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철원 - 신학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구원(영아구원) - 박일민

형람서원 2006. 9. 30.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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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구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고 하신 사도 바울께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과 함께, 주의 이름을 전파하는 사람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표현하기 위하여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라고 하신 바 있다.

구원에 있어서 복음을 듣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전하는 복음을 듣지(받아들이지) 않아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전하는 복음이 없었기 때문에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었던 사람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들이 들을 수조차 없었는데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너무나 억울한 일이 되지 않을까.

여기에 해당하는 사례는 영아들과 복음이 아직 들어가지 못한 시대나 지역에 살았던 성인들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제 그 경우를 각각 살펴보기로 하자.

 

1. 영아(嬰兒)의 경우

 

1) 영아의 상태

우리는 보통 생후 1세~2세 아이들을 영아라고 부른다. 그러나 구원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영아나 유아를 나이가 아닌 영적 상태로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육체적 나이로는 소년이나 청년에 해당하면서도 영적으로는 영아와 다를 바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나이와는 상관없이, 자아의식을 가지기 이전의 상태를 가리켜 영아라고 해보자. 자아의식이 생기기 전이라는 것은 의식적인 자범죄를 범하기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영아도 성장하면 성인이 되고, 자아의식에 따라 자범죄를 범하거나 복음을 들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살아 있는 영아의 구원 문제는 별도로 취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성인이 되기 전에, 즉 자범죄를 범하지 않은 영아의 상태로 죽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복음을 듣거나 믿을 수 있는 기회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그러기에 그 영아의 구원 문제가 별도의 관심사로 등장하게 된다.

 

2) 영아 구원의 가능성

우리는 성경에서 영아의 구원 여부에 대한 단정적인 언급을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영아의 구원에 관한 내용을 확실하게 결정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성경에는 영아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교훈을 하시면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2)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육체적 상태의 어린 아이가 아니라, 그 마음이 어린 아이와 같은 상태를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교훈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천국의 교훈을 위해 어린 아이를 예로 드셨다는 사실을 통해, 어린 아이도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을 것, 즉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사도 바울께서도 구원에 관한 대표적 원리를 밝히시면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고 하셨다. 여기서 ‘네 집’이라는 말씀은 어린 아이도 포함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반적인 가족 구성으로 볼 때, 가정에는 어린 아이가 있는 것이 보통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고 온 집과 더불어 세례를 받았던 빌립보의 루디아(행 16:15)나, 고린도의 회당장 그리스보(행 18:8)의 집에도 어린 아이가 있었을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천국의 아름다운 모습을 소개하면서, “그 때엘··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8)고 했다. 이 말씀은 천국의 평화로운 광경을 소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어린 아이가 등장한 것을 보면, 천국에는 어린 아이도 있을 수 있는 가능성, 즉 어린 아이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전날,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름으로 죽음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는 순결한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예표하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첫 번 유월절에서 구원받은 것은 어른들만이 아니었다. 그 중에는 분명 어린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월절 사건에서 어린 아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된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할례 의식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증거를 가졌다. 이 할례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음을 표하고 인치는 신약시대의 세례에 대한 예표이었다. 그런데 그 할례는 어른에게만이 아니라, 주로 태어난 지 8일되는 어린 아이들에게 행했다. 그러므로 할례 의식은 어린 아이도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강력하게 암시해준다.

 

3) 영아 구원의 범위

앞의 여러 사례들에서 보는 것처럼, 영아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면, 그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영아 상태로 죽은 모든 어린 아이가 다 구원을 받을까, 아니면 믿음의 부모를 둔 아이들만 구원을 받을까.

자범죄를 범하기 전에 죽었다는 점만을 고려해보면, 모든 영아들이 다 구원받았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자범죄의 유무 여부로 구원을 결정하지 않는다. 자범죄가 없는 사람이라도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했다. 그러므로 영아 상태로 죽은 자들이 모두 구원받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적절치 못하다고 보아야 한다.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에서처럼, 부모의 믿음이 온 가족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족 구원의 의미를 고려해 보면, 믿는 부모의 자녀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구원이 오직 자기 자신의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교훈한다(겔 18:4, 20). 이것은 부모를 포함한 다른 어떤 사람의 믿음이라도 영아의 구원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모가 믿으면 자녀가 자동으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적절하지 못하다.

우리는 영아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는 있으나, 그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장 3절에 밝힌 것처럼, 영아 때 죽은 아이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계획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4) 영아 구원의 방법

영아에게는 아직 자아의식이 없다. 따라서 영아는 스스로의 판단이나 결정에 따라 복음을 듣거나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만일 영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면, 그들은 과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자범죄가 없는 영아라도, 원죄가 있기에 반드시 거듭나야 할 필요가 있다. 거듭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자신의 기쁘신 뜻에 의해 성인들의 일반적인 체험과는 다른 방법, 그러기에 성인들에게는 신비롭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방법으로 영아들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케 하실 것으로 여겨진다.

 

2. 성인의 경우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처럼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채 죽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그들은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믿지 못했다는 점에서만 보면, 그들의 상황은 영아들과 똑같다. 그러나 그들은 원죄만이 아니라 자범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영아들과 다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시려고 하신다면 길가의 돌들로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고(눅 3:8), 죄인을 마술처럼 신기하게 구원해 내실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그렇게 사용하려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하신 의도와 반대되는 방식으로는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는 달리 자신의 능력을 항상 오직 자신의 선하신 의도에 맞도록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죄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되기 원하신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롬 6:23).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해주어야만 하는 의무를 가진 분이 아니셨다. 그러나 자신의 선하고 기쁘신 뜻에 따라 죄인을 구원하려고 계획하셨고, 그 계획의 결과 죄에 대한 죽음의 대가를 치르셔야 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게 하실 때에 일정한 방법을 지정해 놓으셨다. 그것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고전 1:21), 즉 복음을 들음으로서 믿음에 이르게 되는 방법이다. 복음을 듣는 것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 수단이 없으면, 그 결과인 구원도 있을 수 없다.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이 수단을 허락받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수단으로 말미암는 결과인 구원도 허락받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받지 못한 것 때문에,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멸망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밀어 넣으시거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멸망에 이른 것은 하등의 불평이 있을 수 없는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온 인류가 다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어떤 자를 구원해주신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결과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들은 사람은 듣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불평을 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감사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자기의 양심에 따라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구원은 양심에 의한 방법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 양심에 비추어 죄가 없어 구원받을만한 사람이란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예외를 만들어 내고 싶다면, 영아들의 경우처럼 성령의 뜻에 맡기고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아쉬움이나 불공평으로 인한 원망을 가지기 쉽다. 이러한 생각은 근시안으로 우리 눈앞의 것만을 보는 데서 생겨나는 오해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죄와 구원의 문제를 넓고 멀리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어찌 나에게는 이 시대 이 지역에 살면서 복음을 들어 구원에 이르는 기회를 허락하여 주셨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불공평하게 보이는 조건 속에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를 찾아 감사하며 찬송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와신앙 박일민 교수(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장·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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