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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justificatio)에서 전가(imputatio), 법정적 개념으로서 의(義)
imputatio, imputation은 전가(轉嫁)라고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轉嫁(옮길 전/떠넒길 가)는 우리말이 있는 것에 대칭해서 번역하여 정착된 신학 용어이다. 진세근 교수(서경대)는 전가가 우리사회에서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용례이고, 성경에서만 긍정적으로 사용한다고 제시했다(轉嫁<전가>, 중앙일보, 2020, 06, 06). 전가(轉嫁)는 법적 용어로 책임전가(責任轉嫁)가 기본의미이다. 하나님께 반역한 상태에서는 불법적인 책임전가가 사회의 기본구조이다. 이것을 밝힌 학자는 르네 지라르(Rene Girard, 1923-2015)의 “희생염소(sacpe-goat)” 구조이다. 정일권 박사는 르네 지라르가 “기독교를 구했다”(Aber Gott ist gut: René Girard rettet das Christentum)고 평가하는 것을 밝히며, “희생염소 구도에서 벗어난 유일한 체계가 기독교”라고 제시하고 있다. 최근 성공회 신학자 톰 라이트는 전가 교리를 심각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응해서 존 파이퍼 목사가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있다. 톰 라이트나 존 파이퍼는 르네 지라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가 체계는 지라르의 체계에 의하면 일반 문화 범주에 있기 때문이다. 톰 라이트가 전가 교리를 비판하는 것이 어느 정도 타당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는 전가, imputatio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화가 없이, 단순하게 “전가(轉嫁)”라고 번역된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우리 어휘와 번역된 신학 어휘의 갈등이 있는지에 대한 반성이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는 ‘은총’과 ‘은혜’를 혼용해서 사용하는데, grace(gratia)에 대칭되는 번역이다. 한 단어는 한 단어로 대칭해서 번역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천주교는 은총이라고 규칙적으로 사용하는데, 개신교에서는 혼용 혹은 분별없이 사용하고 있따. 천주교도 왜 은총이라고 대칭해서 번역하는지는 잘 알지 못하겠지만, 은총이 “왕이 준 (값없는) 선물”로 국어 사전적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일반 용어와 신학 용어는 같은 모습을 하지만 다른 개념을 갖는데, 신학 용어에는 반드시 신학화된 개념이 있어야 한다. 교회에서 일반 용어와 같은 개념을 사용한다는 것은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그런데 전가(轉嫁)는 신학 개념과 일반 개념에 차이가 없다. 그것은 법적으로 문제를 떠 넘겨 해결하는 방식이다. 내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혹은 타인으로 말미암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전가이다. 능동 전가(스스로 책임을 감당함)가 있고 수동 전가(억지로 책임을 감당함)가 있을 것이다. 룻기에서 보아스와 룻의 계대제도를 보면 아무개는 형제의 의무를 포기했고, 보아스는 차선 의무자이지만 형제의 의무를 수행했다. 전가는 지극히 법적인 개념이다. 법적, forensic이다. 이신칭의는 법정적 칭의라고 규정하고 있다(forensic justification). 16-17세기 개혁된 교회는 교회 안에서 형성된 본질적 의(essential righteousness)에 대해서 심각하게 방어해야 했다. 본질적 의는 칭의된 후에 내면이 본질적으로 변화된다는 개념이다. 이것을 방어하면서 구체화된 개념이 법정적 개념이다. 백충현은 칭의에서 본체주의(substantialism) 혹은 본질주의(essentialism), 관계주의의(relationalism) 등으로 칭의 이해를 구분했다. 지금은 법정적 칭의를 견지하는 우리는 관계주의 칭의의 도전에 있다. 루터는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tih)는 우리의 외부에서(extra nos) 온 낯선 의(alien righteousness)라고 정리했다. 루터는 두 가지의 의, 외부의 의와 내부의 의로 제시하는데, 내부의 의(내면적 의)의 자리에서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을 진행한다. 칼빈은 이신칭의를 낯선 의 개념이 아닌 그리스도와 연합 체계(unio mystica cum Christo)로 세웠다. 그리고 중생 안에 칭의와 성화를 배치시켰지만, 칭의 뒤에 성화(죽음과 살림/modificatio et vivicatio)로 구도화했다. 그런데 잉글랜드 청교도 독립파 연구자들은 앞의 칭의가 아닌 뒷부분 성화에서 의(義)를 두 종류로 구도화시켰다. 성화에 대해서 루터는 십자가 신학을 칼빈은 죽음과 살림을 구도화시켰다. 루터와 칼빈은 선포된 복음을 강조하는 사역자였다. 그래서 성경해석이 매우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된다. 칼빈은 성경해석을 위해서 <기독교강요>를 증보하며 집필했다. 루터파에서는 마티아스 플라키우스(Matthias Flacius, 1520-1575)가 루터의 sacra 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를 원리에 근거해서 <성경 이해의 길잡이>(Clavis Scripturae Sacrae, 1567년)을 정립했고, 현재 게르하르트 마이어(Gerhard Maier, 1937-) 박사가 <성경해석학>으로 정립하고 있다(송다니엘, 박해경 번역, 영음사). 루터파는 멜랑톤파(Philippists)와 순수-루터파’(Gnesio-Lutherans)가 나뉘어 논쟁했지만(adiaphora), 오시안더 문제 사상을 정리하는데 마음을 합했고 결국 일치신조(1577년)로 화합했다. 칼빈도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에 대해서 명료하게 비판했다. 개혁된 교회는 “본질적 의”를 강조하는 위협을 효과적으로 방어해서 “법정적 칭의” 개념을 확립했다. 그런데 19세기부터 형성된 “관계적 의미(Verhältnisbegriff)”를 법정적 칭의 진영에서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하고 있다. “관계적 의미”를 주장에 대한 문제 중 한국 교회가 빠르게 인지한 것은 “구원의 확실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최덕성 박사는 이것을 “유보적 칭의”라고 개념화했다. 관계적 의미를 주장하는 진영에서는 법정적 의미인 전가 교리를 인정할 필요가 없다. 관계적 의미를 주장하면, 법정적 선언, 의롭다 선언하시는 주 하나님의 법정적 행동에 대해서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관계적 의미를 주장하는 진영은 두 부류인데, 유럽의 종교사학파와 영미의 새관점학파이다. 루터가 전가(轉嫁, imputatio)에 대한 것보다 외부에 주어진 낯선 의와 십자가 신학을 강조했다. 루터는 의인이 본질적으로 의로워지지 않는다고 확신했는데 그것을 증명하지는 못했다. 증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의인이면서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고 규정하며, 십자가 신학을 주도했다. 참고로 simul justus et peccator의 역(逆, simul peccator et justus)은 성립하지 않는다. 로마 카톨릭의 의의 전이 구조는 성사(聖事)를 통한 주입(infusio)이다. 현대 신사도주의의 의의 전이 구조는 분여(impartation)이다. 임파테이션(분여)는 “나누어주다”는 의미인데, 영적 지도자의 행위로 영적인 복이 분여된다는 구도이다. 천주교는 사효론(ex opere operato)으로 어떤 예전과 매개를 통해서 분여시키는데, 신사도주의는 지도자의 카리스마를 통해서 어떤 영적인 유익이 전달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천주교의 인효론(人效論, ex opere operantis/by the work the worker)의 범주에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infused and imparted righteousness 구도는 로마 카톨릭주의의 범주에 있다고 평가해야 한다. 두 개념은 모두 관계적 개념(Verhältnisbegriff)을 추구하고 있다. 교회, 사역자, 신(神)과 관계하면서 어떤 효력이 발생한 의미이다. 전가(轉嫁)는 어떤 성질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전가는 법적인 의미이고, 주입은 관계적(교회와 직분자) 의미이다. 최덕성 박사는 전가(imputatio)와 주입(infusio)이 양립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전가와 임파테이션은 더 양립될 수 없다. 그런데 칭의 뒤에 부분에서 루터는 십자가 신학을, 칼빈은 죽임과 살림을, 잉글랜드 청교도주의는 이중전가를 주장하는 것 같다. 이중칭의는 레겐스부르크 회의(1541년)에서 결정되었지만, 루터와 교황 모두가 거부해서 결렬되었다. 필자는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은 언약에 근거한 삶을 추구했다고 평가하고, 분리파 청교도(회중파)들은 후천년적 종말론에 근거해서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도성을 이루려고 했다고 평가한다. 대한민국 장로파는 박형룡 박사가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소개함으로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으로 구원을 이해하고 있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구원사(historia salutis)로 이해했고, 종교개혁자들은 칭의(first/initial justification)와 성화(second justification) 구도로 구원을 이해했다. 근대에 와서는 최종 칭의(final justification) 개념과 영원한 칭의(eternal Justification) 개념까지 등장했다. 언약 이해는 관계적 개념이 아니라 법정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언약은 신과 직접 교류하는 것이 아니라, 조약문을 근거해서 진행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중칭의는 종교개혁을 발발하면서 전혀 합의되지 않은 부분이다. 개혁파들은 레겐스부르크 회의와 다른 이중칭의를 구도화시켰는데 은혜로 죄사함과 의의 전가(the gratuitous pardon of sin and the imputation of righteousness)이다. 이중칭의(duplex justificatio)와 이중은혜(duplex gratia)가 일치된다면 개혁파 체계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의의 전가”도 “오직 믿음”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오직 믿음을 강조하면서 놓친 것이 하나있는데, 그것은 믿음은 “선포된 말씀”에 의해서 성장한다는 것이다. 루터, 칼빈,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에게는 “선포된 말씀”이 명확하게 강조되고 있다. 신학은 교회를 세우는 학문이 일차 목표이기 때문에, 교회 사역자에게 “복음선포와 거짓분별”을 부착시키는 것을 목표한다. 주장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이 합당한 훈련이다. 여러 신학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데, 사역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을 해석할 능력(신학 진술 능력)과 복음을 선포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칼빈은 전자만 있고 후자는 없는 직분인 박사(doctor) 직분을 인정했다. 그것은 말씀(복음선포)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배려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에 있는 여러 논의에서 루터의 선언, 이신칭의에 머물 수 있다면 합당한 가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루터는 이신칭의를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이라고 했고, 칼빈은 그 선언을 인정했다. 교리는 개인 자격으로 세울 수 없다. 루터의 선언을 칼빈이 인정했기 때문에 이신칭의는 합당한 교리적 권위를 갖고 있다. 칼빈파의 신앙고백서에서 이신칭의는 명확하게 고백되고 있다. 이신칭의 지붕 아래에서 많은 논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신칭의를 공격하는 거대 진영 앞에서 지붕 아래서의 싸움을 멈출 수 있어야 한다. 유럽이 기독교 사회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의 공격에 신교와 구교가 싸움을 멈추고 이슬람에 공동으로 대처했기 때문이다. 거대 진영이 앞에서 포진하고 있는데, 지붕 아래서 싸움을 하고 있다면 그 집안은 존립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은 삼위일체, 그리스도 양성교리 그리고 이신칭의이다. 필자는 이신칭의를 루터가 확립한 것이 아닌, 1세기 예루살렘 공회의에서 결정한 것(한 믿음으로 한 교회가 됨)을 루터가 복원시킨 것으로 평가한다. “칭의와 전가 구도”는 “법정적 의미”로 “이신칭의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 사는 것은 은혜의 교회, 개혁된 교회의 모습이다.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처럼 주님께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지붕없는 감옥에서 순교할 수 있다면 세상에 주 예수를 증거한 선포이다. 칼빈파는 여러 지역에서 형성되려 했지만 지역에서 명맥만 유지한 사례(프랑스, 하이델베르크 등)가 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와 네덜란드는 효과적으로 칼빈의 가르침이 자리 잡았다. 스위스 제네바 대학에 파렐, 칼빈, 베자, 낙스의 순으로 부조가 있을 뿐 제네바는 칼빈의 교회 성격을 상실한 것 같다. 16세기의 루터와 칼빈에 의해서 구체화된 이신칭의 체계를 가장 귀하게 여기는 지역은 대한민국 장로파이다. 미국 침례파 존 파이퍼 목사도 전가 교리에 대해서 변호하고 있다. 조금 더 학문적으로 우리에게 부여된 이신칭의 체계를 밝힌다면 다시 새로운 개혁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기 상태를 이해하며 규정할 수 없는 존재인 것 같다. 창조주 하나님의 상태나 자기 인간의 상태를 합리적 언어 체계로 설명할 수 없는 것 같다. 모든 이론은 약점과 맹점이 있다. 그런데 기독교 신학은 이해를 추구하는 분야가 아니다(스콜라 신학, 칼 바르트는 이해를 추구하는 체계임). 또한 열성을 추구하는 종교도 아니다. 기독교는 신(神)을 설정하고 묵상하는 종교도 아니다(신비주의, 관상주의). 기독교는 믿음을 고백하는 종교이고, 자기가 믿는 주의 이름을 고백하며 증거하는 종교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소금으로 착한 행실을 보여야 하고, 세상 속에서 빛으로 주의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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