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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목: 성령론
제목: 성령신학, 서철원 저
제 1 장 서론
오순절 운동은 성령 추구의 운동이었다. 예수만 믿음이 아니라 성령을 체험하기를 바라서 일으킨 운동이 20세기 초엽에 일어나서 20세기가 다 되도록 그 운동이 교회로서 존재하고 또 은사 운동의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성령은 예수 믿을 때 받고 예수 믿음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후의 별도의 과정으로 성령 세례를 받으므로 성령을 충만히 받고 성령을 경험하게 된다.
오순절 부흥 운동은 알미니안 감리교회 지반에서 발생하였다. 알미니안 감리회 신학에서는 주권적 은혜의 역사에서 인간의 주도성에로 강조점이 넘어오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쟁취된다. 쿠르트 훗텐(Kurt Hutten)의 지적대로 은혜를 부인하지 않지만 그 은혜는 인간의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
오순절 운동은 성령 운동이었다. 공교회는 초기부터 성령 운동에 대해 우려와 불안으로 대하였다. 2세기 중엽의 몬타누스 성령 부흥 운동 때부터 교회는 우려와 경계를 크게 하였고, 그후 종교개혁 때 나타난 광신파는 성령의 직접적인 말씀과 내적 조명을 강조하여 성경을 배척하고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원을 약화하여 내적 체험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배척되었다. 그러나 18세기 감리교 부흥 운동은 정당한 교회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런 배경에서 오순절 성령 운동이 일어나서 세계로 널리 퍼지고 정당한 교회로 자리잡으므로 로마 교회와 종교 개혁 교회 다음으로 제 3 기독교 세력이 되었다. 따라서 이전 교회사에서 일어난 분파들의 성령 운동을 대적한 교회의 반응은 없어졌고 로마 교회와 영국 교회에까지 이 운동이 퍼지므로 오히려 교회 갱신의 세력으로 영접되었다.
그러나 개혁 신학의 성령 논의가 가장 바르고 성경적이다. 불필한 논의로 교회의 힘을 소진하는 것은 중단될 때가 되었다. 성경적 증거들에 의해 오순절파의 주장이 많이 수정되었지만 기본 신학은 그대로 고집하고 있다.
제 2 장 오순절 운동의 시작과 확산
1. 오순절 운동
1906년 4월 9일 미국 로스엔절레스의 아주사 거리에서 흑인 감리교회 목사인 윌리암 씨무어(William Seymour) 목사의 부흥회로부터 시작하였다. 씨모어는 방언 운동을 처음 출발시킨 챨스 파함(Charles Parham)에게서 배웠다. 이 운동이 짧은 시간에 미국 전역에 퍼지고 전 세계에 퍼질 수 있게 된 것은 프랑크 바틀만의 문서활동에 크게 기인한다. 그는 미국의 성결회 계통의 신문들에 아주사 부흥 운동을 자세히 보고하였고 소책자들을 각처로 보냈다. 세계 각처에서 특히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들이 오순절의 체험을 얻기 위해 아주사가로 모여들었고, 많은 목사들도 부흥회에 참가하였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1950년대에는 그 내적 힘을 고갈하여 매우 피폐해졌지만 은사 운동의 전개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2. 오순절 운동의 확산 : 전 세계에 퍼짐
1) 유럽에 퍼짐 2) 남아메리카에 퍼짐 3) 아프리카에 퍼짐 4)아시아에 퍼짐
3. 은사 운동
은사 운동은 신학은 오순절 운동과 동일하나 새로운 교회를 구성하지 않고 은사에 강조를 두는 면만 다르다. 로마 교회로 은사 운동이 퍼지면서부터는 성령 세례 대신 영의 해방을 사용한다. 즉 세례에서 성령은 이미 받았고 견신 때 혹은 그후에 방언과 다른 은사들을 경험하는 것은 세례에서 받은 은혜가 방출되는 것으로 보게 된다. 이 은사 운동은 영국 교회에도 파급되어 칸터베리에서 은사 대회를 1978년 가졌다.
제 3 장 오순절 운동의 신학 : 중생 후 성령 세례
-방언이 세례의 증거 -
1. 중생 후 성령 세례
성령 세례를 받으면 봉사에 능력(power in service)을 입는다는 것이 오순절 운동의 교리이다. 그리스도의 생애에 성령의 두 작용이 있었다. 첫째 역사는 그리스도의 성령의 역사에 의한 출생이고, 두 번째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어 메시야로 임직되었다 그러면 신자의 생에서도 왜 두 가지 성령의 역사를 갖지 않아야 하는가? 출생(혹은 중생)에서는 성령은 안으로 오시고 성령 세례에서는 내려오신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는 중생 후의 과정이다. (Ernest S. Willams, Systematic Theology. Ⅲ. 1953.1981. pp.44-46)
2. 조건들 이행으로 성령 세례 받음
성령 세례는 모든 신자들의 출생권(birthright)이다. 성령 세례를 받지 않은 것은 자기의 출생권을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 세례가 가능적으로 각 신자의 소유이지만 그것을 믿음으로 자기에게 충용해야 한다. (R.A.Torrey.The Person & work of the Holy Spirit. 150) 하나님의 주려는 능력이 인간의 받는 능력에 의해 제한되었다. 토리는 성령 세례받는데 필요한 7 단계를 제시한다. 랄프 리그스는 5 단계를 , 퍼얼만은 기도에 중점을 두어 조건들을 강조하고, 도널드 기이, 챨스 칸등도 조건을 제시한다.
성령을 받기 이전에도 이런 철저한 죄에서의 분리를 이룰 수 있는 영웅이나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 죄와 완전히 격리될 수 있다면 성령 받을 필요가 있는가? 성령을 받기 전에 완전한 순종을 할 수 있으면 성령 받을 필요가 있는가? 인간 본성이 그렇게 선하고 타락이 별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그러할 것이다. 인간의 노력이 성령 받음과 받음의 양을 결정하는 것은 은혜의 종교일 수가 없다. (서철원, 46쪽)
3. 방언으로 성령 세례가 표현됨
카알 브럼벡은 주장하기를 "성령 세례 혹은 위로부터 능력을 입었는지의 여부는 방언을 말함으로 알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왜 하나님이 방언을 성령 세례의 초기 물리적 증거로 택하셨는지를 7 가지로 설명한다. 그중 4번째는 방언은 성령이 신자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상징이다. 혀는 마지막까지 성령에게 양도하려고 하지 않는데 완고한 혀로 성령이 말하게 한다는 것은 성령이 신자를 완전히 소유했다는 표가 되기 때문이다. 방언은 성령이 신자의 진리와 발언의 원천임을 현시하며, 또 말함이 인간의 특권과 능력의 대표이므로 하나님이 방언을 초기 물리적 증거로 고르셨다는 것이다.
4. 경험을 표준으로 삼는 알미니안 신학
오순절 신학은 알미니안 신학과 웨슬리의 성화 교리의 융합이므로 체험과 인간 주도성이 강조되어 교리보다는 경험을 규범으로 삼는다. 경험을 믿음과 구원 확신의 중심으로 삼음으로 육체적 현상들을 중시한다. 또한 성화가 칭의의 조건들이면 성화 이전의 사람들은 다 죄인으로 남고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도 칭의에 이르기 위한 모본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모범으로 성립한다. 성화를 온전히 이루어 그 도덕적 의에 근거해서 칭의를 입으면 그 의는 내 획득 사항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다. 오순절은 정통 교리보다 정통 실천을 강조하여 영안에서 동력적 활동을 가짐으로 교리적 진리가 정당화를 받는다. 이처럼 오순절 파는 성령 세례의 동력적 경험의 유지를 목표하고 교리의 강조를 거부한다. 성령 세례의 경험은 인간 편에서의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오순절파는 신약의 은혜를 오순절파의 공로로 바꾸었다. 종교의 경험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제 4 장 오순절의 성령 강림 :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1. 성령 강림의 근거 :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성령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이고, 믿음외의 다른 종교적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으로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서는 이룰 수 없는 의를 이루어야 한다. 그 의의 성취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다.
2.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짐
구약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어도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에 의해 그 죄가 완전히 속량되지 못하였으므로 백성들 가운데 임재를 곧 성령의 거주를 가졌지만 그 백성들 각자가 성령의 내주는 갖지 못하였다. 그것은 신약 교회의 특권이다. 신약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에 의해 완전히 죄가 제거되었으므로(행 10:10-12) 성령을 받고 교회의 각 지체들이 성령을 내주 방식으로 모신다.
3. 그리스도의 승천 : 성령 강림의 필수 단계
파송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구속 사역에 근거하여 아버지께 청구한 것이고, 구속 때문에 획득하였다. 그러므로 성령 강림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공로이고 다른 길이 전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없이는 성령의 파송과 강림은 전혀 불가능하다. 예수의 십가가 사건이전에 예수 믿었던 사람들이 성령 받지 못한 이유이다.
4. 예수 그리스도 : 성령 파송자
성령의 오심은 아버지의 약속이지만(눅 24:49, 행 1:4), 예수 그리스도에의해 획득되었다. 신인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을 파송한다.
5. 성령은 보혜사로 오심
원보혜사는 제자들이 예수를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갈 때 그의 몸으로 함께 갈 수 없었다. 그러나 성령은 제자들의 모든 삶의 길에 항상 그들과 함께 하였고 동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각 사람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원보혜사와 다른 보혜사와의 차이점이다. 이 차이점이 원보혜사로 하여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 16:7)고 말하게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혜사로서 제자들과 함께 거주할 동안에는 성령이 오실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원보혜사가 백성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지키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혜사는 예수의 부재시 예수의 현존이라고 정의한 레이몬드 브라운의 정의가 타당하다.
6. 성령 강림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승천 후 속죄 보고를 받으시고 성령을 보내셨다. 그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에 이미 담지되었던 인격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사람의 육체에 거하실 수 있게 되었다.
1) 성령이 처음 오셨을 때는 120명의 작은 무리에게 오셨다.
2) 첫 성령 수납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행 2:1; 1:12-15)
3) 첫 성령 강림은 강한 바람소리를 동반하고 불의 혀처럼 각 사람에게 임재하였다. (행 2:2-3)
4) 성령 강림은 성령 충만으로 나타났다 (행 2:4)
성령 충만은 성령의 지배를 뜻한다. 오순절파의 주장처럼 물을 가득 붓는 식으로 흘러넘치게 부어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5) 성령 강림은 방언 현상을 나타내었다. (행 2:4)
오순절 강림시 방언을 말함은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외국어를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 이방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됨을 광포하는 것이다.
6) 오순절은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오순절파는 사마리아인의 개종, 로마인들의 개종, 요한의 제자들의 개종 사건에서 오순절의 반복을 주장한다. (James Dunn. Jesus and the Spirit 1978. pp. 136-146 참조) 한번 오신 성령은 영구히 교회와 함께 하사 인류에게로 그 주거를 확장하신다. 사마리아인들이 성령 받은 것도 오순절의 반복으로 하늘에서 성령이 다시 강림하신 것이 아니고, 이미 와 계신 성령이 그들에게 임재하셨다. 여러 사람들이 성령 받은 것은 보충적 부어줌이나 반복적 강림이 아니라 성령이 그의 주거를 확장하심이다.
제 5 장 신약의 증거들 : 믿음으로 성령 받음
- 예수 믿음 = 성령 받음-
1. 예루살렘 교회
행 2:1-4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구속 후 처음으로 인류에게 오신 날이다. 오순절 이후에는 예수 믿고 성령 받는 일의 표준을 행 2:1-4에서 구할 것이 아니고 행 2:38-41에서 구해야 한다.
사도들을 포함한 120명은 주의 말씀으로 이미 깨끗해졌다. 많은 경우 중생은 성령의 사역이므로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리스도는 육체 안에 오신 하나님이므로 사죄의 권세를 갖듯이(마9:3-6,눅7:48) 중생케하는 권세를 가졌다. 중생케함이 원래 보혜사의 직임이다. 다른 보혜사인 성령이 이 직임을 계승하였다.(87쪽,89쪽) 성령 오심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 때문이다. 십자가에 죽어 죄를 제거함이 없이는 성령이 오실 수 없다. 이런 구원 섭리 때문에 사도들과 제자들은 주 예수를 믿고 그의 권능으로 중생하고서도 오순절 성령 강림시 성령을 받게 되었다.
3천 제자들은 베드로의 선포의 말씀을 듣고(아포덱사메노이) 세례받았는데(에밥티스데산) 제자들로 추가되었다.(프로세테데산) 이 동사들이 다 단순과거동사이고, 2,3째 동사는 다 단순과거 수동태로 쓰였다. 말씀듣고 세례받아 성령을 받는 일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졌다. 행 2:1-4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구속 후 처음으로 인류에게 오신 날이다.(93쪽)
2. 사마리아 교회
행 8:4-25에서 사마리아인들은 빌립의 전도를 받음으로만 아니고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을 받아 확실히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행 8:12에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하는 빌립을 그들이 믿었더라"고 한 것을 보면 주 예수를 믿었다기보다는 빌립을 더 믿었음을 알 수 있다. 기적들을 인해 그냥 미신적으로 믿은 기적 신앙이었고 예수 믿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전체 문맥에서 예루살렘에서 간 사도들이 예수의 사역 선포 없이 안수하였다고 볼 수 없고, 그 때에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해야 바르다.
3. 바울의 개종 (행 9:1-18)
오순절파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중생하였고 3일후 아나니아에 의해 세례 받으며 중생하므로 중생 후 성령 세례의 도식 본문으로 삼는다. 그러나 주 예수를 만나고 세례 받기까지 3일간이 중생 후 성령 받기를 기다리는 기간으로 볼 것이 아니다. 3일간은 예수 믿음으로의 전이 과정이었고 투쟁 과정이었다. 세례 받음이 곧 신앙 고백이므로 삼일 후 신앙고백과 성령 받음이 일치한다. 또한 바울은 갈 3:2-5에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믿음의 들음으로냐(ek akoees pisteos)"고 하여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 간에 아무런 시간적 거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한다. 갈라디아인들이 들어 믿고 바로 성령 받았다는 것을 그렇게 강조했으면 바울 자신의 경우도 동일하다.
4. 고넬료와 로마인들의 개종 (행 10:1-48)
오순절파는 그가 성령 받기 전에 이미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고넬료는 예수 복음을 듣지 못했으므로 예수를 믿을 수도 없어서 중생은 불가능했다. 또 고넬료야 율법을 아는 경건한 개종자이었지만 그의 친족, 친지들과 군인들은 전혀 그런 것도 알지 못했다. 베드로가 주 예수의 사역을 선포하는 중에 특히 "저를 믿는 자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고 할 때에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오셨다.(행 10:43-44) 로마인들의 개종에는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이 완전히 동시적이었다.
5. 갈라디아 교회 (행 15:1-5, 갈 1:1-4:6)
갈라디아인들은 율법에 관해서 듣고 지킬 의무감을 느끼기 전에 복음만 선포받아서 믿고 동시에 믿어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 예수믿고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 율법 준수의 의무가 전혀 부가되지 안했다. 성령 받음은 믿음으로 되고 율법의 행위 곧 인간적 노력으로 되는 것이 전혀 아니다. 갈라디아서만큼 성령 받음과 믿음이 일치하는 성경 책도 없다.
6. 데살로니가 교회 (행 17:1-9;살전 1:2-10)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주를 본받는 자들이, 즉 믿는 자들이 되었다.(살전 1:6-7) 바울은 여기에 단순 과거분사 분사 를 사용하므로 (살전1:7) 성령의 기쁨을 갖는 것, 곧 믿음과 말씀을 받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분명히 한다. 짧은 기간 곧 세 안식일 동안에 복음을 들었어도 받을 때부터 기쁨으로 주를 믿었다.(행 17:2,살전 1:6)
7. 고린도 교회 (행 18:1-11; 고전 1:13-2:16)
행 18:8에 누가는 주를 믿은 것을 표기하기 위해 단순 과거동사 믿었다(에피수센)를 사용하여 주를 받는 일과 성령 받음이 동시적으로 발생했음을 분명히 하지만, 수다한 고린도 사람들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할 때는 미완료 과거형을 썼다. 이것은 일년 육개월간 믿고 세례받는 일이 반복되었음으로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고전 12:13에서 한 성령에 의하여(en heni pneumati) 우리 모두가 한 영으로 세례받아졌고, 예수 믿어 그의 몸에 결합되는 일이 성령에 의해 이루어졌다. 오순절파는 세례 주는 이는 성령이 아니시고 주 예수이므로 이 본문을 성령에 의해서로 이해 할 수 없고 성령 안에서로 이해한다고 하지만 바른 이해가 아니다. 성령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결합시키는 일을 하시는 분이므로 한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에로 세례받아진다. 이 세례받는 일이 믿는 때에 이루어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단순과거 수동태(ebaptisthemen)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성령을 마시게 되어졌다. 내가 노력해서 성령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마시게 되어졌다. 수동태 동사 epotisthemen를 사용하였다. 예수 믿을 시초부터 성령을 받음을 성령 세례라고 말해야 맞다.
8. 에베소 교회 (행 19:1-20)
1) 에베소의 첫 그리스도인들(행 19:1-7)
오순절파는 아볼로의 전도와 세례 받음으로 중생하고 바울에 의해 성령 세례받았음이 분명하므로 중생 후 성령 세례 공식이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밖에 알지 못하였으므로 (행 18:25) 예수 이름으로 세례주어 예수 믿게 할 수없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로 남았다. (106쪽) 예수 믿을 때 성령 받음이 당연함을 바울의 놀란 질문에서 잘 알 수 있다. 행 19:2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여기 믿을 때 ( )와 성령을 받았느냐( )는 모두 단순 과거여서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이 동시적인 사건임을 분명히 한다. 흠정역이 너희가 믿은 이후에(Since ye believed)로 잘못 번역한 것이 그릇된 해석과 잘못된 신학을 낳게 하였다.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볼로의 가르침을 받고서야(행 18:26) 복음을 바로 알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줄 수 있었다.
2) 다른 에베소인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의 3년간의 집중 전도로 많이 주께로 돌아가게 되었다.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akousantes) 바로 믿어(pisteusantes)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받았다.(esprasisthete)(엡1:13) 듣고 믿고 인침이 다 단순과거로 표시되어 복음을 들을 때 믿고 믿음으로 성령 받았음을 분명히 한다. 이 일은 다 복ㅇ므을 들을 때 동시적으로 이루어졌다. 성령으로 인침이 성령 받음과 동일한 사건이다. 왜냐하면 성령을 주심이 믿음의 결국 곧 구원에 이름의 보증이기 때문이다. (엡1:14,고후 1:21-22)
9. 신약 후기 교회들
사도들의 퇴장 이후에는 교회의 세례 주는 관행이 바뀌었다. 복음의 선포로 예수 믿게 하여 바로 세례 주어 교회에 가입시킨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람들을 교회에 들여왔다.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문답 교육을 시켜서 세례받아 교회에 가입시켰다. 교육 과정 중에 사도신경을 익히고 외게하였는데 그러므로 예수 믿음과 세례받음이 분리되어 오늘까지 왔다.
제 6 장 성령 세례 = 성령 받음
1. 예수의 성령 세례 = 메시야 임직식 : 성령의 담지자 됨
하나님의 아들로서 출생하신 이가 성령을 받아 메시야로 세워지심으로 예수는 성령 담지자가 되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메시야로서 성령으로 기름부음받되 한량없이 받았기 때문이다. (요 3:34) 예수가 성령 담지자가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성령받는 것은 예수에게서 만이다. 예수 성령 담지자는 성령 파송자가 될 수 있기 위하여 죽고 부활에 이르러야 했다. 주 예수는 부활의 날에 성령 파송의 약속을 "성령을 받으라"로 밝히 표현하였다. (요 20:22)
2. 성령 강림 = 성령 세례 = 성령 받음
성령 세례는 예수의 메시야의 임직에 합당히 적용되고 백성들의 성령 받음은 성령 받음, 성령 부어주심, 성령 충만으로 표기되었다. 성령 세례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아니하고 주 예수의 약속을 회상하여 한 번 반복함밖에 없다. (행 11:16) 베드로는 그의 설교에서 성령 세례를 약속하지 않고 성령 받음을 약속했다.
제 7 장 성령 받음 = 선물로 받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단지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이렇게 믿기만 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롬 4:5) 청구하면 성령이 오시는 것이 아니고 믿으면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보내신다. 중생 후 성령 세례를 가르치는 오순절 신학은 신약에 전혀 생소한 율법주의이지만 복음주의 신학으로서 힘있게 주장되었다.
제 8 장 성령 강림의 목적 = 하나님의 거소 마련
하나님의 거소 조성이 성령 강림의 목적이다.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것은 백성들이 거룩해짐으로 이루어진다. 백성이 거룩해지는 것은 성령의 인도로 된다. 성령의 인도가 죄를 죽이고 거룩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내주로 이루어진다. 성령의 내주는 그리스도께서 계심인데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함으로 영이 살아나고 몸은 죽게된다. (롬8:10) 성령의 거주가 하나님 자신의 거주이다. 성령의 내주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해졌다. (고전 3:17) 그러나 이스라엘의 거룩은 외적 거룩이요 의식적 거룩이므로 내면에까지 완전히 거룩해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가운데 장막을 치고 거하셨고 백성들 각자 안에 내주하지 못하였다. 백성들 각자 안에 거하는 것은 신약 교회의 몫이었다. (요일 4:15)
제 9 장 성령의 내주 = 지속적인 인격적인 관계 맺음
구약 백성들에게는 성령께서 장막을 치시고 그들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 위에 계셨다. (출25:19; 40: 34-38)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함께 한 민족은 이스라엘 뿐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백성들 각자의 마음에 하나님이 내주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신약 교회만의 특권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백성이 구속되었으므로 그 은혜 때문에 성령이 신약 교회 전체와 함께 계시지만 신자들 각자의 마음 속에 거주하신다. (롬 8:9,갈4:6,고전3:16,6:19,고후 1:22,5:5)
기독교 구원의 신비는 성령의 내주로 시작하고 진행되는 것이다. 육체 안에 하나님이 내주하신다는 것은 말로 기술할 수 없는 신비이다. 육적 존재 안에 성령이 거하기 위해 오셨다. 성령의 내주로 육인 인류가 영으로 변화되었다. 영은 성령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형상이 된 자들의 존재 방식이다.
삼위일체의 신비에 의하여 성령의 오심이 삼위 일체 하나님의 오심을 뜻한다. (요 14:23, 요일 3:24, 4:13, 2:24) 그리스도의 은혜는 영구한 것이어서 우리를 영원히 떠날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은 새 인류의 각자 안에 영구히 거하신다. 칼빈은 이 진리를 표현하여 그리스도의 은혜가 죽은 후에도 우리의 영혼에서 떠나가지 않고 함께 한다고 하여 재세례파의 영혼 수면설을 반대하였다.
제 10 장 성령 충만 = 성령의 지배
1. 성령 충만 = 성령의 지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의로울 뿐만 아니라 원리적으로 거룩하다. (엡 1:4) 그리스도인이 이처럼 원리적으로 거룩하여도 거룩해져야 한다. 바울은 성령 충만은 엡 5:18에서 한번 사용하였고 다른 서신들에서는 성령의 인도로 표현하였다.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충만도 그 전체 문맥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통치를 말한다. 신약 전체의 문맥에서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인도 또는 지배이다.
2. 엡 5:18 성령 충만을 받음 = 성령 통치 받음
'영으로 충만케 되어져 있으라'( )이다. 현재 수동태 명령형을 썼다. 영으로 충만케 되어져 있음은 내 노력에 의해 영으로 충만케 됨을 배제한다. 은혜가 이미 주어져 있다. 현재형이므로 계속적인 의무사항이지 반복적인 것이 아니다. 이미 영이 주어져 있으므로 영으로 충만케 되어져 있음은 그리스도인의 책임 사항이다. 성령 충만은 통상 생각하듯 물리적 양적 채움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령에게 전적으로 순종하고 완전히 지배받음을 뜻한다. 이 일은 오순절 후 사도들과 처음 제자들에게 잘 나타났다.
3. 사도들의 성령 충만 = 성령에 전적으로 순종 곧 성령에 지배받음
그들은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하였다. 성령의 지배외에 달리 할 수 없었다. 성령 충만은 일곱 집사에게 적용되었다. 제 2 세대 사도들에게도 적용되었다. 바나바는 전도자로 시작하였는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행 11:24) 성령 충만은 바울에게도 적용되었다. 성령 충만은 사도행전에서는 비시디안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지막으로 적용되고 그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행 13:52의 예로 중단되었다. 그 이후는 성령의 역사가 처음처럼 그렇게 힘있게 전개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경우를 보면 (살전 1:6) 성령 충만이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바울의 서신에 성령의 인도가 강조됨을 볼 때 성령의 역사가 처음 세대와는 강도가 낮게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156쪽)
4. 성령의 인도 = 성령 충만 = 죄악을 벗음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악의 행실들을 죽이게 하는 역사이고 그리스도의 법으로 살게 하는 성령의 인도이다.
제 11 장 성령으로 인침 = 구원의 보장
성경이 말하는 구속은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까지 완전히 구원에 이름을 뜻한다. 이 구속의 보장으로 성령을 주시고 인치셨다. 칼빈은 성령부어 주심과 성령으로 인치심을 동시적 사건으로 일치 시켰다. 성령으로 인침은 믿음의 일이요, 복음의 약속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동시적으로 심장에 새겨진다.
제 12 장 성령 받았음의 증거 =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
성령을 보신 자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것이 성령을 받았음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다.
제 13 장 성령의 사역 : 전도와 성화
성령의 사역은 전도와 성화 작업이다. 그 외의 모든 일들은 다 이 전도와 성화 작업 사이에 들 뿐이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전파 : 전도자 성령
성령이 원전도자이고 사람 전도자들은 다 그의 전도의 조력자들이다.
2. 거룩한 백성 만듦 : 성화자 성령
성령은 본래 거룩한 하나님이시지만 백성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직임 때문에 거룩한 영으로 호칭되었다.
제 14 장 성령의 능력 : 복음 전도의 능력
성령의 능력은 기적과 신유 능력 행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거를 힘있게 이루는 능력이다. 성령은 창조주로서 창조 사역도 하였지만 주 예수의 부활 후에 오신 성령은 전적으로 주 예수의 증거에 자기의 모든 활동을 집중하였다.
1. 성령의 능력은 예수 복음을 증거하는 능력
2. 성령의 능력은 죄를 이기는 힘
3. 성령의 능력은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
제 15 장 능력의 길 : 기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결같이 갈망하는 것은 성령의 임재 체험과 그 능력의 행사이다. 성령의 임재가 바로 그리스도 임재이다. 임재의 체험은 주 예수를 믿는다는 신앙고백으로 이루어진다. 성령을 받음은 능력의 원천을 받음이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행사하는 길은 기도를 통해서이다.
성령은 종말론적 선물이어서 영원히 계속될 선물이지만 (요14:16)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 임시적이서 계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할 사항이다. 기도의 역사는 마법이 아니므로 한번의 능력 받음으로 계속해서 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계속적으로 기도하여 죄악을 떠남으로 능력을 덧입는다. 성화의 진행과 비례해서 능력을 더 크게 행사할 수 있다. 이것은 성화가 근거가 돼서 능력을 받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자기 죄악을 내어놓는 기도는 하나님의 들음을 받아 능력을 입어 복음 증거를 힘있게 한다. 성령 세례를 위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능력을 입기 위해 전력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제 16 장 능력의 소실
①기도가 약해지거나 기도를 쉼으로 능력을 상실한다. ②육체의 욕망들을 추구하고 그것들을 생활의 법으로 하면 능력을 입을 수 없고 힘입는 능력을 상실한다. ③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주된 생각이 돈에 집중하면 능력을 상실한다. ④성령의 능력을 자기 추구에로 전용하면 능력이 곧 소실된다. 그러므로 능력을 입고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를 죽이고 영광이 주께만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제 17 장 성령의 은사들
1. 은사의 성질과 목적
은사들은 은혜의 표현이다. 은혜는 구원 은혜를 말한다. 은사들은 다 성령에게서 유래하였다. 성령은 그의 사역을 완수하기 위해 은사들을 베푼다. 반대로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면 그 은사들은 성령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은사들은 다 초자연적으로 오지 않는다. 이미 주어진 재능들이 개발되고 활용되는 것도 성령의 은사이다. 성령의 선물은 종말론적 선물이어서 영원한 선물이지만 은사는 임시적이다. 모든 교회의 지체들은 일정한 은사가 아니어도 다른 은사들을 받아가지고 있다.
2. 은사들의 종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과 교회의 봉사, 위로와 구제, 교회의 치리는 항속적이나 나머지 은사들은 다 사라졌다. 오용하기 때문에 부패하고 중단하였다. 특히 게시 전달의 성격을 갖는 예언과 방언과 방언 통역은 신약 성경의 완결로 더 이상 필요없게 되므로 중단하였다.
3. 방언
방언은 행 2:1-4, 행 10:46, 행 19:6에 그 나타남이 기록되었으나 사도행전 다른 부분에는 명기가 없다. 그리하여 사라진 줄 알았는데 고린도 교회에 나타나 교회가 매우 혼란하였다. (고전12-14) 골니도 교회의 방언도 곧 사라지게 되었다. 극소에서 방언이 계시나 권면의 내용의 전달이 아니고 자기 과시를 위해서 방언의 은사가 오용되므로 중단되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방언은 임시적인 은사이기 때문이다.
1) 고린도 교회의 방언
고린도 교회에서 여러 사람이 동시에 방언하고, 서로 먼저 방언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전 12: 27, 14: 23) 방언의 은사를 제일로 여기며 다른 은사들을 무시하였다. (고전 12:14-26) 성령의 은사들은 교회를 세위기 위해서 주어졌으므로 방언도 교회를 위하여 사용되어야 하고 이 일을 위해서는 통역이 필수적이다. (고전 14:15-19) 고린도 교회에 방언자는 많았어도 통역자는 매우 적었음을 알 수 있다. (고전 14:5,28) 방언이 통역되면 권면을 전하는 예언이 될 수 있었다.
2) 사도행전의 방언들
예루살렘의 방언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한 번 허용되었다. 유대인들이 믿지 않으므로 방언으로 큰 구원을 선포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의 나라의 옮김을 광포한 것이다. 가이사랴 고넬료와 로마인의 개종시 방언은 이방인도 예수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되는 일에 아무런 차이를 두지 않고 예수 믿음에 성령을 동시적으로 주심을 유대인들에게 분명히 하기 위해 주어졌다. 방언을 동반하지 않했으면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에게 성령 주심과 예수 믿음을 인정하지 않했을 것이다. (행 11:18)
에베소 열두 형제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으므로 옛 세대에 속한 자들이고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의 방언도 안디옥에 거주하며 바울의 복음 선포시 함께 있었던 유대인들에 대한 증거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에베소는 국제 도시이고 가나안과 육지로 연결된 교통 요지였으므로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완전히 넘어갔음을 증거한 것이며 방언으로 증거한 이후에 대대적으로 이방인들의 개종이 이루어졌다.
고린도도 국제 항구 도시이므로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다. 이 고린도 교회도 방언하므로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로 옮겨졌음을 분명히 하게 된 것이다. (행 18:7)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의 방언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대한 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바울이 떠나 간 후에도 계속되어 교회내의 문제가 되었다.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와 에베소의 경우처럼 일과성이 아니고 상당 기간 계속되면서 방언을 오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방언은 폐지되었다. 또 복음서와 사도들의 글이 이루어지므로 더 이상 방언으로 권면이 계속될 필요가 없고 신약에 근거해서 가르치고 권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방언이 발생하면 방언자들의 자기 과시욕 때문에 교회는 혼란하고 자라지 못하며 분열해왔다. 현금 교회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반복되었다.
3) 오순절 운동의 방언
20세기 오순절 운동은 방언으로 시작하였다. 방언해야 성령 받았다는 표가 되므로 방언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였고 학습과 모방에 의한 방언을 힘쓰게 되었다. 오순절 운동이 은사 운동으로 바뀌면서 방언과 신유의 은사가 크게 강조되어 70년대 까지 방언이 크게 번졌으나 은사 운동이 80년대 교회 성장 운동으로 바뀌면서 신유의 은사 강조보다 방언의 강조가 적어지므로 방언이 거의 사라졌다. 고린도 교회에서 통역은 적었던 것처럼 20세기 오순절파의 교회들에서도 통역은 적어서 방언의 내용은 별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오순절 운동의 방언은 혼란과 무질서만 많이 하였고 신앙의 성장은 없었다. 그러나 방언을 받기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한 것은 새신자들을 신앙에로 성장하도록 하는 유익을 주었다고는 할 수 있다.
헤르베르트 뮐렌은 말하기를 방언은 자연적 재능이 성령에 의해 해방되어 교회를 세우고 자라게 하는 데 사용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헌신의 표현으로서 일종의 기도형태라고 말한다.
20세기 방언은 예언을 가져오는 계시적 은사가 아니라 방언을 갈구하고 방언을 환경에 접촉되므로 나타나는 언어 기관의 특별한 반응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이 방언 현상은 19세기 부흥 운동이 크게 일어나도 그 때는 경험하지 못한 현상이다. 방언을 추구한 20세기 사람들이 얻은 경험이다.
4. 예언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은 방언과 방언 통역과 예언을 성령의 세 기본 은사로 주장해왔다. 교회 성장 운동이 신유의 은사를 강조하기 전까지는 이 세 은사를 가장 중요한 현존 은사로 여겨왔다. 계시의 계속성을 말하는 자들은 오순절파 사람들이 받은 성령과 사도들이 받은 성령이 동일하므로 현대인도 동일한 성령 경험을 하고 지금 사람들이 받는 말씀도 성경의 말씀과 동등한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성령은 동일한 성령이어도 사도들은 계시의 기관이므로 영감을 받아 받은 계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하였다. 영감은 사도들과 성경 저자들에 국한하여 성경 계시가 완결되었으므로 더 이상의 성경적 구원 계시는 계속되지 않는다. 사도들에 의해 성경 기록이 완료되고 그들이 퇴장하므로 계시는 완전히 중단되었다. 미래 예언은 불가능하고 사도와 선지자들 외에는 허락되지 안했다. 성경 예언의 해석 외에는 다른 길은 불가능하다. 성경 예언의 해석도 그 성취를 예언할 때는 인간의 해석이므로 그 해석된 대로 성취되지 않는다. 예언과 지식의 폐지를 예언한 바울의 예언대로 예언은 그쳐졌다. 성경에 모든 예언이 다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칼빈의 가르침대로 고린도 전서 12:28-29의 선지자는 미래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아니고 성경을 다르고 적용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 때는 영감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이 적용된다.
5. 신유의 은사
야고보 사도가 가르치는 믿음과 기도로 병이 고쳐지는 것은 교회사에 계속 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약 5:14-16) 그러나 신유의 은사를 저장받아 마술적 지팡이를 휘두르듯 병자들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은 사도 시대로 그쳤다. 바울도 그의 말년에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의 위장병을 고쳐줄 수 없어서 자연적 처방만을 했을 뿐이다. (딤전 5:23) 에바브로디도는 죽기에 이를 만큼 병들었지만 신유 은사로 바울이 고치지 못하고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사 고쳐주시기만 기도하였고(빌 2:26-27) 드로비모도 병들어도 신유의 은사로 낫게 하지 못하고 밀레도 섬에 남겨두었었다. (딤후 4:20) 사도들에게는 치병과 귀신 추방의 권세가 주어져서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확증하고 교회를 설립할 수 있게 하였다. 이 두 능력은 사도들의 사도로서의 신임장이었다. 복음의 선포와 교회의 설립을 위해 이 능력들이 행사되었다. 그들은 기적 행사와 신유 능력의 현시와 그 자체의 확증을 위해서는 그 능력이 현시되지 안했다. 바울 사도의 경우는 마지막 선교가 이루어진 멜리데 섬에서의 활동까지는 치병의 은사가 행사되었다.
그 후에는 이방 세계에서 전도하는 일이 진행되지 못하였으므로 치병의 기적들을 행했다는 신약의 보고가 없었다. 따라서 신유 은사자는 사도들의 활동이 끝남과 함께 중지되었다. 사도 시대 이후에는 믿음의 기도로 병들이 낫는 것이 허락되었다. 믿음의 기도로 병자들을 고치는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
제 18 장 성령과 그리스도의 관계
1. 예수 = 성령으로 시작한 사람
2. 예수 = 최초의 성령 세례받은 자 - 구원 시대 곧 하나님 나라의 시작
3. 예수 = 성령의 담지자
4. 예수 = 살리는 영, 성령의 파송자
5. 성령 = 예수의 영; 예수의 인격 = 성령 오심의 통로
우리에게 실제로 오신 분은 성령이셔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심으로 체험한다.
6. 보혜사 = 예수의 제 2 자아
7. 그리스도 사역의 승계 : 보혜사로 역사
성령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사역을 계속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자기 자리에 보내셨다.
8. 성령 사역의 목표 = 그리스도의 영화
성령의 또 다른 주요 사역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는 이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함을 그의 목표로 삼았듯, 이제 차례를 바꾸어 성령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함을 그의 사역의 목표로 삼는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에서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보신다. 왜냐하면 이 일에서 그리스도께서 왕이시기 때문이다.
9. 예수 = 부활의 첫 열매 ; 성령 = 그 보증금
10. 영 = 종말 세계의 생의 원리
종말 세계에서는 영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고 유지되며 영위되는 생을 살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성령의 내주와 충만은 다 종말 세계에서 우리가 누리고 살 풍성한 영의 지배의 예표라고 할 것이다.
제목 : 성령신학 (서철원교수님 著)
과목 : 성령론
지도교수 : 김길성 교수님
총신대학 대학원 Th.M
조직 신학 전공
97116 이성은 강도사
제목: 성령신학, 서철원 저
제 1 장 서론
오순절 운동은 성령 추구의 운동이었다. 예수만 믿음이 아니라 성령을 체험하기를 바라서 일으킨 운동이 20세기 초엽에 일어나서 20세기가 다 되도록 그 운동이 교회로서 존재하고 또 은사 운동의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성령은 예수 믿을 때 받고 예수 믿음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후의 별도의 과정으로 성령 세례를 받으므로 성령을 충만히 받고 성령을 경험하게 된다.
오순절 부흥 운동은 알미니안 감리교회 지반에서 발생하였다. 알미니안 감리회 신학에서는 주권적 은혜의 역사에서 인간의 주도성에로 강조점이 넘어오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쟁취된다. 쿠르트 훗텐(Kurt Hutten)의 지적대로 은혜를 부인하지 않지만 그 은혜는 인간의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
오순절 운동은 성령 운동이었다. 공교회는 초기부터 성령 운동에 대해 우려와 불안으로 대하였다. 2세기 중엽의 몬타누스 성령 부흥 운동 때부터 교회는 우려와 경계를 크게 하였고, 그후 종교개혁 때 나타난 광신파는 성령의 직접적인 말씀과 내적 조명을 강조하여 성경을 배척하고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원을 약화하여 내적 체험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배척되었다. 그러나 18세기 감리교 부흥 운동은 정당한 교회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런 배경에서 오순절 성령 운동이 일어나서 세계로 널리 퍼지고 정당한 교회로 자리잡으므로 로마 교회와 종교 개혁 교회 다음으로 제 3 기독교 세력이 되었다. 따라서 이전 교회사에서 일어난 분파들의 성령 운동을 대적한 교회의 반응은 없어졌고 로마 교회와 영국 교회에까지 이 운동이 퍼지므로 오히려 교회 갱신의 세력으로 영접되었다.
그러나 개혁 신학의 성령 논의가 가장 바르고 성경적이다. 불필한 논의로 교회의 힘을 소진하는 것은 중단될 때가 되었다. 성경적 증거들에 의해 오순절파의 주장이 많이 수정되었지만 기본 신학은 그대로 고집하고 있다.
제 2 장 오순절 운동의 시작과 확산
1. 오순절 운동
1906년 4월 9일 미국 로스엔절레스의 아주사 거리에서 흑인 감리교회 목사인 윌리암 씨무어(William Seymour) 목사의 부흥회로부터 시작하였다. 씨모어는 방언 운동을 처음 출발시킨 챨스 파함(Charles Parham)에게서 배웠다. 이 운동이 짧은 시간에 미국 전역에 퍼지고 전 세계에 퍼질 수 있게 된 것은 프랑크 바틀만의 문서활동에 크게 기인한다. 그는 미국의 성결회 계통의 신문들에 아주사 부흥 운동을 자세히 보고하였고 소책자들을 각처로 보냈다. 세계 각처에서 특히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들이 오순절의 체험을 얻기 위해 아주사가로 모여들었고, 많은 목사들도 부흥회에 참가하였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1950년대에는 그 내적 힘을 고갈하여 매우 피폐해졌지만 은사 운동의 전개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2. 오순절 운동의 확산 : 전 세계에 퍼짐
1) 유럽에 퍼짐 2) 남아메리카에 퍼짐 3) 아프리카에 퍼짐 4)아시아에 퍼짐
3. 은사 운동
은사 운동은 신학은 오순절 운동과 동일하나 새로운 교회를 구성하지 않고 은사에 강조를 두는 면만 다르다. 로마 교회로 은사 운동이 퍼지면서부터는 성령 세례 대신 영의 해방을 사용한다. 즉 세례에서 성령은 이미 받았고 견신 때 혹은 그후에 방언과 다른 은사들을 경험하는 것은 세례에서 받은 은혜가 방출되는 것으로 보게 된다. 이 은사 운동은 영국 교회에도 파급되어 칸터베리에서 은사 대회를 1978년 가졌다.
제 3 장 오순절 운동의 신학 : 중생 후 성령 세례
-방언이 세례의 증거 -
1. 중생 후 성령 세례
성령 세례를 받으면 봉사에 능력(power in service)을 입는다는 것이 오순절 운동의 교리이다. 그리스도의 생애에 성령의 두 작용이 있었다. 첫째 역사는 그리스도의 성령의 역사에 의한 출생이고, 두 번째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어 메시야로 임직되었다 그러면 신자의 생에서도 왜 두 가지 성령의 역사를 갖지 않아야 하는가? 출생(혹은 중생)에서는 성령은 안으로 오시고 성령 세례에서는 내려오신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는 중생 후의 과정이다. (Ernest S. Willams, Systematic Theology. Ⅲ. 1953.1981. pp.44-46)
2. 조건들 이행으로 성령 세례 받음
성령 세례는 모든 신자들의 출생권(birthright)이다. 성령 세례를 받지 않은 것은 자기의 출생권을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 세례가 가능적으로 각 신자의 소유이지만 그것을 믿음으로 자기에게 충용해야 한다. (R.A.Torrey.The Person & work of the Holy Spirit. 150) 하나님의 주려는 능력이 인간의 받는 능력에 의해 제한되었다. 토리는 성령 세례받는데 필요한 7 단계를 제시한다. 랄프 리그스는 5 단계를 , 퍼얼만은 기도에 중점을 두어 조건들을 강조하고, 도널드 기이, 챨스 칸등도 조건을 제시한다.
성령을 받기 이전에도 이런 철저한 죄에서의 분리를 이룰 수 있는 영웅이나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 죄와 완전히 격리될 수 있다면 성령 받을 필요가 있는가? 성령을 받기 전에 완전한 순종을 할 수 있으면 성령 받을 필요가 있는가? 인간 본성이 그렇게 선하고 타락이 별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그러할 것이다. 인간의 노력이 성령 받음과 받음의 양을 결정하는 것은 은혜의 종교일 수가 없다. (서철원, 46쪽)
3. 방언으로 성령 세례가 표현됨
카알 브럼벡은 주장하기를 "성령 세례 혹은 위로부터 능력을 입었는지의 여부는 방언을 말함으로 알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왜 하나님이 방언을 성령 세례의 초기 물리적 증거로 택하셨는지를 7 가지로 설명한다. 그중 4번째는 방언은 성령이 신자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상징이다. 혀는 마지막까지 성령에게 양도하려고 하지 않는데 완고한 혀로 성령이 말하게 한다는 것은 성령이 신자를 완전히 소유했다는 표가 되기 때문이다. 방언은 성령이 신자의 진리와 발언의 원천임을 현시하며, 또 말함이 인간의 특권과 능력의 대표이므로 하나님이 방언을 초기 물리적 증거로 고르셨다는 것이다.
4. 경험을 표준으로 삼는 알미니안 신학
오순절 신학은 알미니안 신학과 웨슬리의 성화 교리의 융합이므로 체험과 인간 주도성이 강조되어 교리보다는 경험을 규범으로 삼는다. 경험을 믿음과 구원 확신의 중심으로 삼음으로 육체적 현상들을 중시한다. 또한 성화가 칭의의 조건들이면 성화 이전의 사람들은 다 죄인으로 남고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도 칭의에 이르기 위한 모본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모범으로 성립한다. 성화를 온전히 이루어 그 도덕적 의에 근거해서 칭의를 입으면 그 의는 내 획득 사항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다. 오순절은 정통 교리보다 정통 실천을 강조하여 영안에서 동력적 활동을 가짐으로 교리적 진리가 정당화를 받는다. 이처럼 오순절 파는 성령 세례의 동력적 경험의 유지를 목표하고 교리의 강조를 거부한다. 성령 세례의 경험은 인간 편에서의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오순절파는 신약의 은혜를 오순절파의 공로로 바꾸었다. 종교의 경험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제 4 장 오순절의 성령 강림 :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1. 성령 강림의 근거 :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성령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이고, 믿음외의 다른 종교적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으로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서는 이룰 수 없는 의를 이루어야 한다. 그 의의 성취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다.
2.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짐
구약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어도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에 의해 그 죄가 완전히 속량되지 못하였으므로 백성들 가운데 임재를 곧 성령의 거주를 가졌지만 그 백성들 각자가 성령의 내주는 갖지 못하였다. 그것은 신약 교회의 특권이다. 신약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에 의해 완전히 죄가 제거되었으므로(행 10:10-12) 성령을 받고 교회의 각 지체들이 성령을 내주 방식으로 모신다.
3. 그리스도의 승천 : 성령 강림의 필수 단계
파송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구속 사역에 근거하여 아버지께 청구한 것이고, 구속 때문에 획득하였다. 그러므로 성령 강림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공로이고 다른 길이 전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없이는 성령의 파송과 강림은 전혀 불가능하다. 예수의 십가가 사건이전에 예수 믿었던 사람들이 성령 받지 못한 이유이다.
4. 예수 그리스도 : 성령 파송자
성령의 오심은 아버지의 약속이지만(눅 24:49, 행 1:4), 예수 그리스도에의해 획득되었다. 신인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을 파송한다.
5. 성령은 보혜사로 오심
원보혜사는 제자들이 예수를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갈 때 그의 몸으로 함께 갈 수 없었다. 그러나 성령은 제자들의 모든 삶의 길에 항상 그들과 함께 하였고 동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각 사람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원보혜사와 다른 보혜사와의 차이점이다. 이 차이점이 원보혜사로 하여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 16:7)고 말하게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혜사로서 제자들과 함께 거주할 동안에는 성령이 오실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원보혜사가 백성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지키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혜사는 예수의 부재시 예수의 현존이라고 정의한 레이몬드 브라운의 정의가 타당하다.
6. 성령 강림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승천 후 속죄 보고를 받으시고 성령을 보내셨다. 그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에 이미 담지되었던 인격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사람의 육체에 거하실 수 있게 되었다.
1) 성령이 처음 오셨을 때는 120명의 작은 무리에게 오셨다.
2) 첫 성령 수납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행 2:1; 1:12-15)
3) 첫 성령 강림은 강한 바람소리를 동반하고 불의 혀처럼 각 사람에게 임재하였다. (행 2:2-3)
4) 성령 강림은 성령 충만으로 나타났다 (행 2:4)
성령 충만은 성령의 지배를 뜻한다. 오순절파의 주장처럼 물을 가득 붓는 식으로 흘러넘치게 부어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5) 성령 강림은 방언 현상을 나타내었다. (행 2:4)
오순절 강림시 방언을 말함은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외국어를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 이방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됨을 광포하는 것이다.
6) 오순절은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오순절파는 사마리아인의 개종, 로마인들의 개종, 요한의 제자들의 개종 사건에서 오순절의 반복을 주장한다. (James Dunn. Jesus and the Spirit 1978. pp. 136-146 참조) 한번 오신 성령은 영구히 교회와 함께 하사 인류에게로 그 주거를 확장하신다. 사마리아인들이 성령 받은 것도 오순절의 반복으로 하늘에서 성령이 다시 강림하신 것이 아니고, 이미 와 계신 성령이 그들에게 임재하셨다. 여러 사람들이 성령 받은 것은 보충적 부어줌이나 반복적 강림이 아니라 성령이 그의 주거를 확장하심이다.
제 5 장 신약의 증거들 : 믿음으로 성령 받음
- 예수 믿음 = 성령 받음-
1. 예루살렘 교회
행 2:1-4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구속 후 처음으로 인류에게 오신 날이다. 오순절 이후에는 예수 믿고 성령 받는 일의 표준을 행 2:1-4에서 구할 것이 아니고 행 2:38-41에서 구해야 한다.
사도들을 포함한 120명은 주의 말씀으로 이미 깨끗해졌다. 많은 경우 중생은 성령의 사역이므로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리스도는 육체 안에 오신 하나님이므로 사죄의 권세를 갖듯이(마9:3-6,눅7:48) 중생케하는 권세를 가졌다. 중생케함이 원래 보혜사의 직임이다. 다른 보혜사인 성령이 이 직임을 계승하였다.(87쪽,89쪽) 성령 오심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 때문이다. 십자가에 죽어 죄를 제거함이 없이는 성령이 오실 수 없다. 이런 구원 섭리 때문에 사도들과 제자들은 주 예수를 믿고 그의 권능으로 중생하고서도 오순절 성령 강림시 성령을 받게 되었다.
3천 제자들은 베드로의 선포의 말씀을 듣고(아포덱사메노이) 세례받았는데(에밥티스데산) 제자들로 추가되었다.(프로세테데산) 이 동사들이 다 단순과거동사이고, 2,3째 동사는 다 단순과거 수동태로 쓰였다. 말씀듣고 세례받아 성령을 받는 일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졌다. 행 2:1-4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구속 후 처음으로 인류에게 오신 날이다.(93쪽)
2. 사마리아 교회
행 8:4-25에서 사마리아인들은 빌립의 전도를 받음으로만 아니고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을 받아 확실히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행 8:12에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하는 빌립을 그들이 믿었더라"고 한 것을 보면 주 예수를 믿었다기보다는 빌립을 더 믿었음을 알 수 있다. 기적들을 인해 그냥 미신적으로 믿은 기적 신앙이었고 예수 믿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전체 문맥에서 예루살렘에서 간 사도들이 예수의 사역 선포 없이 안수하였다고 볼 수 없고, 그 때에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해야 바르다.
3. 바울의 개종 (행 9:1-18)
오순절파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중생하였고 3일후 아나니아에 의해 세례 받으며 중생하므로 중생 후 성령 세례의 도식 본문으로 삼는다. 그러나 주 예수를 만나고 세례 받기까지 3일간이 중생 후 성령 받기를 기다리는 기간으로 볼 것이 아니다. 3일간은 예수 믿음으로의 전이 과정이었고 투쟁 과정이었다. 세례 받음이 곧 신앙 고백이므로 삼일 후 신앙고백과 성령 받음이 일치한다. 또한 바울은 갈 3:2-5에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믿음의 들음으로냐(ek akoees pisteos)"고 하여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 간에 아무런 시간적 거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한다. 갈라디아인들이 들어 믿고 바로 성령 받았다는 것을 그렇게 강조했으면 바울 자신의 경우도 동일하다.
4. 고넬료와 로마인들의 개종 (행 10:1-48)
오순절파는 그가 성령 받기 전에 이미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고넬료는 예수 복음을 듣지 못했으므로 예수를 믿을 수도 없어서 중생은 불가능했다. 또 고넬료야 율법을 아는 경건한 개종자이었지만 그의 친족, 친지들과 군인들은 전혀 그런 것도 알지 못했다. 베드로가 주 예수의 사역을 선포하는 중에 특히 "저를 믿는 자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고 할 때에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오셨다.(행 10:43-44) 로마인들의 개종에는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이 완전히 동시적이었다.
5. 갈라디아 교회 (행 15:1-5, 갈 1:1-4:6)
갈라디아인들은 율법에 관해서 듣고 지킬 의무감을 느끼기 전에 복음만 선포받아서 믿고 동시에 믿어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 예수믿고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 율법 준수의 의무가 전혀 부가되지 안했다. 성령 받음은 믿음으로 되고 율법의 행위 곧 인간적 노력으로 되는 것이 전혀 아니다. 갈라디아서만큼 성령 받음과 믿음이 일치하는 성경 책도 없다.
6. 데살로니가 교회 (행 17:1-9;살전 1:2-10)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주를 본받는 자들이, 즉 믿는 자들이 되었다.(살전 1:6-7) 바울은 여기에 단순 과거분사 분사 를 사용하므로 (살전1:7) 성령의 기쁨을 갖는 것, 곧 믿음과 말씀을 받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분명히 한다. 짧은 기간 곧 세 안식일 동안에 복음을 들었어도 받을 때부터 기쁨으로 주를 믿었다.(행 17:2,살전 1:6)
7. 고린도 교회 (행 18:1-11; 고전 1:13-2:16)
행 18:8에 누가는 주를 믿은 것을 표기하기 위해 단순 과거동사 믿었다(에피수센)를 사용하여 주를 받는 일과 성령 받음이 동시적으로 발생했음을 분명히 하지만, 수다한 고린도 사람들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할 때는 미완료 과거형을 썼다. 이것은 일년 육개월간 믿고 세례받는 일이 반복되었음으로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고전 12:13에서 한 성령에 의하여(en heni pneumati) 우리 모두가 한 영으로 세례받아졌고, 예수 믿어 그의 몸에 결합되는 일이 성령에 의해 이루어졌다. 오순절파는 세례 주는 이는 성령이 아니시고 주 예수이므로 이 본문을 성령에 의해서로 이해 할 수 없고 성령 안에서로 이해한다고 하지만 바른 이해가 아니다. 성령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결합시키는 일을 하시는 분이므로 한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에로 세례받아진다. 이 세례받는 일이 믿는 때에 이루어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단순과거 수동태(ebaptisthemen)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성령을 마시게 되어졌다. 내가 노력해서 성령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마시게 되어졌다. 수동태 동사 epotisthemen를 사용하였다. 예수 믿을 시초부터 성령을 받음을 성령 세례라고 말해야 맞다.
8. 에베소 교회 (행 19:1-20)
1) 에베소의 첫 그리스도인들(행 19:1-7)
오순절파는 아볼로의 전도와 세례 받음으로 중생하고 바울에 의해 성령 세례받았음이 분명하므로 중생 후 성령 세례 공식이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밖에 알지 못하였으므로 (행 18:25) 예수 이름으로 세례주어 예수 믿게 할 수없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로 남았다. (106쪽) 예수 믿을 때 성령 받음이 당연함을 바울의 놀란 질문에서 잘 알 수 있다. 행 19:2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여기 믿을 때 ( )와 성령을 받았느냐( )는 모두 단순 과거여서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이 동시적인 사건임을 분명히 한다. 흠정역이 너희가 믿은 이후에(Since ye believed)로 잘못 번역한 것이 그릇된 해석과 잘못된 신학을 낳게 하였다.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볼로의 가르침을 받고서야(행 18:26) 복음을 바로 알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줄 수 있었다.
2) 다른 에베소인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의 3년간의 집중 전도로 많이 주께로 돌아가게 되었다.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akousantes) 바로 믿어(pisteusantes)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받았다.(esprasisthete)(엡1:13) 듣고 믿고 인침이 다 단순과거로 표시되어 복음을 들을 때 믿고 믿음으로 성령 받았음을 분명히 한다. 이 일은 다 복ㅇ므을 들을 때 동시적으로 이루어졌다. 성령으로 인침이 성령 받음과 동일한 사건이다. 왜냐하면 성령을 주심이 믿음의 결국 곧 구원에 이름의 보증이기 때문이다. (엡1:14,고후 1:21-22)
9. 신약 후기 교회들
사도들의 퇴장 이후에는 교회의 세례 주는 관행이 바뀌었다. 복음의 선포로 예수 믿게 하여 바로 세례 주어 교회에 가입시킨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람들을 교회에 들여왔다.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문답 교육을 시켜서 세례받아 교회에 가입시켰다. 교육 과정 중에 사도신경을 익히고 외게하였는데 그러므로 예수 믿음과 세례받음이 분리되어 오늘까지 왔다.
제 6 장 성령 세례 = 성령 받음
1. 예수의 성령 세례 = 메시야 임직식 : 성령의 담지자 됨
하나님의 아들로서 출생하신 이가 성령을 받아 메시야로 세워지심으로 예수는 성령 담지자가 되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메시야로서 성령으로 기름부음받되 한량없이 받았기 때문이다. (요 3:34) 예수가 성령 담지자가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성령받는 것은 예수에게서 만이다. 예수 성령 담지자는 성령 파송자가 될 수 있기 위하여 죽고 부활에 이르러야 했다. 주 예수는 부활의 날에 성령 파송의 약속을 "성령을 받으라"로 밝히 표현하였다. (요 20:22)
2. 성령 강림 = 성령 세례 = 성령 받음
성령 세례는 예수의 메시야의 임직에 합당히 적용되고 백성들의 성령 받음은 성령 받음, 성령 부어주심, 성령 충만으로 표기되었다. 성령 세례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아니하고 주 예수의 약속을 회상하여 한 번 반복함밖에 없다. (행 11:16) 베드로는 그의 설교에서 성령 세례를 약속하지 않고 성령 받음을 약속했다.
제 7 장 성령 받음 = 선물로 받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단지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이렇게 믿기만 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롬 4:5) 청구하면 성령이 오시는 것이 아니고 믿으면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보내신다. 중생 후 성령 세례를 가르치는 오순절 신학은 신약에 전혀 생소한 율법주의이지만 복음주의 신학으로서 힘있게 주장되었다.
제 8 장 성령 강림의 목적 = 하나님의 거소 마련
하나님의 거소 조성이 성령 강림의 목적이다.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것은 백성들이 거룩해짐으로 이루어진다. 백성이 거룩해지는 것은 성령의 인도로 된다. 성령의 인도가 죄를 죽이고 거룩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내주로 이루어진다. 성령의 내주는 그리스도께서 계심인데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함으로 영이 살아나고 몸은 죽게된다. (롬8:10) 성령의 거주가 하나님 자신의 거주이다. 성령의 내주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해졌다. (고전 3:17) 그러나 이스라엘의 거룩은 외적 거룩이요 의식적 거룩이므로 내면에까지 완전히 거룩해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가운데 장막을 치고 거하셨고 백성들 각자 안에 내주하지 못하였다. 백성들 각자 안에 거하는 것은 신약 교회의 몫이었다. (요일 4:15)
제 9 장 성령의 내주 = 지속적인 인격적인 관계 맺음
구약 백성들에게는 성령께서 장막을 치시고 그들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 위에 계셨다. (출25:19; 40: 34-38)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함께 한 민족은 이스라엘 뿐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백성들 각자의 마음에 하나님이 내주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신약 교회만의 특권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백성이 구속되었으므로 그 은혜 때문에 성령이 신약 교회 전체와 함께 계시지만 신자들 각자의 마음 속에 거주하신다. (롬 8:9,갈4:6,고전3:16,6:19,고후 1:22,5:5)
기독교 구원의 신비는 성령의 내주로 시작하고 진행되는 것이다. 육체 안에 하나님이 내주하신다는 것은 말로 기술할 수 없는 신비이다. 육적 존재 안에 성령이 거하기 위해 오셨다. 성령의 내주로 육인 인류가 영으로 변화되었다. 영은 성령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형상이 된 자들의 존재 방식이다.
삼위일체의 신비에 의하여 성령의 오심이 삼위 일체 하나님의 오심을 뜻한다. (요 14:23, 요일 3:24, 4:13, 2:24) 그리스도의 은혜는 영구한 것이어서 우리를 영원히 떠날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은 새 인류의 각자 안에 영구히 거하신다. 칼빈은 이 진리를 표현하여 그리스도의 은혜가 죽은 후에도 우리의 영혼에서 떠나가지 않고 함께 한다고 하여 재세례파의 영혼 수면설을 반대하였다.
제 10 장 성령 충만 = 성령의 지배
1. 성령 충만 = 성령의 지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의로울 뿐만 아니라 원리적으로 거룩하다. (엡 1:4) 그리스도인이 이처럼 원리적으로 거룩하여도 거룩해져야 한다. 바울은 성령 충만은 엡 5:18에서 한번 사용하였고 다른 서신들에서는 성령의 인도로 표현하였다.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충만도 그 전체 문맥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통치를 말한다. 신약 전체의 문맥에서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인도 또는 지배이다.
2. 엡 5:18 성령 충만을 받음 = 성령 통치 받음
'영으로 충만케 되어져 있으라'( )이다. 현재 수동태 명령형을 썼다. 영으로 충만케 되어져 있음은 내 노력에 의해 영으로 충만케 됨을 배제한다. 은혜가 이미 주어져 있다. 현재형이므로 계속적인 의무사항이지 반복적인 것이 아니다. 이미 영이 주어져 있으므로 영으로 충만케 되어져 있음은 그리스도인의 책임 사항이다. 성령 충만은 통상 생각하듯 물리적 양적 채움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령에게 전적으로 순종하고 완전히 지배받음을 뜻한다. 이 일은 오순절 후 사도들과 처음 제자들에게 잘 나타났다.
3. 사도들의 성령 충만 = 성령에 전적으로 순종 곧 성령에 지배받음
그들은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하였다. 성령의 지배외에 달리 할 수 없었다. 성령 충만은 일곱 집사에게 적용되었다. 제 2 세대 사도들에게도 적용되었다. 바나바는 전도자로 시작하였는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행 11:24) 성령 충만은 바울에게도 적용되었다. 성령 충만은 사도행전에서는 비시디안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지막으로 적용되고 그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행 13:52의 예로 중단되었다. 그 이후는 성령의 역사가 처음처럼 그렇게 힘있게 전개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경우를 보면 (살전 1:6) 성령 충만이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바울의 서신에 성령의 인도가 강조됨을 볼 때 성령의 역사가 처음 세대와는 강도가 낮게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156쪽)
4. 성령의 인도 = 성령 충만 = 죄악을 벗음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악의 행실들을 죽이게 하는 역사이고 그리스도의 법으로 살게 하는 성령의 인도이다.
제 11 장 성령으로 인침 = 구원의 보장
성경이 말하는 구속은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까지 완전히 구원에 이름을 뜻한다. 이 구속의 보장으로 성령을 주시고 인치셨다. 칼빈은 성령부어 주심과 성령으로 인치심을 동시적 사건으로 일치 시켰다. 성령으로 인침은 믿음의 일이요, 복음의 약속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동시적으로 심장에 새겨진다.
제 12 장 성령 받았음의 증거 =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
성령을 보신 자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것이 성령을 받았음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다.
제 13 장 성령의 사역 : 전도와 성화
성령의 사역은 전도와 성화 작업이다. 그 외의 모든 일들은 다 이 전도와 성화 작업 사이에 들 뿐이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전파 : 전도자 성령
성령이 원전도자이고 사람 전도자들은 다 그의 전도의 조력자들이다.
2. 거룩한 백성 만듦 : 성화자 성령
성령은 본래 거룩한 하나님이시지만 백성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직임 때문에 거룩한 영으로 호칭되었다.
제 14 장 성령의 능력 : 복음 전도의 능력
성령의 능력은 기적과 신유 능력 행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거를 힘있게 이루는 능력이다. 성령은 창조주로서 창조 사역도 하였지만 주 예수의 부활 후에 오신 성령은 전적으로 주 예수의 증거에 자기의 모든 활동을 집중하였다.
1. 성령의 능력은 예수 복음을 증거하는 능력
2. 성령의 능력은 죄를 이기는 힘
3. 성령의 능력은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
제 15 장 능력의 길 : 기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결같이 갈망하는 것은 성령의 임재 체험과 그 능력의 행사이다. 성령의 임재가 바로 그리스도 임재이다. 임재의 체험은 주 예수를 믿는다는 신앙고백으로 이루어진다. 성령을 받음은 능력의 원천을 받음이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행사하는 길은 기도를 통해서이다.
성령은 종말론적 선물이어서 영원히 계속될 선물이지만 (요14:16)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 임시적이서 계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할 사항이다. 기도의 역사는 마법이 아니므로 한번의 능력 받음으로 계속해서 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계속적으로 기도하여 죄악을 떠남으로 능력을 덧입는다. 성화의 진행과 비례해서 능력을 더 크게 행사할 수 있다. 이것은 성화가 근거가 돼서 능력을 받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자기 죄악을 내어놓는 기도는 하나님의 들음을 받아 능력을 입어 복음 증거를 힘있게 한다. 성령 세례를 위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능력을 입기 위해 전력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제 16 장 능력의 소실
①기도가 약해지거나 기도를 쉼으로 능력을 상실한다. ②육체의 욕망들을 추구하고 그것들을 생활의 법으로 하면 능력을 입을 수 없고 힘입는 능력을 상실한다. ③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주된 생각이 돈에 집중하면 능력을 상실한다. ④성령의 능력을 자기 추구에로 전용하면 능력이 곧 소실된다. 그러므로 능력을 입고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를 죽이고 영광이 주께만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제 17 장 성령의 은사들
1. 은사의 성질과 목적
은사들은 은혜의 표현이다. 은혜는 구원 은혜를 말한다. 은사들은 다 성령에게서 유래하였다. 성령은 그의 사역을 완수하기 위해 은사들을 베푼다. 반대로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면 그 은사들은 성령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은사들은 다 초자연적으로 오지 않는다. 이미 주어진 재능들이 개발되고 활용되는 것도 성령의 은사이다. 성령의 선물은 종말론적 선물이어서 영원한 선물이지만 은사는 임시적이다. 모든 교회의 지체들은 일정한 은사가 아니어도 다른 은사들을 받아가지고 있다.
2. 은사들의 종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과 교회의 봉사, 위로와 구제, 교회의 치리는 항속적이나 나머지 은사들은 다 사라졌다. 오용하기 때문에 부패하고 중단하였다. 특히 게시 전달의 성격을 갖는 예언과 방언과 방언 통역은 신약 성경의 완결로 더 이상 필요없게 되므로 중단하였다.
3. 방언
방언은 행 2:1-4, 행 10:46, 행 19:6에 그 나타남이 기록되었으나 사도행전 다른 부분에는 명기가 없다. 그리하여 사라진 줄 알았는데 고린도 교회에 나타나 교회가 매우 혼란하였다. (고전12-14) 골니도 교회의 방언도 곧 사라지게 되었다. 극소에서 방언이 계시나 권면의 내용의 전달이 아니고 자기 과시를 위해서 방언의 은사가 오용되므로 중단되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방언은 임시적인 은사이기 때문이다.
1) 고린도 교회의 방언
고린도 교회에서 여러 사람이 동시에 방언하고, 서로 먼저 방언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전 12: 27, 14: 23) 방언의 은사를 제일로 여기며 다른 은사들을 무시하였다. (고전 12:14-26) 성령의 은사들은 교회를 세위기 위해서 주어졌으므로 방언도 교회를 위하여 사용되어야 하고 이 일을 위해서는 통역이 필수적이다. (고전 14:15-19) 고린도 교회에 방언자는 많았어도 통역자는 매우 적었음을 알 수 있다. (고전 14:5,28) 방언이 통역되면 권면을 전하는 예언이 될 수 있었다.
2) 사도행전의 방언들
예루살렘의 방언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한 번 허용되었다. 유대인들이 믿지 않으므로 방언으로 큰 구원을 선포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의 나라의 옮김을 광포한 것이다. 가이사랴 고넬료와 로마인의 개종시 방언은 이방인도 예수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되는 일에 아무런 차이를 두지 않고 예수 믿음에 성령을 동시적으로 주심을 유대인들에게 분명히 하기 위해 주어졌다. 방언을 동반하지 않했으면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에게 성령 주심과 예수 믿음을 인정하지 않했을 것이다. (행 11:18)
에베소 열두 형제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으므로 옛 세대에 속한 자들이고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의 방언도 안디옥에 거주하며 바울의 복음 선포시 함께 있었던 유대인들에 대한 증거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에베소는 국제 도시이고 가나안과 육지로 연결된 교통 요지였으므로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완전히 넘어갔음을 증거한 것이며 방언으로 증거한 이후에 대대적으로 이방인들의 개종이 이루어졌다.
고린도도 국제 항구 도시이므로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다. 이 고린도 교회도 방언하므로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로 옮겨졌음을 분명히 하게 된 것이다. (행 18:7)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의 방언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대한 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바울이 떠나 간 후에도 계속되어 교회내의 문제가 되었다.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와 에베소의 경우처럼 일과성이 아니고 상당 기간 계속되면서 방언을 오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방언은 폐지되었다. 또 복음서와 사도들의 글이 이루어지므로 더 이상 방언으로 권면이 계속될 필요가 없고 신약에 근거해서 가르치고 권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방언이 발생하면 방언자들의 자기 과시욕 때문에 교회는 혼란하고 자라지 못하며 분열해왔다. 현금 교회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반복되었다.
3) 오순절 운동의 방언
20세기 오순절 운동은 방언으로 시작하였다. 방언해야 성령 받았다는 표가 되므로 방언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였고 학습과 모방에 의한 방언을 힘쓰게 되었다. 오순절 운동이 은사 운동으로 바뀌면서 방언과 신유의 은사가 크게 강조되어 70년대 까지 방언이 크게 번졌으나 은사 운동이 80년대 교회 성장 운동으로 바뀌면서 신유의 은사 강조보다 방언의 강조가 적어지므로 방언이 거의 사라졌다. 고린도 교회에서 통역은 적었던 것처럼 20세기 오순절파의 교회들에서도 통역은 적어서 방언의 내용은 별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오순절 운동의 방언은 혼란과 무질서만 많이 하였고 신앙의 성장은 없었다. 그러나 방언을 받기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한 것은 새신자들을 신앙에로 성장하도록 하는 유익을 주었다고는 할 수 있다.
헤르베르트 뮐렌은 말하기를 방언은 자연적 재능이 성령에 의해 해방되어 교회를 세우고 자라게 하는 데 사용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헌신의 표현으로서 일종의 기도형태라고 말한다.
20세기 방언은 예언을 가져오는 계시적 은사가 아니라 방언을 갈구하고 방언을 환경에 접촉되므로 나타나는 언어 기관의 특별한 반응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이 방언 현상은 19세기 부흥 운동이 크게 일어나도 그 때는 경험하지 못한 현상이다. 방언을 추구한 20세기 사람들이 얻은 경험이다.
4. 예언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은 방언과 방언 통역과 예언을 성령의 세 기본 은사로 주장해왔다. 교회 성장 운동이 신유의 은사를 강조하기 전까지는 이 세 은사를 가장 중요한 현존 은사로 여겨왔다. 계시의 계속성을 말하는 자들은 오순절파 사람들이 받은 성령과 사도들이 받은 성령이 동일하므로 현대인도 동일한 성령 경험을 하고 지금 사람들이 받는 말씀도 성경의 말씀과 동등한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성령은 동일한 성령이어도 사도들은 계시의 기관이므로 영감을 받아 받은 계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하였다. 영감은 사도들과 성경 저자들에 국한하여 성경 계시가 완결되었으므로 더 이상의 성경적 구원 계시는 계속되지 않는다. 사도들에 의해 성경 기록이 완료되고 그들이 퇴장하므로 계시는 완전히 중단되었다. 미래 예언은 불가능하고 사도와 선지자들 외에는 허락되지 안했다. 성경 예언의 해석 외에는 다른 길은 불가능하다. 성경 예언의 해석도 그 성취를 예언할 때는 인간의 해석이므로 그 해석된 대로 성취되지 않는다. 예언과 지식의 폐지를 예언한 바울의 예언대로 예언은 그쳐졌다. 성경에 모든 예언이 다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칼빈의 가르침대로 고린도 전서 12:28-29의 선지자는 미래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아니고 성경을 다르고 적용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 때는 영감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이 적용된다.
5. 신유의 은사
야고보 사도가 가르치는 믿음과 기도로 병이 고쳐지는 것은 교회사에 계속 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약 5:14-16) 그러나 신유의 은사를 저장받아 마술적 지팡이를 휘두르듯 병자들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은 사도 시대로 그쳤다. 바울도 그의 말년에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의 위장병을 고쳐줄 수 없어서 자연적 처방만을 했을 뿐이다. (딤전 5:23) 에바브로디도는 죽기에 이를 만큼 병들었지만 신유 은사로 바울이 고치지 못하고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사 고쳐주시기만 기도하였고(빌 2:26-27) 드로비모도 병들어도 신유의 은사로 낫게 하지 못하고 밀레도 섬에 남겨두었었다. (딤후 4:20) 사도들에게는 치병과 귀신 추방의 권세가 주어져서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확증하고 교회를 설립할 수 있게 하였다. 이 두 능력은 사도들의 사도로서의 신임장이었다. 복음의 선포와 교회의 설립을 위해 이 능력들이 행사되었다. 그들은 기적 행사와 신유 능력의 현시와 그 자체의 확증을 위해서는 그 능력이 현시되지 안했다. 바울 사도의 경우는 마지막 선교가 이루어진 멜리데 섬에서의 활동까지는 치병의 은사가 행사되었다.
그 후에는 이방 세계에서 전도하는 일이 진행되지 못하였으므로 치병의 기적들을 행했다는 신약의 보고가 없었다. 따라서 신유 은사자는 사도들의 활동이 끝남과 함께 중지되었다. 사도 시대 이후에는 믿음의 기도로 병들이 낫는 것이 허락되었다. 믿음의 기도로 병자들을 고치는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
제 18 장 성령과 그리스도의 관계
1. 예수 = 성령으로 시작한 사람
2. 예수 = 최초의 성령 세례받은 자 - 구원 시대 곧 하나님 나라의 시작
3. 예수 = 성령의 담지자
4. 예수 = 살리는 영, 성령의 파송자
5. 성령 = 예수의 영; 예수의 인격 = 성령 오심의 통로
우리에게 실제로 오신 분은 성령이셔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심으로 체험한다.
6. 보혜사 = 예수의 제 2 자아
7. 그리스도 사역의 승계 : 보혜사로 역사
성령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사역을 계속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자기 자리에 보내셨다.
8. 성령 사역의 목표 = 그리스도의 영화
성령의 또 다른 주요 사역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는 이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함을 그의 목표로 삼았듯, 이제 차례를 바꾸어 성령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함을 그의 사역의 목표로 삼는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에서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보신다. 왜냐하면 이 일에서 그리스도께서 왕이시기 때문이다.
9. 예수 = 부활의 첫 열매 ; 성령 = 그 보증금
10. 영 = 종말 세계의 생의 원리
종말 세계에서는 영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고 유지되며 영위되는 생을 살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성령의 내주와 충만은 다 종말 세계에서 우리가 누리고 살 풍성한 영의 지배의 예표라고 할 것이다.
제목 : 성령신학 (서철원교수님 著)
과목 : 성령론
지도교수 : 김길성 교수님
총신대학 대학원 Th.M
조직 신학 전공
97116 이성은 강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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