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Twitter

[신학논단]거듭남에 대한 바른 고찰(考察)

형람서원 2024. 8. 24. 22:24
728x90
반응형

[신학논단]거듭남에 대한 바른 고찰(考察)

최 낙 범 박사(총신 교수. 새순교회)

오늘 날 한국교회는 사회구원보다 개인구원에 집중하며 구원문제를 강조해 왔다고 본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회를 대상하기보다 개인을 대상으로 구원사역을 전개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사회구원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자들이 복음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개인구원이 성경적임을 알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 결과 교회의 존재 목적인 구원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다.

여기서 구원사역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이루어 놓으신 일로서 성령이 그의 구속을 선택된 자들의 마음과 삶 속에 적용하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이때 성령이 선택된 자를 부르신 후 그리스도의 구원사역 적용의 사실상 첫 번째 단계인 거듭남(중생)은 더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거듭남이 그 다음에 이루어지는 성령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결정적 단초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거듭남에 대한 판단기준이 분명하지 못하다 보니 거듭남의 유무를 결정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예컨대 자신은 거듭났다고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거듭났습니까? 언제 거듭났습니까? 몇 시에 거듭났습니까? 라는 질문 앞에 머뭇거리거나 당황하게 된다. 그러다가 혹시 내가 구원 못 받은 것 아닌가. 나중에 지옥에 가는 것 아닌가 하면서 심한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또 다른 문제는 자신이 거듭났다고 착각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이 구속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직분자 노릇을 하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거듭나지 못한 위선자들의 놀이터가 되어 있다는 우려 섞인 평가가 난무할 정도이다. 이런 현실은 구속공동체인 교회의 건강을 생각할 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거듭남의 선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구원서정의 첫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는 거듭남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고찰하는 것은 신앙인들 개인뿐 아니라 구속공동체인 교회를 위해서도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 이를 위해 거듭남의 개념, 거듭남의 필요성, 거듭남의 대상, 거듭남의 시기, 거듭남의 방법, 거듭남의 표지 등을 살펴보므로 거듭남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거듭남의 개념은 무엇인가? 거듭남(Born again)이란 단어는 "거듭나야 한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또는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말씀들에 나타나 있다. 거듭남에 대한 어원적 고찰을 보면 명사로는 파린게네시아(παλιγγενεσία; regeneration 중생)인데, 이 단어는 파린(πάλιν;again 다시)과 겐네시스(γέννησις;birth 출생)의 합성명사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3:5)이라는 말씀에 유일하게 나타나 있다.

거듭남이 동사로는 '아나겐나오'(άναγεννάω;to; beget again 다시 태어나다. 위로부터 태어나다)인데, 이 단어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벧전1:3)와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벧전1:23), 그리고 "거듭나지 아니하면"(요3:3)과 "거듭나야 하겠다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3:7)라는 말씀에 나타나 있다. 결국 거듭남을 영어로 직역하면 'born from above'로서 '위로부터 출생한다.'라는 말이고, 학술적인 표현으로는 regeneration이다.

이런 이해 속에 거듭남이란 윤리적으로 새로워진다는 뜻이 아니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 이는 어떤 사람이 먼저 죽었음을 전제하고 있다. 이 말은 사람이 죽었다고 판단되기에 거듭나야 된다는 것이다. 이때 죽음은 사람의 육체가 아니라 사람의 영혼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죽음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의 영적관계가 끊어졌음을 뜻한다. 따라서 거듭난다는 것은 죄로 인하여 죽었던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거듭난다는 것은 죄로 인해 죽은 영혼이 부활하는 것, 즉 영적부활(spiritual resurrection)을 의미한다.

이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라는 말씀에 잘 진술되고 있다. 이때 ‘허물과 죄’는 모두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난 상태를 나타낸다. 하지만 ‘허물’은 주로 외적인 행위와 관련된 도덕적 실패를 가리키는 단어로서 인간의 연약함과 실수를 반영한다. 반면에 ‘죄’는 인간의 내적인 상태와 본성에 깊이 뿌리박혀 있음을 가리는 단어로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근본적인 반항을 의미한다.

이어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주권적인 의지로, 그의 초자연적인 의지로 죄로 인해 죽은 우리의 영혼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입하므로 영적생명을 다시 살리시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거듭남이란 죄로 인해 죽은 영혼이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거듭남이란 부모로부터의 자연적 출생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적 출생을 말한다.

예컨대 돌감나무에서 참 감람나무열매 맺히려면 돌감나무의 가지 하나를 잘라내고 그곳에 참 감람나무의 가지를 접붙이게 되면 참 감람나무의 생명이 유입하게 된다. 이에 겉은 돌감나무이지만 속은 참 감람나무의 성향을 지니므로 참 감람나무 열매를 얻게 된다.

결국 거듭남은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참 생명이 들어오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람의 영혼을 지배하는 것을 말한다. 그때 하나님 자녀로 출생하게 된다,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관계도 다시 회복된다. 또 우리의 성향이 바뀌게 된다.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의 영혼이 죄로 인해 죽었는데 그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의 생명의 본질이 달라진다.

거듭남의 필요성은 무엇인가? 여기서 거듭남의 필요성이란 왜 사람이 다시 태어나야 되느냐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직장에 다니며 돈 많이 벌며 행복하게 살면 되는데 왜 거듭나야 되느냐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3,5) 이 말씀에서 거듭나야 될 필요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하였기에 거듭나야 된다. 그런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요3:3)이라고 하신 말씀에 나타나 있다. 이 말씀은 본래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으나 죄로 인해 타락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사람을 진단하고 있다. ‘아담과 연합된 사람은 부패한 본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요3:3)라고 선언하고 있다. 또 다윗과 바울도 사람은 부패한 본성을 갖고 죽어가고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에베소서4:18-19)

이렇게 부패한 본성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 앞에 지은 죄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임할 수밖에 없다(요한3:36,로마서1:18). 그러므로 죄로 인해 전적으로 타락하고 전적으로 부패한 본성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을 때 반드시 거듭나야 된다.

또 하나는 하나님나라가 있기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 하나님나라가 없고 세상나라만 있다면 거듭날 필요가 없다. 이 말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들은 이 땅에서 먹고 마시며 호의호식하다가 주어진 생을 다 마치고 숨을 거두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본다면 거듭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죽음 이후에 또 다른 나라가 있다. 하나님나라와 지옥이 존재한다. 그런데 인간은 죽음 이후에 지옥에 들어가면 안 되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야 한다. 그렇다고 하나님나라에 누구나 자동적으로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나라는 자신의 노력이나 어떤 공로로도 들어 갈 수 없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그 나라의 생명을 소유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살아 있을 때 거듭나야 한다.

그런데 요즈음 한국교회에 종교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신학들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앞으로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이런 신학들의 핵심골자는 그리스도 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한다. 다른 종교인들도 종교의 이름만 다르고 교주의 이름만 다를 뿐 그들은 구원 받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구원은 사람의 행위나 의지, 종교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속에 하나님나라의 생명이 있으면 구원받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고, 영생할 수 있는 생명이 없으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니까 사람의 본성이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도르트총회는 ‘전적타락’(Total Depravity)으로 규정)되었기에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언제 자신이 임종의 순간을 맞이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하기에 자신이 얼마나 많은 부를 축적했고, 얼마나 많은 학식을 가졌으며, 얼마나 많은 인기와 명예를 누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 있을 때 거듭나고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사람은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

거듭남의 대상은 누구인가? 여기서 거듭남의 대상이란 어떤 사람이 거듭나야 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아담 안에 태어난 모든 사람. 그러니까 죄로 인해 부패한 모든 사람들이 거듭나야 한다. 이는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다.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3,5))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거듭나야 할 자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일까?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은 자연인. 그러니까 부패한 본성을 갖고 사는 자들이 거듭나야 한다. 그 다음 하나님을 믿어도 형식적으로 믿고 교회생활을 하는 자들이 거듭나야 한다. 구체적으로 거듭나야 할 사람을 살펴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만 하고 사는 자들이 거듭나야 한다. 니고데모가 그런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으로 인정만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수많은 이적을 베풀고 있음을 인정만 하였다(요한3:1-2). 그는 무릎을 꿇지 않았다. 오늘 날에도 니고데모와 같은 자들이 많다. 즉 예수님을 위대한 성자로, 기독교의 창시자로 인정만 하고 무릎 꿇지 않는 자들이 있는데, 바로 이런 자들이 거듭나야 한다.

진리를 논하면서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거듭나야 한다. 요한복음3:3~4절에서 진리 되신 예수님이 자신을 인정만 한 니고데모에게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문하였다. 그때 니고데모는 어찌 어머니 배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느냐고 하면서 중요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면서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라고 하면서 영적인 문제 앞에 어리석게도 육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을 본다.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진리를 논하면서도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육적인 자들이 많이 있다. 바로 이런 자들이 거듭나야 한다.

신앙의 모양만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자들이 거듭나야 한다. 그는 바리새인이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율법에 능통하고 십일조생활, 금식기도, 절기준수 등을 잘하므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지도자로 인정을 받았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의 생명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요한3:10~11). 이 일이 니고데모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들의 문제이다. 따라서 신앙의 모양만 있는 자들이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 이런 점에서 거듭나지 않아도 좋을 자가 하나도 없음을 알 수 있다.

거듭남의 방법은 무엇인가? 여기서 거듭남의 방법이란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미 죄로 죽은 영혼이 스스로 거듭나게 할 수 없다. 이미 죽은 영혼은 전적 무능력 상태에 있기에 스스로 거듭날 수 없다. 이 말은 자연인 스스로의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연인 스스로의 지식이나 지혜, 물질이나 권력, 수양과 의지가 대단해도, 또 타고 난 지능이 우수해도, 또 아무리 종교성이 많고 철학적 사고가 가능해도 자연인 스스로의 힘으로는 거듭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거듭날 수 있다.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열어 줄 때 거듭날 수 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들이니라.”(요1:13).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한복음 3:5~7절)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거듭남의 주체는 성령이다. 우리 인간의 죽은 영혼을 다시 살리는 분은 성령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오로지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다. 이때 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성령은 반드시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므로, "물"을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야고보는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고 진술하고 있다.

베드로는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3-25절)고 진술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영혼의 거듭남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요컨대 거듭남은 성령님이 자신의 절대 주권으로 하시는 사역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이루시는 역사요,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이 말씀을 통해서 일할 때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요한3:14절에서 알 수 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성령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어떻게 감동하고 어떻게 도와주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성령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엎드리게 하신다. 또 성령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범죄한 우리 자신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죽었음을 깨닫게 하시고, 그 무서운 죄를 회개하도록 도우신다. 또 전적으로 부패한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고백하게 하신다. 그 때 거듭나는 새 생명의 역사가, 구원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게 된다.

이때 우리가 주목할 점이 있다. 그것은 거듭남의 사건에 죄인의 역할이 있을 수 있느냐이다. 이 질문에 대한 바른 답은 죄인의 역할은 없다. 그 이유는 성령님이 주권적으로 죄인에게 다가오셔서 죄인의 영혼을 다시 살려내시며, 성령의 능력으로 그 영혼이 다시 살아나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죄인이 잠재의식 상태에 있을 때 성령이 주권적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입해 주시므로 거듭나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점에서 거듭남의 근원, 거듭남의 출처, 거듭남의 시작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거듭남의 시기는 언제인가? 성령이 주권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택한 자의 마음속에 이식시키는 일은 1회적 사건이다. 그런데 이 일이 언제 이루어지느냐는 것이다.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거듭남의 시간을 확실하게 체험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거듭남을 일으킬 때는 대부분이 자각하지 못한다.

구원파는 거듭난 날과 시간을 알아야 거듭난 것이고, 그 날과 그 시(時)를 모르면 거듭나지 못했다고 단정하면서 믿음이 약한 교인들을 미혹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일을 알고 있듯이 거듭난 날과 시간을 알고 있어야 거듭난 자라는 것이다. 그럴듯한 논리이다. 하지만 아기들이 스스로 자기의 출생을 자각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사실은 부모가 직접 알려주거나 기록해 둔 것을 통해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거듭남도 성령이 주권적으로 사람의 무의식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이식시키기에 자각이 없는 게 정상이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한 3:8).

여기서 ‘바람(πνεῦμα)’과 ‘성령’(πνεῦμα)은 헬라어로 같은 어원이다.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게 지나가듯 거듭남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도 대부분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바울처럼 자각하는 자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하나님의 자녀들은 거듭났지만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 그것은 스스로 거듭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엄마가 아이를 낳을 때 누가 협력하는가? 아이는 온전히 엄마의 힘으로 나온다. 이처럼 거듭남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자신이 아니고 ‘성령’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난 날과 시간을 잘 모른다.

거듭남의 표지는 무엇인가? 이는 내가 거듭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거듭남은 성령하나님이 택함 받은 자의 무의식 상태에서 단독으로 하는 사역이기에 그 당시에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거듭남의 표지는 판단기준이 다양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말할 수 없지만, 보편적으로 그 사람이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삶의 행위를 볼 때 알 수 있다.

첫째로, 그 사람이 의식을 가지고 죄를 전 인격적으로 회개할 때 알 수 있다. 성령하나님이 선택한 자의 무의식상태에서 거듭나게 하셨는데, 이때 그리스도의 생명이 이식되었기에 그것을 감지한 자가 비로소 의식 가운데 자신의 죄를 십자가 앞에 토해 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이식되기 전에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 이때 회개는 전 인격적인 일로서 구원의 서정에서 일회성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새로운 삶에 대한 성찰이자 하나님께 드리는 최초의 기도가 된다(행2;36~38;시34:18).

둘째로 그 사람이 의식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 인격적으로 믿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성령하나님이 선택한 자의 무의식상태에서 거듭나게 하셨는데, 이때 그리스도의 생명이 이식되었기에 그것을 감지한 자가 비로소 의식 가운데 자신의 죄를 십자가 앞에 토해 냄과 동시에 그리스도를 자신의 유일한 구주로 믿게 된다. 이것 역시 그리스도의 생명이 이식되기 전에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 이때 믿음도 전 인격적인 일로서 일회성이라고 할 수 있다(요일5:1).

셋째로, 그 사람이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하여 지옥갈 수밖에 없는 죄인인데, 그런 자신을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볼 때 알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세상을 사랑하며 세상의 것들을 소유하는데 몰입되어 살아 왔으나 이제는 거듭났기에 은혜 베푸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요일5:1).

넷째로, 그 사람이 죄짓는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볼 때 알 수 있다. 구원파처럼 한 번 거듭나면 그 이후에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되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습관적으로 죄와 벗하며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연약해서 죄를 지었을지라도 회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요3:9).

다섯째로, 거듭난 자는 거룩한 삶을 지향하고(롬8:13,갈5:16),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을 따르지 않고(요일5:4), 자신의 영혼을 소중히 여긴다(요일5:18). 거듭난 자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할 뿐 아니라 성령이 내주하고 있다. 그러기에 죄를 멀리하고 구별된 삶을 살고자 힘쓴다. 또 하나님나라가 구현되기를 갈망하기에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을 거부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한다.

여섯째로, 거듭난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방편인 예배, 기도, 말씀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그것을 사모한다(벧전2:2).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듭난 자는 그 은혜에 감사하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기뻐하고 말씀을 가까이 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힘쓴다. 그러면서 늘 기도하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므로 삶의 목표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둔다. 이것이 거듭남의 표지들이다. 결국 이것이 우리에게 존재한다면 우리가 거듭났음을 확신할 수 있다. 만약 이런 증거가 내게 없다면 거듭나지 못함이기에 이것처럼 심각한 일이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원서정에서 너무나 중요한 거듭남의 문제를 살펴보았다. 그 내용은 거듭남의 개념, 거듭남의 필요성, 거듭남의 대상, 거듭남의 시기, 거듭남의 방법, 거듭남의 표지 등이었다. 문제는 이런 지식을 머리에 기억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 이런 지식에 대한 인식과 함께 자신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도 아니고 빛의 자녀도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또 자신이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 직분을 갖고 있다고 해도 거기에 안주하지 말고 거듭나지 못했다고 판단되면 이것처럼 불쌍한 일이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거듭난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에게 거듭났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만약 이 질문에 거듭나지 않았다고 판단되면 우리는 겸손하게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다시 엎드려야 한다. 그분 앞에 엎드려서 고민해야 한다. 그분 앞에서 자기를 포기하고 잘못된 인생의 껍질을 벗어야 한다. 거듭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그때 성령으로 거듭나는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그 결과, 거듭난 생명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고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중앙대학교 철학과 졸업(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및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졸업(Th.M), 숭실대학교 대학원 졸업(Th.M). 미,Kernel University 대학원 졸업(조직신학박사, Th.D). 총신 조직신학교수

반응형