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권 성경 이야기

여호수아 24장(세겜회의와 계약갱신)-최창모

형람서원 2006. 6. 2.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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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겜회의와 계약갱신

□ 여호수아 24장 □

 

최창모교수 (건국대 히브리학과, 히브리문학 )

 





1. 서론적 언급

여호수아 서는 민족적 승리와 영광에 관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의 독자들은 수많은 실패와 민족적 굴욕을 경험한 자들이다. 야훼의 백성이 되기까지 그들이 경험한 (작은) 영광과 (많은) 고통을 독자들은 이 책의 지평선에 깔고 읽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가나안 땅에서 이방인/떠돌이로 살면서, 때때로 그 땅의 전통과 문화에 젖어 야훼를 잃어버리고 살아온 시절과 그들이 살아오는 동안 도우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새롭게 회상하면서, 다시는 그러한 불신앙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으로서의 역사적 비극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민족의 결단과 갱신을 촉구함으로써 이 책을 마감하고 있다.

여호수아서의 마지막 장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부분은 세겜회의와 계약 갱신(vv.1-28+v.31)이요, 두 번째 부분은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의 장례에 관한 보도이다(vv.29-33). 세겜 중심의 제의행위는 야훼에 대한 이스라엘의 충성과 계약 갱신으로 요약되는데, 이는 신명기 전통에서도 엿보인다(신11:29-32; 27:1-26; 수8:30-35; 삿8:33; 9:4, 46 등). 창세기 35장 2-4절에서 이방 신들의 제거와도 관련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남·북 관계를 고려할 때, 세겜회의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족장들의 전통에 대한 언급에서, 창세기 12-32장의 구성이 아브라함의 "씨"가 중심 주제라면, 본문에서는 족장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다른 신'을 버리라는 권고가 보다 중심에 서 있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및 가나안 사람들은 야훼를 섬기던 자들이 아니었으며, 이제 그들의 전통으로부터 벗어나 오직 야훼만을 섬기기로 결심하라는 것이다(24:2, 14-15). 야훼가 이스라엘을 선택하였으니(신7:6, 7; 10:15; 14:2; 왕상 3:8),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신이든 '선택'하라고 촉구한다. 이제 아모리 사람은 쫓겨났고, 발람은 하나님에게 무릎을 꿇고, 여리고 사람들은 무너졌으며, 족장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야훼만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이시니(vv.8-13), 더 이상 망설임이 "오늘 선택하라"는 것이다(v.15, 23).

여호수아 서에서 24장의 지위는 애매하다. 왜냐하면 23장에서 여호수아의 마지막 고별연설과 기능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23장에서 여호수아는 자신의 고별사(告別辭)를 위해 "온 이스라엘, 곧 장로들과 우두머리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불러"(23:2) 세운다. 24장에서 다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24:1)를 소집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고(23:1, 14)가 두 번째 소집 후에 이루어진다(24:29). 주제 역시 23장과 매우 겹친다.: 과거사에 대한 회상(23:3-5, 9-10; 24:2-13); 명령과 권고(23:6-13; 24:14-15); 그리고 "오직 야훼" 신앙(23:7, 12, 16; 24:2, 14-24, 17).

물론 23장에서는 율법에 대한 복종을, 24장에서는 야훼만을 섬길 것을 요청하고 있다.; 23장에서는 어떻게 야훼를 섬길 것인가?(vv.7-8, 16)를 강조하며, 24장에서는 누구를 섬길 것인가? 를 강조한다.; 23장이 여호수아 서 전체의 요약이라면, 24장은 모세 6경에 대한 총정리라 할 수 있다. 그래서 24장에서는 땅의 정복이나 정착이 주제가 아니라, 족장시대로부터 출애굽, 광야생활, 그리고 정복과 정착이 모두 강조된다. 그런 점에서 23장 16절은 여호수아 서의 결론임과 동시에 24장의 연결고리인 셈이다.



2. 본문 주석

24:1-28 세겜회의

본문은 8:30-35에 대한 보다 상세한 기록이다. 세겜의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의 계곡에 모여 축복과 저주문을 낭독하던 제의행위가 초점이다. 편집 구조로 보아 8장의 부분은 후기 편집자의 첨가물로 여겨진다. 10장부터 이어지는 본격적인 정복 과정과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의 구조는, 먼저 여호수아의 세겜회의의 회의 소집(vv.1-2a)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의 긴 역사 서술(vv.2b-13) - 족장시대로부터 출애굽, 광야, 가나안 정복과 정착에 이르기까지 - 로 이어진다. 이는 오랫동안 가나안 정복을 마치고 마침내 12지파의 거룩한 연맹이 출발하는 시점을 알리는 '거룩한 말씀'이다. 하나님이 1인칭 주어로 등장한다. 하나님 자신이 '주인/주체'이심을 수사적 형식으로 나타내 보여주고자 한다.

vv.2b-13은 전형적인 계약 체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출애굽기 19:3b-6; 신명기 6:20-25; 26:5-9와 비교된다. 조약 체결은 종신국(宗臣國)에 대한 종주국(宗主國)의 자비로운 행위와 업적을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함으로써 봉신으로 하여금 조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자극하여 코뮤니케(comminique, 公報)한다. cf.22:16-10. 계약 형식은 연설을 사회적 요건으로 한다. vv.14-24은 여호수아의 권고와 백성들의 동의가 교차적으로 2번 반복된다. 이어 vv.25-28은 계약을 체결하고, 계약의 증거로 '큰 돌' 비석을 세운다. 마지막으로 vv.29-33에서는 모든 일을 마치고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이 죽어 장사되는 기록으로 막을 내린다.

구조적으로 vv.1-25에서 미완료형 동사 "말하다"( )가 7회(vv.1, 2, 16, 19, 21, 22, 24), "여호수아" 이름이 7회(vv.1, 2, 19, 21, 22, 24, 25), "백성들"이 7회(vv.2, 16, 19, 21, 22, 24, 25), 명령형이 7회(v.14에 4회, v.15에 1회, v.23에 2회)씩 각각 등장한다. 이는 신명기 사가의 전형적인 경향이다.

24:1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 8:33과 35에서는 "온 이스라엘"이라 하여 '지파'라는 말이 생략된다. 12지파에게 땅 분배가 완료되던 실로회의(18장) 이전까지는 분명한 지파의 영토 구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겜에"( ). LXX에서는 '실로'로 읽고 있다. v.25 역시 마찬가지다. 18:1과 조화를 이루고자 한 흔적이다. 동시에 反 사마리아인 경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남·북 분열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서 세겜은 대체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기원전 721년에 아시리아에 의해 파괴된 세겜은 헬라 시대에 사마리아 인에 의해 재건된바 있다. 본문을 제외하고는 여호수아서 내에서 세겜의 지위와 역할은 약한 편이다. 도피성 가운데 한 도시로서 레위인의 소유였다(수20:7; 21:21).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그 우두머리들과 재판관들과 공직자들을 불러내니" ( ). LXX에서는 '이스라엘'과 '우두머리들'이 빠져있다. LXX 23:2에서도 마찬가지다. 수8:33과 23:2와 비교할 것.

"하나님 앞에"( ). 법궤의 출현을 알리는 구절이다. 8:33에서 모든 지도자들이 제사장이 가져온 법궤의 좌우에 서있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24:2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소"( ). 예언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으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법정에 선 대사로서 조약 체결의 봉신(封臣)의 모습을 띈다.

24:2b-4은 족장들의 역사에 대한 요약으로써 아브라함 - 이삭 - 야곱/에서로 이어지는 계보를 언급하면서 어떻게 그들 조상들이 이집트로 내려가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특이할 만한 것은 그들 조상들이 '이방 신들'을 섬겼었다는 것과 하나님의 인도로 가나안 '온 땅'을 두루 다니게 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24:3 "너희 조상"( ). 히브리어에서 '조상'은 곧 '아비'와 동의어이다. 이 용어는 vv.2-6에서 6회, vv.14-17에서 3회씩 사용된다. 7절에서 세대의 완전한 병합 이후 14절의 재차 언급 이전까지 더 이상 이 용어는 나타나지 않는다. 계약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개인과 지파를 함께 묶어서 하나의 계약 당사자로 취급하고 있다.

24:3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 갑자기 단수로 변경된다. 조상에 대한 일반적 전통이 기능적이 된 증거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기원전 10세기의 사회적 변화와 계약의 적용을 반영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무조건적인 계약에 의한 세워진 다윗 왕가의 시대 상황에서 특히 '이방의 다른 신들'을 섬기던 시절을 통칭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가나안 온 땅에 두루 다니게 하였으며"( ). 계절에 따라 옮겨다니던 유목 문화적 특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의 넓은 지역을 효과적으로 점령한 것을 오래 전부터 조상들이 활동 무대로 삼았던 것과 일치시키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24:5-7은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모세와 아론을 통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는가?를 요약하고 있다. 재앙과 바다 사건이 핵심을 이룬다. 사실적인 '역사'와 구원의 '신화적' 요소가 섞여 있다.

24:5 "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내서"( ). LXX에서는 생략되어 있다. 중자탈오(重字脫誤)를 반영한다. 여기서 인간(모세와 아론)의 역할은 약화되고, 이들을 보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강화된다.

24:6 "너희의 조상"( ). LXX에서는 "우리의 조상들"로 읽고 있다.

"바다에 ..... 홍해까지"( .... ). 앞의 '바다'는 신화론적인 색깔이 짙고, 뒤의 '홍해(갈대바다)'는 역사적 기억을 의미한다. 이집트로부터의 구원 사건을 '신화와 역사'라는 두 개념 속에 통째로 넣어 문학적 효과와 계약 상황의 구체성을 동시에 살려내고 있다.

24:7"너희의 조상이 살려 달라고 나 주에게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들의 부르짖음과 서로 관련된다. 시편 107:6, 13, 19, 28에서도 같은 모티프가 나온다.

"흑암"( ). 서사적인 텍스트에서는 주로 '구름'(ana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신의 현현을 나타내는 설화에서 주로 사용되며, 통치자의 힘을 드러내는 용어이다. 본문에서는 이집트의 파라오를 물리치시는 능력의 하나님의 행위를 묘사한다.

"바다(물)를 이끌어 와서 그들을 덮었다"( ). 출15장의 "바다의 노래"와 가장 닮은 표현이다.

"너희 눈으로 [직접] 보았다"( ). 하나님이 행하신 능력을 직접 보았음을 강조하는 것은 신의 현현(theophany)을 나타내는 전통적인 성경의 표현 방법이다.

"너희가 광야에서 오랫동안 지낸 뒤에"( ).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간단히 요약하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목표가 광야가 아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광야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과도적인 시공(時空)이었다.

24:8-13은 요르단 [강] 동편( )에 머물던 시절의 역사로써, 그 중에서 발락 왕에 관한 이야기(민22-24장)가 들어있다. 이집트의 파라오의 손으로부터 구원하신 야훼께서 모압의 발락으로부터도 구원해 내셨다는 이야기는 이스라엘 전 역사를 '구원'이라는 맥락으로 해석하려는 사관(史觀)과 그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발락 사건과 '두 왕'에 대한 보도는 본래 이야기와 차이가 있다. 이는 언급하는 역사적 사건을 모두 '정복 전승'이라는 관점에서 취급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과 땅 소유가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vv.12b-13). 가나안의 원주민들을 몰아낸 것이 "너희의 칼이나 활이 아니다"라는 선언은 세겜 선언의 백미이다.

24:10 "내가" LXX에서는 3인칭 화자로 유지하여 "너희 하나님이"라 읽고 있다.

24:11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기르가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LXX에서는 순서가 다르게 나온다.: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헷 사람과 기르가스 사람.

24:12 "내가" LXX에서는 "그가"로 읽는다.

"두 왕" LXX에서는 "열 두 왕"으로 읽는다. 아마도 여호수아 2장-10장의 사건들에 나오는 정복한 국가의 왕들을 숫자를 잘못 센 것이거나, 단순히 상징적인 숫자를 사용한 것 같다. 본문에서는 요단 강 동편의 두 왕 - 시혼(12:2; 13:10, 27)과 옥(12:4; 13:12, 30-31) -을 지적하는 듯 하다. 12장에 열거된 정복된 31명의 왕들을 반드시 의미할 필요는 없다.

"말벌"( ). 출23:28에서 가나안의 왕들을 말벌로 쫓아내시는 기록이 나온다(cf.신7:20). 벌은 야훼께서 '거룩한 전쟁'에서 적들을 꼼짝못하도록 만드신 하나님의 '가시적인 전사'로서의 역할을 하였다(cf.2:9-11, 24; 5:1; 6:27; 15:14-16). 이는 "이 두 왕을 몰아낸 것은 너희의 칼이나 활이 아니다"라는 다음의 선언을 증명한다. 이 선언은 vv.2b-13의 역사 회고의 절정이다.

"쫓아냈다"( ). 히브리어 는 완전히 섬멸한 상태로써, 완전한 정복을 의미한다. 정복이 하나님의 행위임을 최상으로 강조하는 단어다(cf.출23:28-31; 33:2; 34:11; 삿2:3; 6:9).

24:14-24는 여호수아와 백성들간의 주고받은 2번의 대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 대화는 vv.14-15에서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누구를 섬길 것인지?'를 묻고, 이스라엘 백성의 진정한 결단을 촉구하고 있으며, vv.16-18에서 백성들은 '오직 야훼만을 섬기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이미 마음을 정했음을 고백한다. 특히, vv.17-18의 백성들의 역사에 대한 회고는 수사적으로 매우 간결하게 다듬은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나며, vv.2b-13의 역사 요약을 더 이상 가감할 수 없을 만큼 정밀하게 요약하고 있다. 역사가가 쓴 부분을 고스란히 유지하면서도 제의적 목적으로 리듬을 살려내고 있다.

그러나 두 번째 대화인 vv.19-24에서 여호수아는 약속처럼 그렇게 되지 않을 것 - 어쩌면 그렇게 쉽게 대답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거나, 아니면 '주만 섬긴다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충고일 수 있다. - 과 그럴 경우 엄청난 재앙이 닥칠 것 - 이는 이미 [독자들이] 역사적으로 경험된 사실임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 을 엄중히 경고하며(cf.왕하17:7-20), 이에 대해 백성들[독자들]은 다시금 충성을 선언함과 동시에 '증인'이 될 것을 서약한다. 사실상 vv.19-24은 편집자의 편집이며, 사실상 v.18은 v.25로 바로 넘어간다. '신앙고백에 대한 증인은 바로 그 고백을 한 자신들'(v.22)이라는 선언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독자가 함께 결합되고 있다. 멋진 수사(修辭)이다.

24:14 "경외하고.... 섬기시오"( .... ). '경외하다'는 단어는 '쳐다보다'라는 말인데, 이는 '도리를 다하다' 혹은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다'라는 뜻이며(cf.4:14, 24), '섬기다'는 종으로서 주인에게 복종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14-15절에서만 모두 7번이나 사용되며, 24장 전체에 걸쳐 야훼를 섬길 것에 10회(v.14에 2회; v.15에 2회; 18, 19,, 21, 22, 24, 31), 이방 신을 섬길 것에 6회(v.2, 14, 15에 2회, 16, 20) 각각 나온다.

"섬기던 신들"( ). LXX에서는 '이방 신들'로 명시하고, v.20과 v.23의 "이방 신들"( )과 일치시키고 있다. v.2b과 v.16의 "다른 신들" ( )과 비교된다. 여기서 족장 신앙의 특성이 문제가 된다.

"버리고"( ). v.23에서도 다시 사용된다. 아직까지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이방 신들의 영향을 암시한다. 야훼에 대한 충성을 선언하기에 앞서 족장시대로부터 섬겨온 전통적인 이방 종교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도록 명령하고 있다. 사실상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야훼'와 '이방 신'과의 대립과 갈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던 시절은 없었다.

24:15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표)/"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개). 히브리어로는 으로, 직역하여 "만약 너희 눈에 악하게 보이거든"이 된다.

24:17 "주 우리 하나님이 친히"( ). 백성들의 결심이 유일신으로서의 야훼에 대한 선포를 전제함으로써 강화된다. 야훼만이 하나님임을 강조하며, 그에게만 순종하겠음을 고백한다.

24:19 "질투하시는 하나님"( ). LXX에서는 '질투하시는 자'로 나옴. Cf."살아 계신 하나님"( , 3:10). 야훼에 대한 시적 형용사구 가운데 하나다(출20:5; 34:15; 신4:24; 5:9). 여호수아는 야훼가 다른 신들과 비교될 수 없는 차이를 완곡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문제의 핵심을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따라서 백성들은 둘 사이에서 어떤 타협(妥協)이나 유보(留保)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4:20 "이방 신들"( ). v.23에서도 다시 나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민족적이며, 지파적 성격을 띄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24:22 "증인은 바로 여러분 자신들이오"( ). 백성들의 분명한 입장을 확정짓는 주제어이다. 동시에 시민법과 종교법 사이의 구별을 확정짓는 구문이다. "너희가 나의 증인이다"( )라는 표현은 히브리 성경에서 오직 3번(룻4:9-11; 사43:10-12; 44:8) 나온다. 선택한 자가 전적인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 세워질 '큰 돌'은 이를 기억나게 하는 상징물이다.



24:25-28에서 여호수아가 '백성들과 계약'( )을 체결하고, 그 증거로 계약문(契約文)을 기록한 '큰 돌'을 세겜 성소 곁 상수리나무 아래 세우고, 백성들 사이에 내부적 감독기능(internal-surveillance function)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여호수아는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계약 체결의 중재자로서 등장한다.

24:25 "율례와 법도"( ). 문자적으로 '지위와 판단'을 의미하며, 이사일의(二詞一意, hendiadys)이다. 일반적으로 협정의 내용을 지시한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과 야훼간에 체결한 계약의 내용이 '율례와 법도'인 셈이다.

24:26 "이 모든 말씀"( ). 신명기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다.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의 십계명과 같은 형식을 취한다. 분명히 세겜회의는 시내 산을 그 모델로 삼고 있다. 가나안 정착 후 세겜에서의 서약은 출애굽 후 시내 산의 계약법(출20:22-23:19)을 대체한다. 여기서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길 것'에 대한 서약(vv.14-15)에만 최우선적으로 명령한다.

"큰 돌"( ). '글씨'(하나님의 율법 책)가 새겨진 돌을 말한다. 에발 산에 단을 쌓을 때 사용한 토라가 새겨진 돌(수8:31-32; 신27:2-4)과 평행을 이룬다. 돌은 계약 체결을 상징한다(창31:43-54; 삿9:6. cf. 창28:18). 여호수아의 계약 돌(비석)은 세겜의 성소 앞에서 발견된 후기 청동기 시대의 것과 비교된다. 신명기 법에서는 엄격히 마쩨바( )를 세우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신16:22), 여기서 세운 돌비석은 제의 행위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계약 체결의 "증거"로서 세워진 것이다(cf.수22장). v.27에서는 증거로서의 돌을 향해 "주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들었다"고 표현한다. 따라서 만일 백성들이 계약을 모른다고 하거나 위반하면, 이 돌이 '그 증거'가 될 것임을 분명히 한다.

"야훼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창12:6; 35:4)과 "세겜에 있는 기둥 상수리나무 아래"(삿9:6)와 비교된다. 신명기 법에 '나무 아래 있는 우상 숭배를 금하고 있는 것'(신12:2; 왕하16:4)이 부담스러운지, LXX에서는 "야훼 앞에"를 강조한다.

24:28은 여호수아가 모든 일을 만족스럽게 마치고 백성들을 각각 유산으로 받은 땅으로 돌려보낸다. 이는 고대의 계약갱신 제의가 어떠한 방식으로 종결되었는가?를 말해 준다(cf.삿2:6).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땅의 정복과 계약 체결을 완료한 것은 오랫동안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의 희망이었다. 여호수아가 이를 완성하였다.

24:29-33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의 죽음

LXX와는 많은 차이를 지닌 본문에 의하면, 이제 모든 일을 완료한 여호수아는 110세에 숨을 거두고 딤낫세라에 장사되었으며,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어 기브아에 장사하였다. ".... 죽고, ....에 장사되다"라는 일반적 형식(창35:28-29; 신34:5)은, 모세의 죽음으로 시작된 책(1:1-2)이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것을 알리는 형식으로도 사용된다. 모세의 무덤은 알려지지 않았음에 비하여(신34:5-6), 여호수아의 무덤의 위치는 분명하며, 모세는 120세에(신34:7), 여호수아는 요셉처럼(창50:26) 110세에 죽어 두 사람을 차별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 서를 통틀어 여호수아를 '주의 종'이라는 칭호를 붙여 언급한 것은 본문(24:29)이 유일하다. 서막에서 모세를 일컬어 '주의 종'이라 한 것(1:1)과 비교된다. 이것으로써 모세 시대에 이어 여호수아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제 새로운 역사의 막을 기다린다.

v.31의 "여호수아의 생전과 사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훼를 잘 섬겼다는 첨언(添言)은 편집자의 몫이 분명하며, 동시에 이어지는 사사기의 주제 - 불복종 - 를 암시한다(삿2:7). 여호수아의 죽음/장례와 엘르아살의 죽음/장례 사이에 요셉의 유해가 세겜 땅에 묻힌 보도(v.32)는 오경에 나오는 족장들에 대한 야훼의 약속(창50:24-25; 출13:19)을 확인하려는 의도인 듯 하다.

24:29"이 일을 마친 다음에"( ). 이 표현은 여호수아서에서 오직 이 곳에서만 발견된다(그러나 LXX에서는 v.33에서 다시 나온다). 일시적인 일의 마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이제 그의 과업을 완성하였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안전하게 돌아갔다. 이제 역사는 사사기 1:1의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와 연결된다.

"주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 ). '주의 종'이란 표현은 모세에게 주로 사용되었다(수1:1, 2, 13; 8:31, 33; 9:24; 11:12, 15; 12:6; 13:8; 14:7; 18:7; 22:2, 4, 5). 이 곳까지 여호수아에게 이 용어는 전혀 사용된 바 없다. 여기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외교적 대리자로서, 계약 체결에 직접 참여한 자로서, '하나님의 종'의 자격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호수아는 단순히 정복 전쟁을 이끌어 온 게릴라의 전사가 아니라, 모세와 마찬가지로 당당히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계약 중재자로서 '하나님의 종'의 지위를 확보하게 된 셈이다.

24:30 "딤낫세라[흐]"( - ). LXX에서는 딤낫 세헤르( )로, 사사기 2:9에서는 딤낫 헤레스( , '태양의 몫')로 나온다. 이 도시는 여호수아에게 이미 유업으로 주어진 땅이었다(수19:49-50).

24:32 "하몰" LXX에서는 '하몰'과 '아모리'를 혼동하여 읽는다.

24:33 "엘르아살" 히브리 본문과는 달리 시리아 역에서는 그를 '제사장(hkhn)'이라 불렀으며, LXX에서는 아론을 '대제사장(archiereus)'이라 하였다. 그는 여호수아 서에서 매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14:1; 17:4; 19:51; 21:1). 그래서 그의 죽음과 장사에 관해 언급한다. 제사장 문서에서 제사장의 중요성이 상실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만 그가 왜 헤브론이나 베델에 묻히지 않고 잘 알려진 바 없는 에브라임 산지의 기브아에 묻혔는가? 에 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3. 해 석

출애굽 이후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기원전 10세기 예루살렘 성전 건설 이후 기원전 7세기 요시아 왕에 이르기까지 남북의 분열과 더불어 이방 신들과의 투쟁은 가장 힘겨운 사회적 현실로 비추어 졌다. 이제 유다의 운명 역시 이집트와 다를 바 없으며, 북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음을 강력히 경고할 위기의 시간에 이르렀다.

새롭게 써 내려가는 고대사의 맥은 여호수아-사사기에 이르러 일단락 된다. 자신들이 처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고대사의 중심을 어디에 두고 해석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신명기 사가의 가장 큰 고민이었을 것이다. 그는 결국 세겜 회의에서의 계약 갱신에 두었다. 어떤 법률적 방식이나 도덕적 해석 없이, 세겜에서의 백성들의 자발적인 서약을 강조하고 회상함으로써 모세의 시내 산 사건 이후 흐트러진 시대의 신앙의 뿌리를 되찾으려 했던 것이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마지막 설교(수23장)를 마치고, 모든 백성들을 세겜에 모이게 하여 하나님과의 계약 갱신의 중재자가 된다. 전쟁 영웅으로만 인식되어 온 여호수아는 '야훼의 종'으로서 계약 체결(갱신)을 완성한다. 다시 한 번 조상들이 세웠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할 시간으로 여겼던 것이다. 세겜이 선택된 것이다.

모든 계약 체결에서와 마찬가지로, 여호수아는 과거의 은혜스러웠던 역사를 일일이 회상하고, 자신들의 오늘이 있기까지 전적으로 통치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여, 그에게만 충성하고 순종하겠다는 결단과 서약에 이르도록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재한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 신과 야훼가 어떻게 다른지를 설득한다. 우리는 여기서 여호수아의 새로운 면을 보게된다. 시내 산에서의 모세와 세겜에서의 여호수아는 거의 동등한 가치 체계 내에서 평가되는 듯 하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만이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선포함으로써 다시 새로운 출발 선상에 서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면, 이제는 이스라엘이 오직 야훼만을 '선택'할 때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하나님께만 봉사하는 자,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 그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다. 야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그가 그 땅을 지켜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분명한 구원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선민(選民)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의 위기 속에서 민족적 자기 동일성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야훼 앞에 서서 다시 태어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머뭇머뭇할 시간이 없다. 신앙 고백의 '증인'은 바로 신앙을 고백한 자신뿐이다(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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