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 목사(주님의 교회)
1.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이 갖는 성경 중심의 개념이 지난 후 성경에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실존에서 답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에서 구원의 의미가 성경적인 답변이 아니라 실존적인 답변으로 일색되었다. 그리고 성경이 마치 그것을 지지하는 것처럼 포장하여 답을 제시하고 있다. 기독교가 출현되면서(행 2장) 선포된 설교는 “너희가 죽인 예수가 살아나셨음으로(23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주로 그리스도가 되었다(36절).”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로 죄사함을 받음과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38절).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면 믿기로 예정된 자에게 성령이 임하셨다. 그런데 요한은 이 예수를 “말씀(Logos)”으로 계시했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성육신의 신비와 성령의 보혜사의 역할을 제시함으로 구원의 신비와 능력을 제시하였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를 제시하여 구원의 다른 모습을 제시하였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영원한 생명의 주로서 예수를 제시함으로 완전한 구원의 모습을 제시한다. 즉 구원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어 구원에 이른 백성이 성자(聖子)의 성육신의 신비에 대한 경탄과 성령의 말할 수 없는 작동을 통해서 거룩한 삶을 살면서 결국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구원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
기독교의 ‘구원’에 대한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 줌”이라는 국어사전의 의미대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인 의미로서 구원은 기독교의 구원의 의미와 구별되어 이해되어야 한다. 절대적인 위험, 인력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이라할지라도 죄사함과 영생의 내용이 없다면 기독교 구원이라고 할 수 없다. 죄사함과 영생이 강조되지 않는 구원 개념은 철저하게 배제해야 한다.
폴 틸리히는 쇠외가 해소됨을 구원으로 이해했고, 칼 발트는 무에서 유로 전환됨을 구원으로 이해하였다. 무가치한 자기 존재를 가치한 자기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 구원의 사건이며, 자기 존재를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존적 사망이며 그 사망을 극복할 대안으로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는 것이다. 20세기 신학자들은 ‘예수’를 구원의 도구로 활용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예수’는 구원의 근원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구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주 예수’가 필요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자기가 영원한 저주를 받아도 된다고 자기의 중심을 토로했다(롬 9:3). 즉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은 어떠한 자격, 형편의 변화가 아니라 ‘구주의 이름’에 있는 것이다.
죤 스토트 목사는 본래적인 기독교 구원의 의미를 협소하다고 평가 절하 했다. 죄사함과 영생을 협소한 구원 개념이라 이해하여, 부가된 구원 개념을 첨가한다는 것이다. 사족(蛇足)을 그리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2000년 전에 이미 교회는 완성되었으며, 교회에 선포된 구원의 개념은 지금까지 유효하다.
김세윤 교수는 그의 저서 [구원이란 무엇인가]에서 구원을 “자원의 결핍에서 오는 문제점을 외부의 도움으로 해결하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소외의 발생 원인이 자원에 제한과 결핍으로 제시한 것이다.
즉 실존주의적 현대신학에서는 인간 존재에게 임한 실존적 문제에 대한 답을 주려는 것으로 몸부림하였다. 결국 기독교 신학에서 심리학과 접촉하여 구원의 문제에 대한 답을 추구하였다.1) 그러나 성경을 떠난 모든 시도는 답을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 교회의 선배들이 답을 내었던 죄사함과 영생에 대한 구원으로는 돌아가지 않는다. 심리학으로 상담학으로 인간의 구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인류는 물리적인 약물 치료로 구원을 이루려 하고 있다. 결국 더욱 심각한 인류의 영적 세계의 파탄이 온 것이다.
18세기의 계몽주의는 이성 중심으로 모든 우상을 척결하려는 운동이었다. 계몽주의의 열성은 모든 우상을 척결시켰으며, 과격한 계몽주의인 칼 맑스의 자본론으로 형성된 변증법적 사고와 공산주의 이론은 더욱 철저하게 종교를 배격하였다. 그래서 잠시 동안 세계는 이성의 풍미가 있었다. 그러나 21세기의 현재의 현상은 우상의 도래를 합당하게 여기는 이성 시대가 되었다. 마태복음 12:45의 주님의 말씀이 실현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부요함이 없는 청결 운동은 더욱 심각한 문제를 갖는다. 주의 성령이 임하지 않는 개혁 운동은 더욱 패괴한 모습을 갖게 된다.
종교개혁 운동이 구원론에 대한 정의라고 한다. 루터가 “이신칭의”를 교회의 근본 교리로 천명하였고, 1618년 돌트 회의에서는 항론파에 대항하여 5개조(TULIP)를 수립하여 절대예정의 구원 이해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개혁 신학의 이해에 반하는 알미니안주의와 경건주의에서 파생된 자유주의 신학 그리고 신정통주의 신학(20세기 신학, 루돌프 불트만과 폴 틸리히)에서 종교다원주의 신학으로 변질되어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것으로 전개되었다. 이성의 귀결은 결국 하나님을 반항 혹은 대적하는 것이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2). 성경과 교리를 떠난 기독교의 종점은 종교다원주의인 것이다. 자유주의가 범신론에 대한 위험을 지적받을 때에 그 해소가 바로 종교다원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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