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이야기

9. 칼빈의 예정의 논리

형람서원 2007. 2. 19.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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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칼빈의 예정의 논리 - 광신대 고광필 교수 강의안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여러 가지 우려와 비판이 칼빈 당시뿐만 아니라 그의 후계자들 가운데도 많은 논란이 되어 왔음을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읽을 수 있다. 카톨릭에서 장로교회로 개종했다가 칼빈과 예정론에 대해서 싸운 후 다시 카톨릭으로 개종한 Jerome Bolsec은 강력하게 칼빈의 예정론에 대해서 반대했다. 그 이유는 칼빈의 예정론은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들고 죄의 조성자로 만든다고 했다. 그러나 칼빈은 말하기를 볼섹이 진정한 의미에서는 예정론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반대한 것이기 때문에 신성모독이 된다고 했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는 더치 (Duchess)의 페라라 공작(Duke of Ferrar) 부인인 프랑스의 르네 (Renee of France)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변질시키는 자는 설령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더라도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F. Whitfield Barton, Calvin and the Duchess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89), p.42 이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칼빈의 자세를 시사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칼빈은 볼섹의 체포를 명령했다. 그러나 볼섹은 우리가 선택받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선택되었다고 하면서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제네바 시의회는 볼섹의 주장이 이단임에는 사실이지만 그의 처벌 규정에 관하여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기회를 포착한 방종파들은 다른 도시 개혁자들의 자문을 구하자고 제의해서 시의회는 그렇게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제네바시의 규정에 의하면 이단은 처형이 아니라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볼링거나 파렐은 심한 처벌을 요구했지만 베른주나 바젤 지도자들은 예수님은 진리를 사랑하고 자기를 배반한 사람도 사랑했다고 하면서 관용을 베풀기를 원했으며 아무튼 예정론은 인간을 고뇌케 만드는 교리라고 각주를 달아서 회신했다. 나중에 칼빈은 파렐과 볼링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볼섹은 처형되어야 하는데 영원한 추방은 만족스러운 처벌이 아니라고 했을 때 칼빈은 볼링거로부터 인정과 관용이 적다는 책망의 편지를 받고 칼빈과 볼링거 사이가 멀어지기도 했다. E. Whitfield Barton, Calvin and the Duchess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89), p.58.

칼빈은 자신의 무조건적인 예정론에 반대하여 조건적인 예정론을 말한 위트레트의 부감독인 알버투스 피기우스와 베네딕트 수도승인 게오르기우스의 견해를 반박하고 변증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에 관하여 (1552)” 논문을 쓰기도 했다. 칼빈의 예정론은 그가 살았을 때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칼빈의 후계자인 데오도르 베자의 전택설(타락전 예정론)에 반대한 알미니우스의 반대와 그를 따르는 자들에 의해서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심대한 논란이 있었다. 이들은 칼빈주의에 반대해서 다섯 가지 항목을 제안했다. 칼빈주의에 반대했기 때문에 항론파로 불려지게 되었다. 항론파가 제안한 다섯 가지 항목을 성경의 입장에서 변증하고 항론파의 오류를 고침으로써 구원 교리의 핵심을 잘 요약한 돌트 신조를 낳게 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정론은 칼빈이 만들어 낸 교리가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교리이다. 예정론은 칼빈이 말한 대로 성경적인 교리이며 이 교리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음으로 영접할 때 많은 이익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리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제일 먼저 예정 교리를 확립한 사람은 성 어거스틴이다. 독일 엘랑겐 대학(the University of Erlangen)의 뮬러(E.F. Karl Mueller)교수는 초기 장로교회에서 예정 교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기 때문에 교회가 구원의 확실성을 준다는 주장에 반대했으며 모든 종교 개혁자들의 중요한 교리라고 설파했다. E.F. Karl Mueller, “Predestination” in the New Schaff-Herzog Encyclopedia of Religious Knowledge, Vol. IX, p. 196. 그래서 장로교인은 예정론자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J.H. Babington, the Reformation, p.84. 삼대 칼빈 신학자의 한 사람으로 불린 벤자민 워필드도 말하기를 종교개혁이란 영적인 관심에서 비롯한 종교 부흥이요, 신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어거스틴주의 부흥(a great revival of Augustinianism)이라고 했으며, 예정론은 칼빈이 창설한 교리가 아니며 칼빈주의가 필연적으로 도출한 논리적 귀결로써, 성 어거스틴, 루터 부처로부터 영향을 받은 교리라고 했다. 벤자민 B.워필드, 「구원의 계획」, 모수환 옮김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1), 121. 루이스 벌코프(L. Berkhof), 헤르만 바빙크(H. Bavink), 헌터(A.M. Hunter) 등도 예정론은 종교 개혁자들 모두가 중요시한 교리이며 장로교회의 중요한 교리의 하나라고 했다. L. Berkhof, The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 p.153. H. Bavink, The Doctrine of God, p.353. A. M. Hunter, The Teaching of Calvin, p.96.

오늘날에는 많은 신학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서 신학의 홍수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신학을 시대의 산물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 시대의 이슈를 성경을 통해서 변증하고 험증 하는 것도 신학의 임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 시대 그 시대마다 상황이 다르고 이슈가 다르기 때문에 신학의 강조점이 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이란 단순히 시대의 산물은 아니다. 성경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그 시대를 진단하고 말씀에 기초하여 바로잡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삶을 살도록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오늘의 시대를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성경의 눈으로 이 시대를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2000년대를 준비하고 바라보면서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재를 양성하고 새로운 기술과 이론을 개발해야 한다고 한다. 선지자적인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과학적인 사고와 논리를 신학에 직접적으로 접목시킬 수 있는가? 신학을 과학의 논리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과학을 지배하는 논리와 신학을 지배하는 논리는 두 개의 다른 논리이기 때문이다.

신학적인 면에서 2000년대를 준비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신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가 성직자들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한다. 사실이다.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하고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많이 안다고 하는 것이 깊이 이해한다는 말일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논리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좀더 깊은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하는 것과 깊이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두 개의 다른 논리라고 생각되어진다. 오늘날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시대에서 중요한 것은 한 가지를 알아도 분명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생각되어진다. 혼탁하고 개방된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단순하게 그리고 명료하게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가 구원의 메시지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원을 확신하며 감격과 환희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가를 명료하게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진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 존재의 절대성을 가질 수 있는가? 우리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사는 것인가? 우리 신앙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이 세상을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가?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를 끝까지 인도하시는가?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부르심을 확신할 수 있는가? 등등의 문제가 예정론에서 다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예정론은 구원의 근본 문제를 다루며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룬다고 말할 수 있다. 21세기에도 이런 근본적인 문제들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예정론은 성경에 계시된 교리이기 때문이다. 21세기를 향하여 사는 우리들에게 우리 믿음의 선배요 종교개혁을 완성한 칼빈의 예정론을 살핌으로써 오늘의 교회와 자신의 신앙 뿌리를 새롭게 재조명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의 교회와 신앙생활은 종교개혁의 중요한 유산인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도 오늘도 내일도 우리의 신앙의 뿌리는 성경에 있어야 하며 그렇게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래서 우리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올바르게 가르치려면 우리 신앙의 뿌리를 늘 새롭게 봐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전도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해 아래 새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는 볼 수 있는 것이다. 새롭게 보려면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요 성령의 역사이다. 새롭게 하는 역사의 뿌리는 예정론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칼빈의 예정론을 그의 생애와 작품 속에서 살펴봄으로써 우리 신앙의 뿌리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예정의 논리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I. 예정론의 역사


성 어거스틴을 제외한 초대 교부들은 예정론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았다고 한다. 초대 교회는 하나님과 세계, 영과 육, 영혼과 육체, 빛과 어둠, 악과 선, 죽음과 생명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이원론적인 사고에 기초하며 타락한 신에 의해서 이 세계는 창조되었기 때문에 물질계는 근본적으로 악하며 그로 인한 인간 자유를 부인하고 모든 것을 맹목적인 운명에 맡기는 영지주의를 반박하면서 초대 교부들은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는 약화된 것이지 말살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했다고 한다. 최초의 조직 신학자로 불려진 오리겐도 하나님은 예지에 의해서 예정했다고 함으로써 조건적인 선택을 강조하게 되었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 학파나 안디옥 학파간의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적으로 중생이란 성령과 인간 의지의 협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봤다고 한다. 여기서 의지의 협력설은 아주 적을지라도 여하간 인간이 중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신인협동설(synergism)이라고 한다. Harry Buis, Historic Protestantism and Predestination,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58), p.8.

어거스틴도 초기에는 무조건적인 예정론이 아니라 조건적인 예정론을 가르쳤으나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그의 분명하고 성경적인 예정론을 확립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는 말하기를 믿고 의지하는 것은 인간에게 속해 있으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부어진 사랑을 통해서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에게 믿음과 의지를 준다고 했으며 하나님은 인간이 믿을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에 예정하셨다고 했다. St. Augustine, Expositio Quarumdam Propositionum ex Epistola ad Romanos, 61 & 55. 이와 같은 사상은 다분히 초대 교부들의 사상과 비슷하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 있어서 믿음은 선택의 결과이며 예정은 예지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 예정이며 이중 예정론을 강조했다. 죄를 다분히 환경의 탓으로 돌리며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가르쳤던 펠라기우스에 반대해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가르쳤으며 아담의 타락에 의한 의지의 왜곡을 가르쳤다.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반대해서 반펠라기우스파가 생기게 되었으며 이들은 어거스틴의 무조건 예정과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거부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아니고서는 왜곡된 의지는 회복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지는 회복되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부어진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행할 수 있다고 했다. “주여 이제 명령하소서”라고 했다. 칼빈 자신이 고백한 대로 자신의 예정론은 어거스틴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은 마틴 루터도 그의 유명한 에라스무스와의 자유의지 논쟁에서 인간의 의지란 은혜 없이는 자유 하지 못한다는 노예 의지(bondage of will)를 천명함으로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을 역설했다.

루터에 의하면 가롯 유다의 배반의 경우에 있어서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강제가 아니며 사탄의 노예(slave of satan)가 되어서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다. 그래서 배반은 유다의 책임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유다를 회개시키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루터는 말하기를 그것은 하나님의 숨은 뜻이라고 했다. 그러면 하나님은 모순된 뜻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에 대해서 루터는 그것은 하나님께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우리 인간의 왜곡된 논리로 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예정론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에 대한 인간 무지의 고백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된 기뻐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확신에 대한 고백이라고 했다.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된 뜻(복음 안에 계신 된 뜻)이요 다른 하나는 숨겨진 뜻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복음 안에 계시된 뜻 (the revealed or preached will of God)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자가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숨은 뜻 (the hidden will of God)이 있다.

어거스틴과 루터, 칼빈 이전의 모든 종교 개혁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무조건적인 예정을 가르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정 교리는 정통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교리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II. 칼빈의 생애와 예정론

칼빈의 생애를 회고해 볼 때 정말로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윌리암 파렐과 제네바에서 첫 만남도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라고 말했으며, 제네바에서 추방당한 후에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다시 눈물을 머금고 제네바로 돌아가게 된 것도 예정과 섭리 가운데서 봤다. 1541년 3월 1일 제네바의 James Bernard 목사에게 보낸 자신의 편지에서 자신이 스트라스버그를 떠나기를 주저하는 이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아유 하나가 하나님 앞에서 부르심에 대한 확신 문제였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양심상 나는 현재 맡겨진 사명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된다. 양심의 소리 때문에 스트라스부르그를 쉽게 떠나지 못하겠다. 양심은 타당하고 거룩한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증거이다. 나의 사역이 나에게 불행하고 불운한 것처럼 보였던 재난의 시간(칼빈이 제네바로부터 추방된 때) 이후 나는 주님께서 직접 나에게 분명한 음성으로 부르시지 않는 한, 즉, 주님께서 내가 도저히 거역할 수 없도록 어떤 필요를 제시해 주지 않는 한 내가 먼저 교회의 어떤 지위를 떠맡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존 칼빈, 「칼빈의 경건」, 이형기 옳김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89), pp. 204-205, 각주 25의 번역을 인용. Henry Beveridge and Jules Bonnet (eds), Selected Works of John Calvin tracts and Letters, Vol. 4. (Baker Book House, 1983), p.234, LXII. 칼빈에 있어서 부르심이란 우리의 선택의 확신을 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기독교 강요에서 말했다. 이점에서 본다면 칼빈이 제네바에서 추방되어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성직자에게 부르심이란 아주 중요한 것임을 일깨워 주며 부르심은 선택의 확신을 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도 언제나 하나님이 자신을 복음을 위해서 사도로 부르신 것을 분명히 했으며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받아 들였다.(롬 1:1)

칼빈은 그가 죽기 전 고별사와 유언에서도 “나의 전 구원이 근거해 있는 하나님의 자비스러운 예정 외에는 다른 소망이나 피난처를 내가 갖고 있지 않으므로,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믿음 안에서 살다가 죽는다는 것을 고백합니다.”라고 했다. The Reformation, Hans J. Hillerbrand (ed), (Baker Book House, 1987), p. 207. 이 고백을 통해서 볼 때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첫째, 칼빈은 자기의 전 생애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 있었음을 체험했음을 고백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와 은혜 가운데 잠자는 것처럼 죽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예정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근거해 있다. 셋째, 칼빈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믿음은 예정에 기초해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넷째,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굳게 믿어야 함을 배울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성경의 중요한 교리를 믿지도 않으면서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칼빈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사람은 아직 주님의 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나 생각되어진다. 칼빈 신학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는 그의 예리하고 명석한 논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 자신의 신앙 여정에서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깊이 체험하고 창세전에 모든 것의 미래를 예정하신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나온 신학(theology from the fear of God) 이라는 점이다.

칼빈의 예정론은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당시에 개혁 신앙을 고백한 믿음의 동역 자들과 성도들의 순교와 고난과도 관계가 있다. 그들은 고난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로 개종한 후부터는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내일의 소망이 없이 불안과 초조 가운데 살아야 했으며 그 중의 어떤 성도는 불안과 회의 가운데 있었던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도들에게 예정 신앙에 굳게 서서 구원을 확신하며 개혁 신앙대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할 뿐만 아니라 믿음의 선조들도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을 믿는 믿음 가운데 살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Joseph Haroutunian (ed), Calvin: Commentaries (The Westminster Press, ), p. 42.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믿는 신앙만이 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오늘의 세상에서 희망과 확신을 갖고 살 수 있음을 우리는 칼빈의 생애를 통해서 배울 수 있다.


III. 예정론의 위치

칼빈은 1536년에 강요 초판을 발행했으며 그 후 23년 동안 2번(1539년, 1543-50년)의 수정을 걸쳐 강요 최종판(1559)이 나왔다. 초판 기독교 강요에서부터 최종판이 나오기 전까지는 예정과 선택을 같이 다루고 있지만 최종판에서는 섭리는 신론에서 다루며 예정론은 구원론에서 분리시켜 다루고 있다. 강요 초판에서는 예정론을 사도 신경에 있는 교회론을 설명하는 데서 발견되어지며 그 외 강요 최종판 전까지는 예정과 섭리를 같이 다루고 있으며 구원론에서 다루고 있다. 논리적으로는 예정이 섭리의 앞에 있지만 인식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예정은 예수님의 구속을 통해서 보여 진다. 예수님이 우리의 예정을 보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경험론적으로 보더라도 예정과 섭리는 직접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지난 후에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강요 제 삼권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환언하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방법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내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고 변화 받게 한다. 이 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선택의 확신은 단순히 경험적인 것도 아니며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확신시켜 준다고 말할 수 있다. 칼빈은 상향식이 아닌 하향식으로 예정론을 다루고 있다. 이 사실이 그의 후계자인 베자와 다르다.


IV. 예정론 이해의 전제 조건

칼빈의 예정론을 다루면서 한편으로는 다루면서 선택을 유기보다 더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환언하면 칼빈 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을 다루기 위해서 유기가 필요한 것이지 유기를 위해서 선택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이요 유기는 하나님의 공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에베소서에 사도 바울은 선택을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이라고 했다(엡 1:3).

다른 한편으로는 칼빈의 예정론은 이론이나 사변이 아니라 성경의 교리라는 것이다. 칼빈은 위트레트(utrecht) 부감독인 알버투스 피기우스 (Albertus Pighius)와 베네딕트 수도원의 수도승인 게오르기우스(Georigius of Sicily)의 조건적 예정론에 대한 반박 논문인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에 관하여”에서 예정론의 교리의 창시자는 어거스틴도 아니요 자신도 아니며 성경이라고 했다. 칼빈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성경이 예정에 대해서 말하도록 하지 않았다면 예정론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존 칼빈, 「칼빈의 예정론」,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 편역, (기독교 문화 협회, 1988), pp.83 (각주 9), 86. 성경이 예정론의 창시자라는 말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자동차가 고장이 났을 때 정비소에 가서 고치게 된다. 그러나 정비소에서도 고치지 못할 때 그들이 하는 말이 “만든 데로 가지고 가시오”라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가 시사하는 것이 무엇인가? 결국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동차를 설계하고 만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정론의 창시자가 성경이라고 한다면 성경이 제시하는 대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깊이 이해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인간의 이성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 두는 겸손이 참 지혜이며 인간의 지혜를 규율하는 원리”라고 했다. 「칼빈의 예정론」, p.86. 그렇다. 하나님의 예정의 비밀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것은 설명이 아니라 말씀하신 그대로 받아 드리는 것이다. 깊이 이해한 사람에게는 설명이 먼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먼저 인 것이다. 신비는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이다. 어느 사형수가 고백했듯이 죽음을 극복하는 것은 죽음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죽는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고백한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예정론을 인간의 사변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피상적인 이해요, 번뇌케 하며, 양심에 고통을 당하게 하며, 신앙생활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영접하는 것이다. 이것이 깊은 이해이다. 이러한 이해는 성경에 나오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처럼 30배, 60배, 100배의 행복하고 환희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V. 예정론의 정의, 중요성 및 목적

1. 정의

칼빈은 예정론을 “영원한 선택: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선택에 의해 사람을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 하셨다”라고 정의했다. 어떤 사람은 구원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예정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칼빈의 이중 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 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예정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언어는 예지가 아니라 예정이라는 단어이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항상 현재로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인간 미래의 조건을 예견하시고 예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지라는 말은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는 ‘항상’ 있다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항상 현재로 이해하신다. 모든 것을 현재 우리가 기억하고 판단하고 이해하는 것처럼 이해하고 계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예지이다. (강요 3.21.5.)


2. 중요성

칼빈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예정론의 유익과 중요성, 목적을 아주 감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예정론은 그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 유익도 없이 마음을 권태롭게 하는 교묘한 사변이 아니다. 오히려 이 교리는 경건한 사람들의 필요에 아주 적합하고 확실한 교리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교리는 우리의 믿음을 건전하게 세워 주며, 우리로 하여금 겸손케 하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지극히 선하심에 대한 우리의 경외심을 고양시키며, 이 선하심을 찬양하도록 우리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의 믿음을 견고히 세우는데 있어서, 이 선택 교리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는 것만큼 더 적절한 것은 없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선의 (good will)에 기초하고 있고 세상의 모든 풍파와 사탄의 모든 공격, 그리고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취소되지 않을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선택을 우리의 심령 속에 확실히 증거 하여 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택의 이유를 하나님의 품안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참으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에게 보장되어진 것이다.”「칼빈의 예정론」, pp.77-78.

칼빈에 의하면, 첫째, 예정론은 우리 마음을 고뇌케 하는 사변이 아니다. 둘째, 예정론은 경건한 사람에게 필요한 교리이다. 셋째, 예정론은 우리의 믿음을 건전하게 세워 준다. 넷째, 신자로 하여금 겸손케 해준다. 다섯째, 선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해준다. 여섯째, 구원의 절대적 확실성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도 예정론은 우리 인간의 구원의 역사가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는 자비의 원천에서 흘러나옴을 말해 준다고 했다. 하나님은 무차별적으로 구원의 소망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을 어떤 사람에게는 유기의 대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의 은혜를 알게 하시기 때문이다.「영한 기독교 강요」 (1559) (성문, 1993), 3. 21. 1.


3. 목적

첫째,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찬양하게 해준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는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라고 예정의 목적을 기술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성화된 삶을 의미한다. 칼빈에게서 성화된 삶이란 하나님의 영광에 종속된 삶이다. 따라서 예정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선택된 자는 아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매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선택된 자의 삶인 것이다. John Calvin, Commentaries, Vol.XXI (Grand Rapids, Michigan: Baker Book

House,1989), pp.198-99. Cited as CM.


VI. 선택과 유기의 근거

1. 선택의 이유와 근거

세상에 보면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고 살며 어떤 사람은 아무리 전도해도 받아들이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죽어 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렇게 될 것을 예견하시고 그렇게 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왜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유기에 처하시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은 많은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요 사랑이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신 10:14, 15, cf.4:37, 7:7-8, 23:5)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심은 그들을 기뻐하시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선택의 이유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잘나서 또한 앞으로 좋은 신자들이 될 것을 예견하시고 택한 것은 아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이요 사랑이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창세 전(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에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선택 (εξελεξατο)하셨다. εξελεξατο는 εκλεγω(선택하다)의 부정 과거 시제(aor. mid. ind.)로서 영원의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이 선택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엡 1:4) 또한 이 선택이라는 언어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선택에는 유기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에베소서 1:5절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προορισας ημας εις υιοθεσιαν δια Ιησου Χριστου εις αυτον,) 여기서 “προορισας”는 προοριζω의 부정 과거 시제 (aor.act. part)로써 하나님이 영원의 어느 시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실 것을 예정하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칼빈은 에베소서(1:4-6) 주석에서 예정은 첫째,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선택의 주체이지 인간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인간은 전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을 말해 주고 있다고 했다. “너희가 나를 택한(εξελεξασθε)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εξελεξαμην) 세웠나니”(요 15:16) 둘째, 선택은 하나님의 자유스러운 결정이요 예수 안에서 하신 것이라고 했다. 선택은 누구의 압력을 받아서 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εν Χριστω)와 “그리스도를 통하여”(δια Χριστου) 라는 말은 아주 중요하다. 택자의 선택의 근거가 우리가 아닌 그리스도다. 그래서 선택의 확신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며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영원히 숨겨져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선택을 볼 수 있는 “거울”이며 “약속”이다.「칼빈의 예정론」, 180.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은 창세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선택과 유기를 결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선택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지 우리의 공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셋째, 선택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κατα την ευδοκιαν του θεληματος αυτου)에 기인한다. 선택은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있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선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혜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다. 신앙의 최고의 표현은 찬양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주님의 자비스러운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예정에 있어서 하나님을 formal cause, 예수님을 material cause,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을 efficient cause, 하나님의 은혜의 찬양을 final cause 라고 했다. Calvin: Commentaries, Joseph Haroutunian (ed), pp.305-306.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셨다. 여기서 창세전이라는 말은 우리가 선택된 것은 시간적으로 보면 우리가 태어나기 전이다. 그래서 선택의 근거가 절대적으로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이다. 여기서 기뻐하신 뜻이란 하나님이 당신의 원하시는 대로 역사 하시는 뜻을 의미한다. 창세전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요약하면 하나님은 그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자를 때가 차매 부모를 통해서 이 땅에 보내시고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택자를 부르셔서 중생 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삶을 살도록 당신의 섭리로 보호하시고 양육하시다가 때가 되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가게 하실 것이다. 이 얼마나 놀랍고 자비스러운 하나님의 계획이며 은혜가 아닌가! Joseph Haroutunian, Calvin: Commentaries, pp.305-306. 시간적으로 본다면 칼빈에게 있어서 선택은 창세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은혜로운 뜻이며 시간 속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보여 진다. 전자는 선택의 이유요 후자는 근거가 된다.


2. 유기의 근거

선택이라는 언어 속에 유기라는 말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선택과 마찬가지로 유기도 하나님이 창세전에 정하신 것이다. 첫째, 하나님이 창세전에 선택과 유기를 예정하셨기 때문에 유기의 일차적인 원인은 죄가 아니다. 죄는 이차적인 원인이다. 칼빈에 의하면 전자는 遠因이며 후자는 近因이라고 한다. 환언하면 하나님은 영원한 예정에 따라 이미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개인과 모든 인간의 운명을 정하신 것이다. 아담은 그 자신의 죄로 유기 된 것이다.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타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은혜로 선택하신다. 칼빈주의자들 중에 하나님의 계획 순서에 대해서 두 견해가 있다. 하나님이 선택과 유기를 결정했을 때 인간은 타락될 자로 간주되었는가 타락되지 않을 자로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환언하면 하나님이 선택과 유기의 대상을 하나님이 타락할 자로 봤는가 아니면 단순히 창조한 사람으로 봤는가의 문제이다. 타락전 선택설에 따르면 1) 창조될 자들 가운데서 어떤 자들은 영생하도록 선택하고 어떤 자들은 멸망하도록 정한다. 2) 창조한다. 3) 인간의 타락을 허락한다. 4) 택자를 구속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낸다. 5) 이 구속을 효력 있게 하기 위하여 성령을 보낸다. 타락 후 선택설은 1) 하나님은 창조하고 2) 타락을 허용하고 3) 타락한 사람 가운데 어떤 자들에게는 영생을 어떤 자들에게는 유기에 내버려두시고 4) 택자를 구속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고 5) 그리스도에 의해서 획득된 구속의 적용을 위해서 성령을 보낸다.(칼빈주의 예정론, 로레인 뵈트너, p.151) 타락 전 선택 설은 “차별”에 강조를 두며 이 관념을 전 과정에 관련시킨다. 차별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유기와 선택에 모순이 생긴다. 왜냐하면 창조하기로 결정된 대상은 인류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이며 똑같은 본성의 소유자이며 타락될 인류도 부분이 아니라 전체였기 때문이다. 벤자민 워필드도 말하기를 “이 문제의 제출이 그 해답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문제가 되어 있는 인간의 실제적 처리는 택함 받은 자들이나 버림받은 자들을 막론하고 둘 다 죄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를 가정하지 않고서는 구원이나 유기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죄는 필연적으로 문제가 되어 있는 차별의 구체적 사실 구원이나 형벌 그 어느 것이든지 다 포함한 운명에 관한 차별에 선행하는 것이지 차별의 추상적 관념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제정하는 근거에서와 마찬가지로 죄가 예기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리적인 순서로 봐서 죄인으로서의 인간을 생각지 않고는 구원과 형벌에 관한 차별 제정에 대해 논의할 수 없는 것이다.”(the plan of salvation, p.28.) 둘째, 유기의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지을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것을 예지 하셨지만 그것이 유기의 근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유기의 원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선택과 유기를 결정하신 것이다. 로마서(9:13)에서 사도 바울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에서와 야곱의 쌍둥이 중에서 하나님은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한다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언이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케 하시느니라”(롬 9:18). 하나님의 선택에도 선하신 뜻이 있으며 유기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

선택 자나 유기 자나 다 같이 유혹과 악을 행할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 자에게 고난은 다른 차원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 택자에게 환난과 고난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택자를 훈련시키는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택자의 구원을 보호하시는 것이다. Joseph Haroutuian, Calvin: Commentaries, p.307. 유기 자에게 고난과 환난은 그들의 잘못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환난이나 고난을 통해서 당신의 공의를 보여주신다. 따라서 유기에 있어서 원인(遠因)은 하나님의 예정이나, 근인(近因)은 유기 자의 죄이기 때문에 유기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판단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기된 자의 깊은 원인은 우리에게는 숨겨진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칼빈은 로마서 주석에서 말했다. John Calvin, Calvin's Commentaries, Vol. 19, (Baker Book House, 1989), p. 417.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하나님께서 어떤 자는 구원에, 어떤 자는 멸망에 예정하셨다면 어떻게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우리 인간의 죄를 판단하실 수 있는가라고 누가 묻는다면 칼빈은 성경에 있는 대로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라고 말했다.(롬 9: 20)


VII. 선택의 확신

칼빈에 의하면 선택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확증되지만 유기된 자는 그들에게 예정된 공정한 멸망을 초래하게 된다고 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전적으로 은혜의 사역이다. 여기서 전적인 은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보여주는 은혜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숨겨진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볼 수 밖에 없다. 존 녹스가 1527년에 죽음의 침대에서 그 아내가 읽어 주었던 설교가 칼빈의 에베소서 설교라고 한다. 칼빈의 에베소서 설교는 확신에 차고 감격과 환희에 넘치는 설교이다. 하나님의 창세전의 비밀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늘 하나님께서 복음을 위하여 사도로 부르심에 대하여 늘 감사했다(롬 1:1).

우리는 누가 선택을 받고 누가 유기를 받았는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에베소서 설교에서 우리의 선택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칼빈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우리 이름을 기록하는 서기(registra)이며, 하나님이 당신의 선택을 우리에게 보이시는 “거울”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과 유기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볼 수 밖에 없다. 환언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선택을 복사할 수 있다고 했다. John Calvin, Sermons on the Epistle to the Ephesians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3), p.33, 47. 여기서 믿음은 선택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다. 칼빈의 예정론을 반대한 볼섹이나 피기우스 게오르기우스처럼 믿음의 결과로 선택된 것은 아니다.

칼빈이 에베소서 설교에서 사용한 선택의 확신에 관한 세 가지 메타포를 통해서 우리는 선택의 확신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이 생명책에 택자의 이름을 기록하는 서기라고 하는 것은 선택의 확실성을 말해 주며, 거울이라는 메타포는 우리의 선택을 보는 인식론적인 방법을 말해 주는 메타포요, 믿음의 복사는 선택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경험적인 방법을 말해 준다고 생각할 수 있다.


VIII. 칼빈 이후의 예정론

칼빈의 후계자요 제자인 데오도르 베자는 그의 저서 「신학 대전」(summa toitus christianismi)에서 예정론을 중심으로 기독교 교리를 재구성 했다. 칼빈은 예정을 하향식으로써 창조에서 시작하여 타락 예정으로 나아가지만 베자는 상향식으로 예정에서 시작해서 창조-」 타락-」 구속-」 성화로 나아간다. Wilhelm H. Neuser (ed), Calvinus Sacrae Scripturae Professor Calvin as confessor of Holy Scripture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4), p. 39.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베자의 신학은 예정론을 중심으로 한 신학 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베자 밑에서 배우고 그의 제자인 알미니우스가 베자의 전택설(타락전 예정)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 나중에 항론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항론파의 예정론은 무조건적인 선택이 아니라 조건적인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구원도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신인 협동적인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돌트 신조에서 항론파의 다섯 가지 반대를 성경에 입각하여 무조건적인 선택을 재 천명했으며 칼빈주의 구원의 교리를 잘 요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구원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재 천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임스 페커(J.I. Packer)는 돌트 신조는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신다” (God saves sinners)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고 했다. James Owen, 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 ( Biling and Sons LTD., 1963), p.6. 돌트 신조나 웨스트민스터 신조에서 타락 전 예정설과 타락 후 예정설을 다 수용했지만 타락 후 예정론 입장에 예정론을 기술하고 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James Owen는 돌트 회의시 우세했던 견해는 온건한 타락 후 예정설이었다고 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는 이미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제기된 것이라고 한다. 커닝함은 전 예정설은 “비교적 소수의 칼빈주의자 신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어 왔다”고 말하고 있다. The Reformers..., p.359. 그러나 페어번은 그 이름들을 상세히 거론치 않은 채 말하기를, “개혁주의 신학자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들은 타락 전 예정설을 옹호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0p.cit. p.168.(이 각주의 인용은 알란 셀의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와 구원, 김경진역, 생명의 말씀사, 1989, p.21 각주 18에서 인용했음) 돌트 신조에서 “선택이라는 것은, 이 세계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이 그들의 최초의 상태로부터 타락하여 죄와 파멸의 결과를 낳게 됨에 따라 그리스도, 즉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중보자로 또한 택한 자의 머리와 구원의 기초로써 세우신 그 분 안에서 구원받은 자의 일정한 수를 뽑으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선하신 주권에 따라 은혜로 인하여 된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목적이 되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이 그 본성에 있어서는 그 밖의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낫거나 더 값어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똑같은 비참한 속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주셔서 그를 통하여 택함 받은 자들이 구원 얻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고 죄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말씀과 성령으로 그 분과 교통하도록 하시고 그들에게 참 믿음을 주시어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 또한 그 아들과의 교제를 통해 능력 있게 그들을 보존해 주시면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신 자비로우심에 영광을 돌리고 그의 풍성한 은혜를 찬양케 하신다.” 「개혁주의 신앙고백집」, 김의환목사 편저 (생명의 말씀사,1984),제7장 p.264.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서는 “1.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가장 지혜로우시며, 가장 거룩한 자기 뜻에 따라 되어갈 일을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또는 변할 수 없게 정하셨다. 그러나 그것에 의하여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로 되지도 않으시고 인간의 의지를 억제하심도 없으며, 제이 원인들의 자유나 우연성이 제거되지도 않고 도리어 확립되게 하셨다. 2. 하나님은 장차 일어날 듯한 혹은 일어날 일을 무엇이든지 아시지만 장래 일로, 혹은 일어날 것으로 선견 하신 때문에 작정하신 것이 아니다. 3.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의 작정으로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생을 얻도록 예정하시고 다른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죽음에 이르도록 선정하셨다... 5. 인류 중에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된 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이 기초가 놓이기 전에 그의 영원하고 변함없는 목적과 그 마음의 은밀한 계획과 기뻐하심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셔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하셨다. 이렇게 결정하실 때 자유로운 은혜와 사랑 안에 하신 것이요, 어떤 선견된 신앙이나 선행, 오래 참는 일, 피조물 안에 있는 어떤 조건, 혹은 하나님을 그렇게 하도록 움직이는 원인 때문에 하신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송하게 하려 하신 것이다. 6.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신 것처럼 그의 뜻의 영원하며 지극히 자유로운 목적을 따라 그들로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어야 할 모든 방편들을 먼저 정하셨다. 그러므로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으나,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을 받았고 때가 되어 역사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도록 유효적으로 부름을 받고 의롭다 청함을 얻고 양자됨을 얻고 성화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그의 권능으로 보호를 받는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자 외에는 다른 아무도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을 받지 못하고 유효적으로 부름을 받지 못하고 칭의, 양자, 성화, 구원을 받지 못한다.” 「개혁 주의 신앙고백집」, 김의환 목사 편저, 제 3장, pp.23-24. 찰스 하지도 말하기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타락 후 예정론을 주장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그 경애할 만한 단체(웨스트민스터회의)의 회장 튀쓰(Twiss)씨는 대단한 타락전 선택론자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회원은 타락 후 선택론자들이었다. 그 회의의 신조는 분명히 타락 후 선택설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가급적이면 타락 전 선택론을 취하는 사람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도록 작성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보면 (하나님은 택한 자들을 영생으로 정하시고 남은 자들은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그의 주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긍휼을 신장 혹은 억제하시는 오묘하신 뜻에 따라 간과하시며, 그의 영화로운 공의를 찬송케 하기 위해 그들의 죄값으로 치욕을 받도록 내버려두기로 정하셨다고 했다.”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Vol. II., p. 317.) 헤르만 바빙크에 의하면 세 사람의 개혁자 루터, 쯔빙글리, 칼빈은 타락 전 선택설을 주장한다. 선택과 유기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의 행위이고, 논리적으로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에 앞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종종 타락 후 선택론적 추론을 따랐다고 말했다. 또한 바빙크에 의하면 타락 전 예정론은 예정-원죄-자범죄의 순서이고 타락 후 예정론은 원죄-예정-자범죄의 순서이다.(헤르만 바빙크, 개혁주의 신론, 이승구 역,기독교 문서 선교회,1989, pp.518-526) 소요리문답 19번과 20번에도 후택설 입장으로 전개한다. “모든 인류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또 그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게 되어 생전의 모든 비참함과 죽음과 영원한 지옥의 벌을 받게 되었다(19번). 하나님께서는 다만 자기의 선하신 뜻대로 영원 전부터 어떤 자들을 영생하도록 선택하시고, 은혜의 언약을 세워 구속자로 말미암아 그들을 죄와 비참한 처지에서 건져내어 구원의 자리에 이르도록 하셨다(20번).”「개혁주의 신앙고백집」, 김의환 목사 편역, p.149, 문답 19-20번.

신 정통파로 알려진 칼 바르트가 예정론을 그의 교의학의 중요한 뼈대로 삼으면서 신중심의 예정론이 아닌 극단적인 기독론 중심 (exclusive Christ monism)의 예정론을 기술함으로써 종교 개혁자들의 이중 예정론을 부인했으며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했으며 보편 구원론으로 가게 했다고 한다. Harry Buis, Historic Protestantism and Predestination, pp.99-104.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님은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요 동시에 선택된 인간이다. 그래서 예정의 확신을 갖게 한다.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요 선택받은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영원 전에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의 죄를 위해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실 것이 예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 당하신 예수님은 동시에 창세 전에 인간과 교제하시고 구원하기 위해서 예정하신 하나님이다. 이것이 바르트의 이중 예정이다. 따라서 바르트는 종교 개혁자들의 이중 예정을 부인하며 보편 구원으로 가는 논리의 가능성을 열어 놓게 된 것이다. 이점에서 본다면 바르트의 예정론은 성경적인 것 같으면서도 비성경적이며 합리적 사고가 짙은 예정론이라고 할 수 있다.( David L. Mueller, Karl Barth, Word Books, Publisher, 1976, pp.96-107)


VI. 신학적 적합성

예정론이 칼빈의 핵심적인 교리가 아님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해서 지엽적인 교리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정론은 성경이 가르친 실제적인 교리로서 성 어거스틴에서 시작하여 종교 개혁자뿐만 아니라 신 정통주의에서도 중요한 교리이다. 그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구원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가장 깊이 말해 주며 구원의 절대적 확신을 보여주는 교리가 예정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둘째, 예정론은 신자의 선행과 경건의 뿌리라고 칼빈은 말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정체성 (Christian identity)을 갖게 하는 뿌리가 예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 기독교가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신자의 정체성의 문제이다. 미국에 이민 간 자녀들의 커다란 문제가 정체성의 문제라고 한다. 미국 사람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한국 사람도 아니라는 정체성의 위기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 시키는 것처럼 신자는 신자다운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사상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예정론에 기초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여기에 개인 개인의 과거·현재·미래의 존재의 확실성과 소망을 주는 확신이 있다고 생각되어 진다.

셋째, 인류 역사는 인간의 의지나 결단에 의해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 인간을 통해서 펼쳐지는 것이 인류의 역사이다. 우리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장중에 있으며 그분의 선하신 뜻과 섭리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이 세상에서 탄탄대로를 걸어갈 수 있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많은 사가들이 역사의 주체를 민중, 인간 의지에 두고 있다. 이런 사관의 견해가 다 틀린 것은 아닐지라도 인간 중심의 사관이다. 인류역사는 도전과 응전이나, 자연의 순리에, 무산자와 유산자의 계급투쟁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서 움직인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하나님은 선택자를 통해서 역사를 움직여 나가고 계신다는 예정과 섭리에 기초한 역사관을 확립하며 살아가는 것이 칼빈주의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확신과 소망 가운데서 완수해 나갈 수 있다.


VII. 정리

칼빈의 예정론은 그가 고백한대로 사변으로써 이해되어지는 교리가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해되어져야 할 교리이다. 성경이 이 교리의 창시자이기 때문이다.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의지에 기인한 것이다. 이 의지는 폭군의 의지가 아니라 은혜롭고 공의로운 하나님의 의지이다.

선택과 유기는 인간의 공로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믿음으로 그것을 복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 자에겐 우연은 없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예정과 선하신 섭리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때가 차매 부모를 통해서 이 땅에 오게 하시며, 지금까지 당신의 능력으로 양육하시고 보호하시며 선하신 섭리 가운데 인도하시며, 앞으로도 하나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당신의 능력으로 보호하시고 양육하시고 섭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살 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생명을 바쳐서 감당하는 것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을 돌리는 생활일 것이다. 이것이 칼빈이 성경을 통해서 발견한 예정의 논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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