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 강사로 평범한 탁발수도사였다. 그가 고뇌하며 성경을 연구하면서, 교회에서 성행하던 면죄부에 대한 궁금증이 확정되었고, 만성절 전날 1517년 10월 31일 <95개조 논제, The Ninety-five Theses>을 비텐베르크 예배당 정문에 게시했다. 1517년 루터가 이신칭의 체계를 선포한 것이 아니다.
95개조 반박(The Ninety-five Disputation) 게시일을 역사의 분기점으로 세운 것은 후대의 일이다. <95개 논제>의 글은 당시에 급부상한 인쇄 기술을 통해서 유럽 전 지역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루터는 교회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 후 6개월 후 1518년 4월 말 남부 독일 하이델베르크(Heidelberg)로 토론을 위해 이동했다.
루터가 95개 논제를 발표했을 때에 당시 교황은 가볍게 여겼다. "루터는 술취한 독일인이다. 술이 깨면 생각이 달라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비텐베르크에서 하이델베르크는 약 535Km의 먼 거리였다. 루터가 이동하는 거리에 있을 위협과 암살을 대비해서 선제후 적센의 프리드리히 3세(1463-1525)가 보호를 위한 조치를 했다. 그는 섹소니의 선제후(Prince-elector of Saxony from 1486 to 1525)였고, 현공(the Wise)으로 불린 위인이다. (*선제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사람으로 7명(성직자 3명, 봉주 4명)으로 구성되었고, 확정된 숫자는 아니다)
교황청은 어거스틴 수도원장을 통해 95조에서 말하려는 루터의 의도가 과연 무엇인지를 면밀히 확인하려 했다. 루터는 1518년 4월 26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강당에 토론을 위해 섰다. 어거스틴 수도회 소속 수도사들과 몇몇 교수들 그리고 많지 않은 학생들이 함께 했다. 그런데 루터는 그곳에서 면죄부에 관련된 95개조 논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루터는 교회의 잘못된 신학과 철학에 대해서 40논제를 제시했다. 하이델베르크 논박(Heidelberg Disputation, 1518년) 혹은 '논제'로 사용하기도 한다. 신학적으로(28항) 그리고 철학적으로(12항) 나누어 총 40개항으로 자신의 입장을 제시했다. '논박'보다 '논제'라고 여기는 것은 루터의 논제에 대응되는 문장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중세 로마 카톨릭 신학 체계가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욕되게 함을 지적했다.
루터에게는 비텐베르크 밖에서 자신의 종교개혁 사상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비판자들을 대해서는 입장을 보다 확실히 대변할 수 있는 기회였다. 루터는 이 토론문의 머리에서 바울 사도가 선택함을 받은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자 어거스틴을 그리스도의 가장 신실한 해석자로 일컬으며 잠언 3장 5절 하반절 말씀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를 근거로 제시했다.
루터는 중세교회의 오류를 크게 두 가지로 지적했다. 첫째, 이신칭의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구원을 위한 인간의 공로는 무가치하다. 둘째,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이다. 십자가 신학의 주요 어휘는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었다.
당시 막강한 권세와 화려한 교황청이 보여주는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은 잘못이다. 당시 1518년 하이델베르크 토론에 모인 학생들 가운데 후일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로 부상한 마르틴 부처와 같은 탁월한 인물들이 나왔는데, 그들은 독일 남서부 지방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하이델베르크 토론 40항 가운데 몇 항을 번역 인용한다.
가장 거룩한 생명의 교리인 하나님의 율법은 사람들을 의로 이끌지 못 한다. 도리어 그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데 거대한 하나의 장애물이다(1항). 인간의 공로는 눈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하고 빛이 나지만, 실상은 내적으로 볼 때 죽음에 이르는 죄악을 벗어나지 못한다(3항). 은혜와 믿음 없이는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행15:9). 그리스도 없이는 인간은 그 어떠한 선행도 행할 수 없다(9항). 율법은 겸손하게 하고, 은혜는 용기를 주며, 율법은 두려움과 분노를 일으키고, 은혜는 소망과 긍휼을 불러일으킨다.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게 하고, 죄의 인식을 통해 겸손하게 하고, 그 겸손을 통해 은혜에 이른다. 그래서 하나님의 낯선 행위가 비로소 자신의 행위로 신뢰한다(16항 해설).
1521년, 루터는 95개조 논제(1517년), 하이델베르크 논제(1518년)로 야기된 여러 신학적인 입장들에 대한 변증을 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알 5세가 주재하는 보름스 제국의회에 참여하라는 명을 받았다. 루터가 머무르던 비텐베르크에서 보름스까지 거리는 500km가 넘는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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