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목사 수필

계시와 성경 그리고 역사, 고경태 박사

형람서원 2024. 10. 18.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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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와 성경 그리고 역사

고경태 박사

계시와 성경에 머물게 되면 균형잡힌 신학 체계를 구성하는 것에 부족함이 있다. 계시와 성경에 역사 이해가 있어야 한다. 역사 이해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해이고, 교회사이고, 시간에 대한 이해이다. 우리시대의 기본적 역사 이해는 변증법적 역사 이해가 다수이다. 기독교 역사 이해는 구속사적 이해가 다수이다. 구속사적 이해도 변증법적 사관으로 보면 점진적 증진이 될 것이고, 성경적 관점이면 무질서의 증가가 될 것이다. 최정호는 역사 이해를 소실과 전진으로 구도화시켰다. 기독교 지역의 상실과 새로운 기독교 지역의 형성으로 교회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절대적이라는 구도이다.

계시와 성경은 신학적 분야이고, 역사는 역사적 분야이다. 그래서 두 요소를 배치한 성경해석이 역사적 문법적(신학적) 해석 방법(historical-grammatical method)이다. 게르하르드 마이어 박사는 ‘문법적’에 ‘신학적’을 넣어 해석학 구도화를 제시했다. 기본적 신학 구도는 계시 문서에 근거한 성경해석이고, 역사비평학을 거부하는 체계로서의 성경해석이다.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도 역사적 가치에 대한 확증이며 권위이다. 예배가 계시적 기구이고, 계시 안에 역사인 사도신경이 포함되어 예배를 구성한다. 그래서 예배의 공법적 기능과 함께 영적이고 계시적 기능을 수행한다.

세상 속에 있는 성경과 계시는 세상의 역사와 함께한다. 그 구조에 대해서 좀 더 면밀한 이해가 신학에서 필요하다. 신학은 신론에서는 신정론, 기독론에서는 성육신 등이 계시와 역사의 접촉이다. 특히 구원론과 교회론은 역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대한 담론이고, 종말론은 역사의 종말에 대한 담론이다. 그래서 신학에서 역사에 대한 이해가 긴밀하게 요구된다.

계시적 종교로서 기독교와 역사적 종교로서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는 역사적 종교로서 기독교는 체험적 공동체가 아니라 공법적 공동체로 제시한다. 역사에서 체험에 대한 인식, 공유, 증진을 추구하는 것은 역사 의식을 흩어버리는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교회법(교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추구하는 것은 곧 계시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것이고, 교회 조직을 영적으로 굳게 세우는 역할을 할 것이다.

역사에 남겨진 교리는 인간이 만들었지만 이해 문장이 아니다. 간혹 교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유가들이 많다. 교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교리 존재 목적을 왜곡한 것이다. 교리는 이해를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리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 즉 한 믿음을 고백하기 위한 작업에서 파생된 법(당시는 국가법)이다. 그러나 신학은 이해를 추구하는 목적이다. 즉 교리와 신학은 어떤 면에서는 상관되지만, 어떤 면에서는 대립될 때도 있다. 즉 교리를 부정하거나 해체하려는 신학은 교리에 대치된다고 보아야 한다. 교리를 세우는 신학이 필요하다. 교리는 반드시 합리적이지 않고, 합리적일 필요도 없다. 그러나 신학은 합리를 추구하고 논리적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인간의 합리성과 논리의 일관성으로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이러한 과정이 교회에 허용되는 것은 신학 수행자, 교리 작성자, 교회 사역자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무한 자비와 사랑으로 말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교리를 대립하는 신학을 배격하고, 교리를 따라 신학하는 것을 추구한다. 혹자는 교리를 따라 신학함을 교리에 맹종하고 성경의 권위를 희석한다고 비판하는데, 교리에 대한 무지이고, 성경의 권위에 대한 무지이다. 성경으로만 사유하는 학생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 반드시 교리 동행이 함께 해야,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합당하게 섬기며 전파하며 계승할 수 있다. 신학 훈련은 자기 사유 체계를 확립하여 전파하는 것에 있지 않고, 교회를 세우는 복음의 내용을 세우며 전파하는 것에 있다.

신학논증을 통해서 자기정당성이 증명된다면 신학의 사유화이다. 신학논증의 승리를 통해서 교회가 해롭게 된다면 이단이고 적그리스도이다. 교회의 신학논증에서 이단이 이긴 적이 없다. 그것은 복음의 사람이 결코 이단적 사설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단적 사설이 결코 후퇴한 적도 없다. 항상 정죄되었지만 항상 변형, 우회, 얼렁뚱땅 존재하면서 그 가치를 확산시켰다. 현재 사회에서 삼위일체를 배격한 유니테리언(세르베투스, 소시니안의 후예)주의는 대세를 이루었다. 유니테리언(여호와의 증인)은 자기 조상이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1553), 아리우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통교회에서 유니테리언이라고 밝히지 않고서 활동하는 학자들이 존경을 받고 있다. 대표 학자는 칼 바르트이다. 칼 바르트의 신학에 삼위일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칼 바르트를 왜곡해서 칼 바르트를 추앙할뿐더러,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 자기까지 높이는 것이다. 칼 바르트에게는 정통 교리의 삼위일체가 없다. 그가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의 견해를 뿌리(Wurzel der Trinitätslehre)라고 제시했지만, 그 뿌리(흔적, 자취)와 동일성을 거부한다. 삼위일체를 거부하면 가장 가깝게 세르베투스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이고, 그의 그늘에 들어가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295?~373)는 삼위일체(동일실체)를 지키기 위해서 고난을 받았고,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를 제거하려다가 죽임을 당했다.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야의 결정을 지킨다는 이유로 다섯 차례 유배를 당했으며, 주교직 46년 동안 약 20년을 유배 생활을 했다. 70세의 노년에서도 5번째 유배(365~366)를 당했다. 삼위일체를 지키려는 아타나시우스의 고난이나 삼위일체를 헤치려는 세르베투스의 고난의 양은 같을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가치이다. 세상의 가치에서 세르베투스의 의지는 큰 성공을 거두어 다수의 사람들이 유니테리언이 되었다. 소수의 사람이 아타나시우스의 믿음에 동의해서 삼위일체 믿음의 길에 서 있다. 계시와 역사의 충돌이다. 주의 계시는 세상에서 약화되고 있고(소실) 세속의 힘은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은 결코 쉬지 않고 전진한다(행 28장).

 

형람서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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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선생은 박형룡 박사, 서철원 박사, 최덕성 박사입니다. 서철원 박사(믿음고백)와 최덕성 박사(복음전함)을 묶어 “주 예수를 믿어 힘써 복음을 전하자”가 형람의 구호입니다. 한국 장로교회의 출옥성도, 1940년 "장로교인언약" 등 거룩한 교회의 유산을 복되게 생각하며, 교회 이룸을 추구합니다. 이기선 목사님, 한상동 목사님, 김현봉 목사님 좋은 믿음의 유산을 복되게 여깁니다. 한국 교회 신학의 정수가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 신학에 기여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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