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에 대한 새로운 관점,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루터
마크 마테스, <루터의 신학적 미학:재평가> 이신열 역, (부산: 개혁주의학술원, 2024)
우리는 루터칼빈신학회(대표 고경태 박사)를 조직해서 루터신학과 칼빈신학을 기본으로 연구하고 있다. 이번에 개혁주의학술원에서 마크 마테스의 Martin Luther's Theology of Beauty: A Reappraisal(2017)를 이신열 교수로 <루터의 신학적 미학: 재평가>로 번역해서 출간했다. 루터칼빈신학회는 한국 신학계에서 루터에 대한 객관적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미력하지만 루터 이해와 칼빈 이해를 병행한다. 그래서 좀 더 역사적 개혁신학을 구축하려고 노력한다. 장로교 신학자들은 장로교의 근원을 알비파, 왈도파, 칼빈으로 세우려고 한다. 보헤미아로 피신한 왈도파와 알비파에서 잔 후스가 배출되었고, 잔 후스(Jan Hus, 1372-1415)가 화형으로 순교한 뒤 100년에 마틴 루터가 출현했다. 왈도파를 공유한 존 칼빈과 마틴 루터는 개혁파의 원형을 이룬다. 다만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은 다른 국가에서 활동하면서 갈등이 있었는데, 마틴 루터 사후에 좀 더 심했다.
마크 마테스(Mark Mattes)는 미국 루터파 연구자로 그랜드 뷰 대학교(Grand View University) 신학부에서 교수로 재직중이다.
마테스의 글을 보면 루터의 글에 대한 관통과 함께 다양한 신학자의 글에 대한 박식함이 드러난다. 이런 글을 읽을 때면 우리가 더 많은 번역을 이루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구 사상의 저술이 번역되었다는 것은 전문화가 되었으며 서구 사상을 능가할 준비가 된 것이다. 우리 신학 연구자들의 연구도 원천적 지식의 성과물들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어 연구자들의 글이 영어 등으로 번역되어야 할 연구 수준이 발휘되면 우리의 신학의 위상은 교회의 외형과 유사하게 될 것이다.
마테스는 루터의 신학에서 '미(beauty)'가 주효하게 드러나며 반복된다는 것을 파악하고 정리했다. 루터의 사상이 십자가 신학, 숨어계시는 하나님 등으로 신학적 주제에 편중되어 있기 때문에, "재평가"라는 항목으로 '미(beauty)'를 제시한 것이다. '미(beauty)'는 인문학적 분야이지만 신학적 진술에서도 포함된다.
루터와 칼빈에서 나타난 흥분은 달콤함(suavitas)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의 “달콤함을 느끼고 체험”truly feeling its sweetness and experiencing it in ourselves 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가질 수 없다(3, 2, 15). 칼빈에게서 더 빈번하게 나타나지만, 루터의 문장에서도 나타난다. 달콤함은 시편에서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라는 표현을 반복한 것이다. 그런데 마테스는 미(beauty)를 착안해서 연구를 이루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신자가 느끼는 성품이고 지식이다. 저술과 설교에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표현이다. 마테스는 그러한 루터의 표현을 잘 착안했고, 잘 정리해서 저술로 출간했다. 이러한 학문 산물은 연구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한다. 새로운 아이템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루터의 저작을 깊이 탐독하면서 훈련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테스는 "아름다움과 음악"까지 연결해서 제시했다. 그리고 성상에 대한 자세를 제시했다. 예술과 종교에 대한 정립은 쉽지 않는 부분이다. 루터는 성상파괴주의자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에 대해서 좀 더 유연하고 적극적인 자세가 있다. 우리는 루터의 정통주의를 4형식으로 규정했다. 4형식 정통주의는 7차 공의회에서 성상숭배를 인정하지 않지만 성상숭배를 배격하지 않는 것이다. 칼빈의 정통주의는 2형식 정통주의로 규정했다. 7차 공의회 중에서 1-4차(451년 칼케돈 공의회)까지 정통주의로 세우며, 787년 성상숭배를 배격하는 것이다. 참고로 1형식 정통주의은 2차(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까지만 인정하는 것이며, 3형식 정통주의는 7차 공의회를 합당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루터는 성상에 대해서 아디아포라, 개방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래서 더 아름다움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마테스는 생각했을 수 있다.
칼빈은 아름다움에 대해서 좀 매서운 면이 있다. 음악도 시편가사에 단조로운 선율의 곡조로 찬송했는데, 루터는 민족의 곡조에 개인적인 체험의 가사로 찬송했다. 그리고 칼빈은 연극, 성상 등에 매섭게 적용했다. 그러나 루터는 그러한 부분에 관대한 것이라고 했다. 마테스는 성상파괴주의자의 문장을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finitum non possit capere infinitum)는 것이고, 루터는 유한에 무한에 포용되었다(finitum possit capere infinitum)는 것으로 제언했다. 그러나 다른 연구물에서는 루터도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finitum non possit capere infinitum)를 견지했다고 한다. 루터에게는 두 상반된 면이 함께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루터의 신학을 단순하게 규정하거나, 천편일률적으로 제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루터에 대한 연구를 보면 장님 코끼리 만지기(群盲撫象)의 전형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연구자의 새로운 시도는 도전이 된다. 루터 신학에 대해 깊은 이해가 된다면 개혁신학을 좀 더 무겁게 구축할 수 있을 것 같다. 루터 신학에 대한 이해가 없는 개혁신학은 가벼운 산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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