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론 _ 김두환
I. 서 론
총신대 신대원을 들어오면서, 서철원교수님께서 자유주의 신학때문에 세계교회가 침몰되어 가고 있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알 수 없는 의분이 저자의 마음속에 피어올랐다. 하나님의 교회의 인간의 이성을 토대로 한 한계성을 갖고 있는 이론 때문에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이 현실이기에, 그렇다면 현재로서는 저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론 핵물리’이라는 분야에서 Ph. D.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잠깐이지만,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할 신학자가 되어 그들의 이론과 사상들이 갖고 있는 한계성을 지적하면서 논쟁하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1) 이를 일단 보류하고, 좀더 현실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을 때 가장 논쟁의 핵심이 될 것 같은 ‘삼위일체’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보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삼위일체’만 제대로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다면, ‘기독론’까지도 어렵지 않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며, 이성으로 신학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일침을 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신학한다는 것이 진리를 발견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밝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한 마음을 먹고, 4월이 지나면서 일찌감치 시작한 ‘삼위일체’ 연구는 초기 참고문헌만을 검토하는 단계에서 미루어지고, 시간에 쫓겨 이렇게 황급하게 마무리하게 되어서 아쉬움이 많다.
바로 참고문헌의 내용들을 정리하는 수준에 머물기는 했지만, 본론에서는 삼위일체의 개략적인 설명을 1장에서 하였으며, 세부적으로 삼위일체의 개념과 삼위 일체론에 대한 성경의 증거, 삼위일체론에 관한 진술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2장에서는 삼위의 각론에 대해서 설명하며,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해 개별적 설명을 하였다. 3장에서는 초대교회사적 삼위일체의 변천내용을 기술하였다.
II. 본 론
기독교 교회사에 있어서 항상 논쟁의 주제가 되었던 점은 거의 대부분이 그리스도의 신분에 관련하여 발생하였다. 기독론 뿐 아니라 삼위일체론도 마찬가지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와의 신분의 결정과 그 관계가 주요 쟁점이 되었다. 초대교회의 정치적,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상황을 통해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이 성립되는 요인의 역할을 하였다.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사 전체에 걸쳐서 삼위일체론과 그에 대한 반론의 입장이 항상 공존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과 ‘그리스도나 성령의 신분이나 삼위 하나님의 관계에 관하여 반론을 내는 자들’2)이 항상 두 부류의 형태가 존재해 왔던 것이다.
우선적으로 성경을 기록한 말씀의 저자들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성부 성자 성령께서 모두 동일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었다. 그 뒤를 이은 초대 교회의 신앙인들이 그 신앙을 이어 삼위일체에 대하여 인정하였다. 초대교회에서도 삼위일체론을 위한 증거가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삼위일체론은 소수의 이단적 입장을 제외하고는 보편적으로 교회에 수용되었고, 그에 대한 성경적 해석도 불완전하지만 진리의 사실로서 확신을 주고 있었다.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된 성경 말씀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열쇠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그와 동시에 완전한 인간으로서 인간이 지닌 인간성을 지니고 소유하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451년에 칼케돈 회의에서 ‘신인양성론’이 확정되면서 아리우스(256-336)나 네스토리우스 등이 정죄 당하였다.
그리스도의 그러한 양성에 관한 진술은 부울의 주장에서도 부분적으로 살펴볼 수 있지만 완전하게 양성론을 진술하지 못하였다. 부울의 문제점은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확증할 수 없으며 태초 이전에 성부로부터 피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구약에서 언급된 하나님은 성부가 아닌 성자로 보았다. 그는 그 진술을 성자께서 인간의 이성과 육체를 지닐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속성들(불가시성, 불가해성, 영원성, 편재성)을 지니지 못한 일종의 선험적 이성을 지닌 분이라고 서술하였다.
삼위일체에 관한 공식적 발표는 니케아 회의(325)에서 이루어졌고 콘스탄티노플 회의(381)에서 재정립되었다. 아리우스는 “성자가 없었던 때가 있었으며 무로부터 창조된 분이며, 변화나 변질될 수 있다”고 하였다. 3세기에는 아리우스 입장을 선호하고 따르는 자들이 있었고, 4세기에는 그들의 이단적 주장이 더욱 심해져서 그리스도의 신성조차 부인하였다.
커닝햄은 니케아회의(325)에서 삼위일체의 독특성에 대하여 서술함에 있어서 그 본질을 실질적으로 구체화시켰다고 보는데, 그 본질에 관하여 3가지의 질문이 제기되어야 한다고 서술한다. 첫째는 ‘삼위일체에 있어서 성부와의 동일본질을 언급할 때 그 대상이 성자와의 본질을 의미하는가?’이며, 둘째는 ‘니케아의 동일본질을 주장함에 있어서 그 내용이 성경적 진리에 합당한 정확한 주장인가?’이며, 셋째는 ‘삼위일체의 동일본질을 언급함에 있어서 그에 관한 성경적 실질적 내용의 언어를 선택하는 것이 기독교의 참된 지혜에 대한 올바르고 합당한 것인가?’이다. 그러한 세 가지의 질문에 대하여 커닝햄은 니케아회의에서 취한 입장의 내용은 모두 정당하고 합당한 것이라 서술하였다.
초대 교부들이 ὁμοούσίος의 의미에 있어서 단순한 개념이상의 의미를 가미하여 단순히 ‘동일본질’이 아닌 ‘하나이며 동일한 본질’을 의미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러한 구별은 본체의 동일성이나 단일성이 단순한 숫자에서의 의미가 아니라 ‘본질이나 실체에 있어서 하나’이시라는 특별한 개념을 의미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러한 용어(ὁμοούσίος) 자체만으로는 특별한 단일성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에 대한 객관적 근거를 보일 수가 없지만, 니케아 교부들은 성자가 성부와 동일본질(ὁμοούσίος)일 뿐 아니라 성자가 성부의 본질로부터 나셨고 그와 본질에서 동일할 뿐 아니라 수에서도 하나이심을 확신하였다.
하나님께 속한 명칭, 속성, 사역 등은 성자에게 있어서도 전혀 열등하거나 종속되지 않은 상태이며, 성부와 성자는 본질적 관점에서 볼 때 동일성을 지니신다. 성자께서 피조물에 속하지 않으시며, 신적 존재의 총체적 서열에 속하시며, 성부와 동등한 지위를 지니심을 성경의 권위위에서 결론 내릴 때 완전하게 확증 받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성부와 성자는 동일한 신적 본성을 지녔으며 동일한 하나님의 본체이시므로 능력과 영광에서도 동등하시다.
성부와 성자가 하나이시며 동일하신 본체시라는 견해는 정통적으로 성경의 기반위에서 정립되었던 특별한 성질이며 지혜인 것이다. 니케아 교부들은 성부와 성자에 관하여 가르치는 성경의 내용에서 정확하게 구체화하였다. 그리고 아리우스 주의의 견해를 부인하고 부정하는 것에 있어서 정확하고 뚜렷한 기반을 제시하였다. 그렇지만 성경 진술의 해석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일치하는 기준이 완전하지 못하고 모호성을 포함하므로 성경에 제시된 용어와는 다른 용어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커닝햄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제시가 없더라도 반대의 비방이 없고 진실한 의미를 조금이라도 제시한다면 주장될 수 있다고 보았다.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성의 선언이 공격을 받을 수 있게 되는 직접적 근거는 그것의 본질에 대한 성경의 확실하고 구체화된 설명이나 표현이 약하거나 없을 때 일어날 수가 있다. 하지만 아리우스 주의와 세미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은 동일본질(ὁμοούσίος)이라는 단어의 서술에 관해서 성경적 교리와는 너무나 다른 입장을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부정한 것으로서 정죄를 당하였다. 그들은 ὁμοούσίος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반대하였으며 그 대신 ὁμοιούσίος(유사본질)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성부와 성자간의 신적 동일성을 부정하였다.
4세기의 정통교리를 고수하려는 학자들은 아리우스주의에 대하여 정확하게 파악하고 배제시키는 데 있어서 많은 역할을 하였지만 완전한 해결책은 내지 못하였다. 반면에, 3명의 갑바도기아 학자들3)이 용어(ουσία와 ὑποστασις)의 개념에 대하여 뛰어난 정리를 하기 이전에는 그 두 용어의 의미에 있어서도 대부분 혼용을 하고 있었다. 갑바도기아 학자들은 두 용어에 대한 의미를 확립함으로써 삼위일체에 관한 개념의 확립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4세기에 활동하였던 아다나시우스와 힐러리는 니케아 신조에 대하여 적극적인 옹호자들이었다. 그런데 아다나시우스는 정통신학의 삼위일체교리를 정립하는데 공헌을 하였으며, 힐러리는 정통신학자들 중에서도 ὁμοούσίος 용어보다 ὁμοιούσίος라는 용어를 동일한 의미로 취급하는 자들이 다수 있으며 더 선호하는 학자들도 있다는 것을 밝히려 하였다.
니케아 신조(325)의 삼위일체론의 정립에 의해 삼위 하나님에 대한 의미를 내리는데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성경에 나오는 성부는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으로서, 한분 하나님이 계신다.4)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며 성자가 하나님이시고 성령이 하나님이시라면, 그 분들은 성부와 더불어 나뉘지 않고 분리될 수 없는 신적 본질이나 본체를 동등하게 소유해야 하며 능력과 신적 완전성을 동등하게 소유해야만 하신다. 그러므로 한 신성(one Substance) 안에 있는 세 위격(three Persons)들은 동일 본질적이며 동등하시고 영원이 공존하시는 존재이시다.
하나님의 신적 본성에 있어서 첫 번째 위격과 성자의 관계에서는 두 번째 위격의 정립을 보여주는 것이며, 성부가 신적 본성을 성자와 공유하고 성자가 그것을 성부로부터 받거나 발출되었으므로 성부와 같을 뿐 아니라 나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니케아 교부들이 제시하려 했던 교리이며 그리스도의 영원한 아들이심과 영원한 출생아래서 대부분의 정통 교리가 교회에 수용이 된 것이다.
커닝햄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성자직과 영원한 출생에 관한 이 교리가 대부분 정통 교회들에 보편적으로 수용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니케아 종교회의가 자신들의 신조들로 부터 주어진 인용들을 가르치려고 하였던 것들과도 동일한 것임을 언급하고 있다. 성경적 증거와 본질적 중요성에 대한 근본적 진리는 성자께서 고유하신 하나님이신 성부와 하나이시며 동일하신 본체이시며 능력과 영광에서 동등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교리이다. 이러한 교리 위에서 구속의 계획에 대한 중한 원리들을 바르게 볼 수가 있다. 니케아 교부들과 정통 교부들의 공통점은 이러한 주제가 성경에 제시되었으며 본질적으로 중요한 특별한 진리로서 ‘성자의 영원한 출생’에 관한 진리가 있었다는 점이다. 영원한 출생의 교리가 성경에 기반을 지니기 때문에 성자-직의 사상을 첫 번째 위격과 두 번째 위격 간에 존재하는 관계에 적용한다. 그러한 실제적 관계는 성자-직을 진실하고 고유하게 제정하는 것이며 아들 됨의 기원적 사상이나 원형이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성자-직은 성부와 동일하시며 그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신 본성과 본체의 참다운 본체이심을 제시하는 것이다.
니케아 교부들이 성자가 성부와 하나이시며 동일한 본체이실 뿐 아니라 그가 성부로부터 자신의 본체로 영원토록 태어나셨다는 것을 선포할 때 하나님의 말씀 뿐 만이 아니라 초대 교회의 증거들에 의해서 지지를 받는다고 확신할 수 있다.
니케아 회의(325)에서는 성령에 관해서는 아무런 진술이 없었으나, 콘스탄티노플 회의(381)에서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였다. “성부로부터 나오시는 주님과 생명을 주시는 분,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아야하시는 분이심을 선지자들이 말했다”는 진술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성부, 성자와 다른 위격으로서 동일본질과 영원공존을 내포하심을 진술하려는 의도를 지녔다. 갑바도기아의 3인이 성령의 위격과 특성을 보다 자세하게 연구함으로써 많은 제시를 하여주었다.
그런데 성령의 동일본질이 확증되고 한 위격을 지니신 하나님이심이 확정된 상황에서, ‘성령의 발출(출래)’에 관하여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에서는 다른 입장을 주장하였다. 서방에서는 성령께서는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해서 나오신다’는 성령의 이중 발출을 주장하였지만, 동방교회(헬라교회)는 그것을 거부하고 성부로부터만 나오신다고 주장하였다. 몇 세기 후에는 동방교회에서도 성령의 이중발출을 받아들였다.
커닝햄도 성부, 성자와 동일본질이신 성령께서는 ‘발출(출래)하신다’는 특성을 고유한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성령께서도 성부, 성자와 같은 동일한 신적 본성과 본질을 지니셨으며 신비적이며 형용할 수 없는 방법으로 유래되는 것으로 보았다.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격에 관하여 신적 본성의 구별에 관하여 특별계시인 성경에서 제시해주는 모든 것의 총체이며 요약으로 보았다.
1장. 삼위일체 개론
본체와 능력과 영원성에 있어서 동일한 삼위가 단일한 신격으로 있으니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나시지도 않으며, 나오시지도 않으나,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장 3항)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적 명제는 첫째 영원히 불변하게 불가분하신바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오직 한분만이 계신다(유일신); 둘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 완전하고 동일하게 하나님이시다(삼위 하나님의 신적 본질의 동질성 교리)5); 셋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 구별된 위격들이시다(삼위 하나님의 존재의 구별성 교리)6). 이상의 세 개념들이 성경의 삼위일체 교리를 요점적으로 제시한 것이다.7)
‘삼위일체’란 말은 화란어 ‘Drie-eenheid'라는 말보다 표현이 풍부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말은 세 위격의 일체에 대하여 어떤 함축성도 없으며, 단지 셋이 있다는 상태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말은 신학의 전문 용어로서, 그러한 관념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관하여 언급할 때, 일체 속의 삼위와 삼위인 일체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물론 ‘본질의 동질성’이나 ‘존재의 구별성’이라는 표현들도 사용된 바 없다. 그렇지만, 3세기 이후로 교회는 하나님의 삼위격(tripersonality)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설명할 때 그러한 표현들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워필드가 말한대로 ‘성경의 단어들보다는 성경의 진리를 보전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확신한다.
1. 하나님의 인격성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존재로 계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격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삶은 인격적인 삶으로서 성경 속에서 우리 앞에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물론 하나님의 인격성을 주장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없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어떠한 종교도, 즉 어떠한 진정한 기도나 진정한 인격적인 사귐, 신뢰할 수 있는 의존, 확신있는 소망도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인간의 인격성을 알고 있는 대로 인격성을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인격적인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인격성을 하나님의 인격성을 측정하기 위한 표준으로 설정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인격성의 원형태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의 인격성은 원형적(archetypal)이지만, 인간의 인격성은 모형적(ectypal)이다. 후자는 전자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것과의 유사성의 희미한 흔적들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은 인격적이지만 하나님은 초인격적(매우 옳지 않는 용어)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초인격적인 것은 인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간에게서 불완전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 안에서는 무한한 완전으로 존재한다. 이 둘 사이에 있는 하나의 뚜렷한 차이점은 인간이 단인격적인 반면에, 하나님은 삼위격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삼위격적인 존재는 신적인 존재 안에 있는 필연성이며, 결코 하나님이 선택하신 결과는 아니다. 하나님은 삼위격적인 형태 이외의 어떤 다른 형태로는 존재하실 수 없다. 삼위 일체론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논의되어 왔다. 인격성 자체의 개념으로부터 삼위일체론을 논의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방법이다. 쉐드는 신성안에 있는 각 위격들의 특수적 개성적 자의식과 구별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반적인 자의식 위에 그의 논의를 기초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의식에는 주체가 반드시 그 자신을 대상으로 알아야 하며, 또한 그것을 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삼위적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가능하다. 쉐드는 하나님이 자신의 본질에서 삼위가 아니라면, 하나님은 자기 묵상, 자기 인식, 자기 교통이 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바틀렛은 하나님이 필연적으로 삼위격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흥미있는 방식으로 다양한 고찰들을 제시하였다. 하나님 안에 있는 복수성을 증명하기 위한 인격성으로부터의 논증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형식을 취할 수 있다. 사람들 가운데서 자아는 비자아와의 접촉에 의해서만 의식을 일깨워 준다. 인격성은 고립 속에서는 발전하지도 존재하지도 않으며, 오직 다른 인격들과의 의하여서만 발전하고 존재한다. 따라서 하나님 안에 있는 동등한 위격들의 사귐을 떠나서는 하나님의 인격성이 고려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들의 접촉이 인간의 인격성을 설명해 줄 수 없음같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피조물들과의 접촉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인격을 설명할 수 없다. 하나님의 삼위의 존재에 의하여 하나님 안에는 신적인 삶의 무한한 충만함이 존재한다. 바울은 엡 3:19과 골 1:9; 2:9에서 이러한 신성의 충만함에 대하여 말한다. 하나님 안에 세 위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고려해 본다면, 하나님을 한 인격으로 말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인격적이시라고 말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2. 삼위 일체론에 대한 성경의 증거
삼위 일체론은 단연 계시론이다. 인간의 이성이 이 삼위일체론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어떠한 사상들을 제안할 수도 있고, 또 인간들이 때때로 순전히 철학적 근거에서 하나님 안에 있는 그대로의 유일성의 관념을 버리고, 살아있는 운동과 자기 구별의 관념을 소개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경험이 이러한 신론의 구성을 구성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경험이 이러한 신론의 구성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이 삼위일체론은 우리가 경험만을 근거로 하였다면, 알 수 없었으며, 또한 아무런 확신도 가질 수 없었을 교리로서, 하나님의 특별 계시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교리에 관한 증거들을 수집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1) 구약 성경의 증거들
초대교회의 어떤 교부들과 후대의 몇몇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발전적인 특성을 간과하면서, 삼위일체론이 구약성경에서 완전히 계시되었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소지니주의자들과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삼위 일체론이 구약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양자의 주장은 다 잘못된 것이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존재에 관한 충분한 계시를 내포하고 있지 않으며, 그것에 관한 몇가지의 암시들만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하게 기대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결코 삼위일체론을 추상적인 진리로 취급하지 않으며, 다양한 관계들 속에서 삼위일체적인 삶을 살아있는 실재로 계시하고 있다. 어느 정도는 창조와 섭리의 사역들과의 연관속에서, 특히 구속의 사역과의 연관속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 삼위일체론의 가장 근본적인 계시는 말씀들 속에서가 아닌 사실드 속에서 주어진 계시이다. 그리고 이 계시는 성자의 성육신과 성령의 강림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좀더 분명하게 계시되는 정도에 따라 그 명료성이 점점 더 증가한다. 또한 삼위 일체의 영화로운 현실이 역사의 사실들 속에서 점점 드러나게 될 수록 삼위일체론적인 진술들은 점점 더 분명해진다. 신약 성경속에서의 삼위일체의 더욱 충만한 계시는, 말씀이 육신이 되셨으며 성령이 교회 안에 거하시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
삼위일체에 대한 증거는 때때로 여호와와 엘로힘을 구분하는 사실에서, 그리고 복수적인 엘로힘에서 찾는데, 전자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며, 후자는 로텐버그가 그의 책 [이스라엘의 신 관념 속에 있는 삼위 일체에 관하여]에서 여전히 주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으 복수로 언급하고 있는 창1:26; 11:7과 같은 구절들이 삼위 일체가 아닌 위격들의 복수성만을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안에서의 위격의 구별들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은 휠씬 더 그럴듯한 이론이다. 게다가 이러한 위격의 구별에 대한 좀더 분명한 암시들이 한편으로는 여호와와 동일시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여호와의 구별되는 여호와의 천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구절들(창 16:7-13; 18:1-21; 19:1-28; 말 3:1)과, 또한 말씀이나 하나님의 지혜가 인격화되어 있는 구절들(시 33:4; 잠8:12-31)속에서 발견된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말씀하시는 자로, 메시야와 성령을 둘 다 언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 48:16; 61:1; 63:9,10). 이와같이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의 삼위일체가 좀더 충만하게 나타나는 계시에 대한 분명한 예견을 포함하고 있다.
2) 신약 성경의 증거들
신약성경은 신성 속에 있는 구별들에 대한 더 분명한 계시를 담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여호와가 자기 백성의 구원자요 구세주로 나타난다면(욥 19:25; 시 19:14; 78:35; 106:21; 사 41:14; 43:3, 11, 14; 47:4; 49:7, 26; 60:16; 렘 14:3; 50:14; 호 13:3), 신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러한 능력을 가지신 것으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마 1:21; 눅 1:76-79; 2:17; 요 4:42; 행 5:13; 갈 3:13; 4:5; 빌 3:30; 딛 2:13, 14). 그리고 구약 성경에서는 이스라엘과 자기를 경외하는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 여호와이지시만 (시 74:2; 135:21; 사 8:18; 57:14; 겔 43:7-9; 욜 3:17, 21; 슥 2:10,11), 신약성경에서는 성령께서 교회 안에 거하신다.(행 2:4; 롬 8:9, 11; 고전 3:16; 갈 4:6; 엡 2:22; 약 4:5) 신약성경은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는 하나님 (요 3:16; 갈 4:4; 히 1:6; 요일 4:9)과, 성령을 파송하시는 성부와 성자에 대한 명백한 계시 (요 14:26; 15:26; 16:7; 갈 4:6)를 제공한다. 우리는 성부가 성자에게 말씀하시며(막1:11; 눅 3:22), 성자가 성부와 교제하시며 (마11:25, 26; 26:39; 요 11:41; 12:27, 28), 성령이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것(롬 8:26)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삼위일체의 각 인격들은 우리들의 마음 앞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도록 되어있다. 성자가 세례를 받을 때, 성부는 하늘에서 말씀하시고, 성령은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셨다(마 3:16, 17). 마지막 대사명을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세 위격을 언급하였다.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 세 위격은 또한 고전 12:4-6; 고후 13:14; 벧전 1:2에서 서로 나란히 명명되었다. 삼위일체를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구절은 요일 5:7이지만, 이 구절은 순전성이 의심스럽기 때문에, 신약 성경의 최근 비평적인 판에서는 제거되었다.
3. 삼위일체론에 관한 진술
삼위일체론은 다양한 명제들과의 연관성속에서 간략하게 가장 잘 논의될 수 있으며, 이 다양한 명제들은 이 점에 있어서 교회의 신앙의 개요를 구성하고 있다.
1) 신적인 존재안에서 유일의, 구분될 수 없는 본체가 있다. (ousia, essentia)
하나님은 그의 본체적 존재나 본질적 본성에 있어서 하나이시다. 하나님의 유일성에 관한 이러한 명제는 신 6:4; 약 2:19과 같은 구절들과, 하나님의 자존과 불변, 그리고 하나님께서 생명, 빛, 진리, 의 등으로 불리실 때와 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속성들과 동일시되고 있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2) 이러한 한 신적 존재안에는 세 위격들 혹은 개별적인 실체들(subsistences),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존재한다.
이것은 삼위 일체론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언급되는 다양한 구절들에 의하여 입증되고 있다. ‘인격’이라는 단어는 통상적인 어법에서 그것은 자의식을 소유하고 있으며, 모든 변화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의식하고 있는 각각의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개체를 나타낸다. 칼빈은 “하여간 인격이란 말을 쓸때, 나는 신적 본체안에 있는 실존을 의미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의견은 완전히 용인할 수 있으며, 오해를 피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것으로 인해서 우리는 신적 존재 안의 자기 구별들이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나’와 ‘너’, 그리고 ‘그’를 함축하여 서로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마 3:16; 4:1; 요 1:18; 3:16; 5:20-22; 14:26; 15:26; 16:13-15).
3) 하나님의 나누어지지 않은 전 본체(질)가 삼위의 각자에 동등하게 속한다.
이것은 신적 본체가 삼위에 배분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속성을 가지고서 각 위들 안에 전체적으로 있으며, 따라서 그 삼위는 본체의 수적 유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신적 본체는 수적으로 하나이며 동일하다. 그러므로 삼위들 안에 있는 본체의 유일성은 수적인 유일성이다.
4) 신적 존재 안에 있는 삼위의 실존과 활동은 분명하게 정해진 순서로 표시된다.
존재론적 삼위 일체에는 분명한 순서가 있다. 위격적 실존에 있어서 성부는 첫째요, 성자는 둘째, 성령은 셋째이다. 이 순서는 시간이 본체적 엄위에서의 어떠한 선훈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단지 기원의 논리적 순서에 있어서만 그러하다. 성부는 어떤 다른 위격에게서 태어나시거나 발원하지 않으시며,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
5) 삼위가 구별되는 어떤 위격적인 속성들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또한 내향적 사역이라고 불리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신적 존재 안에 있는 사역들이어서 피조물에 관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위격적 사역들이며, 삼위가 공동으로 하지 않으며, 또한 나누어 줄 수 없는 사역이다. 모든 것은 삼위의 공동적인 사역들이지만, 창조는 일차적으로 성부에게, 구원은 성자에게, 성화는 성령에게 돌려진다.
6) 교회는 삼위일체를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신비로 고백한다.
삼위일체는 이전에는 감추어졌다가 이제 계시된 진리라는 성경적인 의미에서만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또한 이해시킬 수 없다는 의미에서 신비이다. 삼위 일체는 현현의 어떤 관계들이나 양식에 있어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본체적인 성질에 있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결코 삼위 일체의 신비를 설명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며, 단지 그것을 위태롭게 하는 오류들을 막는 정도에서 삼위 일체의 교리를 체계화하려고 노력했을 따름이다.
2장. 삼위의 각론
1. 성부 혹은 삼위일체의 제 1위
1) 하나님께 적용된 ‘아버지’라는 호칭
이 호칭은 성경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언제나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a) 때때로 아버지라는 명칭은 모든 피조물의 근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적용되고 있다. (고전8:6; 엡 3:15; 히 12:9; 약 1:17) b) 아버지라는 호칭을 또한 하나님이 그의 구약 백성인 이스라엘에 대하여 맺고 있는 신정적 관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신 32:6; 사 63:16; 64:8; 렘 3:4; 말 1:6; 2:10) c) 신약에서 아버지라는 호칭은 윤리적인 의미에서 그의 모든 영적인 자녀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마 5:45; 6:6-15; 롬 8:16; 요일 3:1) d) 하지만 전혀 다른 의미에서, 아버지라는 호칭이 삼위일체의 제 2위와 관련을 맺고 있는 제 1 위에 대하여 적용되고 있다.(요 1:14, 18, 5:17-26; 8:54; 14:12, 13)
2) 성부의 독특한 특성
아버지의 위격적 특성은 소극적으로 그가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며, 적극적으로 성자의 발생 및 성령의 파송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부께만 독점적으로 독특하게 해당되는 사역은 능동적 발생의 사역이다.
3) 좀더 특별하게 성부께 돌려진 외향적 사역
하나님의 모든 외형적인 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고, 성부는 사역들 중 어떤 것은 전면에 계시는데, 이러한 사역은 성자 자신이 대상이었던 선택을 포함하여 구속의 역사를 계획하는 것시 2:7-9;, 40:6-9; 사 53:10; 마 12:32; 엡 1:3-6), 특히 초기 단계에서의 창조와 섭리의 사역들 (고전 8:6; 엡 2:9), 권리는 침해당하였으나 구원의 계획 속에 계신 삼위일체를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존재로 나타내는 사역(시 2:7-9;, 40:6-9; 요 6:37, 38:17:4-7) 등이다.
2. 성자 혹은 삼위일체의 제 2위
1) 제 2위에게 적용된 ‘성자’라는 호칭
삼위 일체중의 제 2위는 형이상학적인 의미, 직무적 혹은 메시야적인 의미, 출생적인 의미 등 한 가지 이상의 의미에서 ‘아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린다.
형이학적인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로서의 그의 지위와 사역에 관계없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내어 진다. a) 성자는 성육신의 이전에도 하나님의 아들로 언급되고 있으며(요1:14; 갈4:4), b) 성자는 ‘하나님 또는 아버지의 독생자’라고 불리워졌으며 (요 1:14, 18; 3:16, 18; 요일 4:9), 어떤 문맥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시한다(요5:18-25; 히 1장).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것을 가르치셨으며, 동시에 자기 자신은 그를 단지 ‘아버지’또는 ‘내 아버지’라고 칭하였으며(마 6:9; 7:21; 요 20:17), 다른 아무도 소유할 수 없는 하나님의 독특한 지식을 예수님만이 소유하고 있으며(마 11:27), 유대인들도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주장을 이해하였다(마 26:63; 요 5:18; 10:36).
직무적 혹은 메시야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으며(마 8:29; 26:23; 27:10; 요 1:49; 11:27), 메시야적 아들 됨의 입장으로부터, 하나님은 아들의 하나님이라고까지 불리며(고후 11:31; 엡 1:3), 또한 때때로 주와 구별하여 하나님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요 17:3; 고전 8:6; 엡 4:5, 6).
출생적인 의미에서, 예수는 그의 인성을 따라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사역에 의해 출생하셨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다(눅 1:32, 35; 요 1:13).
2) 성자의 위격적 실존
성자의 위격성은 다음과 같이 구체화될 수 있다. a) 성경이 성부와 성자를 서로 동렬로 언급하는 방식은 그 어느 한편이 다른 편과 똑같이 위격적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며, 또한 둘 사이에 존재하는 위격적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b) ‘독생자’와 ‘맏아들’이라는 명칭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독특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략 출생과 출생의 관계로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c) 성경에 있는 ‘로고스’라는 용어의 독특한 사용도 같은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요 1:1-14; 요일 1:1-3). d) 성경은 성자를 형상 혹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까지 묘사하고 있으면(고후 4:4; 골 1:15; 히 1:3), 하나님이 인격적 존재이므로 성자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그 또한 인격적이어야만 한다.
3) 성자의 영원한 발생
성자의 인격적 고유성은 그가 아버지에게서 영원히 나시며, 또한 성부와 함께 성령의 파송에 참여하신다는 점이다. ‘성부’와 ‘성자’라는 명칭은 전자에 의한 후자의 발생을 의미할 뿐 아니라 또한 성자는 반복적으로 ‘독생자’라고 불리고 있다(요 1:14, 18; 3:16, 18; 히 11:17; 요일 4:9). 성자의 발생에 관련된 강조될 수 있는 특별한 사항들은 a) 성자의 발생은 하나님의 필연적이며 완전히 자연적인 행위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성자의 발생이 결코 성부의 의지와 관계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b) 성자의 발생의 영원성은 하나님의 영원성으로부터 유래할 뿐만 아니라, 신적 불변성과 성자의 참된 신성으로부터 유래된다. 그밖에도 이 영원성은 성자의 선재성이나 성부와의 동등성을 가르치는 모든 성경 구절들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미 5;2; 요 1:14, 18; 3:16; 5:17, 18, 30, 36; 행 13:33; 요 17:5; 골 1:16; 히 1:3). c) 성자의 신적 본질의 발생이라기보다는 위격적 실존의 발생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부와 성자의 본질은 이미 창조전에 정확하게 동일하기 때문이다. d) 교회의 교부들은 성자의 발생을 육체적 혹은 생물적인 방식으로 인식해서는 안되며, 모든 분활이나 변화의 관념을 배제하는 영적이고 신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바빙크는 발생은 신적 존재에 구별과 구분을 가져오지만, 변화와 분할은 가져오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e) 성자의 발생은 삼위일체의 제 1위의 신적 존재안에서, 자기 자신과 같은 제 2위의 실존의 근거가 되며, 또한 그 제 2위로 하여끔 어떤 분할이나 분리 또는 변화가 없이 신적 본질을 전부 소유하게 하시는 영원하며 필연적인 행위이다.
4) 성자의 신성
a) 성경은 성자의 신성을 명백하게 주장하고 있으며(요 1:1; 20:28; 롬 9:5; 빌 2:6; 딛 2:13; 요일 5:20), b) 성경은 신적인 호칭들을 그에게 적용하고 있다(사 9:6; 40:3; 렘 23:5, 6; 욜 2:32) c) 성경은 영원한 존재(사 9:6; 요 1:1,2 ; 계 1:8; 22:13), 편재(마 18:20; 28:20; 요 3:13), 전지(요 2:24, 25; 21:17; 계 2:23), 전능(사 9:6; 빌 3:21; 계 1:8), 불변성(히 1:10-12; 13:8) 등의 신적 속성들을 그에게 돌리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 모든 속성들은 성부에게 속하는 것이다(골 2:9). d) 성경은 성자가 창조(요 1:3,10; 골 1:16; 히 1:2, 10), 섭리(눅 10:22; 요 3:35; 17:2; 엡 1:22; 골 1:17; 히 1:3), 사죄(마 9:2-7; 막 2:7-10; 골 3:13), 부활과 심판(마 25:31, 32; 요 5:19-29; 행 10:42; 17:31; 빌 3:21; 딤후 4:1), 만물들의 마지막 붕괴와 갱신(히 1:10-12; 빌 3:21; 계 21:5)등의 신적인 사역들을 행하신다고 말한다. e) 성경은 신적인 영광을 성자에게 돌리고 있다(요 5:22, 23; 14:1; 고전 15:19; 고후 13:13; 히 1:6; 마 28:19).
5) 경륜적 삼위 일체에서의 성자의 위치
본체적 혹은 존재론적 삼위일체에서 존재의 순서가 경륜적 삼위일체에 반영되었으며, 성자는 외향적 사역에서 두 번째 위치를 차지한다. 성자는 만물의 운행(고전 8:6; 요 1:3,10; 히 1:2,3), 성육신과 구속(요 1:9; 시 40:7,8; 엡 1:3-14), 지혜와 권능(고전 1:24; 히 1:3), 긍휼과 은혜(고후 13:13; 엡 5:2, 25) 등의 속성들이 있다.
3. 성령 혹은 삼위일체의 제 3위
1) 삼위 일체의 제 3위에 적용된 호칭
요 4:24이 하나님을 ‘영’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나, ‘영’이라는 명칭은 특별하게 제 3위에 적용되고 있다. ‘영’을 나타내는 히브리어는 루아흐(ruach)이고, 헬라어는 프뉴마(pneuma)인데, 이 양자는 라틴어 ‘스피리투스’와 같이 ‘숨을 쉰다’는 뜻을 가진 어근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이 말들은 또한 ‘호흡’(창 2:7; 6:17; 겔 37:5,6)이나 ‘바람’(창 8:1; 왕상 19:11; 요 3:8)으로 번역될 수 있다. 구약은 ‘영’이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아무런 수식어 없이 사용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영’이나 ‘주의 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성령’이라는 용어는 단지 시 51:11; 사 63:10, 11 에서만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 이 용어는 삼위 일체중 제 3위의 휠씬 더 일반적인 칭호가 되었다. 현저한 사실은 구약이 하나님을 반복적으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시 71:22; 89:18; 사 10:20; 41:14; 43:3; 48:17)로 부르고 있는 반면에, 신약은 ‘거룩하신’이라는 형용사를 거의 하나님께 붙이지 않고 종종 성령을 특징짓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성령과 그의 성화 사역안에서 자신을 거룩하신 자로 계시하셨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성령은 신자들의 마음속에 거하시며, 그들을 하나님께서 성별하여, 그들을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신다.
2) 성령의 인격성
‘하나님의 영’ 혹은 ‘성령’이라는 용어는 ‘성자’라는 용어만큼 인격성을 암시하지 않으며, 성령의 인격은 명백하게 인식할 수 있는 인격적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초대교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나, 인격화는 신약의 산문적인 글들 속에서 드물지만 확실하게 나타난다(요 14:26; 16:6-11; 롬 8:26). a) 인격성에 적절한 칭호(요 14:26; 15:26; 16:7)들이 성령에게 부여되고 있으며, b) 지식(요 14:26; 15:26; 롬 8:16), 의지(행 16:7; 고전 12:11), 감정(사 63:10; 엡 4:30)과 같은 인격의 특징들이 성령에게 돌려지고 있다. c) 성령은 자신의 인격성을 의미하는 바, 다른 인격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분으로 나타나고(행 15:28; 요 16:14; 마 28:19; 고후 13:13; 벧전 1:1,2; 유 20:21), d) 성령이 자기 자신의 능력과 구분되고 있는 구절들도 있다(눅 1:35; 4:14; 행 10:38; 롬 15:13; 고전 2:4).
3) 성령과 삼위일체의 다른 위격과의 관계
589년 톨레도 회의에서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라틴어 역문에 필리오케(Filioque, 성자로부터도)라는 말을 첨가됨으로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 문제의 해당 신조는 “우리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을 믿습니다”(Credimus in Spiritum Sanctum qui a Patre Filioque procedit)라는 구절이었다. 이 성령의 발출은 간략하게 파송이라고도 불리는데, 성령의 인격적인 특성이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했다는 교리는 요 15:26에 근거한다. 파송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삼위일체의 제 1위와 제 2위가 신적 존재 안에서 성령의 인격적 실존의 근거가 되며, 제 3위로 하여금 아무런 분활이나 분리또는 변화가 없이 온전한 신적인 본질을 소유하게 하는 영원하며 필연적인 행동’이다.
4) 성령의 신성
성령의 신성은 성자의 신성을 입증함과 유사하게 성경으로 입증한다. a) 신적 호칭들이 그에게 부여되고 있다(출 17:7; 행 5:3,4 ; 고전 3:16; 딤후 3:16). b) 편재(시 139:7-10), 전지(사 40:13,14; 고전 2:10,11), 전능(고전 12:11; 롬 15:19), 영원(히 9:14)과 같은 신적 속성(성품)들이 그에게 돌려지고 있다. c) 창조(창 1:2; 욥 26:13; 33:4), 섭리적 갱신(시 104:30), 중생(요 3:5, 6; 딛 3:5), 죽은 자의 부활(롬 8:11)과 같은 신적 사역들이 그에 의하여 수행되고 있다. d) 신적 영광이 그에게도 역시 돌려지고 있다(마 28:19; 롬 9:1; 고후 13:13).
5) 신적 경륜 속에서의 성령의 사역
일반적으로 성령을 특별한 임무는 피조물의 안팎에 직접적으로 활동하심으로써 사물들을 완성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언급될 수 있다. 성령의 사역이 성자의 객관적 사역과 떨어지게 되면 그릇된 신비주의로 빠지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성령의 사역은 자연계에서 a) 존재가 성부로부터 나오고, 생각은 성자로 말미암음과 같이, 생명은 성령에 의하여 매개되며(창 1:3; 욥 26:13; 시 33:6?; 시 104:30), b) 성령은 사람들의 직무적 과제를 위하여, 즉 과학과 예술 등의 일을 위해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며 자격을 부여하신다(출 28:3; 31:2,3,6; 35:35; 삼상 11:6; 16:13,14). 구원의 영역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은 a) 중보적인 사역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준비시키고 자격을 부여하셨으며(눅 1:35; 히 10:5-7; 눅 3:22), b) 성령은 성경에 영감을 주셨으며, 인간에게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주셨다(고전 2:13; 벧후 1:21). c) 성령은 교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을 중생과 성화에 의하여 형성하시고 성장시키시며, 또한 새 생명의 원리로서 교회안에 거하신다(엡 1:22,23; 2:22; 고전 3:16; 12:4 이하). d)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며, 또한 교회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요 14:26; 15:26; 16:13, 14; 행 5:32; 히 10:15; 요일 2:27)
3장. 초대교회사적 삼위일체의 변천
1. 2세기 삼위일체론 논의의 시작
한 하나님 창조주 교리는 초대교회의 신앙의 시비불가한 근본 전제였다. 그러나 교회는 한 하나님 창조주 신앙에다가 그리스도의 계시로 온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대해 어려운 사고와 이해를 시작하였다. 한 하나님이어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구분되는 인격으로 계시되고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부활자 예수를 주님으로 경배하고 신앙 고백하였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로 계시된 하나님의 성육신의 관계를 교회는 반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 인격만 있는 유일신 교리에서 삼위일체로 넘어가는데는 교회의 깊은 반성과 많은 신학적 노력이 있어야 했다. 삼위일체의 신학적 논의와 반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때문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성육신이고, 또 자신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그가 창조에 역사하여 아버지에게서 유래한 만유를 창조한 창조 중보자임을 인식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예수로 구원을 이루었고 또 그를 통하여 성령을 교회에 부어주셨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리하여 한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 천지의 창조주를 믿었고, 한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을 믿었으며, 선지자들을 통해 구원을 예언한 성령을 믿었다. 그리하여 비록 325년 니카야 공회의 이전에라도 신적 위격들의 복수성이 교회의 인식에 크게 인각되었다. 이 신앙과 이해가 2세기 중엽에 사도신경과 신앙의 규범으로 공식화되어 후기 교회의 삼위일체 교리 공식화의 기본과 시작점이 되었다. 초대 교회는 하나님내의 복수성을 인식하였지만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니카야와 콘스탄티노플리스 공회의까지에 이르는 여러 세기에 걸친 신학적 노력과 반성과 투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2세기 사도적 교부들은 전통적 신앙의 증인들이었지 그 해석자들은 되지 못하였다. 로마의 클레멘트, 제 2 클레멘트, 바나바스, 이그나티오스, 헤르마스 등의 진술을 통해 초대교회의 삼위일체적 이해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 변증가들은 희랍철학으로 기독교의 합리성을 변증하려고 노력했는데 하나님내의 구분을 인식하고 로고스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하나님내의 구분을 확실하게 해서 다음 세대의 삼위일체 교리의 확정의 길을 열어주었다. 특히 변증가들의 논의가 이레니우스에게 전승되어 발전하므로 삼위일체의 이해가 교회에 바로 정착하는 길을 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유일성 곧 유일신 교리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 내의 구분을 지성으로 설명하므로 하나님 자신과의 일치와 구분을 분명히 하되, 유일신 교리를 지키려고 하였다. 이 당시 활약하던 변증가들은 저스틴, 타티안, 안디옥의 데오필로스 등으로서, 그들은 신적 로고스 혹은 말씀이란 상을 사용하여, 하나님안에 있는 말씀은 내재 말씀으로 나타난 말씀은 현현 말씀으로 구분하기 위해 스토익(stoic)의 구분을 활용하였으나, 이는 사도 요한의 로고스 개념과는 다르다. 최초의 교황이며, 교부시대를 열었던 이레니우스는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들 로고스 창조주, 로고스의 성육신, 하나님의 지혜 성령, 삼위일체의 관계등에 대해 설명하였다.
2. 3세기 삼위일체론 논의
3세기의 삼위일체의 논의는 2세기의 논의와 달리 진행되었다. 유일신 신앙을 헐지 않으면서 하나님 내의 구분을 말한 교부들과 변증가들의 경우와는 달리 삼위일체가 본래적이고 영원한 것임을 밝히게 되었다. 분리 불가한 한 신격내에 있는 구분을 삼중의 개념으로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섭리적 삼위일체론의 논의를 펴므로 하나님의 하나 되심에 강조를 두어 유일신 사상을 헐지 않도록 하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서방교회는 전제군주론에 오래도록 부착하여 삼위일체론의 정립에 진전이 더디게 되었다. 그러나 동방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복수성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 내에 있는 구분들을 그들의 존재방식 혹은 위격으로 표시하였다. 이 새로운 접근 방식에 의해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이 기독교의 기본 신앙이 되었다. 터툴리안은 삼위일체, 로고스 하나님의 아들, 로고스의 성육신, 성령 등에 대해 언급하면서 삼위일체론을 진보시켰으며, 히폴리우스는 교황 칼릭스투스의 양태론, 군주론과 성부 수난설을 주장한다고 비난하고, 로마교회의 주교의 교황권 주장을 이단적이라고 배척하였다. 그는 삼위일체, 로고의 출생, 로고스의 성육신 등에 대해 언급하였지만, 터툴리안처럼 구체적인 전개는 못하였지만 하나님은 한분이시지만 복수가 있음을 강조하였고, 삼위일체란 용어에 아직 이르지 못했지만 ‘셋’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그의 말씀과 지혜와 늘 함께 계셨음을 말한다.
2세기말부터서 교회에 유일신 교리를 지키기 위해 신앙의 규범과는 다른 이론을 제시하였다. 삼위일체 교리로 교회가 가고 있을 때 전통적인 유일신 교리를 지키기 위해 예수를 한낱 사람으로 보는 견해와 세 위격 대신 한 위격이신 아버지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그 존재 양식을 변화하여 나타나셨다는 양태론이 나타났다. 양태론은 교회에 추종자가 많았으나, 양자론은 이단으로 즉각적인 정죄를 가져왔지만, 그 이단은 계속되었다. 양자론 혹은 동력적 군주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들은 데오도토스과 바울이다. 양자론이 일부의 합리적인 삼위일체론의 해결이지만 양태론은 널리 퍼진 이론이었다. 삼위일체론의 전개에 대항하여 전통적인 유일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양태론이 나타났다. 하나님은 한분이시고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성을 가졌으므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주장이 양태론인데, 한 위격이 세 양태로 나타나셨기에 삼위일체 교리는 틀렸다고 본다. 이 주장은 노에토스, 프락세아스, 사벨리오스가 전개하였으며, 사벨리오스가 체계화하므로 사벨리오스주의로 불리우기도 한다. 그러나, 양자론과 양태론의 이단은 이레니우스의 제자인 히폴리투스와 터툴리안와 노바치안, 4세기의 에피파니오스의 심한 공격으로 사라졌다. 이로 인해 로마교회 신학도 전통적인 신앙에로 들어서게 되어 삼위일체 교리의 공식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동방교회에서 삼위일체 교리의 공식화가 이루어지도록 알렉산드리아에 의해 신학적 작업이 전개되었으며, 클레멘트와 오리겐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희랍철학을 대거 교회에 유입하여 신학 작업을 하므로 문제점들을 많이 일으켰으며, 그 결과로 후에 오리겐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격적인 존재를 확립하는 일을 하므로 정통교리를 확정하는 일에 기초를 놓았다고 할 수 있으나, 오리겐은 삼위일체론의 전개에 있어서 플라톤주의의 깊은 영향아래 있었으므로 정통교리와는 그 이해를 달리했다. 오리겐이 신학자로서 과도한 종속주의를 삼위일체론에 도입하므로 아리우스가 그를 대변하였다.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단정하게 되었고, 그후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의 신학적 작업에 의해서 삼위일체에서 종속주의를 제거하였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종속주의가 떠나지 않게 되었다. 이 종속주의가 근세에 이르러 삼위일체를 부인하게 되어 유대교적인 유일신 곧 한 인격적인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서 기독교를 자연주의화하였다. 오리겐의 신학은 두 방향으로 나타났는데, 오리겐의 종속주의를 대변하여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보는 신학과 호모우시온을 취하여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실체임을 주장하는 정통주의이다. 과격한 종속주의를 대변하는 신학들은 데오그노스토스, 피에레오스와 히에라카스, 그레고리오스 타우마툴고스와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스, 교회사가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오스 등이고, 정통주의는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드로스와 아다나시오스 등이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이 그의 신학을 이해한 것은 정통교리로 가도록 길을 열었으며, 마침내 4세기초에 니케야 정통교리가 확정될 수 있게 되었다. 이후부터는 교회가 삼위일체를 믿는 교회가 되었다.
3. 아리우스 논쟁과 니케아 공회의
삼세기 이상에 걸쳐 전개된 삼위일체 논의와 이해는 교회로 하여금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교리를 결정할 수 있는 신학적인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의 공식화는 교회 자체적인 이해만으로 결정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과격한 이단적인 주장에 대한 반동으로 삼위일체 교리가 확정되었다. 삼위일체 교리는 오리겐의 삼위일체론을 과격화한 아리우스의 종속주의의 논쟁에서 유발되고 결정되었다. 아리우스는 318년 알렉산드로스에게 편지를 보내어 아들을 피조물로 주장하므로서 논쟁을 촉발시켰다. 또한 유세비오스는 오리겐의 제자로서 그의 종속주의를 그대로 대변하면서, 아리우스의 과격한 종속주의 곧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보는 견해를 표현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알렉산드로스는 아리우스의 사건이 터지자 말자 A.D 320년에 공회의를 소집하여 아리우스를 정죄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동방의 최초의 정통 신학자이고 교회의 정치가이다. 이때에 정한 그의 정죄와 신학적 규정이 니케아 정통 교리를 산출하도록 했다. 그는 오리겐의 종속주의적 경향을 완전히 벗지는 못하였지만 정통주의 신학을 견지하므로 아리우스의 과격한 종속주의를 정죄하였다. 또한 니케아 공회의가 정통교리를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다나시우스의 확고한 신앙과 바른 신학 때문이다. 그는 ‘이방인들에 대항하여’와 ‘로고스의 성육신에 관하여’을 통해 로고스론을 펼쳤다. 초대교회의 삼위일체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은 모두 신적인 위격들이시다라는 확신으로부터 이끌어져 나온 것이었다. 첫 3세기 기간 동안 특히 2세기의 영지주의와 로고스 기독론, 3세기 사벨리우스주의와 4세기초의 아리우스주의 등에 의해 촉진되었던 공식화 과정 (즉 삼위일체 교리를 공식화하는 과정)은 A.D. 325년 니케아 신조에 있는 기본적이고 진정한 삼위일체 교리의 결정체를 교회에 가져다 주었다. 최초의 공의회가 만든 그 신조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시오,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만물들의 창조주이신 한분 하나님을 믿사오며, 또한 우리는 한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아버지에게서 유일하게 나신 자, 즉 성부의 본질에서 나신 자요,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시이요, 빛에서 나온 빛이시오. 참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 하나님이시니, 그는 낳으신 바 되었으나 창조되지 않고, 성부와 동일 본질에서 나오셨으며, 그를 통하여 천상과 지상의 만물이 창조되었다. 그는 우리 인간들을 위하고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성육신하셔서 인간이 되셨으며, 고난을 받으시고 제 3일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우리는 또한 성령을 믿는다. 하지만, 그가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고 하거나, 그가 나시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거나, 혹은 그가 무에서 존재하게 되었다고 하는 자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 서로 다른 실체, 혹은 본질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그가 창조되었거나 변모되고 변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사도적 공교회가 저주하는 바이다.”
중심내용은 첫째 니케아 공의회에서 교회는 계속해서 삼위일체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 공의회는 성부와 성자가 동일본질(homoousia)임을 믿는 믿음을 고백하고 있고, 또 그를 ‘참 하나님’으로 진술하고 있다. 이로써 하나님의 아들의 완전한 신성에 대한 교회의 변함없는 신앙을 단언하였다. 셋째 호모우시아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그 교리를 고백함으로써 교회가 모든 형태의 다신론, 삼신론, 아리우스주의를 피할 수 있게 하였다. 넷째 (성부는 성자를 영원히 낳으시고, 또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히 나셨다)라는 식으로 성부와 성자를 구별함으로써, 공의회는 교회가 모든 형태의 사벨리우스주의로부터 벗어나도록 해 주었다. 다섯째 ‘진정한 하나님이시며, 성부와 동일본질이신’ 한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는 우리 인간들을 위하고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성육신하셔서 인간이 되셨으며, 고난을 받으시고 제 3일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라고 고백함으로써 공의회는 교회가 그 자신을 구속의 메시지를 소유하고 있는 구속된 공동체로 보아야 하며, 그 구속의 메시지의 중심에는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과 그 사건의 결과이신 신인(神人)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서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요컨대 공의회가 선포한 바에 의하면, 교리적 생명과 헌신적 경건의 핵심 표시로서 교회는, 참되고 살아 계신 한분 하나님께서 서로가 “나-너”관계인 하나의 신적 통일성 안에서 세 개의 구분된 자의식적 자아로 영원토록 존재하신다는 진리를 그 신앙의 중심에 간직해야 한다. 또한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구속의 목적을 위해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성자의 성육신에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다라고 끊임없이 고백해야 한다. 또한 기독교 유신론의 하나님에 대해 위와 같이 공의회가 묘사한 것은 정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논점도 제기되었다. 첫째 삼위일체에 있어서 ‘위격’의 의미, 둘째 하나의 신적 본질과 세 위격들 간의 관계, 셋째 니케아 교부들이 성부와 성자를 구별하기 위해 사용했던 교리적 도구, 즉 성부께서 성자를 영원히 낳으셨다는 표현의 타당성 등이다.
4. 아다나시우스의 신학
아다나시우스는 니케아 신경의 최대의 대변자이고 변호자이다. 그의 신학으로 니케아 신경이 확립되게 되었고, 그 이후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에서 결정한 제 2조의 내용과 제 3조 성령조도 다 그의 신학에 의해서 확정되었다. 아다나시우스 신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으로 신학함으로 그리스도의 신격을 증명함, 둘째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의 실체의 소생임, 셋째 아들의 영원한 출생, 넷째 의지에 의한 출생이 아니라 본성적 출생, 다섯째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실체 호모우시온, 여섯째 아버지와 아들은 한 하나님이다. 아다나시오스의 신학의 핵심은 하나님이 이룩한 구원이다. 하나님의 구원에서 출발하여 다른 모든 조항들이 사고되었다. 창조주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어야 확실한 구원이 되어 실제로 인류가 구원된다. 그러므로 구원자는 피조물일 수 없고 창조주는 하나님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구원자는 반드시 하나님이어야 하고 피조물일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 로고스가 아버지와 동일실체를 가졌고 그 실체는 분할 불가하므로 한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리우스의 이단처럼 피조물이 아니라 아버지와 동일한 한 신격을 가져 아버지와 동일실체이다. 이러한 노력 때문에 아다나시우스는 성령에 관한 사고는 매우 적고 또 언급도 적다. 그러나 그는 성령이 삼위의 한 위격이며 분할 불가한 한 신성을 가져 동일실체임을 명시하였다. 아다나시우스 신학의 특징은 아들과 성령을 함께 결합하는 점이다.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결합하여 한 신성이고 동일실체임을 밝혔다. 또 로고스와 성령을 함께 결합하여 성령이 한 신성이고 삼위일체임을 증명하였다.
5. 성령의 인격성과 콘스탄티노플 공회의
니케아 공회의 이후 반세기에 걸쳐 진행된 호모우시온에 대한 투쟁은 362년 알렉산드리아 공회의에서 호모우시온을 시비없는 교회의 바른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에큐메닉 공회의의 결정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므로 이 호모우시온에 대한 최종 결정을 위해 제 2차 에큐메닉 공회의가 소집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호모우시온의 확정을 위해서 공회의가 소집될 때 더 절박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것을 성령이 아레안파에 의해 피조물이고 천사장이라고 주장하는 마케도니안파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에게 적용된 호모우시온이 성령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성령이 인격적인 하나님인지 아니면 피조물인지를 확정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 3조의 확립에 있어서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이 크게 일하였다. 그들의 신학적 노력에 의해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과 동등이신 하나님으로 확정할 수 있게 되었다. 공회의의 결정에 이르기 전에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신학적 작업을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바실레오스는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서 한 하나님이신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수에 있어서 한 하나님이 아니라, 본성에 있어서 한 하나님이시므로 삼 위격이 다 참 하나님이심을 밝힌다. 그러므로 세 위격 내의 한 실체를 강조하므로 세 위격에 더 강조를 두고 세 위격의 공동 특성에로 추론하였다. 또 실체와 위격의 관계에 있어서 부성과 출생, 성화로 각 위격의 특성을 확정하였고, 성령의 존재방식을 아버지에게서 출래로 정하였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는 바실레오스의 작업을 이어서 성령의 신성을 강조하여 동일 실체임을 강조한다. 세 위격이 한 하나님이심은 한 실체, 동일본성이기 때문이라는 강조한다. 그리고 각 위격들의 특성을 밝힘에 있어서 성령의 특성이 출래임을 제시함에 있어서 바실레오스를 따르고 있다. 닛사의 그레고리오스는 바실레오스의 동생으로서 그에게서 주로 신학교육을 받았다. 후에 닛사의 주교가 되고 큰 저술들을 하여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에서 성령조의 공식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그는 닛사의 별로 칭송되고 교부중에 교부로 찬탄을 받았다. 닛사의 그레고리오스는 삼위격의 공동성과 동등성에서 출발한다. 실체는 세 위격 내에 발견된다. 비창조성이 신적 본성의 특성이므로 이 특성이 세 위격에 공히 발견된다. 물론 신적 본성은 비물질적 합리적 본성이라는 것이 그레고리스오스의 기본 사상이다. 이것은 플라톤적 사고의 영향을 입은 것을로 보아야 할 것이다.
A.D.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에서 결정된 신조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한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만드신 이를 믿사오며, 한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한 아들을 믿는데,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시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이요, 빛에서 나온 빛이요, 참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 하나님이요, 출생하셨고 만들어지지 않으셨으며, 아버지와 동일실체이시다.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만들어졌다. 그는 우리 사람들을 위하여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 오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육신하시어 사람이 되셨고,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수난 받으시고 장사되셨다. 성경대로 부활하사 하늘들에 오르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으니, 영광으로 다시 오사 산자들과 죽은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라, 그의 나라는 끝이 없느니라. 그리고 성령을 믿사오니, 주시오 살리는 자시요 아버지에게서 나오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 받으시고 함께 영광을 받으시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느니라. 그리고 한 거룩한 보편적이며 사도적 교회를 믿습니다. 죄들의 용서에 이르는 한 세례를 믿사오며,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오는 세대의 생을 믿사옵니다. 아멘“
콘스탄티노플 공회의 결정 내용은 첫째 제 2조에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시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다’가 추가되고, 둘째 성령은 주시오 살리시는 자로 공식화되었다. 셋째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출래하였고, 넷째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같이 함께 받고 영광을 받으심 다섯째 성령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여섯째 제 3조에 교회를 신앙의 대상으로 확정했다. 이제 정통교리가 확정되었으므로 이제 이후로는 이 니케노-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따라 신학하게 되었고, 그 울타리 안에서만 신학작업이 가능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 공회의 신경에 대한 의의는 최종적으로 아레안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호모우시오스가 아들뿐 아니라 성령에도 그대로 적용되게 되었다. 이로써 아들과 성령이 피조물이라는 시비가 완전히 가시고 아버지와 동등하여 아버지와 함께 아들과 성령이 동등한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으로 확정되었다. 이렇게 하여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종교로 확립되었다.
6. 삼위일체 교리의 결말
콘스탄티노플 공회의 이후 삼위일체론의 논의와 바른 이해를 위해 아우구스티누스가 큰 작업을 하였다. ‘삼위일체에 관하여’라는 저술에서 이제까지의 논의를 총괄하면서도 성경 주석의 방식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바르게 결말하므로 최대 교부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공은 세 위격들의 완전 동등성과 성령의 출래를 아버지와 아들로 확정하여 서방교회의 교리와 신학활동의 표준이 되게 하였다. 성령의 출래를 동방교회와 달리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확정하므로 동방교회와의 논쟁에서 Filioque를 양보할 수 없게 되었다. 아다나시우스 신경은 정통 신앙의 수호자이고 대변인인 아다나시우스의 이름으로 신경이 작성되었어도 그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재생산하였다. 따라서 개신교회는 이 신경을 정당한 신경으로 받되 루터교회는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서에 이 신경을 표준 신경으로 지목하였다. 이 신경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그 마지막 귀결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성령의 출래를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시는 것으로 확정하였다. 삼위일체 교리가 결말되었으므로 이 삼위일체 교리를 믿어야 구원에 이름과 이 신앙을 거부하면 멸망에 이름을 명기하였다. 이로써 삼위일체 교리가 구원 얻음과 교회에 필수적임을 명기하여 이 교리가 영구한 교리임을 천명하였다.
III. 결 론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주의의 주장에 반대하여 성자의 위격에 대한 교리를 확립하는 일에 힘을 소진하는 바람에, 성령에 대해서는 ‘교회가 성령을 믿는다’라는 단순한 선언 이상의 것을 말하지 못했다. 교회가 성자의 신성과 위격적 존재에 대한 문제를 해결한 이후에야 성령에 대한 교리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A.D 381년에 열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에 손상을 입힌 아폴리나리스의 가르침과 함께 성령에 대한 부족한 부분을 다루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성부가 성자를 창조하셨던 것처럼 성자 또한 성령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쳤던 아리우스주의와 반-아리우스주의에 반대하여, ‘교회는 주요, 생명의 수여자이신 성령을 믿사오니, 그분은 성부로부터 나오신 분이시오, 성부와 성자와 동일하게 경배받으시고 영광받으시는 분이시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이심을 믿는다’고 선언했다. ‘성부로부터 나오신다’(proceeds)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공의회는 성부와 성자와는 구별되는 성령의 유일한 특성을 강조하려 했으며, 위의 고백을 통해 성자가 본질적이고 필연적으로, 영원히 성부에 의해 나시는 것처럼, 성령 또한 본질적이고 필연적으로, 영원히 성부로부터 나오신다는 점을 말하려 하였다.
개혁주의 신앙적 측면8)에서 삼위일체의 고백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존재의 실체 그 자체가 정신과 마음 모두에게 최고로 중요한 것이다 첫째로 교회는 그 고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존재의 단일성과 다양성을 모두 유지한다. 세상의 단일성, 인류의 단일성, 진리의 단일성, 덕의 단일성, 의의 단일성, 미의 단일성이 바로 하나님의 단일성에 의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단일성을 부인하거나 무시하면 바로 그 순간 다신론에로 향하는 문이 열리고 마는 것이다. 그 단일성에는 차이, 구별 혹은 다양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 다양성이 하나님의 존재의 삼위 혹은 세가지 양상 속에 표현되는 것이다. 이 삼위는 그저 계시의 세가지 양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세가지 양상인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의 신적 본질과 특성들을 공유하며, 그들이 한 존재인 것이다. 둘째로 교회는 이 고백을 지켜가면서 이신론(계시없는 하나님을 믿음)과 범신론, 다신론의 이단들과 유대교와 이교의 이단들에 대하여 강력한 입장을 취한다. 셋째로 교회의 이러한 고백은 영적 삶을 위해서도 지극히 중요하다. 개혁주의 신앙고백 11항에서 교회는 하나님이 한 본체시며 또한 삼위이심을 진술하고 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성경의 증거에서, 또한 삼위 하나님의 여러 활동들에서 알수 있다. 삼위일체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느낌과 경험에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믿을때에, 그 교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적 체험과 친밀한 관계속에 있다는 것을 지각하게 되는 것이다. 삼위일체를 믿으면, 신자들이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우리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신 성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배우고 알게 된다. 우리에게 거룩한 계명들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행하도록 하신 율법 제정자이신 하나님을 알게 되며, 또한 사람의 모든 불의 에 대해서 끔찍한 진노를 발하시며, 결코 죄인을 죄없다 하시지 않는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배워 알게 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의 육체와 영혼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며 또한 이 눈물 골짜기에서 당하는 모든 악들을 선으로 바꾸어 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그런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배워 알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또한 아버지의 독생자시오 성령으로 마리아에게서 나신 성자의 역사하심을 배워 알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최고의 선지자요 스승이시오 우리의 구속에 관하여 하나님의 은밀하신 경륜과 뜻을 우리에게 완전하게 계시해 주신 분이심을 배워 알게 되며, 그가 자기 몸을 단번에 희생시키셔서 그들을 구속하셨고 여전히 계속해서 그들을 위하여 아버지께 간구하시는 유일한 대제사장이심을 배워 알게 되며, 그가 자기 몸을 단번에 희생시키셔서 우리를 구속하셨고 여전히 계속해서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께 간구하시는 유일한 대제사장이심을 배워서 알게 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며 또한 우리들이 얻은 구속의 상태속에 우리를 보존시키시는 그들의 영원한 왕이심을 배워서 알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인식하기를 배우게 된다. 그는 그들을 중생시키시며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가 그들의 믿을 통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모든 은 택들을 누리게 하시는 바 믿음의 역사자이심을 배워 알게 되며, 그가 그들 속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며 또한 그들의 영과 더불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는 보혜사이심을 배워 알게 되며, 또한 구속의 날까지 그들을 보존하시는 그들의 영원한 기업의 보증이심을 배워 알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은, “성령을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고백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총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없이는 창조도, 구속도, 성화도 순결하게 유지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고백에서 이탈하게 되면, 언제나 교리의 다른 요목들에 관한 오류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신앙의 여러 강령들에 대한 그릇된 사고들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그릇된 사고에서 비롯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이 성부, 성자, 성령의 위대한 역사임을 인식하고 고백할 때에야 비로소 그 놀라운 일들을 참으로 선포할 수 있는 것이다.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안에서 사람의 구원 자체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마무리하면서, 저자의 주장이나 논지가 없음에 대해 무척 아쉽지만, 이렇게 삼위일체에 대한 내용들을 정리하면서, ‘삼위일체’ 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던 믿음의 선배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이러한 것들을 가능하게 하신 창조주이시고, 구원주이시며,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오직 이 땅 가운데 영광 받으실 분은 오직 한분이심을 선포하며,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이 진리를 지키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진력할 것이다.
참고문헌
1. 루이스 벌코, ‘조직신학 (상)’,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1
2. 루이스 벌곱, ‘기독교 신학개론(개정판)’, 성광문화사, 1994
3. 서철원, ‘교리사’, 총신대학교 출판사, 2003
4. 찰스 하지, ‘조직신학’ I권,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2
5. 로버트 L. 레이몬드, ‘최신조직신학’, 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6.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개요’,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4
7. 버나드 맥긴, 존 마이엔도르프, 장 레크레르크, ‘기독교 영성’ I권, 은성출판사, 1997
8. 박용규, 초대교회사, 총신대학 출판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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