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권 성경 이야기

정경과 외경

형람서원 2006. 6. 19.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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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과 외경

 

인류의 역사전체를 통틀어 성경만큼 틀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책은 없었습니다.

세계 3대 유일신 종교(monotheism)인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모두 구약성경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고, 가장 많은 부수의 책이 출판 반포 되었습니다.

과거 2천년동안 성경만큼 집중적으로 연구되고, 독서와 명상의 대상이 되어온 책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을수가 없습니다.

 

성경책의 이름에 대해서 살펴보면, 구약은 본래 히브리어로 "하 세파림"(Ha Sefarim)이라고 불이었습니다.

이 뜻은 단순히 "그책들"(The Book)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이 본래 쓰였던 히브리어(Hebrew)에서 희랍어(Greek)로 번역될때, 책의 명칭도 "ta biblia" (the book)로 번역되었고, 이 이름은 라틴어(Latin)를 거쳐 영어의 "Bible"이 되었습니다.

 

구약이라는 말은 신약과 대칭되는 말입니다.

 

"구약"이라는 이름 자체는 이미 "신약"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반대로 "구약"이 없이는 "신약"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구약과 신약이라는 말은 구약의 예언자 예례미야의 말씀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보란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집에 새 언약(new convenant)를 세우리라"

[예레미야31:31]

여기서 예례미야는 "새 언약"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새 언약"이란 곧 "신약"이라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신약이라는 명칭이 생겨났고, 이에 대비하여 구약이라는 말도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약"이라는 말은 언약 또는 계약이라는 말로 히브리어의 브리트(berith)라는 말의 번역입니다.

 

이 말은 본래 "계약"(covenant)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희랍어로 번역될때 diatheke라고 번역되었고, 다시 라틴어의 Testamentum을 거쳐 영어의 Testament가 되었습니다.

구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맺으신 옛 언약 / 계약 (Old Covenant / Testment) 이요, 신약은 "새 이스라엘"과 맺으신 새 언약 / 계약 (New Covenant / Testment )입니다.

 

2.정경과 외경

 

구약은 신약과 함께 성경이라고 불립니다.

이 구약과 신약 성경책은 기독교의 정경입니다.

정경이라는 말은 영어로 Can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의 카네(qaneh)에서 나온말입니다.

"카네"란 곧은 막대기, 곧은 갈대(stick, rod, reed)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희랍어로 건너와서 Kanon이 되었고, 그 말의 뜻도 단순한 막대기라는 말에서 무엇을 재고 측량하는지, 기준 표준의 뜻으로 그 의미가 변화하였습니다.

이 말을 주후 4세기경 기독교 신학에 들어와서는 정경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한 신앙공동체에 있어서 정경(Canon)은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최고의 규범이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책입니다.

그러면 구약을 구성하고 있는 39권의 책들은 언제부터 정경이 되었습니까?

구약 책들중에서 "5경"(Pentateuch, 창세기로부터 신명기까지)은 가장 먼저 그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고, (에스라시대, 주전450년경) 다음은 에언서가 정경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주전 2세기경)

마지막으로 5경과 예언서들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성문서)은주후 90년경, 팔레스틴의 얌니야(Jamnia)에서 유대인 학자들에 의해 최종적으로 그 범위가 확정되었습니다.

 

<얌니야는 팔레스틴 지중해 연안지역에 있던 도시로 Jabneh, Javneh, Jabneel 등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얌니야 회의"에서는 히브리어로 쓰여진 책 이외에 희랍어로 쓰여진 종교 문헌들은 정경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은 "얌니야회의"에서 정경의 범위 (39권의책)가 확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Hebrew Old Testament)를 일명 "팔레스틴 정경(Palestinian Canon)"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외경(Apocrypha)이란 무엇입니까?

외경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소위 "70인역"(희랍어 번역 구약성경)을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전 333년 알렌산더 대왕이 페르샤 제국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둠으로써 고대 근동 지역은 희랍세계로 전환되었습니다.

 

따라서 이후로는 희랍어(Greek)가 고대 근동세계에의 통용어가 되었고,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모국어인 히브리어(Hebrew)를 점차 잊게 되었고, 희랍어를 상용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후로는 히브리어로 된 구약의 책들을 희랍어로 번역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구약 번역작업은 주전 3세기 중엽, 당시 희랍 문명의 중심지 중의 하나였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 이루어졌습니다.이렇게 희랍어로 번역된 구약을 "70인역"(Septuagint)라고 부릅니다

 

<"70인역"은 처음에는 5경 부분만 번역되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할때는 희랍어 번역 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70인역"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이름은 이것을 번여할때 이스라엘의 12지파에서 각각 6인씩 선출되어 모두 72인(어림순자로70)이 번역 했다고 해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70인이 각각 독방에서 70일만에 번역을 완성하였고, 이를 대조해보니 모든 번역이 완전히 일채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승은 "70인역"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편 희랍시대에 있어서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구약 이외에 많은 종교적 문헌들이 양산되었고, 또 애독되었습니다.

 

이 당시에 출현한 많은 종교적 저작들 중에서 "15권"의 책들은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또한 본래의 구약 책들과 동등한 권의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70인역"이 완성되었을때, 이 15권의 책들도 이에 첨가되어 전체가 구약성경으로 읽혀지게 되었습니다.

 

즉 희랍어로 된 구약성경 (Greek Old Testament)은 "70인역" 번역부분에 15권의 책을 첨부하여 (70인역+15권)이 모두를 찹쳐서 "구약성경"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15권이 포함된 희랍어 구약성경을 "알렉산드리아 정경"(Alexandria Canon)이라고 부릅니다.

 

"얌니야 회의"에서 결정한 것은 결국 이들 15권의 책들은 정경으로써 자격이 없다는 것을 천명하고 이들을 정경에서 제외시킨것입니다.

 

따라서 Palestinan Canon의 입장에서는 이 15권의 책들은 정경 밖의 책, 즉 외경이 됩니다.

 

"얌니야 회의"이후부터 구약 성경의 정경(Canon)은 두가지 전승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즉, 본래 히브리어로 쓰여진 성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15권을 제외시키는 Palestinan Canon과 15권의 책을 포함시키는 희랍어 구약 전승, 즉 Alexandrian Canon입니다.

 

15권의 책 이름은 아래와 같습니다.

 

토비트 (Tobit = Tobias)

유디트 (Judith)

솔로몬의지혜 (Wisdom of Solomon)

바룩 (Baruch)

예레미야의 편지 (The Letter of Jeremiah)

마카비서 상 (1 Maccabees)

마카비서 하 (2 Maccabees)

수산나 (Susanna)

세 청년의 노래 (The Song of Three Young Men)

벨과 용(뱀) (Bel and Dragon)

에스더 속편 (Additition to Esther)

벤시락 또는 집회서 (Ben Sirach, Ecclesiasticus)

에스드라스 상 ( 1 Esdras)

에스드라스 하 ( 2 Esdras)

므낫세의 기도 (The Prayer of Manasseh)

 

위에서 언급한 "얌니야회의"에서 결정한 것은 결국 이들 15권의 책들은 정경으로써 자격이 없다는 것을 천명하고, 이들을 정경에서 제외시킨것이었습니다.

따라서 Palestinan Canon의 입장에서는 이 15권의 책들은 정경 밖의 책, 즉 외경이 됩니다.

 

"얌니야회의"이후부터 구약성경의 정경(Canon)은 두가지 전승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즉, 본래 히브리어로 쓰여진 성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15권을 제외시키는 Palestinian Canon과 15권의 책을 포함시키는 희랍어 구약전승, 즉 Alexandrian Canon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된 기독교회에서는 희랍어로 된 구약성경을 읽었습니다

당시 희랍어가 당시의 공용어였기 때문입니다.

즉, 기독교회는 구약 정경에 있어서 Alexandrian Canon 전통을 채택한 것이고, 이것은 로마 카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에서 계속되어 유지되어 내려왔습니다.

즉 로마 카톨릭교회는 Alexandrian Canon 전승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구약의 전경의 전승

 

Palestinian Canon 1>언어:히브리어(Hebrew) 2>15권의 책은 외경으로 정경에서 제외됨 3>유대인들과 개신교 교회(Protestant)의 정경전승 [개신교]

 

Alexandrian Canon 1>언어:히랍어(Greek) 2>15권의 책도 정경에 포함된다 3>초대교회, 로마 카톨릭교회 정경전승[카톨릭]

 

이러한 기독교의 정경 전승은 마틴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에 의해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루터나 칼빈은 정경문제에 관해서 Palestinian Canon의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5권의 책을 외경으로써 제외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Protestant에서는 외경을 제외한 39권의 책만을 구약의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마틴루터와 동시대의 종교개혁가 칼빈(John Calvin)도 정경문제에 관해서 같은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루터는 15권의 책을 외경으로 정경에서 제외시켰습니다.>

 

한편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트렌트 종교회의 (Trent Council 1545-1563)가 소집되었고, 여기서 정경문제에 관해서는 종래의 Alexandrian Canon의 기본입장을 재확인 하였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사항은 카톨릭은 15권의 책 가운데서 3권의 책 에스드라스 상 하 (1 2 Esdras)와 므낫세의 기도 (The Prayer of Manasseh)를 제외시켰습니다.

 

그결과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정경으로 인정하는 외경은 Alexandrian Canon의 15권이 아닌 12권이 되었습니다.

 

또한 기독교회의 3대 주류가운데 하나인 희랍정교회 (Geek Orthodox Church)는 로마카톨릭 교회와 같이 Alexandrian Canon전승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이한것은 1672년 예루살렘회의 (Jerusalem Synod)에서 희랍정교회는 바룩(Baruch)과 예레미야의 편지(The Letter of Jermiah)두권의 책을 정경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신약에는 구약성경의 구절들에 대해서 263번의 직접적인 인용이 있으며, 370번의 간접적인 인용이 있지만,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단 한 번도 외경을 인용하지 않으셨으며, 예수님께서직접 밝히신 구약의 기준에서도 제외되는 것입니다(마23:35). 구약외경은 솔로몬의 지혜, 집회서(시락)등과 같은 교훈서, 토빗, 유디스 등과 같은 종교소설, 에스드라 1서, 마카비 1서, 마카비 2서 등과 같은 역사서, 바룩, 에레미야의 서신, 에스드라 2서와 같은 예언서, 에스더 첨가, 아사랴의 기도(또는 세 청년의 노래), 수산나, 벨과 용, 므낫세의 기도 등과 같은 전설 등 15권이 있습니다.

 

초기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Against Apion, Book I, sec. 8) 그의 당대에 외경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배제한 채 성경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이나 개신교나 신약에 대한 정경은 같습니다.

 

문제되는 것은 구약의 정경입니다. 39권이냐 46권이냐입니다.

 

종교개혁으로 인해 루터가 39권만을 가지고 나왔다고 논박하시는 분들 간혹계신데 종교개혁자는 루터만 있는것이 아닙니다. 루터의 신학을 대변하신분은 카톨릭에서도 유럽학자의 최고로 치는 에라스무스가 루터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칼빈이나 쯔빙글리 낙스 존오웬등 다른 종교개혁자들도 이와같습니다.

 

마태복음 23:34,35을 통해 볼 때, 예수님은 구약 성경을 창세기에서 역대기하(당시의 성경 배열 순서는 창세기가 처음이었고, 역대기하가 구약의 마지막 책이었음)까지를 확증하셨음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아벨에서부터 성전 제단 사이에서 죽은 사카랴까지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잘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외경에 대해서는 언급해 본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인가하신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 한 차례도 외경을 인용하신 것은 고사하고 그 존재를 인정하신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구약 성경은 263 차례나 직접 인용하였으며, 간접 인용하신 것은 370여 차례나 됩니다. 외경의 책들은 소실된 것이 아니라 철저히 버림받은 책이었습니다.

 

 

 

http://user.chollian.net/~simono/TRANS/Apo/Apocryhpa.htm

 

카톨릭 신자분이신 priessay님께서는 저보고 예수님께서는 70인역 외경에 대해 말씀을 인용하신 적이 있다고 이야기 하셨는데 그중 집회서와 토비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따라서 님의 진의 여부를 다른분들이 알수 있도록 위에 정경을 볼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를 올려놓았습니다.

 

 

 

질문드립니다.

 

 

카톨릭성경은 Alexandrian Canon을 전승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왜 1546년 트랜트회의에서 외경 15권의 책 가운데서 3권의 책 에스드라스 상 하 (1 2 Esdras)와 므낫세의 기도 (The Prayer of Manasseh)를 제외시켰습니까?

 

카톨릭에서 구약의 정승인 70인역(헬라어역)이 옳다고 말씀하신다면 3권을 임으로 제외할수 없는것이 당연한것이 아닙니까

질문 내용 추가 (2005-02-22 10:34 추가)
카톨릭에서 왜 그토록 외경을 정경안에 포함시키려 하는지 그 이유는 연옥이나 성모승천설 무오성, 천사숭배등 모든것들이 외경안에 교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외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성경의 내용과는 거리가 멀므로 우리는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면, 토비트서(the Book of Tobit)에 나오는 토비아(Tobias)의 이야기는 참으로 허황됩니다. 눈 멀고 가난한 처지가 된 토비트는 그의 아들 토비아를 메대(Media)에 있는 채권자 가바엘에게 보내어 약간의 돈을 빌려 오도록 합니다.한 사람이 토비아와 함께 길을 떠나는데 나중에 그는 천사 라파엘(Raphael)임이 밝혀졌습니다. 그 둘은 길을 가다가 밤이 되어 티그리스 강 가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는데. 마침 토비아가 발을 씻으려고 물 가에 내려갔을때에 한 커다란 물고기가 물에서 뛰어올라 그의 발을 잘라먹으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라파엘은 고기를 잡아 죽이되, 그 쓸개와 염통과 간은 먹지 말고 잘 보관하라고 했다. 여행을 계속하는 중 토비아는 남겨 둔 그 물고기의 쓸개와 염통과 간을 무엇에 쓸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라파엘은 대답하기를 쓸개는 눈이 먼 자의 시력을 회복시키는 데 쓰일 치료약이요, 염통과 간은 악마를 퇴치하는데 쓰인다고 하였습니다. 즉, 악한 귀신이나 악령에 사로잡힌 자 앞에서 그것들을 태워 연기를 피우면 그 악한 것들이 주던 괴로움이 깨끗이 사라지고 다시는 그 괴로움이 그 사람에게 찾아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토비아는 라파엘의 인도를 받아 그의 친척 라구엘의 집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라파엘이 일러준 대로 그의 친척 라구엘의 집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라파엘이 일러준 대로 그의 친척의 딸인 사라(Sarh)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사라는 이미 일곱 번의 결혼 경험을 가진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녀는 그녀와 결혼한 신랑들이 한결같이 결혼 첫날 밤 비명에 감으로써 졸지에 과부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이제 토비아는 그녀의 여덟번째 신랑이 되었습니다.
그의 장인어른은 일찌감치 여덟번째 사위의 무덤을 파놓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에 토비아는 무사하였습니다. 오히려 그가 물고기로부터 취한 염통과 간을 태워 만든 연기로 인하여 사라의 몸 안에 들어 있던 귀신 아스모데우스 (Asmodeous)는 그녀의 몸에서 나와 애굽 땅 먼 곳까지 도망을 갔습니다.
마지막으로 물고기의 쓸개는 그의 아버지 토비트의 눈을 고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이야기는 결국 행복하게 끝((happy ending)을 맺게 됩니다.
이제까지 이 외경의 대강 줄거리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어떤 종류의 글이라 생각되십니까? 이 외경의 이야기는 한낱 유대인 우화 중의 하나에 불과한것입니다.


외경의 가르침

마카비 2서( 2 Maccabees) 12장에서 우리는 유다 마카비(Judas the Maccabean)가 기도회를 연 후 율법에서 금하는 바, 우상을 부적으로 지닌 채 전사한 자들의 죄가 용서받도록 그들을 위하여 기도한 것과 또한 그들을 위한 속죄의 제사에 쓰일 비용으로 많은 돈을 모금하였다는 기사를 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사실에 동의할수 없습니다.
그 책의 저자에 따르면, 마카비가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고 속죄 제물을 바친 것은 영생 및 그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 확신이 어디서 온 것인지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죽은 자들에 대한 자신들의 교리를 성경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항상 그러한 구절들을 원용하여 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구절들을 대할때마다, 어째서 로마교회가 외경을 정경의 일부로 삽입시키려는 일에 그토록 열성적이었는지를 쉽게 납득할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외경에서 농부, 기술자, 대장장이, 옹기장이 또는 그와 비슷한 다른 종류의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성경 학자가 될수 없다는 부분(집회서:Ecclesiasticus 또는 Sirach 38:24~34)을 읽게 된다면 아마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한 구절들을 통해서 우리는 노동 계층의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랍비들의 교만을 엿보게 됩니다.

랍비들은 노동 계층의 사람들 없이 세상을 지탱해 나갈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교회"안에서 지도자가 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선언함으로써 자신들의 우월성을 자랑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솔로몬의 지혜서에서 그 제자가 자신을 가리켜 묘사한 글을 보면서 그 내용 역시 오해의 여지가 많고 허황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저자는 자신을 "좋은 기질을 타고 난 어린이였으며 훌륭한 영혼을 받은 자였다"라고 밝히면서, 따라서 자신은 더럽혀질수 없는 몸을 부여 받았노라고 말합니다.(8:20)

우리가 이상과 같은 그의 말을 받아들일때 그는 원죄가 전혀 없다는 것과 그 영혼은 이미 츅체와 결합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이상에서 외경이 가르치는 바가 반드시 "성경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규명해 보이기 위해 몇 가지 명백한 실례를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교회가 외경을 정경의 일부로써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이제까지 논거한 대로 그 가르침의 대부분이 성경적이지 않으며 기괴하고 허황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외경이 전혀 쓸데없는 책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2쳔년전 헬라 지역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집회 때에 낭독용으로 사용했던 것 같이, 오늘날에도 그것은 성경과 함께 편집되어 더러 읽혀지고 있습니다.

질문자가 선택한 답변
re: 정경과 외경
choiluke (2005-02-22 15:50 작성, 2005-02-22 15:55 수정)
이의제기 (1) | 신고
질문자 평 
카톨릭의 입장을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님이 올리신 질문 글을 잘 읽었습니다.
그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아주 충분히 공부가 되더군요.
제가 조금 덧붙이자면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정경과 외경문제를 비롯한 카톨릭교회와
개신교의 성경에 관한 모든 인식 차이는 근본적으로
“성경이 지니는 권위가 어느 위치인가?” 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자면 교회내에서 어떤 의견충돌이 생길 때,
혹은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에 교회전승을 우선할 것인가
아니면 성경을 우선할 것인가? 에 관한 것입니다.

카톨릭의 경우 “교회의 권위로 그 책들을 성경으로 인정함으로써 성경이 되었다” 는 성경<교회 의 인식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자리는 교회의 권위 아래에 위치하게 됩니다. 극단적인 예로 교회의 회의에서 결정하면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라도 부인해 버릴 수 있게 됩니다. 실제로 종교적인 암흑의 시대였다고 말하는 중세에 온갖 비행들이 벌어지는데 있어서 이러한 인식이 일조하게 됩니다.

반면에 개신교를 대변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은 “성경이 성경된 것은 그 말씀이 가지는 자체의 영감으로 인한 것이지 교회의 권위가 성경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성경>교회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더 권위 있는 것은 있을 수 없음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개신교의 경우에는 이러한 성경의 영감이나 성경이 차지하는 인식에 문제가 있다기 보다 그것을 현장에서 설명하고 설교하는 이들의 신학에 따라 보는 눈이 많이 달라질 수 있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같은 교단이지만 교파가 다른... 아픈 현실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기본적인 생각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있다면...이런 문제를 놓고 천주교와 개신교가 논의를 한다는 그 사실 자체가 그 출발점에서부터 아주 커다란 갭을 안고 출발하는 것입니다. 서로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는…

장로교를 다니는 제 견해는 물론 “오직 성경으로”를 외치던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입니다. 성경은 교회에서 이것이 정경이다 라고 지정해주지 않았어도 그 자체의 영감과 빛으로 성도들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을 비추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를 누가 다이아몬드라고 인정해 주든 인정하지 않든 그 가치가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딤후 3:16-20)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6-20) 『[16]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 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입니다. [17] 이 책으로 하느님의 일꾼은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과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딤후 3:16-20) 『[16]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 [17] so that the man of God may b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work.』

샬롬 !!!
이의제기 내용추가 (2005-02-22 18:37 추가) 이의제기 내용보기
글중에 말씀드렸듯이 기독교적 입장입니다.
그리고 카톨릭 님의 입장에서 쓰신 글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카톨릭에서 이해하는 성서와 교회에 관해 말씀을 적어주셨는데...
저는 약 500여년전에 이러한 일이 벌어지게된 시각의 차이를 말씀드린것입니다. 그 이후에 카톨릭에서도 수많은 변화가 있었음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자세한 답변 감사하구요. 질문자가 이해를 돕는 질문을 올리시고 또 양쪽의 의견을 다 수렴하셨음도 아주 감사하는 부분입니다.
질문자가 선택한 답변
re: 정경과 외경
joonie76 (2005-02-22 09:49 작성, 2005-02-22 16:14 수정)
이의제기 (1) | 신고
질문자 평 
개신교의 입장을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런 이런.. 답변 작성이 날아가 버렸군요. 다시 작성해야 할 듯.


1. 신약 성서의 복음사가들은 구약 외경을 인용하였는가?

개신교의 대한성서공회 홈페이지의 '성서에 관하여'라는 곳에 (http://www.bskorea.or.kr/about/about/old_testament02.aspx) 가면, 개신교도 신약에서 구약 외경을 구약성서와 다르지 않게 인용하고 있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2. 초대교회의 외경은 어떠한 지위였는가?

말도 많고 탈도 많습니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히브리어 지식이 없었고, 70인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였기 때문입니다. 얌니야 회의의 결정은, 이런 기독교의 아픈 구석을 잘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당장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수태설부터 위협받았던 것입니다. (유다교인들은 이를 통해, 예수는 로마 병정의 사생아라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교부들은 70인역을 적극 옹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70인역은 원래 토라만 의미하였으나, 사도들이나 복음사가들이 70인역의 성문서와, 예언서를 성서 말씀으로서 인용하였기에, 기독교는 성문서와 예언서를 포함한 70인역 자체를 성서로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후 히브리어 지식을 습득한 교부들도, 70인역과 히브리어 원문 성서 사이에 내용상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고민하였으나, 선대 교부의 주장에 대해서 별다른 반대 의견을 개진하지는 않고서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에 대해서 완벽한 의미의 반기를 든 최초의 사람이 히에로니무스(제롬) 입니다.

그는 성서 번역 작업에 있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부정하고, '정확한 언어 지식과 원문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이 것은 어찌보면 초대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부정하는 것과도 같았고,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을 포함한 당대 대다수 교부들의 비난을 불러왔습니다. 그가 히브리어 성서를 기본으로 번역한 불가타 성서는, 한동안 가톨릭 교회 내에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비록 나중에는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가톨릭 교회의 정식 성서로 자리매김했지만 말입니다.) 마침내 성서를 최종 결정한 힙본 공의회와, 카르타고 공의회는 외경을 성서로서 공식 선언합니다.


3. 왜 그럼 가톨릭의 외경 목록은 변화되었는가?

70인역의 외경 목록은 정확하게 남아 있지 않으며, 70인역 안에서도 경전성이 없는 문헌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이런 옥석 구분의 작업은 외경이 성서로 인정된 이후에도 계속 전개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경전성 구분은 '교회의 권위'를 통해서 이루어 졌습니다. 얌니야 회의에서 유다교 랍비들이 24권의 구약 정경을 확정지었듯이 말입니다. 안티 레고메나 논쟁에서 27권의 신약 성서 목록이 확정된 것과도 같은 맥락이지요. 루터가 신약의 야고보서를 성서에서 빼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일지는 좀.. 의문이네요.^^ 멜란히톤의 만류로 결국 놔두었지만 말입니다.

현존하는 70인역의 사본들 중에서도, 외경의 목록이 제각기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가 그를 최종적으로 교통 정리해 줄 필요성은 있었지요. 그 결과가 '사크로산크타 교령'이었습니다. 이 것은 임의적으로 그 때 결정된 것이 아니라, 장구한 세월을 걸쳐서 가톨릭 교회 안에서 결정된 내용을 비로소 공식 선언한 것입니다. 그 것이 '교회 임의로' 제 멋대로 성서 목록을 결정한 것이라면, 그 논리는 신약 성서의 27권 결정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안티레고메나 5권을 부정한 시리아 교회의 페쉬타 신약 22권이 그런 주장의 결과로 나온 산물이니까요.


4. 천주교와 개신교, 누구의 주장이 옳은가?

이런 질문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서로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 성서학에 있어서는 가톨릭 측이 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개신교 스스로 어느정도는 인정하듯, 17세기에 사마리아 오경의 소개를 둘러싸고 성서 진본 논쟁을 전개한 와중에서 유다교의 주장을 극단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스스로의 큰 패착입니다. 사해 쿰란사본 연구 결과에서 드러났듯이, 당시 가톨릭의 주장이 오히려 탄력을 받아버린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유다교 랍비들은 70인역이 번역된 날을 테벧월 8일로 지정하여, 유다민족이 주님을 금송아지 형상으로 바꾼 날과 같이 불행한 날이라고 선언해 버렸습니다. 그럼으로서 70인역과 그에 기초한 초대교회의 신앙을 부정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주장의 결과로서 완성된 마소라 사본을 개신교 측에서 '절대적 진리'로서 수용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본다면 우스꽝스럽기까지 합니다. 개신교는 초대 교회의 신앙을 회복하고자 개혁한 산물이 아니었단 말인가요?

또한, 많은 개신교 성도들이 '성서 66권은 주님의 영감을 받은 문헌으로 주어진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그 결정 과정도 주님의 뜻이다'라고 주장하지만, 그를 최초로 66권을 확정한 히에로니무스가 '성서 번역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정확한 언어지식과 원문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필요하다'라고 하면서, 인간적인 관점을 강조한 것을 고려한다면, 개신교의 앞뒤 논리가 맞지 않는 문제가 생깁니다. 66권은 지극히 인간적 관점에서 확정된 것이지, 신의 권위를 빌어서 확정지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주장은 천주교 측의 73권 확정의 주장에 더 가깝습니다.^^


P.S

많은 개신교 성도들이 천주교는 교회의 권위가 성서의 권위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교회는 성서의 해석권을 가진다고 보는 것이 천주교의 입장일 뿐입니다. '명시적인 성서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을 교회는 교리로서 지정할 수 없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성서의 해석이, 성서 자체의 문구를 바꿀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개신교는 이러한 성서의 해석 권한을 각 개개인에게 부여한 것이며, 이것이 바로 만인사제설입니다. 그 결과, 성서학을 획기적으로 발달시키는 데에는 기여하였지만, 수많은 분파로 갈라지는 결과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사람마다 같은 성서를 놓고도 제각기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니까요. 천주교는 그 점을 경계하여, 사적 해석을 공식화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는 것입니다.

즉, 개신교는 초대교회와 가톨릭 교회의 구분을 시도하여, 자신들과 다른 입장을 가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가톨릭 교회가 스스로를 주님의 도구로서 규정하며, 73권의 성서 확정 전과정에 주님의 역사하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부정하고, 주님의 역사하심은 단지 구약은 얌니야 회의까지, 신약은 힙본 공의회와 카르타고 공의회까지만 있다고 축소해 버리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개신교에서 정경 66권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쓰여졌다고 보는 것은 결국 유다교의 구약적 견해에 초대교회의 신약부분에 관한 견해를 적당히 편집해 넣은 것입니다. 가톨릭은 성서 73권 전부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오히려 초대교회의 가치관을 보다 잘 계승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논리적으로 잘 생각해볼 여지를 제공해 준다고 생각되는군요.
내용출처 : 직접. 대한성서공회 사이트, 대한 성서공회 논문집
이의제기 내용추가 (2005-02-23 13:56 추가) 이의제기 내용보기
네. 알고는 있습니다만..
답변들
re: 정경과 외경
priessay (2005-02-22 13:08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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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와서는 경전이 확대되고 재편집된다. 확대되었다는 말은 히브리어 경전에 기독교의 경전인 신약 과 함께 구약과 신약 중간기에 형성된 제2경전이 첨가된 것을 일컫는 것이었고, 재편집되었다는 것은 이와 같은 첨가 외에, 히브리어 경전 24권을 70인역을 따라서 39권으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어 경전의 ‘사무엘기’ ‘열왕기’ ‘역대지’를 ‘사무엘기상’ ‘사무엘기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지상(歷代誌上)’ ‘역대지하(歷代誌下)’로 나누고, ‘에스라-느헤미야기’를 ‘에스라기’와 ‘느헤미야기’로 나누고, 소예언서 ‘열두 책’을 열둘로 나누어서 구약을 모두 39권으로 재편집하였다.

구약성서는 일찍부터 두 언어로 전승되어 왔다. 하나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서이고, 다른 하나는 기원전 3세기부터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된 그리스어역 구약, 일명 칠십인역(LXX)이다. 초기 기독교는 히브리어 구약성서보다는 그리스어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받아들였는데, 거기에는 히브리어 구약성서에는 없는 소위 외경(外經)이라고 하는 책들이 더 편집되어 있어서 가톨릭의 성서가 된다. 개신교에서 외경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톨릭에서는 ‘제2경전(第二經典,deuterocanonical)’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히브리어 구약성서와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합친 성경을, 가톨릭에서는 ‘제1경전’ 혹은 ‘원경전(原經典,protocanonical)’이라고 한다.

제2경전에 들어가는 책은 역사적으로 변천되어 왔다. 또 편집 형태에 따라,책의 권 수도 일정하지 않다. 1977년에 나온 우리나라의 신.구교가 번역한 '공동번역성서'(1977)에 보면, ‘토비트’ ‘유딧’ ‘에스델(제1경전 에스더기의 추가부분)’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다니엘서(제1경전 다니엘의 추가부분)’ ‘마카베오상’ ‘마카베오하’ 이상 9권이다. ‘바룩서’ 안에는 ‘예레미야의 편지’가 마지막장으로 편집되어 있고, ‘다니엘서의 추가 부분’에는 ‘세 젊은이의 노래’ ‘수산나’ ‘벨과 뱀’이 들어 있다. 영어개역표준성서(Revised Standard Version) (1957)에 실린 제2경전에는 ‘제1에스드라’ ‘제2에스드라’ ‘므낫세의 기도’가 더 들어 있다.

제2경전에 속하는 이러한 책들은 본래 유대교가 번역한 그리스어역 구약인 ‘칠십인역’에 들어 있던 것들을 초기 기독교가 받아들이고, 그것이 그대로 가톨릭의 경전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제2경전에 속한 책들이 제1경전과 합본된 것은 기독교의 작업이 아니라 유대교의 경전사와 관련된 것이다.

에 익숙하지 않던 초기 기독교가 그리스어로 번역된 ‘칠십인역’ 구약을 읽게 되면서 거기에 들어 있는 제2경전에 속한 책들까지 함께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고대 라틴어역 성서(Old Latin Version)는 바로 ‘칠십인역’에서 번역된 것이다. 교부들 사이에서도, 히브리어로 된 구약에는 없고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에만 나오는 책들에 대한 경전으로서의 권위를 문제삼기는 하였으나, 1546년 트렌트 회의에서는 그리스어 외경을 히브리어 성경에 들어 있는 39권 책과 동일하게 영감 받은 권위 있는 경전으로 인정하게 된다. 히브리어 구약에 들어 있는 39권의 책은 이미 경전으로 전해져온 것이므로 이것을 ‘제1경전’이라고 하였고, 그리스어 구약에 들어 있는 나머지 책들은 늦게 경전이 되었다고 하여 ‘제2경전’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논의의 편의상 여기에서 ‘제1경전’ ‘제2경전’이란 말을 쓰지만, 이런 용어는 16세기 트렌트회의 이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므낫세의 기도’ ‘제1에스드라’ ‘제2에스드라’는 불가타역 성서에 들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전으로 인정 받지 못하였다. 따라서 불가타역은 이 세 책을 부록으로 취급하여 별도로 편집하였고, 나머지 책들은 구약의 여러 곳에 적절히 재배치하였다. ‘토빗트’와 ‘유딧’은 ‘느헤미야기’ 다음에, ‘에스더기 추가 부분’은 ‘에스더기’ 안에, ‘마카베오상’과 ‘마카베오하’는 ‘에스더기’ 다음에, ‘지혜서’와 ‘집회서’는 ‘아가’ 다음에, ‘바룩서’는 ‘애가’ 다음에, ‘다니엘서 추가 부분’은 ‘다니엘서’ 다음에 각각 편집해 넣었다.
는 39권의 낱권으로 형성된 구약과 27권의 신약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신교의 성서가 유대교의 경전과 다른 것은 구약외에 신약을 더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구약의 경우도 내용은 같지만 책의 분책과 배열이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에서는 '사무엘 상' 과 '사무엘 하'로 나누지만 유대교 경전에서는 '사무엘, 한 권으로 구성하고 있다.
책의 배열에 있어서도 개신교는 욥기, 시편, 잠언등으로 되어있는데 유대교 경전에서는 시편, 욥기, 잠언등의 순서로 되어 있다.
창세기(창)

레위기(레)

신명기(신)

사사기(삿)

사무엘기상(삼상)

열왕기상(왕상)

역대기상(대상)

에스라기(라)

에스더기(더)

시편(시)

전도서(전)

이사야서(사)

예레미야애가(애)

다니엘서(단)

요엘서(욜)

오바댜서(옵)

미가서(미)

하바국서(합)

학개서(학)

말라기서(말)

출애굽기(출)

민수기(민)

여호수아(수)

룻기(룻)

사무엘기하(삼하)

열왕기하(왕하)

역대기하(대하)

느헤미야기(느)

욥기(욥)

잠언(잠)

아가(아)

예레미야서(렘)

에스겔서(겔)

호세아서(호)

아모스서(암)

요나서(욘)

나훔서(나)

스바냐서(습)

스가랴서(슥)

마태복음서(마)

누가복음서(눅)

사도행전(행)

고린도전서(고전)

갈라디아서(갈)

빌립보서(빌)

데살로니가전서(살전)

디모데전서(딤전)

디도서(딛)

히브리서(히)

베드로전서(벧전)

요한1서(요일)

요한3서(요삼)

요한계시록(계)

마가복음서(막)

요한복음서(요)

로마서(롬)

고린도후서(고후)

에베소서(엡)

골로새서(골)

데살로니가후서(살후)

디모데후서(딤후)

빌레몬서(몬)

야고보서(약)

베드로후서(벧후)

요한2서(요이)

유다서(유)

가톨릭과 다른 것은 가톨릭이 제2경전이라고 부르는 외경(外經)을 경건문학으로는 받아들여도 경전으로는 고백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톨릭에서는, 외경의 경전성 문제가 논의되어 오다가 ‘제2경전’으로 정착되었지만, 개신교쪽에서는 종교개혁 당시부터 외경의 경전성 문제가 논의되다가 끝내 경전 안에는 들어 올 수 없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개신교 목사들이 편집한 츄리히 성서(Zurich Bibel or Swiss-German Bible)(1527-1530)는 외경을 신약 다음에 부록으로 편집해 넣었다. 1534년에 끝난 루터의 독일어역은 외경을 구약과 신약 사이에 부록으로 엮어 넣고, 그 서문에 “외경은 경전과는 동등하지 않지만 읽어서 유익한 책”이라고 언급하였다.
1535년에 프랑스 개신교가 처음으로 번역하여 발간한 성서도 외경을 구약과 신약 사이에 부록으로 넣고, 머리말에서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쓰여진 구약에는 없지만 불가타역본에 들어있는 외경”이라고 언급하였다.
1535년에 카버데일(Miles Coverdale)이 번역한 영어성서도 외경을 구약과 신약 사이에 부록으로 편집하였다. 즉 구약의 일부로 다루지 않고, 별도로 묶어 경전성이 확보되지 않은 책임을 밝혔다.
1560년에 나온 제네바성서는 본문을 절로 나누어 출판한 최초의 성서일뿐만 아니라, 외경에 대해서도, 그 서문에서 개신교의 견해를 분명하게 밝혔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서문에서, 외경을 두고서, 이 책들이 교회가 공적으로 읽고 해석하는 것이 공인된 점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경전이 확증하는 것과 같은 내용에 동의하는 한에서만 도움이 되는 책임을 밝혔다. 그러면서도, ‘므낫세의 기도’만은 역대지하 끝에 편집해 넣은 예외를 보인다.
1611년에 나온 제임스왕 역본(King James Version)도 외경을 경전과 구 별하는 점에서는 개신교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지만 신약성서 관주(전후참조)에서 외경과의 관련구절을 여러번 언급하여 외경에 대한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1546년 트렌트 회의에서 가톨릭교회가 외경을 ‘제2경전’으로 결정하면서부터 개신교쪽에서도 외경에 대한 태도를 좀 더 분명하게 하기에 이른다.
1562년에 영국교회가 발표한 39개조 종교조항 제6조는 “(외경은) 교회가 신도에게 생활의 모범이나 교훈을 가르치려고 할 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외경을 근거로 하여 교리를 제정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1647년 웨스터민스터 신학자 총회에서 결정한 신앙고백 제1장 3절은 “외경은 영감으로 쓰여진 책이 아니므로 경전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외경은 성경과는 달리, 교회 안에서 어떠한 권위도 가지지 못하고, 인정되거나 사용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개신교 가운데서는 어느 한 교회도 외경을 경전으로 인정하는 교회는 없다.
개신교 가운데서도 성공회는 외경을 가장 존중하는 교회다. 그들의 기도서에 붙어 있는 성구절에는 언제나 외경이 인용된다. 최근에 영국 성공회에서 개정한 성구집에 보면 외경에서 인용한 일과가 44개나 되고, 미국성공회가 사용하는 최신 개정판 성구집에는 무려 110곳의 외경 인용이 있다. 일반적으로 개신교는, 종교개혁자들이 외경을 중요하게 권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외경에 대해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내용출처 : 대한성서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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