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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2부 법정.
20여 년 전 사업이 잘돼 잘나가던 시절 조강지처와 자식들을 버린 남편 A(67) 씨와 버림받았던 부인 B(64) 씨가 법정에서 마주 섰다. ‘버린’ 남편은 그 후 사업 실패로 알거지가 다 됐고, ‘버림받은’ 부인은 부동산 투자 성공으로 수백억 원대의 자산가가 됐다. B 씨가 홀로 키운 20대의 두 자녀도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이 재판은 이날의 마지막 재판이어서 법정에는 이들 가족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족 재판’이었던 셈이지만 법정 분위기는 싸늘했다.
“20년 전 이혼할 때 땅을 넘겨준 것은 제 정신으로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서 넘겨준 것이므로 무효입니다. 저 사람(부인)은 그 땅 가지고 많은 돈을 모았는데 이제 내가 굶어죽게 생겼다는데 거들떠도 안 봅니다.”
한눈에 보아도 노숙인처럼 보이는 남루한 옷차림의 A 씨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두 자녀가 한심하다는 투로 야유하는 소리가 들렸다. 재판장인 강민구(姜玟求) 부장판사는 두 자녀에게 주의를 줬다.
말쑥한 옷차림에 귀부인 티가 나는 B 씨는 재판 내내 말이 없었다. B 씨는 고급 외제 승용차(렉서스)를 타고 법정에 나왔다.
강 부장판사가 B 씨에게 말을 건넸다.
“전 남편인 원고(A 씨)의 ‘과거’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그래도 오갈 데 없는 원고를 위해 작은 도움이라도 준다면 그 ‘복’은 뒤에 앉은 자식들이 받게 될 거라고 생각해 보세요.”
1985년, A 씨와 B 씨는 부부였다.
A 씨는 사업이 크게 성공해 많은 돈을 벌었다. A 씨는 바람을 피우다가 새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조강지처인 B 씨는 A 씨에게서 버림받았다.
A 씨는 이혼 요구에 응해 주는 조건으로 B 씨에게 충남 당진군의 임야 1400평과 서울 구로구 개봉동의 대지 42평을 넘겨줬다.
당시 이 땅은 보잘것없었지만 이후 두 사람의 인생을 뒤바꿔 놓았다. 땅 주위에 공장 등이 들어서면서 땅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B 씨는 땅 중 일부를 처분해 부동산 투자를 시작했고, 20여 년간 수백억 원을 벌었다.
반면 A 씨는 거듭된 사업 실패로 재산을 탕진했고 함께 살던 여자와 새로 얻은 자녀들에게서도 버림을 받았다.
끼니조차 잇기 어렵게 된 A 씨는 B 씨가 큰 부자가 된 사실을 알고 “이혼할 때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땅을 넘겨줬으니 그 땅을 돌려 달라”며 B 씨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B 씨와 자식들은 단호했다. 조강지처와 어린 자식들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나가 20년 만에 알거지 신세로 소송까지 걸어 돈을 요구하는 뻔뻔함에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맞섰다.
재판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A 씨의 억지 주장이 통할 리 만무했다. 그러나 재판장인 강 부장판사는 ‘뻔한 결과’를 그대로 선고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때 인연을 맺었던 부부인데…. 무엇보다 싫든 좋든 방청석에 앉아 있는 두 자녀의 아버지였다. 강 부장판사가 B 씨에게 제안했다.
“부인께서 4000만 원 정도 주면 어떨까요. 다만 한 번에 목돈을 주면 원고가 다시 바람을 피워 탕진할지 모르니까 2년 동안 네 번으로 나눠서 1000만 원씩 주는 건 어떻겠습니까.”
강 부장판사는 B 씨를 한참 동안 설득했고, 마침내 B 씨도 강 부장판사의 조정안을 받아들였다.
재판을 마치고 나온 강 부장판사가 말했다.
“그래도 친아버진데 법정에서 조롱 섞인 야유를 보내는 자식들을 보니 20년간 쌓여 있던 가족 간의 앙금부터 지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원망스러운 아버지라도 결국 세상 떠날 때면 자식들이 거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조정이란
민사재판 등에서 판결 선고 대신 법원의 조정안(화해 권고안)을 재판 당사자들이 받아들여 재판을 끝내는 제도. 화해 권고안에 양쪽 당사자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합의하면(조정이 이뤄지면) 판결과 같은 효력이 생긴다. 법원이 화해 권고 결정문을 당사자들에게 우편송달한 뒤 2주간의 이의제기 기간을 주고 이 기간에 이의가 없으면 조정이 이뤄진 것으로 간주하는 방법과 법정에서 당사자들의 의견을 물어 즉석에서 조정하는 방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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