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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철원 교수는 순천만에 위치한 대대마을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대대마을은 달성 서씨의 집성촌이었습니다. 서철원 교수의 아버지께서는 일제의 공출을 피하여 충남 부여로 이사를 갔었고, 부여에서 이방인이었던 가정에 교회에서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개종으로 온 가족이 개종에 이르렀습니다.
해방 이후 대대에 돌아온 후에 대대교회에 출석하면서 가족들이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어느날 한 가족들이 식사를 하는데, 믿지 않는 아버지 앞에서 오랫동안 기도하는 아들에게 밥상을 엎어버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심한 가족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세워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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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곡성 입면에서 사역할 때에 서울 서초에서 사시는 교수님께서 시골의 정취인 나물들을 가끔씩 드리곤 했습니다. 한 주먹되는 취나물을 받으시면서도 무척 감사하는 모습이 촌뜨기가 드리는 부끄러운 손을 가볍게 해주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것을 주려고 했는지 지금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땐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허접한 푸성귀를 드렸는데, 너무나도 기쁘고 환하게 받는 교수님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돌저귀에 있는 돛나물을 드렸는데, 그것만은 싫어하셨습니다. 교내식당에서 식사하실 때에도 여전히 돛나물은 싫어하셨습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 너무 가난해서 돛나물을 많이 먹었기 때문에 먹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린 시절의 모습의 영상이 찰라로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골에서 돛나물만큼은 그 이후로 교수님께 가져다드리지 않았고, 식당에서 함께 식사할 때 돛나물을 보면 교수님의 아픈 과거가 생각났습니다.
해방 이후 대대에 돌아온 후에 대대교회에 출석하면서 가족들이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어느날 한 가족들이 식사를 하는데, 믿지 않는 아버지 앞에서 오랫동안 기도하는 아들에게 밥상을 엎어버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심한 가족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세워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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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곡성 입면에서 사역할 때에 서울 서초에서 사시는 교수님께서 시골의 정취인 나물들을 가끔씩 드리곤 했습니다. 한 주먹되는 취나물을 받으시면서도 무척 감사하는 모습이 촌뜨기가 드리는 부끄러운 손을 가볍게 해주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것을 주려고 했는지 지금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땐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허접한 푸성귀를 드렸는데, 너무나도 기쁘고 환하게 받는 교수님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돌저귀에 있는 돛나물을 드렸는데, 그것만은 싫어하셨습니다. 교내식당에서 식사하실 때에도 여전히 돛나물은 싫어하셨습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 너무 가난해서 돛나물을 많이 먹었기 때문에 먹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린 시절의 모습의 영상이 찰라로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골에서 돛나물만큼은 그 이후로 교수님께 가져다드리지 않았고, 식당에서 함께 식사할 때 돛나물을 보면 교수님의 아픈 과거가 생각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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