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리를 오해했다(00) 중세 시대 교회가 정죄한 것은 모두 이단이다?
최덕성 박사는 기독교 사상사를 집필했다. 중세 시대에 관한 두 권의 교회사 저서를 출간했다. 첫째 저서의 제목은 <쌍두마차>(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2)이고, 부제는 "어거스틴에서 동·서방교회의 분열까지"이다. 둘째 저서는 <종교개혁전야>(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3)이다. 최덕성 박사의 주요한 관점은 역사적 신앙으로, 정통신앙, 구원의 복음의 소리는 교회 역사에서 끊어진 때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우리는 중세시대 1000년(서로마제국 멸망 476년)을 암흑시대라고 이름한다. 그것은 14세기 이탈리아의 인문주의 학자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이다.
중세 천년은 암흑일까? 광명일까? 역사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달라진다. 세계 모든 산물은 빛과 어둠을 함께 갖고 있다. 중세 천년은 교회 권력이 지배한 교회 시대인데, 왜 어둠의 시대로 평가해도 거부가 없을까? 그것은 종교개혁진영에서도 그러한 평가를 하기 때문이다. 다수가 로마 가톨릭 교회임에도 중세 천년을 광명기로 표방하는 지식인은 거의 없다. 20세기 구조주의 학자인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5)은 중세를 바라보는 관점이 페트라르카와 다르게, "장기 지속(histoire longue durée)"의 개념으로 암흑시대로 규정하는 것을 비판했다. 단순히 "암흑시대"로 규정하는 것에 비판적인 입장이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등장을 종교개혁의 기점으로 본다. 기점은 하늘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시작(신기원)이 아니라, 때가 차매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마틴 루터가 있기 전에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루터는 프랑스 학자 르페브르 데타플(Jacques Lefevre d'Estaples, 1455-1536)의 글을 보았다고 한다. 르페브르는 성경을 평신도도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하고,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칙을 강조했으며, 미사 제도를 비판했다. 그의 《시편 주석》(1509)과 《바울 서신 주석》(1512)은 루터의 신학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데타플은 프랑스 사람으로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이나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 등 프랑스 종교개혁가들의 중요한 교사이다.
권현익은 종교개혁의 바른 신앙의 전통을 바울바(Paulicians)와 알비파(Albigensians, 카타리파)로 연결하면서 제시했다. 그 최종 정점에는 왈도파(Waldensians)가 있다. 왈덴시안의 시작을 553년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12세기 피터 왈도(Peter Waldo, 1140-1218)로 보는 것이 절대 다수 의견이다.
알비파는 중세 시대에 지목된 대표적 이단인데, 로마 카톨릭 진영에서 징벌하는 십자군을 출병시키기도 했다(알비십자군. 1198-1245). 알비파는 "마니교적 이원론, 미사 거부, 공중 앞에서 성경낭독과 해설, 공개적 죄고백(apparelhamentum), 의식적 회식(agape), 통과의례(通過儀禮, consolamentum)를 중요하게 하며, 완전한 자(Cathari)"라고 주장했다. 알비파로 인해서 탁발수도회가 발달한 계기가 되었다(출처 가톨릭대사전).
왈도파는 전 유럽에 큰 영향을 주었다. 14세기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84)의 가르침을 따르는 롤라드파(Lollards)가 있고, 15세기 체코의 얀 후스(Jan Hus, 1369-1415)로 형성된, 체코 형제단(Czech Brethren), 후수파(Hussites)가 있다.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위클리프에게 부관참시의 형벌이 주어지면서, 위클리프와 후스의 관련성이 높아졌다. 후스는 그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해서 화형으로 순교했다. 왈도파, 롤라드파, 후스파는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으로 평가된 유력한 가르침이다. 공통점은 성경번역과 복음설교의 회복이다. 그리고 미신적인 로마 교황주의의 미사를 폐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가 등장한 것이 성상파괴주의(iconoclasm)이다. 성상파괴주의는 787년 7차 공의회(니케아)에서 결정된 것을 거부한 가르침이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상파괴주의를 주도했던 튀르키예 지역의 교회들 중 일부가 바울파로 성상파괴주의를 유지하며, 유럽으로 전례되었다는 것이 권현익의 분석이다. <장로회주의>(Presbyterianism: The Scriptural Form of Church Government)를 쓴 사무엘 뮐러(Samuel Miller, 1769-1850)는 장로교의 뿌리를 왈도파와 바울바로 제시했다. 사무엘 뮐러는 장로교의 기원을 사도 시대부터 이어진 개혁적 신앙 전통으로 보고, 왈도파와 바울파를 그 역사적 뿌리로 제시한 대표적인 신학자이다.
역사적 신앙은 역사(시간과 공간)에서 우리와 동일한 믿음이 끊어지지 않고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들은 복음은 역사에서 일어난 일인데, 그 사건은 먼저 믿은 복음의 사람의 전도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역사적 신앙이다. 그래서 창세 이래 지금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이 땅위에서 끊어진 적이 1초도 없다는 것이 기본 이해가 역사적 신앙이다. 그럼에도 우리 믿음의 시작은 천적이어서 소명, 주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이다. 교회의 믿음은 하늘의 믿음과 함께 한다. 교회의 진리는 하늘의 소명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하늘의 보화를 간직한 성격이다. 교회가 간직한 진리는 하늘의 것이다. 대학교에서 탐구하는 진리는 땅의 것으로 탐구하고 있다. 교회의 진리는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확정적이고 명확하게 교회에게 주어졌다. 계시의 확정성은 명확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계시의 말씀, 66권에 확정성을 두고, 계시기록은 중지가 되었고, 구원에 관한 계시의 충족성을 견지한다.
중세 로마 교회 시대를 어둠의 시대로 규정하는 것이 나쁘지 않지만, 유구하게 존재하며 활동했던 복음의 사람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놀랍게도 교회에서 복음의 사람을 정죄했다. 참고. 최덕성, <위대한 이단자들>(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5). 진리를 이단으로 정죄하면 정죄한 세력이 이단이 된다. 이단을 옹호하면 이단이 된다. 이단적 가르침을 가르치거나 인정하지 않아도 이단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교회에게 박해받은 그리스도인들, 교회에게 박해받은(1000년) 그리스도인의 숫자와 로마 제국에게 박해받는(300년) 숫자는 비교한다면, 교회에게 박해받은 숫자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지켰고, 교회를 세웠고, 복음을 전도했다. 세상지성은 로마 제국, 그리스 시대를 황금기로 보고, 중세시대를 암흑기로 평가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로마제국시대나 중세 교회시대(교회주의) 모두 박해 기간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평안한 것은 일상적이지 않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평안을 추구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평안한 것은 주의 일이 진행되기 때문에, 주의 복음이 진행되기 때문에 평안할 뿐이다.
중세 시대에 가장 난해한 것은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론을 분별할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교부 시대는 이단과 정통을 분명하게 분리했다. 그리고 종교개혁시대는 구교와 신교가 선명하게 분리되었다. 그러나 다시 분별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분별하는 것을 정죄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것이 오히려 암흑기로 평가하는 중세적 모습이 아닐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1세기나 중세시대나 변함없는 행동양식, 복음의 사람, 복음을 듣고 복음을 지키고 복음으로 살고, 복음을 전파한다. 그 복음의 사람이 복음의 교회에서 정죄받은 일이 역사에 있었다. 그리고 이단들이 그 폐단을 자기에게 적용해서 스스로 선지자처럼 외치고 있고, 그 패턴은 강력한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이단으로 많이 흘러간다. 그리스도인을 정죄한 교회나 그리스도를 배역하는 교설을 만든 이단은 같은 범주이다. 오직 그리스도인은 주께서 만드신 태양아래서, 주께서 제공하신 산소와 물과 양식으로, 주어진 생명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할 뿐이다. 그래서 교회는 유지되었고, 복음은 전례되어 지금 나에게...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 전례될 것이다.
형람서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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