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람 성경

요한계시록, 예언이란 무엇인가?

형람서원 2025. 1. 21.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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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계시록은 1장 1절 계시(啓示, revelation), 3절의 예언(豫言, prophecy), 4절의 편지(便紙, epistle)이다. 요한계시록 전체는 계시이고 예언이고 편지이다. * 7 인 - 어린 양, 징조(sign). 7 나팔 - 천사, 경고(warning), 7 대접 - 천사, 심판(judge).

* 예언은 계시이고 묵시는 문학이다. A Prophecy is the revelation and an apocalypse is the literature(Apocalyptic literature).

*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For it is the Spirit of prophecy who bears testimony to Jesus(계 19:10).

묵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미래적 소망을 표현한다. 유대교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라는 관용어는 구약에 나타나지 않는다. 리츨(Albrecht Ritschl) 하나님 나라를 예수님에 의해 창설된 사랑이라는 윤리를 실천하는 종교적인 공동체로 제시했다. 종교사학파의 요하네스 바이스(Johannes Veiss)는 리츌의 개념을 거부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순전히 미래적이며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이 세상의 종말을 전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바이스는 예수가 자기 죽음 전에 그 나라가 도래될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것이다.

예언(預言)이란 무엇인가?

언어에서 예언의 개념과 성경에서 예언의 개념은 다르다. 성경에서 예언은 대상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다. 과거의 일도 되며, 미래의 일도 되고, 현재의 일도 된다. 우리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계1:8). 언어적 예언은 "미래의 일어날 일을 말함"으로 제한되어 있다.

‘예언’에는 ‘예언(豫言)’과 ‘예언(預言)’이 있다. 어떤 신학자가 두 단어를 구분해서 설명하는 것을 보고, 두 단어를 구분해야 하는지를 한학자(漢學者)에게 질문했다. 그 한학자는 구분하지 않고, 동의어라고 했다. [참고. 예(豫, 미리 예), 예(預, 미리 예) 예금(預金), 예산(豫算), 予(예)+상(象)과 혈(頁)이 결합하여 만든 문자이다] 즉 예언(豫言)’과 ‘예언(預言)’을 구분해서 예언(預言)의 독특성을 설명하는 것은 좋은 훈련이 될 수 없다. 맡길 예라는 의미를 주어서 예언(預言)으로 사용할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견강부회적인 면이 있다. 예언은 prophecy의 번역어이다.

우리는 통상 ‘예언’을 ‘미래의 일을 알려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영어에는 prophecy와 prediction가 있는데, 성경에서는 prophecy를 사용한다. 이것은 ‘신탁(神託)’인 ‘oracle’과는 다른 행위인 것 같다. 신이 말한 것을 전달하는 단어가 prophecy와 oracle이고, 우리말에서는 예언(豫言)과 신탁(神託)으로 구분하고 있다. 신(神)에게 무엇을 받아서 전달하는 것이 전부 예언(預言)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신탁(神託)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언과 신탁을 명료하게 구분해야만 한다. 기독교 신학에서 '신탁'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혹 사용하는 학자들도 있을 것인데, 일상적인 예언을 사용하지 않은 분명한 의도가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는 ‘prophet’를 ‘선지자(先知者)’로 번역했다. 국어사전에서는 “예수 이전에 나타나 예수의 강림과 하나님의 뜻을 예언한 사람”로 정의한다. 개신교에서만 사용하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정의한 것 같다. 구교(천주교)에서는 ‘예언자’로 사용한다. 개역개정에서는 구약이나 신약이 모두 ‘선지자’로 사용한다. 고전 14:32에서 제시한 “예언하는 자들”은 일반명사가 아니다. 행 21:9에서 네 딸은 예언하는 자(did prophesy)로 행 21:10에서 아가보는 선지자(a certain prophet)로 제시했다.

우리 시대에 신사도 운동에서는 (자칭, 타칭) 사도가 부활하고 있다. 그런데 ‘선지자’는 부활하지 않는데, ‘예언자’가 부활하고 있다. prophecy을 행하는 prophet인데, ‘선지자’가 아닌 ‘예언자’이다. 우리 성경 번역은 예언자라하지 않고 선지자고 했다. 그런데 신사도 운동에서는 선지자가 아닌 예언자가 부활하고 있다. 그들은 단순하게 미래의 일을 바라보는 권능자들이다.

우리는 국어사전의 의미를 잘 수용할 것을 제안한다. 구약 시대 ‘예언’은 “예수 이전에 예수의 강림과 하나님의 뜻”이다.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큰 뜻(구원)에 관한 것이다. 신약 시대에 예언은 사도행전에 나타난다. 아가보 선지자가 기근을 예언했고(행 11-27-28), 빌립의 네 딸과 아가보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고난받을 것을 보아서 예루살렘에 가지 않도록 권면했다. 전자의 예언은 이방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을 부조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었고, 후자는 사도 바울을 붙잡았지만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신약성경의 예언은 구약 시대와 다른 점이 있는데, 하나님이 주신다는 명령이 없는 것이다. 아가보는 성령으로 말했고(행 11:28), 성령이 말씀한 것을(행 21:11) 말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성령이 하신 말씀을 거역한 것인가? 그리고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으려고 고의로 행동했는가? 예루살렘 교회는 소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바울에게 지도했고, 바울은 지도를 따라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행 21:26).

아가보와 빌립의 네 딸의 예언이 ‘개인적 예언’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한 부분만을 본 것이다. 바울도 그 부분을 동일하게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에 자신이 갈 것을 확신했고, 서바나까지 이를 것을 확신했다. 다만 그 방법을 알지 못했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할 때였기 때문에 피하지 않고 진행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복음이 땅끝까지 가는 경륜을 본 것이고, 그 경륜의 부분에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고난 받은 것이 포함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있다는 예언의 유형은 무엇인가? 고난의 상황을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고난의 상황이 아니라 고난의 조건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고난을 피할 길을 알려주면, 듣는 자는 맹목적으로 피할 길을 따르는 것이 대부분이고, 혹 따르지 않더라고 꺼림칙한 마음을 지우지 못 한다. 그것이 성경적인 예언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예언의 유형은 과거의 죄를 사유(赦宥)하는 행위까지 있다고 한다. 과거의 죄를 알아 지적하고 회개를 종용하며, 예언자로 안수기도로 사죄(赦罪)를 행할까? 또 어떤 예언의 유형은 아들 낳고 딸 낳은 것을 말하기도 한다고 한다. 아들을 딸로, 딸을 아들로 바꾸는 능력까지 행하는지는 모르겠다. 예언으로 대학이나 취업의 합격 불합격 여부를 미리 알려주기도 한다고 한다. 불합격을 합격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까지 말하는지는 모르겠다. 성경은 선지자나 꿈꾸는 자를 죽이라고 명령했다(신 13:1-5).

‘그리스도인’이 행하면 모두가 선(善)이 되는 것인가? ‘자칭 그리스도인’은 한국 교회 안에는 없는가? ‘적그리스도’는 666을 이마에 보이도록 새겨 놓았을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룸은 주의 은혜의 도리를 겸손하게 증거해야 한다. 겸손은 자기경험이 아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자기경험이 중요하지만 자기경험은 주관이고 검증할 수 없다. 검증되지 않은 지식을 타인에게 전하는 것은 자기객관화의 오류일 것이다. 혹 유익이 있으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잠간의 유익, 일시적 유익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2,000년 동안 변하지 않았고, 2,000년 동안 거짓 유형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다양화 되었을 뿐이다.

이제는 그리스도인인 내가 하기 때문에 옳다는 견해를 주의하고 부정하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자며 구원의 탈락가능성을 주장으로 오용할 것이 아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룸은 자기부정이다. 비록 그리스도인이지만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객관화시키지 말자. 객관화된 복음 문장을 더 많이 창안해서 규모있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추상적인 문장에 배부르지 말고,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문장으로 지식을 이루자.

예언은 추상적이거나 막연한 것이 아니라, 내 손에 잡히고 이해되고 파악되는 생명의 말씀이다. 예언이 없으면 백성이 무지하고, 예언을 무시하면 백성이 방자하다. 거짓 예언은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고, 참 예언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든다. 방언기도 용례가 없듯이, 예언기도 용례도 없다. 은사는 그리스도인의 거룩 세움을 목표로 한다.

선지자는 주의 예언으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백성을 훈련시켰고, 언약의 땅에서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는 백성을 책망했다. 그리고 메시아께서 오신 뒤에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했고, 신약시대에 선지자는 사도의 사역을 돕는 역할을 했다. 사도의 주 임무는 복음 전파와 구제이다. 구약이나 신약에서 예언은 개인적으로 사용한 적이 없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개인적 예언’이라는 표현은 ‘성경 한 본문’에서 모든 설교자들의 설교가 다름에 대한 정당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설교를 했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 동일한 성경 본문을 설교할 때는 다르게 설교할 수 밖에 없다.

예언을 개인 미래를 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다. 성경에서 예언은 주께서 주신 계시, 즉 구원 이룸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밝히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예언은 오실 메시아를 지시하는 것과 여호와 하나님의 정직(말씀대로 이루어짐)을 계시하는 것이다. 신약에서 예언은 오신 메시아를 지시하며, 현재 어린양을 지시하며, 미래에 다시 오실 주 하나님을 지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는 완료되었다. 우리는 성경 66권 충족성을 믿는다. 그 완성된 구원 경륜과 성령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에서 풍성한 예언이 나온다. 지금도 주 예수께서는 교회의 사자를 통해서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자기 백성에게 전하시고 계신다(계 2-3장).

묵시(默示)란 무엇인가? 묵시(默示, Απōκάλυψις, apocalypsis, 아포칼립스)는 신이 선택한 예언자에게 준 비밀스러운 일들이다. 이러한 문장은 묵시문학(默示文學)이다. 문학은 계시가 아니다. 앞에 묵시가 있어도 계시가 아니다. 특히 개신교에서는 묵시문학이 있는 외경을 참조문서가 아닌 일반문서로 분류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묵시문학은 계시가 아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계시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의 범주에 넣는 것은 좋지 않다. 요한계시록에 있는 많은 구약성경의 표현(에스겔, 다니엘, 스가랴 등)은 계시이다. 외경에 있는 내용은 묵시문학이다.

계시(啓示, Απōκάλυψις, apocalypsis, 아포칼립스)란 무엇인가? 먼저 계시(啓示)와 묵시(黙示)는 우리말에서는 동의어로 사용할 수 있지만, 신학에서는 전혀 별개로 사용하고 있다. 참고로 ‘계시록’과 ‘묵시록’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요한계시록은 요한 사도가 받은 계시를 기록한 것이고, 요한묵시록은 요한이 경험한 환상체험을 당시 한 문학 장르인 유대묵시문학의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 한국말에는 신학적인 개념이 없지만, 기독교 사상을 한국어로 표현하면서 신학화했기 때문에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계시(啓示)’는 영어 revelation을 번역한 것이다. ‘묵시(默示)’는 영어, 아포칼립스, apocalypse를 번역한 것이다. 헬라어 아포칼립시스의 어원적 뜻은 un - veiling, ‘감추인 것(베일)을 벗기다’이다. 신학할 때에 만나는 단어는 단순하게 단어적인 뜻으로 신학 개념으로 소개하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신학적 의미와 언어 사전적 의미는 항상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福音)은 좋은 소식, 기쁜 소식, 복된 소식으로, 언어적 의미는 왕의 즉위 소식, 전쟁 승리의 소식이다. 그러한 것이 좋은 소식이지만 신학과 전혀 무관한 내용이다. 신학적으로 “무엇이 좋은 소식”인지를 밝혀야 복음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를 전하는 그 소리를 ‘복음’으로 신학적 의미와 동일화하려는 시도가 있다. 승리의 소식과 십자가 승리의 소식을 병행해서 견강부회(牽强附會)를 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음은 단순한 단어적 의미가 아니라 신학화된 것이다. 복음은 일반 언어적 의미나 역사의 사건에 의미를 도출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계시의 의미가 있는 기독교 핵심 가치가 되어야 한다.

* [신천지의 주장] 사도 요한이 기록한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계시(啓示)’라는 말은 열어서 보인다는 뜻이다. 이 계시록은 하나님이 친히 기록하셨고, 일곱 인으로 봉하여서 오른손에 가지고 계셨기에, 천상천하 그 누구도 능히 그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었다. 하나 때가 되어, 이기신 예수님이 이 봉한 책을 취하시고(계 5장) 계 6장, 8장에서 책의 일곱 인을 다 떼시고 기록된 내용을 다 이루셨고, 그 이룬 것을 새요한에게 다 보이셨기에(계 22:8) ‘계시’라고 하신 것이다.

=> [고경태] 계시를 unveiling(감추인 것을 벗겨냄)으로만 해석하면 신천지의 가르침을 배격하기 쉽지 않다. 신천지는 계시를 "열어서 보인다"는 뜻으로 개념화했고, 이긴자, 새요한, 이만희에게 다 보여졌기 때문에 봉한 계시의 제시자가 된다. 계시의 유일한 해석자이기 때문에 계시자와 동등하게 되며, 결국 계시자의 계시가 아니라 계시의 유일한 해석자의 뜻이 대신하게 된다. 신천지는 주객이 전도되는 사건을 인지하지 못하고 결국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긴자, 새요한을 믿게 된다. 그러나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의 훈련에서 나온 정답이 있기 때문이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은 감춰진 것인데 비밀(secret)이 아닌 신비(mystery)이다. 명확하게 드러났지만 알지 못하는 신비이다. 새요한은 밀봉을 비밀로 해석한다. 십자가의 성취에서 성전의 휘장이 찢겨진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의 성소의 완전한 제사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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