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신학&개혁신학

개혁주의 사상(3), 개혁신학이란 무엇인가?

형람서원 2008. 3. 18.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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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경태 박사(광신대 개혁주의 사상)

 (4) 개혁신학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신학은 개혁교회(ecclesia reformata)의 신학 곧 개혁신학이므로 개혁교회의 신앙고백(confessiones ecclesiae reformatae)을 규범과 근본으로 삼는다. 즉 칼빈과 그의 후계자들의 신학을 기초로 삼는다. 칼빈이 저술한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에 나타난 신학 체계와 그의 주석에 나타난 성경 이해를 근거해서 신학을 한다. 물론 고대 교회의 교의가 기본 진리가 된다.1)

  개혁교회는 종교개혁교회이므로 루터교회와 함께 종교개혁의 기본원리를 인정한다. 즉 루터교회가 중생(regeneratio) 혹은 이신칭의 교리를 실질적 원리로 삼아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으로 삼았다. 개혁교회 또한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 성경에 부합된 조항임으로 루터교회와 동일하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중생과 칭의만을 강조하는 루터교회와는 달리 성화를 강조하며, 믿음의 진보를 목표로 한다. 루터교회는 칭의에서 시작해서 칭의에 머물지만, 개혁교회는 성화 곧 성도의 거룩한 생활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에서는 성도의 삶에서 윤리가 합당한 강조와 존경을 받는다.

  종교개혁은 루터신학과 개혁신학이 공히 ‘성경’을 강조하였다. 성경이 신학의 원리와 근거이다. 성경의 강조는 중세 로마 교회의 교황권에 대한 강조를 대치하는 역할을 하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므로 성경의 권위는 신적 권위로 강조되었다. 모든 신학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며, 믿음의 내용도 다 성경에서 도출하고 성경대로 구성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이 신학의 형식적 원리가 된다.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매임으로 신학하는 것을 원리로 삼는다.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므로 모든 일을 자기 경륜대로 이루셨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함으로 개혁신학은 어거스틴에게서 나타난 예정 교리가 부각되어 개혁신학의 특징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예정 교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성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즉 기계적이거나 숙명론적인 신적 주권 이해는 개혁신학의 역동성을 이해하지 못한 처사이다.

  개혁신학에서 성경을 이해함에서 ‘언약 사상’이 강조되었다. 개혁 신학이 주장하는 언약은 영원한 언약, 즉 삼위 하나님의 협약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과 일을 하실 때에도 언제나 언약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사역을 이루셨다. 즉 언약이 하나님께서 일하는 방식이다. 개혁신학(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구별하여  이해하였다. 그러나 서철원은 첫언약(하나님의 백성됨의 약정)과 새언약(첫 언약의 회복과 완성)으로 구분하는 것이 성경에 부합된 이해라고 개혁 신학 고백의 재논의를 주장한다.2)

 개혁신학은 인간의 상태에 대해서 ‘전적 부패’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에 부합된 이해로 주장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구원또한 창조 사역처럼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이다. 구원의 과정에 인간의 능력이나 보충이 전혀 불가능하다. 이러한 개혁신학의 인간의 전적 부패에 대한 주장은 로마교회, 알미니안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성’을 강조한다. 개혁신학은 칭의와 성화 모두에서 은혜의 주권성을 강조한다. 즉 구원의 성취와 적용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 되어 은혜의 산물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선택과 연결이 된다.

  개혁신학은 ‘그리스도와 연합’이 강조된다. 그리스도와 연합에 대해서는 기독교강요 3권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된다. 모든 은혜는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옴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기독교강요에서 연합에 대한 다른 표현은 ‘성령의 띠’. 로마서의 표현으로 ‘접붙힘’등으로 제시된다. 구원이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교회의 구성하는 근본 또한 그리스도와 연합을 목표로 한다. 즉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거룩한 백성이 되고, 거룩한 백성은 또한 성도의 교제가 가능하다. 성령으로 구원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백성들이 교제하게 된다.

  개혁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됨의 한계를 명백히 제시한다. 이러한 이해는 칼케돈 신경(451년)에서 주장된 성육신한 하나님의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지 않음을 따른 것이다.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개혁신학의 근본전제이다.3) 그러므로 개혁신학에서는 피조물이 신이 되거나 신화되는 일이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죽음 후의 영화 또한 신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백성이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한계의 강조는 하나님의 영광이 강조되며, 넘어설 수 없음에서 오는 넘어섬이 일어난다.

  개혁신학에서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자기 영광’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생을 사시는 것이 아니다(발트의 주장).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영광을 위하신다. 성육신 또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목표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 전도의 목적을 말씀하시지만, 말기에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일만 하신다.

 개혁신학은 ‘성화’를 강조함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활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율법이 자리를 잡는다. 즉 율법이 구원을 길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규범으로 역사한다. 개혁신학은 율법이 생활의 규범으로 합당한 자리를 잡는다. 루터신학에서 율법은 정죄의 기능을 갖지만, 개혁신학에서는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주신 은혜의 수단이다.

  개혁신학은 모든 생활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강조하고 그 실현을 위하여 노력한다. 그리스도가 모든 창조의 영역에서 주이시므로 그가 인간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왕이 되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왕이 되는 것은 그의 법이 교회와 사회의 법이 됨으로 이루어진다. 이 일을 위해 모든 영역을 복음화하고 말씀의 권세 아래 두기 위해 노력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칼빈 주석에서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강조된다.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세상은 중립적 혹은 적대적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문화 활동을 적극 권장한다. 그리스도인은 문화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개혁신학은 선포된 말씀에 강조를 둔다.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는 길은 선포된 말씀으로 가능하다. 교회의 창설도 오순절 성령 강림과 동시에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확장되어져 갔다. 중세 로마 교회가 무의미한 미사 집행으로 천년동안 백성을 우민화시켰다. 개혁교회는 선포된 말씀을 통해서 믿음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믿음의 생활을 하게 함으로 교회의 표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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