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람 성경

요한계시록 1:3

형람서원 2025. 1. 2.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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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3

* 예언(豫言, prophecy)은 성경해석에서 규정해야 할 중요한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예언은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 성경에서 번역한 預言(예언)은 "맡겨진 말씀"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예언(豫言)이 아니라 預言(예언)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과도한 주장이다. 그런데 예언은 prophecy, προφητεία를 번역한 것이다. προφητεία(예언)은 prophet(선지자)에서 기원한 것이다. 계시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다. prophet을 '예언자(預言者)'라고 번역하지 않고 '선지자(先知者)'라고 번역했다. 구약 선지자는 여호와께 말씀을 받아 그대로 전달하는 사역자였다. 신약 선지자는 말씀을 받아 전달했는데 그대로가 아닌 해석이 들어갔다. 말씀을 받았지만 해석이 다른 사례가 아가보와 빌립의 네 딸 그리고 사도 바울이 달랐다.

예언은 복음을 증거하는 말씀, 계시 말씀의 전달이다. 사도 베드로의 용례 후로 복음선포는 항상 기록된 말씀과 함께 진행되고, 먼저 기록된 말씀을 읽고 해석하면서 복음을 전도하는 형태가 되었다. 예언은 기록된 말씀을 읽는 것(복음설교, 계시 말씀을 해석하여 설교(전달))이다. 예언은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맡겨진 것을 전하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전하는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는 오실 메시아를 전파했고, 신약의 선지자와 사도는 오신 메시아와 현재 메시아 그리고 다시 오실 메시아를 전파(증거)했다. 예언에서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1절과 2절에 있는 증언과 예언은 동일한 선상이다. 예언은 절대 계시적 성격이 아닌 계시된 말씀을 해석한 것이다.

'복되도다(Blessed, Μακάριος)'는 헬라어에서 한 번 사용했는데, 영어 번역에서는 두 번 사용하는 용례가 많다. 그 이유는 첫째는 단수이고, 둘째는 복수이기 때문에 구분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복되도다'는 문장 앞에 있어, 선언적 의미를 갖는다. 마태복음 팔복 문장에서도 앞에 Μακάριος가 있다.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단수)와 듣는 자(복수)가 복(福)되다. 읽는자와 듣는자의 등장은 예배에서 상황이다. 예수께서는 두 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다(마 18:20). 그것은 숫자가 아닌 읽고 듣는 자의 형성, 예배의 구성이다. 예배는 복음설교와 복음들음이 있다.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는 복음설교가 없이 단순하게 성찬(화체)를 먹음으로 구성시켰다. 개혁교회는 복음을 먹고 마심의 구도, 복음설교가 있는 구도로 예배를 회복시켰다.

"예언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으로 추측하면, 이미 신약성경 기록이 다수가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사도 베드로는 사도 바울의 글을 주의깊게 읽으라고 권면했다(벧후 3:10-18). 바울의 서신서든지 예언의 말씀은 주의깊게 읽어야 하며, 억지로 풀면 스스로 멸망을 당하게 된다(벧후 3:16). 읽는 자(설교자)와 듣는 자(청중)은 서로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히 3:1). * 신약성경 27권의 최초 제안자는 아타나시우스인데(367년), 당시 알렉산드리아에 위경들이 너무나 성행했기 때문에 아타나시우스가 정경목록을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나그함마디 문서(Nag Hammadi library)의 추정연대가 아타나시우스가 활동하던 시대와 유사하다. 나그함마디 문서가 1945년에 발굴되어 기독교 기원 연구에 기폭제가 되었는데, 영지주의 문서라고 하면서도 기독교 원류로 평가하려고 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성경 전례를 따라 영지주의를 배격했을 것이 자명하다. 신약성경은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27권으로 결정되었다. 교리는 교회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순종한 산물이다. 설교도 설교자가 진행하고 성령이 돕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순종한 설교자의 발화산물이다.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는 복되다. 그런데 듣는 자의 복수형에는 읽는자도 포함된다. 설교자는 복음을 선포하면서 듣는자이다. 듣는 자는 듣고 말씀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특이한 표현은 "그(자기) 가운데 기록한 것(written in it)"을 지키라고 했다. 영어NIV 문장에는 "심장에 취하라(take to heart)"는 것이 있다. NIV처럼 심장에 예언의 말씀이 기록되어 졌다는 상상이 구체적이다. 그 안에 기록되어진 말씀은 지킬 수 밖에 없다. 핵심기억장치는 두뇌가 아니라 심장이기 때문이다.

"때가 가까워졌다"(γὰρ καιρὸς ἐγγύς, 3절), 1절에서 "속히"가 있다. 때가 가깝다는 선언은 경고와 약속을 함의한다. 때가 가깝다는 선언은 임박한 종말의 시기가 아니라, 게으르지 말고 일하라는 권면이다. '때'의 시기를 놓고 바울 시대의 교회에서 지금까지 논란이 있다. 수 많은 이단들이 때를 계산했고, 많은 사람을 미혹했다. '때'는 '때'가 아니라 '일'이다.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임무, 일은 무엇인가?

형람서원 고경태

 
Blessed is the one who reads aloud the words of this prophecy, and blessed are those who hear it and take to heart what is written in it, because the time is near.

Μακάριος ὁ ἀναγινώσκων καὶ οἱ ἀκούοντες τοὺς λόγους τῆς προφητείας καὶ τηροῦντες τὰ ἐν αὐτῇ γεγραμμένα· ὁ γὰρ καιρὸς ἐγγύς.

念這書上豫言的、和那這聽見又遵守其中所記載的、都是有福的.因為日期近了。

념저서상예언적、화나저청견우준수기중소기재적、도시유복적.인위일기근료

念这书上豫言的,和那些听见又遵守其中所记载的,都是有福的。因为日期近了

この 預言のことばを 朗讀する 者と, それを 聞いて, そこに 書かれていることを 心に 留める 人¿は 幸いである. 時が 近づいているからである

3 Pinagpala ang bumabasa ng mga salita ng propesiyang ito sa mga tao, at ang mga nakikinig at tumutupad ng mga bagay na nakasulat dito, sapagkat malapit na ang takdang panahon.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개역한글]

1:3 이 예언(豫言)의 말씀을 읽는 자(者)와 듣는 자(者)들과 그 가운데 기록(記錄)한 것을 지키는 자(者)들이 복(福)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개역한문]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개역개정]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개역개정4판]

1:3 이 예언의 말씀들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안에 기록된 것들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으니, 이는 때가 가깝기 때문이다. [바른성경]

1:3 이 豫言의 말씀들을 읽는 者와 듣는 者들과 그 안에 記錄된 것들을 지키는 者들이 福이 있으니, 이는 때가 가깝기 때문이다. [바른성경 한문역]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과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표준새번역]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과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새번역]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거기에 기록된 것들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 때가 가까움이니라. [한글KJV]

1:3 이 대언의 말씀들을 읽는 자와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그것들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때가 가깝기 때문이라. [한글흠정역]

1:3 이 예언의 말씀들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과 그 안에 기록된 것들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이는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성경]

1:3 만일 여러분이 이 예언을 교회에서 낭독한다면 여러분은 주께서 주시는 특별한 복을 받을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 또한 복을 받을 것입니다. 이 예언이 실현될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현대어성경]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고 그 가운데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이 예언들이 이루어질 때가 가까왔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성경]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 일들이 성취될 시각이 가까왔기 때문입니다. [공동번역]

1:3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카톨릭성경]

https://nocr.net/bible/index.php/Re/1/3

예언이란 무엇인가?(고경태 박사)

‘예언’에는 ‘예언(豫言)’과 ‘예언(預言)’이 있다. 어떤 신학자가 두 단어를 구분해서 설명하는 것을 보고, 두 단어를 구분해야 하는지를 한학자(漢學者)에게 질문했다. 그 한학자는 구분하지 않고, 동의어라고 했다.

[참고. 예(豫, 미리 예), 예(預, 미리 예) 예금(預金), 예산(豫算), 予(예)+상(象)과 혈(頁)이 결합하여 만든 문자이다] ‘豫言’과 ‘預言’이 실제로 같은 의미의 단어라는 사실은, 숱한 한국과 중국의 옛 문헌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조동원, " ‘豫言’과 ‘預言’ - 성서한역과정을 중심으로 살펴 본 ‘예언’의 한자어 -", <가톨릭신학> 37권, 2020). 중국어 번역에서는 豫言, 일본어 번역에서는 預言을 사용했다. 일본에서는 "이미 ‘預’"라는 단어를 “맡기다”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일본인들은 ‘預言’을 (일반적인 ‘豫言’과 구분되는) “말씀을 맡기다” 혹은 “맡겨진 말씀”으로 해석했다.

우리는 "예언"이라고 말하면서, 예언하는 사람을 "선지자"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통상 ‘예언’을 ‘미래의 일을 알려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영어에는 prophecy와 prediction가 있는데, 성경에서는 prophecy를 사용한다. 단순한 미래를 제시하는 prediction은 엄격하게 구분해야 하며, 또 ‘신탁(神託)’인 ‘oracle’과도 구분해야 한다. 신(神)이 말씀하신 것을 전달하는 단어가 prophecy와 oracle이고, 우리말에서는 예언(豫言)과 신탁(神託)으로 구분하고 있다. 신(神)에게 무엇을 받아서 전달하는 것이 전부 예언(預言)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신탁(神託)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언과 신탁을 명료하게 구분해야만 한다. 기독교 신학에서 신탁은 사용하지 않지만, 성경 어휘에는 있다. 그러나 간혹 사용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일상적인 단순 미래 제시인 예언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prophet’를 ‘선지자(先知者)’로 번역했다. 국어사전에서는 “예수 이전에 나타나 예수의 강림과 하나님의 뜻을 예언한 사람”로 정의한다. 개신교에서만 사용하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정의한 것 같다. 구교(천주교)에서는 ‘예언자’로 사용한다. 개역개정에서는 구약이나 신약이 모두 ‘선지자’로 사용한다. 고전 14:32에서 제시한 “예언하는 자들”은 일반명사가 아닌 교회에 부여된 특수한 한 은사이다. 행 21:9에서 빌립의 네 딸은 예언하는 자(did prophesy)로 행 21:10에서 아가보는 선지자(a certain prophet)로 제시했다.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선지자는 동일한 직분처럼 보이지만 권위에서 차이가 있다.

우리 시대에 신사도 운동에서는 (자칭, 타칭) 사도가 부활하고 있다. 그런데 ‘선지자’는 부활하지 않는데, ‘예언자’가 부활하고 있다. prophecy을 행하는 prophet인데, ‘선지자’가 아닌 ‘예언자’이다. 예언하는 사람이 선지자가 아닌 사도가 되는 이상한 환경이기도 하다.

우리는 국어사전의 의미를 잘 수용할 것을 제안한다. 구약 시대 ‘예언’은 “하나님의 구원 경륜, 초림 예수의 강림과 재림 예수를 지시하는 것”이다. 여로보암을 책망하러갔던 하나님의 사람은 이스라엘의 늙은 선지자의 권면을 듣고 집에 들어갔다가 죽음을 당했다(왕상 13장).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큰 일(구원)에 관한 것이다(행 2장). 신약 시대에 예언은 사도행전에 나타난다. 아가보 선지자가 기근을 예언했고(행 11-27-28), 빌립의 네 딸과 아가보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고난받을 것을 미리 보아서 예루살렘에 가지 않도록 권면했다. 전자의 예언은 이방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을 부조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었고, 후자는 사도 바울을 붙잡았지만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모두 미래의 사건을 본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해석은 본 사람이나 그 예언을 들은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사도 바울은 빌립의 네 딸과 아가보의 권면을 거부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그것은 예언, 절대 신탁에 불순종한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의 예언은 구약 시대와 다른 점이 있는데, 하나님이 주신다는 명령이 없는 것이다. 아가보는 성령으로 말했고(행 11:28), 성령이 말씀한 것을(행 21:11) 말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성령이 하신 말씀을 거역한 것인가? 그리고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으려고 고의로 행동했는가? 예루살렘 교회는 소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바울에게 지도했고, 바울은 지도를 따라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행 21:26).

아가보와 빌립의 네 딸의 예언이 ‘개인적 예언’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한 부분만을 본 것이다. 바울도 그 부분을 동일하게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에 자신이 갈 것을 확신했고, 서바나까지 이를 것을 확신했다. 다만 그 방법을 알지 못했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할 때였기 때문에 피하지 않고 진행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땅끝까지 가는 경륜을 본 것이고, 그 경륜의 과정에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고난 받은 것이 포함된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사도 바울에게 고난은 있었다. 그러나 그 고난에 대한 이해, 아가보는 고난을 피해야 한다하였고, 사도 바울은 그 고난을 지나 로마와 서바나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에서 당할 고난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있다는 예언의 유형은 무엇인가? 고난의 상황을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고난의 상황을 피하는 길을 일러주는 형태이다. 지금도 자기 예언에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가 있을 것처럼 말하는데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오히려 그가 말한 예언으로 고난을 피하는 것을 선택한다면 우상숭배가 될 것이다. 그리고 고난을 피할 길을 알려주면, 듣는 자는 맹목적으로 피할 길을 따르는 것이 대부분이고, 혹 따르지 않더라고 꺼림칙한 마음을 지우지 못 한다. 그것은 전혀 성경적 예언이 될 수 없다.

어떤 예언의 유형은 과거의 죄를 사유(赦宥)하는 행위까지 있다고 한다. 과거의 죄를 알아 지적하고 회개를 종용하며, 예언자로 안수기도로 사죄(赦罪)를 행할까? 또 어떤 예언의 유형은 아들 낳고 딸 낳은 것을 말하기도 한다고 한다. 아들을 딸로, 딸을 아들로 바꾸는 능력까지 행하는지는 모르겠다. 예언으로 대학이나 취업의 합격 불합격 여부를 미리 알려주기도 한다고 한다. 불합격을 합격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까지 말하는지는 모르겠다. 성경은 선지자나 꿈꾸는 자를 죽이라고 명령했다(신 13:1-5).

‘그리스도인’이 행하면 모두가 선(善)이 되는 것인가? ‘자칭 그리스도인’은 한국 교회 안에는 없는가? ‘적그리스도’는 666을 이마에 보이도록 새겨 놓았을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룸은 주의 은혜의 도리를 겸손하게 증거해야 한다. 겸손은 자기경험이 아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자기경험이 중요하지만 자기경험은 주관이고 검증할 수 없다. 검증되지 않은 지식을 타인에게 전하는 것은 자기객관화의 오류일 것이다. 혹 유익이 있으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잠간의 유익, 일시적 유익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2,000년 동안 변하지 않았고, 2,000년 동안 거짓 유형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다양화 되었을 뿐이다.

이제는 “그리스도인인 내가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견해를 주의하고 부정하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자며 구원의 탈락가능성을 주장으로 오용할 것이 아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룸은 자기부정이다. 비록 그리스도인이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자기 주관, 자기 경험을 객관화시키지 말자. 주관적 경험이 아닌 객관화된 복음 문장을 더 많이 창안해서 규모있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추상적인 문장에 배부르지 말고,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문장으로 지식을 이루어야 한다. 복음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예언은 추상적이거나 막연한 것이 아니라, 내 손에 잡히고 이해되고 파악되는 생명의 말씀이다. 예언이 없으면 백성이 무지하고, 예언을 무시하면 백성이 방자하다. 거짓 예언은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고, 참 예언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든다. 방언기도 용례가 없듯이, 예언기도 용례도 없다. 은사는 그리스도인의 거룩 세움을 목표로 한다.

선지자는 주의 예언으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백성을 훈련시켰고, 언약의 땅에서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는 백성을 책망했다. 그리고 메시아께서 오신 뒤에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했고, 신약시대에 선지자는 사도의 사역을 돕는 역할을 했다. 사도의 주 임무는 복음 전파와 구제이다. 구약이나 신약에서 예언은 개인적으로 사용한 적이 없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개인적 예언’이라는 표현은 ‘성경 한 본문’에서 모든 설교자들의 설교가 다름에 대한 정당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설교를 했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 동일한 성경 본문을 설교할 때는 다르게 설교할 수 밖에 없다.

예언을 개인 미래를 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다. 성경에서 예언은 주께서 주신 계시, 즉 구원 이룸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밝히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예언은 오실 메시아를 지시하는 것과 여호와 하나님의 정직(말씀대로 이루어짐)을 계시하는 것이다. 신약에서 예언은 오신 메시아를 지시하며, 현재 어린양을 지시하며, 미래에 다시 오실 주 하나님을 지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는 완료되었다. 우리는 성경 66권 충족성을 믿는다. 그 완성된 구원 경륜과 성령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에서 풍성한 예언이 나온다. 지금도 주 예수께서는 교회의 사자를 통해서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자기 백성에게 전하시고 계신다(계 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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