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 박사(광신대, 개혁주의 사상)
1. 개혁주의에 대한 정의.
많은 사람들은 ‘주의(主義, ism)’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다. ‘주의’는 일상적으로 고형화된 의미를 제시한다. 그러나 개혁주의의 대원리 중 하나인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로 본다면 ‘개혁주의’라는 단어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작금에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개혁주의와 병행하여 “개혁신학”을 필두로 “개혁신앙”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Reformed를 문자적으로 번역하여 “개혁된 신학”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개혁주의는 어떤 신학자의 사상에 고착된 사상은 아니며, 사상을 답습하는 것도 아니다.
(1) 개혁주의 역사적 개괄
기독교 신학은 역사적으로 고대신학, 중세신학, 종교개혁신학, 근, 현대신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 종교개혁시대에 개혁주의 신학의 근본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개혁파 신학은 루터의 신학과 칼빈이 신학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종교개혁 시대는 르네상스와 쌍벽을 이룬다.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는 공히 중세로마교회의 전횡에 저항하는 것이다. 중세로마교회는 천년동안 유럽의 정신세계를 지배했지만 덕을 쌓지 못함으로 민중들에게 철저하게 거부당했다. 로마 교회의 부패는 정신세계의 자유를 선언하는 르네상스와 신앙의 회복을 주장하는 종교개혁으로 나뉘게 되었다. 그래서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 교회의 권위에 항거하여 형성된 사조가 세계의 근본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순수 신앙을 회복하게 위한 처절한 항거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로마 교회는 여전히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하며 중세로마교회의 꿈인 세계 통치를 추구하고 있다.
(2) 개혁파 신학은 편협한 신학인가?
개혁파 신학은 많은 기독교 분파들로부터 편협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완전한 교파나 사람이 없을 것인데 개혁파가 편협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이 편협하지 않다는 교만 혹은 거짓에 있는 것이다. 이 땅위에 완전한 사상이나 사람은 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즉 편협하지 않는 사상은 없다. 정도의 차이를 갖고서 편협성을 논의하는 것은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하다.
개혁파를 편협한 신학으로 평가하고 공격하는 것은 개혁파는 고대 교회의 신학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고대 교회의 신조를 그대로 인정하고 여전히 동일한 신앙으로 인정한다. 그 맥락에서 성경의 시대 또한 동일한 인간 존재로 규정한다. 즉 죄로 인해서 죽음이 변함이 없으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을 견지하게 때문이다.
혹 개혁파 신학이 편협하다면 그 편협한 신학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다시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편협한 신학을 알지도 못하면서 편협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자기의 무지의 소치를 드러내는 형국이다. 개혁파의 후예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신앙의 소명을 충실히 견지해야 한다. 신앙과 신학은 양심과 영생을 두고 하는 것이지, 이성과 감정을 갖고 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무엇도 전체를 알 수 없는 이성의 한계, 공간의 제약, 시간의 제약 속에서 편협하지 않는 사상이 어디 있는가?
개혁파 신학은 절대로 편협하지 않다. 그 심오함은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탐구하는 신비의 학문이다. 이성의 심오함이 없다고 평가될지는 모르지만 영생의 신비가 있다. 영생의 신비를 탐구하고 경탄하는 이성의 신비를 무엇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개혁파는 역사적으로 언제나 핍박받았다. 개혁파 신학과 교회는 영적, 삶의 현장에서 실제적인 전투로 말미암아 형성된 고난에 근거한다. 네델란드에서 로마 교회와 전투, 영국에서 국교회에 의한 핍박, 프랑스 위그노 대학살 등은 개혁파의 험난한 여정을 볼 수 있다. 개혁파의 선배들의 여정을 현재 후배들도 걸음에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 믿음의 순례는 천로역정의 순례자처럼 역경 속에서 영원한 나라의 영광의 문 앞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파의 역동적 신앙의 모습은 모든 세계의 문명, 문화를 새로운 세계정신에 부합되게 하였다. 기술과 상업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개혁파의 성실하고 적극적인 삶에 근거한다. 주께서 믿는 자에게 환란과 복을 겸하여서 주심으로 겸손이 주를 섬길 수 있도록 하셨다.
(3)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개혁파의 중요한 표지는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이다. 이것이 마치 교회가 날마다 변화되어야 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개혁은 불변의 진리를 전제한다. 그 불변의 진리는 삼위일체 교의(325년, 381년)와 기독론 양성 교의(451년)이다. 개혁파 사상의 원천은 그리스도 계시에 의해 산출된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양성 이해를 근본으로 모든 교리가 구성된다. 이 원리에 부합되지 않는 신학, 교회의 제도들은 과감히 개혁되어야 한다. 중세로마교회가 이 교의에 부합되지 않는 제도들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개혁을 한 것이다. 이 시대에도 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
작금에 장로 제도에 대한 반성이 시작되었다. 개혁파 교회 제도에서 장로 제도는 다른 교파와 다르게 강조된 직제이다. 그러나 교회 현장에서 장로 제도의 문제성이 발견됨으로 장로 제도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된다. 개혁파의 선배들이 장로 제도를 결정했을 때에는 성경에 준거해서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제도를 변경하려면 다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제도 개혁을 생각해야 한다. 상황적 문제나 모순으로 제도를 개혁하는 것은 개혁의 연속에 부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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