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철원 교수님 고난 주간 설교
(본문; 이사야 53:4-10)
죽음의 고난으로
하나님은 엉뚱한 계획을 하셨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에 사람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일을 결정하셨습니다. 전능한 창조주가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는 전능자의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전능자는 말씀으로 이 거대한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별 수고 없이 하나님은 말씀하심만으로 이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미 물질이 있었는데 그것으로 우주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는데서 이 거대한 우주를 말씀한 마디로 지으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는데서 이 모든 만물을 창조셨습니다. 거대한 우주를 지으시고 그것을 구성하는 작은 것들도 다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닌 것은 이 세계에 없습니다. 잴 수 없는 큰 우주를 창조하시고 보지도 못할 아주 작은 것도 다 말씀으로 지으셨습니다. 전능한 창조주는 이렇게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말씀만 하심으로 이 거대한 우주를 창조해내셨습니다.
그런데 전능한 창조주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해내시는 일에 있어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을 취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사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어서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방식을 누가 헤아리기나 했고 그런 안을 낼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담의 후손 중에서는 아무도 그런 생각이나 고안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구원의 방식은 사람이 생각해내지 못한 것이어서 사람들의 눈에 아주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그 방식은 아무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고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눈에 전적으로 어리석은 방식을 택하시어 세상을 구원하기로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사람이 되시기로 함으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사 세상의 죄를 담당하므로 세상을 구원하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실 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것을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사 세상 죄과를 담당하기로 정하셨습니다. 범죄 곧 반역은 사람이 하였는데 그 죄과는 하나님이 담당하기로 하셨습니다. 죄값은 죽음이어서 범죄한 사람들은 다 죽어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죄값을 감당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죄과를 담당하시므로 사람에게서 죽음을 제거하기로 하셨습니다. 사람의 죄과는 사람의 죽음을 필연적으로 가져왔습니다. 즉 범죄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합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반역하였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범한 죄과를 하나님이 담당하신다는 작정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범죄는 사람이 하였는데 하나님이 그 죄를 담당하심으로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작정과 계획도 도저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사람의 죄과를 자신이 담당하기로 하셨습니다. 죄과를 담당하시되 사람이 되시므로 사람의 신분에서 그렇게 하기로 하셨습니다.
죄과를 담당하면 죄과에 대한 값을 다 치러야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되시므로 인류의 죄과를 다 담당하기로 하셨습니다. 죄과를 담당하는 것은 그 죄과에 관련된 모든 값을 다 치르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죄의 벌로 온 모든 고통을 당하므로 죄값을 치르는 것을 말합니다.
죄값을 치르는 고난이 이사야서 53장에 잘 기술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고난을 당하시는 과정이 자세하게 묘사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육신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의 장면들이 생생하게 밝혀져있습니다. 마치 그림처럼 펼쳐져있습니다. 죄과를 지므로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과를 그에게 지우셨습니다. 그는 그 죄과 때문에 채찍에 맞았습니다. 전신에 채찍을 맞아 성한 곳이란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채찍에 맞아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멜 깁슨이 만든 그리스도의 수난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채찍은 그냥 가죽끈으로 때리는 정도가 아닙니다. 가죽끈으로 맨몸을 치는 것도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채찍은 가죽끈 끝에 납이나 쇳덩어리를 달아 맨 몸을 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힘차게 내리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가죽끝이 심하게 내리치므로 살덩이가 부어오르고 핏줄이 맺히고 피가 흘러나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가죽끈에 달린 납덩이나 쇳조각은 살점을 뚝뚝 떼어내게 되어있습니다. 그리하여 가죽끝이 닿는 곳마다 피투성이가 되고 피가 푹푹 튀기게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채찍끈을 맞아 온 몸 곧 등과 앞과 다리들이 다 만신창이가 됩니다. 이런 채찍은 한번만 맞아도 견디기 힘듭니다. 그런데 온 몸 전부를 다 맞아 붉게 물들고 핏줄이 터져서 피가 죽죽 흐르고 힘줄도 끊어지고 그 고통은 말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되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사람이 되셨는데 이런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죄인은 벌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국법으로나 어느 단체의 법이나 범죄하면 그 소속된 사회의 법에 의해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벌을 줄 때 언제나 육체적 고통을 당하도록 합니다. 육체적 고통을 더하는 형벌이 부당한 경우에는 심한 인격적 모독감을 느끼게 되어 자기 자신을 가누기가 어렵게 됩니다.
합당한 형벌도 그 당하는 사람에게 심한 인격적인 모멸감을 가져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육체적인 심한 고통을 받는 형벌을 받는다면 그 인격이 자기의 인격으로 설 수가 없게 됩니다. 주 예수는 사람으로서도 도저히 받을 수 없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그렇게 부당한 형벌을 지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우신 형벌이라 그 자신은 우실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지고 우리의 죄 때문에 그런 고통과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왜 그런 고통과 형벌을 당해야하는지 알아줄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홀로 그런 육체적 형벌과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과도한 육체적 고통은 사람의 생존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치입니다. 자기의 몸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도록 하는 조치가 바로 심한 육체적인 형벌이고 고문입니다. 사람은 그의 몸으로 삶을 사는데 더 이상 바른 삶을 살 수 없도록 물리적인 피해를 더하는 것이 육체적 형벌입니다.
주 예수는 채찍에 맞으며 조롱을 받았습니다. 유대의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고 조롱과 모욕을 마음껏 퍼부어댔습니다. 그를 치는 로마병정들은 주 예수를 치면서 조롱과 멸시를 마음껏 퍼부을 꺼리를 만났습니다. 로마병사들은 지금 유다 땅을 통치자의 편에 서서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강포와 매서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로마병사들로 더욱 강포하게 만든 이유는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어 유다를 로마의 지배에서 벗겨내면 자기들의 일자리가 없어져서 군인에서 해고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군인들의 직업과 가정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분노도 나고 미움도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사람들을 치고 채찍직하는 것이 자주 일어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음껏 치고 채찍질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마음껏 그들의 매서움과 폭력적인 힘을 마음껏 휘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면에서 예수는 바로 로마병사들의 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로마병사들은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그들의 악함을 마음껏 발휘하였습니다. 온갖 욕설과 조롱을 퍼부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채찍질하였습니다. 모욕과 조롱이 육체적 고통보다 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주 예수는 무고하게 모욕과 조롱을 계속적으로 당하였습니다.
사람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수치입니다. 부당한 수치를 받았다고 하면 사람들 중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모욕과 조롱이 사람들을 꺼꾸러뜨려 사람으로 존속할 수 없게 합니다. 그래서 심한 수치감을 느끼면 자살하여 자기의 삶을 스스로 마감합니다.
로마병사들의 채찍질 후 주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 험한 골고다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갈 때 많은 예루살렘 거민들이 그를 따라오고 앞서 가며 그를 에워쌌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비틀거리는 예수를 보면서 사람들은 온갖 욕과 조롱을 퍼부어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켜보고 경멸의 눈으로 그를 감싸고 그를 좇고 있는 중에 그는 7번이나 넘어졌습니다. 넘어지는 일이 반복되므로 로마의 군인들은 구레네 시몬으로 하여금 그 십자가를 지게 하였습니다. 넘어질 때마다 병사들은 그를 채찍으로 치고 욕하고 밟았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그 십자가형틀 위에서 죽기 위해서 가는 로마의 반역자를 동정하거나 애처롭게 여길 군인들이 하나라도 있었겠습니까?
모든 백성들과 군인들과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를 앞세우고 가면서 그를 조롱하고 모욕하였습니다. 넘어지면 발로 차고 그를 모욕하고 조롱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넘어졌다고 욕하였습니다.
이 모욕과 조롱은 십자가상에서 계속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을 박고 그 아픔과 처절한 괴로움 속에 신음할 때 백성의 지도자들과 모든 백성들은 주 예수를 모욕하고 조롱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그를 조롱하고 모욕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인데 오히려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한다고 욕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자기가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라고 조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남은 구원하면서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구원할 자이면 자기부터 먼저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였습니다. 세상의 구주가 십자가에 달렸으니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겠는가? 라고 조롱하였습니다.
성전을 헐고 삼일에 다시 짓는 자가 지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고 있다고 모욕하였습니다. 헤롯 성전은 46년 걸려 지은 집인데 그런 집을 3일에 지을 수 있으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 그러면 그런 능력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와 그 능력을 증명해보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면 하나님이 그를 십자가에서 구출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 십자가에 달려 죽을 고생을 하며 죽어가고 있는가? 십자가에서 내려옴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라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당하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수치는 죽어가는 사람의 눈을 뻔히 띄어놓고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그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십자가에 처절하고 못 박혀 발버둥 치며 소리치고 고함치며 괴로워하고 있는데 그의 눈을 보면서 그를 조롱하고 모욕하는 것입니다. 대단한 중죄수여서 더 이상 사람으로 여길 수 없다고 하는 경우에도 그래도 그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수치감을 갖고 있고 인격적인 존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그를 조롱하고 모욕하면 그가 당하는 인격적인 자괴감과 모독감은 오직 심하겠습니까?
그런데 주 예수는 그 숱한 비난과 조롱과 모욕에 한마디도 대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참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과에 대해 상응하는 모든 조롱과 모욕을 지우셨기 때문에 아무 말도 않고 아무 대꾸도 안 하고 참았습니다. 소리 한번 지르지 않았습니다. 모든 죄수들은 저주하고 욕하고 소리치고 고함치고 발버둥 쳤습니다. 그런데 주 예수는 아무 대구나 소리침이 없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로마 군인들의 눈에 기이하였습니다. 많은 노예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그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사렛 예수는 아무런 대구나 욕이나 자기변명도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소리치거나 고함치거나 욕하는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전개된 것입니다.
이에서 나아가 십자가의 고통은 얼마나 큽니까?
산 사람을 아무런 마취도 없이 손목에다가 큰 대못을 박았습니다. 그것도 양손에다 큰 못을 박았습니다. 아무런 마취도 없이 산 사람 멀쩡한 정신인데 양 손목에다 큰 못을 박았습니다. 대못을 박아 몸부림치고 고함치고 발버둥 쳐도 손목이 그 큰 못에서 벗어날 수 없게 머리가 큰 못을 박았습니다. 그 아픔과 고통이 말로 할 수 없어서 혼절할 형편입니다. 원만해서는 그 고통과 아픔으로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습니다. 이 고통에 못 이겨서 십자가에 달린 중죄수들은 고함을 치고 욕설을 크게 퍼부어대고 저주와 욕을 소리쳐 퍼부어댔습니다. 그런데도 주 예수는 아무 소리도 치지 않았고 욕설도 외치지 않았습니다. 그 험한 고통에도 조용히 참으셨습니다. 소리도 치지 않았고 욕설도 하지 않았고 저주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죄수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조용하게 십자가형의 고통을 참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이 험악한 처형을 자기에게 지우셨기 때문에 순종하여 조용하게 참았습니다. 로마병사들이 이렇게 조용히 험한 처형을 감당하고 있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라고 로마의 백부장이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그렇게 험한 십자가처형을 감당할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험한 대못을 박는 것은 발등에도 이루어졌습니다. 발과 발목이 합치는 발목에 큰 못을 박았습니다. 손목에 대못을 박은 것처럼 발목에 박은 대목도 뼈는 크게 다치지 않게 박았습니다. 대동맥이나 대정맥도 다치지 않게 박았습니다. 그래서 피는 흘러도 크게 펑펑 흐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실핏줄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계속 흘러내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양손과 양발에 박은 못은 큰 피가 펑펑 쏟아지게 한 것이 아니어서 건장한 사람들은 1주일 내지 열흘도 십자가에 매어달려 있었습니다.
이 때 바람과 열과 추위에 의해서 당하는 고통이 심장에 바로 전달되어 심장을 찢어지게 할 만큼 아프게 하였습니다. 그 심한 고통은 심장만 터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폐도 터지게 하고 온 몸을 뒤틀게 하였습니다.
피는 계속 흘러내리므로 심장은 말로 할 수 없이 바쁘게 뛰고 그래서 폐가 터질듯 부풀어 오르고 혀는 말라 타들어가고 숨은 말로 할 수 없이 바쁘게 쉬었습니다. 피가 계속 흐르므로 목이 말라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병사들이 스폰지에다가 독초와 쓸개를 탄 것을 묻혀 그의 입과 코와 혀에 대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강한 초이어서 일시적인 마취효과를 가져 올 수 있었습니다. 잔인무도한 로마병사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중죄수들에게 베푼 단하나의 인도적인 조치였습니다. 그 험한 고통을 잠시라도 잊도록 하기 위해서 그 독한 식초를 스폰지에 뭍혀 그의 혀와 입과 코에 대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은 다 하나님이 지우셨기 때문에 주 예수는 그 독초를 받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십자가상의 모든 고통을 다 감내하기 위해서 그 독초를 거부하였습니다.
로마군인들이 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다리를 키대로 펼 수 없게 구부려서 발목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래 너무 괴로워 몸을 비틀고자 해도 몸을 비틀 수도 없고 몸을 바로 펼 수도 없게 하였습니다. 몸이 너무 아파서 견딜 수 없을 때 몸을 바로 펴는 것은 더 아프게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몸을 한번이라도 바로 펴고 숨을 들이킬 수도 없게 하였습니다.
이런 모든 고통 곧 십자가상의 고통이 너무 커서 심장이 터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주 예수는 그의 심장이 터짐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런 고통이 너무 심할 때 주 예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나님을 향해서만 절규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절규를 받으신 하나님은 그 타는 심장을 어찌할 수 없어서 그의 얼굴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돌이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주 예수로 하여금 세상 모든 죄과를 지고 죽게 하신 이는 하나님 아버지이셨습니다. 죄과대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함으로 세상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서만 절규하였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 아버지는 주 예수를 십자가의 고통아래 죽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지옥의 불을 보도록 그를 십자가상의 고통에로 내버려두셨습니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하여 그의 숨을 막게 하였습니다.
주 예수는 숨을 거둘 때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가 살을 찢어내고 살을 칼로 꼿는 고통아래 죽으므로 세상의 죄값을 다 치렀습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 기간에 살고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십자가상의 모진 고통으로 죽는 날 전까지의 기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께서 잡혀서 고문과 조롱과 모욕을 받고 채찍에 맞아 거반 죽게 된 상태에 동참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가 당한 고통에 동참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그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어서 그의 고통에 동참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상의 극한적인 고통과 죽음에로 밀어친 그 고난을 어떻게 헤아려서 그 고통에 동참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 예수의 고통에 동참할 수는 없어도 그의 고난을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고통의 극치를 맛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당한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는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왜 그토록 고통을 당하고 죽음에 이르렀는지는 생각하고 묵상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의 고난과 고통과 죽음이 나를 위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묵상할 수 있습니다. 내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주 예수께서 고통과 죽음의 고통에 이르렀음을 우리는 묵상하고 생각해야합니다.
주 예수의 죽음의 고통을 묵상하고 그의 죽음이 나를 위한 속죄 제사였음을 마음에 굳게 담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순절에 할 우리의 일입니다. 아멘.
'서철원 - 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신학, 서철원 저 (0) | 2007.04.11 |
---|---|
서철원-어린양으로 죽고 생명의 주로 부활하사 (0) | 2007.04.02 |
개혁신학의 파수꾼이 되어 서철원(교의신학, 본지 편집인) (0) | 2007.03.26 |
서철원 교수 겨울 세미나 (0) | 2007.01.25 |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구원(영아구원) - 박일민 (0) | 2006.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