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목사 설교

[개혁편지 제 9 호, 2010년 12월 11일(토)]

형람서원 2010. 12. 11.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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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편지 제 9 호, 2010년 12월 11일(토)]

 

Reformed Letter 

고경태 목사(010-8525-0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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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1권 8장]

 

Chapter VIII

 

Passing hence from infancy, I came to boyhood, or rather it came to me, displacing infancy. Nor did that depart,—(for whither went it?)—and yet it was no more. For I was no longer a speechless infant, but a speaking boy. This I remember; and have since observed how I learned to speak. It was not that my elders taught me words (as, soon after, other learning) in any set method; but I, longing by cries and broken accents and various motions of my limbs to express my thoughts, that so I might have my will, and yet unable to express all I willed, or to whom I willed, did myself, by the understanding which Thou, my God, gavest me, practise the sounds in my memory. When they named any thing, and as they spoke turned towards it, I saw and remembered that they called what they would point out by the name they uttered. And that they meant this thing and no other was plain from the motion of their body, the natural language, as it were, of all nations, expressed by the countenance, glances of the eye, gestures of the limbs, and tones of the voice, indicating the affections of the mind, as it pursues, possesses, rejects, or shuns. And thus by constantly hearing words, as they occurred in various sentences, I collected gradually for what they stood; and having broken in my mouth to these signs, I thereby gave utterance to my will. Thus I exchanged with those about me these current signs of our wills, and so launched deeper into the stormy intercourse of human life, yet depending on parental authority and the beck of elders.

 

http://www.ccel.org/ccel/augustine/confess.ii.viii.html

 

LIBER I - CAPUT 8

 

Nonne ab infantia huc pergens veni in pueritiam? vel potius ipsa in me venit et successit infantiae? nec discessit illa: quo enim abiit? et tamen iam non erat. non enim eram infans, qui non farer, sed iam puer loquens eram. et memini hoc, et unde loqui didiceram, post adverti. non enim docebant me maiores homines, praebentes mihi verba certo aliquo ordine doctrinae sicut paulo post litteras, sed ego ipse mente, quam dedisti mihi, deus meus, cum gemitibus et vocibus variis et variis membrorum motibus edere vellem sensa cordis mei, ut voluntati pareretur, nec valerem quae volebam omnia nec quibus volebam omnibus. pensebam memoria: cum ipsi appellabant rem aliquam et cum secundum eam vocem corpus ad aliquid movebant, videbam et tenebam hoc ab eis vocari rem illam, quod sonabant, cum eam vellent ostendere. hoc autem eos velle, ex motu corporis aperiebatur, tamquam verbis naturalibus omnium gentium, quae fiunt vultu et nutu oculorum certerorumque membrorum actu et sonitu vocis indicante affectionem anim in petendis, habendis, reiciendis fugiendisve rebus. ita verba in variis sententiis locis suis posita et crebro audita quarum rerum signa essent paulatim colligebam measque iam voluntates, edomito in eis signis ore, per haec enuntiabam. sic cum his, inter quos eram, voluntatum enuntiandarum signa conmunicavi; et vitae humanae procellosam societatem altius ingressus sum, pendens ex parentum auctoritate nutuque maiorum hominum.

 

[아우구스티누스의 Conf 1.8,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 습득 과정....]

 

   저자는 자신이 유아기에서 소년기로 옮겨 갔음을 고백하면서, 유년기가 완전히 떠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전환점을 말을 하는 것으로 진술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말하기를 습득하였는지를 고백합니다(“For I was no longer a speechless infant, but a speaking boy. This I remember; and have since observed how I learned to speak.”).

 

   저자는 어른에게 말을 배운 것과 글을 배운 것이 다름으로 고백합니다. 저자는 언어를 소리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 습득한 것으로 이해하였고, 언어를 통해서 마음의 뜻을 전달하는 기능으로 이해했습니다. 또한 뜻의 전달 방법으로 표현을 말하며, 그것을 “모든 종족에게 해당되는 자연의 언어(the natural language of all nations, verbis naturalibus omnium gentium)”라고 하였습니다.

 

   저자는 말로서 의사로 표현을 하며, 말의 신호(signs, signis)로 마음의 뜻(意思)이 전달됨으로 제시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청소년기에서 부모와 어른들의 지도와 인도를 따라서 인간 사회의 일원으로 들어가게 됨을 진술합니다.

 

   본 장은 언어습득과 전달 그리고 소통의 과정을 진술하는 것으로 많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는 근원적인 본문입니다. 현대 신학자들은 계시의 전달이 언어의 신호를 따라서 전달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비트겐쉬타인의 자연언어철학의 근원이 이곳이라고도 생각됩니다. 언어를 통한 의사전달 구조와 습득 과정은 신비스러운 과정이긴 하지만, 신학의 계시 전달 과정을 설명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강요] 2권. 1장. 7절. 죄의 전달

원현숙 자매

 

   옛 교부들은 아들의 영혼이 부모의 영으로부터 전달받는 것인가를 고심했으나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아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곧, 하나님께서 인간 본성에 부여하신 은사들(gifts)을 아담에게 맡기셨고, 아담은 그 은사들을 잃어버림으로 우리도 똑같이 그것들을 잃어버리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아담이 잃어버린 은사들은 그 자신만이 아닌 우리를 위한 것이었고, 그 재능들이 온 인류 전체에게 주어졌다면, 영혼이 부모로부터 전달 받느냐의 문제로 염려할 필요가 없다. 아담이 그것들을 상실했을 때, 인간 본성은 핍절한 상태가 되었고, 그가 죄에 감염되었을 때, 그것이 인간 본성 속으로 감염되었다. 그러므로 썩은 뿌리에서 썩은 가지들이 나왔고, 그 상태가 다른 작은 가지들로 전달된 것이다. 즉, 아담에게서 시작된 부패가 후손들에게로 영속적으로 전달되었다. 전염의 기원은 하나님께서 첫 사람에게 베푸신 은사들을 지니고 있거나 잃어버리는 것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 모두를 위한 것이 되도록 정해 놓으셨다는 사실에 있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자녀들이 경건한 부모들에게 부패성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부모들의 순결함으로 자녀들이 거룩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녀들은 부모의 영적 중생을 물려받지 않고, 육적인 혈통을 물려받는다. 사람은 부패한 본성으로 자녀를 낳으므로 누구나 죄 있는 자녀를 낳는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이 그 부모의 거룩함에 어느 정도 참여한다는 것은 특별한 축복이다. 그러나 인류의 보편적 저주가 그보다 선행한다는 사실이 뒤집어지지는 않는다. 죄책은 본성에 속하며, 거룩하게 되는 것은 초자연적인 은혜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서철원 교수의 [인간, 하나님의 형상], 50-69.를 다시 정리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에 대해서는 유대교나 기독교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형상에 대한 논의는 유대교에서와 기독교에서도 일치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먼저 유대교는 인간에게 실제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아 초상화를 그리는 것도 금지하였습니다. 로마 교회는 지성적, 도덕적 성품이라고 하였습니다.

 

   에레나이오스(120-202)는 “합리성”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다메섹의 요한네스는 “사고하고 추리하는 영혼과 자유의지”라고 하였으며,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삼위일체의 형상, 기억, 지성, 의지”라고 하였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지성적 영혼”이라고 하였습니다.

   루터교회는 “자연적 완전성: 지혜와 의와 불멸성, 엄위”라고 하였고, 칼빈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때 인간의 각 기관이 나타내는 순정성(Inst. I, 15, 3)”으로 종교개혁의 신형상이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튜레티니는 “인간 본성의 견실성과 불멸성과 원시의”이며, 개혁파의 신형상관은 “하나님과의 동형성”으로 정의했습니다.

챨스 핫지는 “도덕적 완정성과 합리적 성품”으로, 아브라함 카위퍼는 “하나님 내의 어떤 상”이라고 하였고, 헤르만 바빙크는 “천상의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카알 발트는 “하나님 내의 마주섬”으로 각 신학자마다 다르게 정의하였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전체를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위의 많은 정의들은 완전하게 반영하지 못했습니다. 칼빈은 고대교회의 지성, 자유의지라는 하나님의 형상 이해를 모든 기관들이 나타내는 탁월성으로서의 순정성으로 제시하였습니다. 개혁파는 다시 하나님의 탁월성을 나타내는 인간의 동형성으로 변경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설명이 어렵습니다. 서철원 박사는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인격성 특히 피조수준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인격성의 반사”로 규정합니다. 성경에서 구체적인 정의가 없지만,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에게 부여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인격의 반사로 규정하는 것이 적당할 것입니다.

 

 

 

2010년 12월 11일(토요일)

광주시 북구 망월동 1154-147. 주님의교회

고경태 목사. 010-8525-0288

개혁신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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