으로는 가능할지모르지만, 원점과 연결하는 많은 고리가 끊어져서 불가능하다. 필자는 그러한 연대를 칼케돈 공회의를 지난 500년으로 세운다. 즉 500년 이후 구원은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 사도들과 바울에게 구원이 신비였지만, 그 역사적 시대가 지난 현재에도 그와 다르지만 큰 신비가 있다. 어떻게 역사적 관계가 없이 믿음을 이룰 수 있는가?

 

완료 후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순서는 (1) 성령세례 --> (2) 물세례 의 순서이다. 그런데 교회의 운영원리에는 성령세례에 의해서 물세례를 주지 않고, 예배모범에 의해서 물세례를 주고 있다. 그것은 목사에게 성령세례 받음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능력에 문제가 있다. 혹 완전히 분별할 수 있다할지라도 교회는 보이지 않는 영적 공동체를 추구하기 때문에 판단하지 않고 오직 보이는 교회 예배모범에 의해서 물세례를 베풀어야 한다.

 

구원의 원리적 순서와 교회의 운영원리에 의한 순서가 다르기 때문에 교회의 목회자는 매우 신중한 자세로 물세례를 베풀어야 한다. 물세례에 대한 경망한 자세 때문에 오순절파가 등장한 것이다. 그들은 이중축복(second blessing)을 주장하여 물세례 뒤에 더 좋은 세례가 등장할 것으로 제시하였다. 이것은 교회 운영원리에 의해서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물세례를 받았는데, 그가 다시 성령세례를 받을 때에 마치 이중세례를 받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결론

 

필자는 구원사에서 점진적 계시를 믿는다. 그리고 계시의 완료, 특별계시의 종료를 믿는다. 또한 성경 66권만이 완료된 특별계시로 믿는다. 이러한 믿음의 구도에서는 사도들, 바울 그리고 완료된 역사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의 순서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만약 동일한 구원의 순서를 가진다면 점진적 계시, 특별계시 종료가 부정되고 계시 연속에 대한 사상을 갖게 된다. 현재는 포스트모던 사회이기 때문에 어떤 사상을 갖음에도 자유가 있다. 또한 교회에서는 분별하거나 자정 능력도 상실되었다. 혹은 계시연속을 주장하는 견해가 훨씬 매력적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명시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는 명확히 알고 있다. 우리의 심판대는 현재가 아닌, 영원한 재판장 앞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현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세례를 받은 성령의 사람이다. 사도들과 바울은 자신들이 받은 성령파송자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현재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이 성령세례를 받았다면 성령파송자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복음을 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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