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최중진 목사, 대한예수교자유교회, 부안, 정읍, 임실, 김제, 고창
1) 최중진의 자유교
최중진은 1870년 전북 정읍시 덕천면 상학리에서 태어났다. 정읍에서 성장했고 순창으로 이주했는데, 1894년 동악농민군의 지도자였던 매부를 따라 동학군에 가담했다. 동학농민군이 순창해서 패배하며 매부가 처형되면서 농민군은 해산되었다. 최중진은 순창을 피해 전주에 들어가 테이트(최의덕) 선교사, 1892년 레이놀즈, 테이트, 젠킨 등이 사역했고, 테이트의 전도로 회심했다. 그는 테이트의 조사가 되었고 테이트 구역에서 전도활동을 했다. 최중진은 1909년 평양신학교 제2회 졸업생으로 호남의 첫 졸업생이었다. 그는 1909년 매계교회(태인면 매계리)를 설립했다.
선교사를 반대하는 기치를 내걸고 1910년 자유교(自由敎)를 설립했다. 전라대리회는 최중진 목사를 제명했고, 한국 교계의 1호 제명인사가 되었다. 군산 지방으로 편입된 부안 지방을 자신의 지역으로 돌려 줄 것, 중등학교를 세워 줄 것, 집 한 채를 사 주어 선교사업에 재정적인 어려움이 없게 해 줄 것 등 다섯 가지 요구 사항을 요구했으나, 전라대리회에서 그의 요구를 거부할 뿐 아니라 그의 잘못된 요구를 사과하라고 하자 이에 반박하여 자유교회를 세웠다. 자유교는, 부안 정읍 임실 김제의 교회가 부화해서 큰 소동을 일으키자 전북 대리회와 이어서 노회가 그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 세력은 1911년 평북 대리회 지역, 특히 의주까지 확산되었다. 그러나 전북대리회는 자유교가 스스로 없어졌다고 보도했다.
최중진의 문제는 반 선교사 정서에서 비롯된 분리 분파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박용규는 ⑴ 자유교의 급속한 확산 ⑵ 선교사들의 치리를 거부하고 장로회 정치에 불복한 점 그리고 ⑶ 교회의 피해가 컸던 것을 그 원인으로 지적했다.
최중진의 반 선교사 기치는 선교사들의 치리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그런 행동은 초창기 교회뿐만 아니라 일본의 침략과 맞물려 나라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 것이다.
1918년 김장호 목사 조선기독교회, 진보적 성향 신학으로 교파를 구성함
김장호는 1905년 북장로교 선교사 쿤스(E. W. Koons, 군예빈)에게 세례를 받은 후, 191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제7회)하고, 황해노회의 파송을 받아 황해도 봉산군 산수면 신원교회를 담임했다. 그런데 그가 신학적인 문제로 비판을 받기 시작한 것은 두 번째 목회지였던 사리원 남쪽 홍수원교회에서 자신의 자유주의 사상을 피력하였기 때문이다.
김장호는 현대과학과 상치되는 성경의 초자연적 기사들을 모두 자연적인 현상으로 해석했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을 신봉하고 있었던 북장로교 선교사 커(W. C. Kerr, 공위량)의 조사로 있으면서 그 사상의 영향을 깊게 받았던 것이다.
김장호의 새로운 성경해석이 파문을 일으키자, 황해노회는 그의 총대권을 박탈하고 이어서 6개월 휴직을 결정했다. 그러자 김장호는 1918년 7월 7일 제명된 신원교회를 차지하고 반(反)선교사와 민족주의적 조선기독교를 표방하는 ‘조선기독교회’를 창설했다. 복음이 전래된 지 불과 반세기가 채 되기도 전에 주류의 신앙 노선에서 이탈한 종파가 나타났던 것이다.
1923년, 이만집 목사, 대구 자치교회. 대구제일교회 이만집 목사를 중심으로 노회를 이탈하여 1923년 3월 11일에 대구 예수교회 자치선언(自治宣言)을 하였다
송현강 박사(교회사학자)
1923년 3월 18일 대구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이만집 목사가 자기를 지지하는 이들과 함께 선교사들의 지도에서 해방된 자치교(自治敎) 설립을 선언했다. 이만집 목사는 평양신학교 제10회 졸업생(1917년)으로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그 이듬해 남정정교회 동사목사로 부임해 북장로교 어드만(W. C. Eerdman, 魚塗萬) 선교사와 함께 그 교회를 섬겼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남성정교회 조사 김태련과 함께 대구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 투옥되어 3년 간 옥살이를 할 정도로 민족의식이 강했다. 그러나 출옥 후 얼마 되지 않아 자치교를 설립했던 것이다.
이 사건의 발단은 1921년 5월 대구선교부에서 운영하던 계성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사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학생들의 처벌을 둘러싸고 남성정교회 당회와 경북노회가 대립하면서 노회를 주도하는 선교사파와 이만집파 사이에는 심한 논쟁이 벌어졌고, 노회는 이만집 목사를 포함하여 당회원들을 치리하였다. 결국 이만집 목사는 ‘선교사의 정신지배’를 받는 경북노회를 탈퇴하고 자치교회를 설립하겠다고 선언하였다.
1946년 남부총회(32회 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교단 신학교로 인준함
평북 선천에서 김린희 전도사, 1946년 재건교회. 최덕지 전도사(1901-1956) 재건교회 세움.
일장기와 가미다나가 있던 예배당...을 거부하고 재건교회 설립
경남노회에서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1946년 고려신학교를 설립함.
한국 개신교 교단수, 1957년 13개 교단에서 2013년에 232개로 증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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