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위급한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붓을 잡던 손에 창칼을 쥐고 일어서 나갔다. 진정한 선비정신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1531~1592)은 동래부사직에서 물러나 고향(광산구 대촌)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제봉은 글만 하던 문관출신에다 60이 넘은 고령임에도 뒤에 앉아있지 않았다. 아들들과 함께 말 위에 올라, 의병을 일으켰다.
포충사(褒忠祠;남구 원산동 776번지 일대)는 임진왜란때 호남의병을 이끌고 금산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高敬命, 1531~1592), 고종후(高從厚, 1554~1593), 고인후(高因厚, 1561~1592) 3부자와 유팽로(柳彭老, 1554~1592), 안영(安瑛, 1564~1592)을 모신 곳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때에도 장성의 필암(筆巖)서원과 함께 헐리지 않았던 전남지역 2대 서원중 하나이다.
1980년, 이 지역 2만여평에 새로 사당과 유물관 등을 지었다. 시청 앞에서 시내버스로 한 시간 거리, 너른 잔디밭과 수려한 송림이 있어 유치원생들과 초등학생들 소풍 터, 또 신랑신부들의 야외촬영장으로 인기다.
충효문을 들어서자 왼편은 한반도 모양의 연못, 오른편은 유물전시관인 정기관(正氣館)이다. 고경명선생이 1592년 5월 29일, 6천여 의병을 모아 백마피를 나눠 마시며 왜적을 무찌를 것을 서약하는 창의거병도, 같은해 6월24일 출전하는 말 위에서 각도의 관원, 백성들에게'구국일념으로 일어나라'고 써 내려간 마상격문(馬上檄文), 또 제봉집(霽峰集)원문 등이 진열되어 있다.
구사당으로 올라가는 동산엔 휘늘어진 소나무들이 수 백년 얘기를 들려줄듯 가깝다. 홍살문 앞에 사람높이의 자연석비, 충노비(忠奴碑)다. 가노(家奴)로 고제봉을 따라 의병에 참여했던 봉이(鳳伊)와 귀인(.貴仁) 두 종은 금산전투에서 제봉과 둘째아들이 순절하자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고 이듬해 다시 첫째아들을 따라 진주성 전투에 출전, 주인과 함께 전사했다. 신분을 넘어서 나라사랑에 목숨을 바친 4백 여년 전의 충의 정신이 가슴을 친다.
병역의무를 두려워하는 오늘의 젊은이들은 포충사에서 무엇을 느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